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TOTAL. 181 건
갑오동학혁명기념탑
동학농민혁명기념탑이라고도 한다.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최초의 탑으로 1963년 10월 3일에 건립하였다. 탑 높이 7.5m·탑신 6.3m·기단 1.2m·둘레 4.64m 규모이다. 탑신 앞면에는 "제폭구민 보국안민(除暴救民保國安民)"이란 글자가 세로로 쓰여져 있다. 강암 송성룡이 글씨를 쓰고, 김상기가 전액을 썼다. 뒷면에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라는 노래와 함께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 가보리"라는 노래가 새겨져 있다. 동학농민혁명이란 조선 고종 31년(1894)에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반외세 운동을 말한다. 이는 1894년 3월 봉건체제개혁을 위해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2차로 봉기한 항일무장투쟁을 가리킨다. 농민들이 궐기하여 부정과 외세에 항거하였다고 해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긴 했으나 내부적으로는 갑오개혁, 외부적으로는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 1919년 3·1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전봉준 동상
전봉준(1855 - 1895)는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이다. 본관은 천안, 좌는 명좌, 호는 해몽이며 이칭으로는 왜소했던 특징으로 녹두장군이라고도 불린다. 아버지 전창혁이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죽음을 당하였으며 이후 농민봉기의 불씨가 되었다. 1890년경 동학에 입교해 접주가 되었다.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의 탐학이 극심해 원성이 자자하던 1894년 정월에 1000여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다.(고부민란) 정부에서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 장흥 부사인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고 박원명을 새로운 고부 군수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왔던 이용태가 동학교도를 체포하고 살해를 일삼자 결국 1894년 3월 인근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내 봉기를 호소하고 백산에 1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면서 동학농민혁명으로 확대되었다. 그 해 5월 홍계훈과 폐정개혁안이 성사되어 전주화약을 맺고 전라도 각 지방에 집강소를 두어 잠시 잠잠해진듯하였으나 결국 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9월부터 11월까지 전봉준, 손병희, 최익현 휘하에 20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우금치 싸움에서 대패하고 이후 일본군과 정부군에 진압되었으며 피신 중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동학농민군 행렬 조형물
동학농민혁명이란 조선 고종 31년(1894)에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반외세 운동을 말한다. 이는 1894년 3월 봉건체제개혁을 위해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2차로 봉기한 항일무장투쟁을 가리킨다. 농민들이 궐기하여 부정과 외세에 항거하였다고 해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긴 했으나 내부적으로는 갑오개혁, 외부적으로는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 1919년 3·1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최경선 집
최경선(1859 - 1895)은 동학농민혁명 5대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본명은 영창(永昌), 자는 경선(卿宣)이다. 1893년 11월 고부 인근의 동학접주들이 중심이 되어 농민봉기를 준비했던 사발통문(沙鉢通文) 거사계획에 참여하였다. 1894년 정월 전봉준(全琫準)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고부민란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즉, 동학교도 300명을 집에 집결시켰다가 고부농민 1,000여 명과 합세해 고부관아를 습격했던 것이다. 같은 해 3월 제1차 농민봉기 백산(白山)에서 농민군을 조직할 때, 영솔장(領率將)의 직책을 맡았다. 이후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서남해안을 돌아 5월 6일 전주성에 입성할 때까지 선봉에서 지휘하였다. 한편, 5월 7일의 전주화약(全州和約)으로 전라도 53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던 시기에는 전봉준과 함께 전라도 일대를 돌며 집강소 설치를 감독하였다. 7월에는 집강소 설치를 거부하는 나주를 공략하기 위해 3,000여 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나주의 동학접주 오권선(吳權善)의 군대와 합세, 총공격을 단행했으나 집강소 설치에는 실패하였다. 8월 13일 전봉준이 단신으로 나주성에 입성해 부사 민종렬(閔鍾烈)과 담판해 집강소 설치가 가능해지자, 나주의 집강소를 담당해 행정을 감독하였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소식이 전해진 그 해 9월에 제2차 농민군봉기가 삼례회의(參禮會議)에서 결정되었다. 전봉준을 수행, 정읍·장성·담양·동복·벽성 등지로 순행하며 농민군 봉기를 독려하는 한편, 태인에서 7,000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2차봉기에 참여하였다. 우금치에서의 패전 이후 12월에 전라남도 동복현 벽성에서 농민군의 모집을 시도하다가 수성군에게 체포되었다. 이듬해 3월 29일 전봉준·손화중(孫華中) 등과 함께 갑오개혁을 주도한 친일개화정권의 법무아문 권설재판소(權設裁判所)에서 사형판결을 받았다.
김개남 피체지
김개남(1853 - 1895)은 19세기 후반 동학농민혁명 당시 호남창의소 총관령 등을 역임한 동학교단의 호남 대접주이다. 1890년경에 동학에 입도하였고 이후 삼례집회와 보은집회 때 큰 활약을 하여 대접주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총관령직을 맡아서 동학농민군의 중심 지도부가 되었다. 2차 봉기 이후 북상하는 과정에서 청주성 전투가 전개되었는데, 이곳에서 대패한 후 체포되어 1895년 1월 처형되었다.
김개남 집
김개남(1853 - 1895)은 19세기 후반 동학농민혁명 당시 호남창의소 총관령 등을 역임한 동학교단의 호남 대접주이다. 1890년경에 동학에 입도하였고 이후 삼례집회와 보은집회 때 큰 활약을 하여 대접주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총관령직을 맡아서 동학농민군의 중심 지도부가 되었다. 2차 봉기 이후 북상하는 과정에서 청주성 전투가 전개되었는데, 이곳에서 대패한 후 체포되어 1895년 1월 처형되었다.
김개남 묘
김개남(1853 - 1895)은 19세기 후반 동학농민혁명 당시 호남창의소 총관령 등을 역임한 동학교단의 호남 대접주이다. 1890년경에 동학에 입도하였고 이후 삼례집회와 보은집회 때 큰 활약을 하여 대접주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총관령직을 맡아서 동학농민군의 중심 지도부가 되었다. 2차 봉기 이후 북상하는 과정에서 청주성 전투가 전개되었는데, 이곳에서 대패한 후 체포되어 1895년 1월 처형되었다.
김개남 집
김개남(1853 - 1895)은 19세기 후반 동학농민운동 당시 호남창의소 총관령 등을 역임한 동학교단의 호남 대접주이다. 1890년경에 동학에 입도하였고 이후 삼례집회와 보은집회 때 큰 활약을 하여 대접주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총관령직을 맡아서 동학농민군의 중심 지도부가 되었다. 2차 봉기 이후 북상하는 과정에서 청주성 전투가 전개되었는데, 이곳에서 대패한 후 체포되어 1895년 1월 처형되었다.
김개남 집
김개남(1853 - 1895)은 19세기 후반 동학농민운동 당시 호남창의소 총관령 등을 역임한 동학교단의 호남 대접주이다. 1890년경에 동학에 입도하였고 이후 삼례집회와 보은집회 때 큰 활약을 하여 대접주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총관령직을 맡아서 동학농민군의 중심 지도부가 되었다. 2차 봉기 이후 북상하는 과정에서 청주성 전투가 전개되었는데, 이곳에서 대패한 후 체포되어 1895년 1월 처형되었다.
손화중 묘
손화중(1861 - 1895)은 개항기 고창 지역에서 활동한 동학 대접주이자 동학농민혁명 지도자이다. 1881년(고종 18)에 처남 유용수(柳龍洙)를 따라 지리산 청학동에 갔다가 동학에 입도(入道)하여 수도하다가, 1883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포교하였다. 정읍군내 농소리(農所里)·입암리(笠巖里)·신면리(神綿里)·음성리(陰城里)를 전전하다가, 전라북도 무장(茂長)에 가서 김모(金某)의 집에 포교소를 설치하였다. 언제 접주가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1892년 전라북도 삼례의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에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였다. 1893년에는 광화문 복합상소 때 호남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으며, 충청북도 보은 장내리(帳內里) 집회에서도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는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1894년 동학군의 전주화약 후에는 전라남도 나주 지방으로 가서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제2차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던 10월 일본군의 배후상륙에 대비, 최경선(崔景善)과 같이 나주 부근에 주둔하였다. 전봉준(全琫準)이 공주를 공략하다가 실패한뒤, 나주성을 공격했으나 지형관계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해 12월 일단 광주로 후퇴, 입성하였다가 전라북도 흥덕(興德)에 있는 이모(李某)의 재실(齋室)에 숨어 있었으나, 1895년 1월 6일 재실지기 이봉우(李鳳宇)의 고발로 체포되었다. 전주감영으로 압송되었다가 서울로 이송, 여러 차례의 심문 끝에 전봉준·김덕명(金德明)·최경선·성두환(成斗煥)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동상
전봉준(1855 - 1895)은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이다. 35세경 동학에 입교해 접주가 되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이 극심해 1894년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고, 인근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내 봉기를 호소하여 동학농민혁명으로 확대되었다. 폐정개혁안이 성사되어 시정개혁에 전념하다가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했다. 남도접주로서 12만 농민군을 지휘하며 싸우다가 일본군과 정부군에 진압되었고, 피신 중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했다. 손화중(1861 - 1895)은 1881년(고종 18)에 처남 유용수(柳龍洙)를 따라 지리산 청학동에 갔다가 동학에 입도(入道)하여 수도하다가, 1883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포교하였다. 정읍군내 농소리(農所里)·입암리(笠巖里)·신면리(神綿里)·음성리(陰城里)를 전전하다가, 전라북도 무장(茂長)에 가서 김모(金某)의 집에 포교소를 설치하였다. 언제 접주가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1892년 전라북도 삼례의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에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였다. 1893년에는 광화문 복합상소 때 호남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으며, 충청북도 보은 장내리(帳內里) 집회에서도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는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1894년 동학군의 전주화약 후에는 전라남도 나주 지방으로 가서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제2차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던 10월 일본군의 배후상륙에 대비, 최경선(崔景善)과 같이 나주 부근에 주둔하였다. 전봉준(全琫準)이 공주를 공략하다가 실패한뒤, 나주성을 공격했으나 지형관계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해 12월 일단 광주로 후퇴, 입성하였다가 전라북도 흥덕(興德)에 있는 이모(李某)의 재실(齋室)에 숨어 있었으나, 1895년 1월 6일 재실지기 이봉우(李鳳宇)의 고발로 체포되었다. 전주감영으로 압송되었다가 서울로 이송, 여러 차례의 심문 끝에 전봉준·김덕명(金德明)·최경선·성두환(成斗煥)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 김개남(1853 - 1895)은 19세기 후반 동학농민혁명 당시 호남창의소 총관령 등을 역임한 동학교단의 호남 대접주이다. 1890년경에 동학에 입도하였고 이후 삼례집회와 보은집회 때 큰 활약을 하여 대접주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총관령직을 맡아서 동학농민군의 중심 지도부가 되었다. 2차 봉기 이후 북상하는 과정에서 청주성 전투가 전개되었는데, 이곳에서 대패한 후 체포되어 1895년 1월 처형되었다.
갑오동학혁명100주년기념탑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리는 탑으로, 1997년 5월 11일 건립되었다. 내장저수지가 바라다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바로 옆에 내장산조각공원이 있다. 화강암, 대리석, 오석 등으로 만든 탑으로, 주탑과 부탑으로 되어있다. 거창석(居昌石)으로 만든 주탑의 4각뿔은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이상을 상징하고, 흰 대리석은 민족봉기의 정신을 상징한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1894년을 기리기 위하여 높이 1,894m로 조성하였다. 상층부에 3단 3단 금(金)태는 고부 농민봉기, 3월 백산봉기, 9월 삼례봉기를 상징한다. 문경석(聞慶石)으로 만든 부탑은 부탑은 사민(사농공상士農工商) 즉 온 백성들의 평등, 수평사회를 상징하는 의미로 4개의 원기둥으로 되어 있는데 각각의 원기둥은 높이 1,100m, 지름 85cm 규모이다. 이 기념탑은 정읍 출신의 설치미술가 전수천(全壽千)이 조성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고종 31년(1894)에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반외세 운동을 말한다. 이는 1894년 3월 봉건체제개혁을 위해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2차로 봉기한 항일무장투쟁을 가리킨다. 농민들이 궐기하여 부정과 외세에 항거하였다고 해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긴 했으나 내부적으로는 갑오개혁, 외부적으로는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 1919년 3·1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