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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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곡마을 동학 사적 기념비
왕곡리 마을은 1887년 동학(천도교)가 전파되었으며, 1889년년 2월 제 2세 교조인 해월 최시형이 동학을 포교하며 제자들을 교화한 곳이다. 1894(갑오)년 9월에 동학혁명 기포령(총동원령)을 내렸을 때에는 양양 거진지역까지 동학군이 궐기하여 이 마을 함일순 집에서 10여 일 간 머물면서 전력을 가다듬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해월 최시형의 인내천 사상과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97년 6월 2일에 천도교중앙총부와 동학민족통일회 고성군지부가 후원하여 고성군문화원에서 세운 동학사적지 기념비를 세웠다.
최시형 은신처 기념비
최시형(1827~1898)은 조선 말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에서 일하다가 1861년 동학에 입교하여,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의 동학 경전을 발간했다. 동학의 육임제(六任制) 조직 확립 및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는 한편 1893년 이후 교조 신원 운동에 전력했는데, 당시 교조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 아래 추진되던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했고, 동학군의 재기포(再起包) 때 북접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 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의 혼성군에게 연패하자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사형당했다.
해월신사 추모비
해월 최시형(1827~1898)은 조선 말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에서 일하다가 1861년 동학에 입교하여,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의 동학 경전을 발간했다. 동학의 육임제(六任制) 조직 확립 및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는 한편 1893년 이후 교조 신원 운동에 전력했는데, 당시 교조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 아래 추진되던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했고, 동학군의 재기포(再起包) 때 북접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 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의 혼성군에게 연패하자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사형당했다.
동경대전 간행 각판소터
최초의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을 비밀리에 간행한 곳인 〈동경대전 간행터〉는 〈각판소터〉와 〈공방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판소는 동경대전 간행 당시 동학의 주요 인물들이 관련 업무를 총괄하던 곳이다. 〈동경대전 간행터〉는 강원도 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됐다. 「동경대전」은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가 깨달음을 얻은 후 평생에 걸쳐 한문으로 쓴 동학의 기본 경전으로, 포덕문(布德文)·동학론(東學論)·수덕문(修德文)·불연기연(不然其然)의 네 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념 뿐 아니라 실천을 통해 완성해 나가는 동학사상이 써 있다. 최제우가 사형될 때 이 책도 불태워졌으나, 후계자이자 동학의 2세 교주인 해월 최시형이 1880년(고종 17년) 5월 9일 인제 갑둔리 김현규 집에 각판소, 숙부댁에 공방터를 설치, 5월 11일부터 간행작업을 시작해 6월 14일 목판본으로 『동경대전(東經大全)』 초판을 완성했다.
동경대전 간행 공방터
최초의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을 비밀리에 간행한 곳인 〈동경대전 간행터〉는 〈각판소터〉와 〈공방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공방터는 동경대전 간행 당시 실제 목판 새기는 작업을 수행하던 곳이다. 〈동경대전 간행터〉는 강원도 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됐다.「동경대전」은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가 깨달음을 얻은 후 평생에 걸쳐 한문으로 쓴 동학의 기본 경전으로, 포덕문(布德文)·동학론(東學論)·수덕문(修德文)·불연기연(不然其然)의 네 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념 뿐 아니라 실천을 통해 완성해 나가는 동학사상이 써 있다. 최제우가 사형될 때 이 책도 불태워졌으나, 후계자이자 동학의 2세 교주인 해월 최시형이 1880년(고종 17년) 5월 9일 인제 갑둔리 김현규(김치운)의 집에 각판소, 숙부댁에 공방터를 설치, 5월 11일부터 간행작업을 시작해 6월 14일 목판본으로 『동경대전(東經大全)』 초판을 완성했다.
최시형 독공지비
해월 최시형(1827 - 1898)은 1871년 3월 교조신원을 명분으로 이필제가 주도한 영해의 봉기가 실패하고 많은 동학도들이 처형당하고 투옥되면서 교단은 산산조각이 나자, 무너진 동학을 일으켜야 하는 새로운 종교적 모색이 절실한 상황에서 1873년 10월 함백산 정암사(갈래사) 적조암(寂照庵)에서 수련을 하기로 계획을 잡았다. 이곳은 해월 최시형이 동행한 강수, 유인상, 김해성, 전성문과 49일간 산중 수련을 했던 곳으로, 적조암에서의 수행을 통해 또 한 단계 종교적으로 성장했다. 적조암 경내에 있던 『天道敎 第二世 敎祖 海月神師 篤工址(천도교 제2세 교조 해월신사 독공지)』 표지석은 한동안 방치되었다가, 정선문화원과 천도교단에서 정암사 관계자의 협조를 구하여 2016년 11월 동학유허지 적조암터 표지석 옆에 다시 세웠다.
적조암(동학 유허지)
동학유허지 적조암은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의 기도터로, 1872년 10월 15일부터 12월 5일까지 49일의 특별기도를 드린 곳이다. 당시 해월 최시형은 적조암의 노스님 철수좌(哲首座)의 양해를 얻어 강수, 유인상, 전성문, 김해성 등 동학의 지도자들을 대동하고 특별기도를 행하였으며, 이필제의 난(1871년 3월)으로 풍비박산이 된 동학교문이 다시 일어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특히 특별기도 이후 강원도 정선과 영월, 충청도 단양 등 삼남일대로 교세를 넓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는 원동력을 이루었다.
유시헌 행적비
유시헌은 해월 최시형이 이필재의 난으로 인해 영월 직동 박용걸의 집에 은거하고 있을 때 찾아가 1871년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그의 집에서 고천제(告天制)라는 제례의식을 행하기 전 도접주(道接主)로 임명되어 접주들을 관장했다. 이후 해월 최시형은 유시헌의 집에 머물며 동학 역사서 「도원기서」를 저술하는 것과 동시에 비밀포교를 시작했다. 그렇게 20년 세월이 흘렀고, 정선 일대엔 동학의 교세도 크게 성장했다. 이필제 난 이후 위기의 동학 교단을 삼남(三南)은 물론 전국적인 조직으로 키우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東學 道接主 旌菴 劉時憲 先生 行蹟碑(동학 도접주 정암 유시헌 선생 행적비)』는 유시헌의 장남 유택하의 며느리 유언에 따라 1999년 4월 5일 증손이 세운 비이다.
무은담 표지석
유시헌은 해월 최시형이 이필재의 난으로 인해 영월 직동 박용걸의 집에 은거하고 있을 때 찾아가 1871년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그의 집에서 고천제(告天制)라는 제례의식을 행하기 전 도접주(道接主)로 임명되어 접주들을 관장했다. 이후 해월 최시형은 유시헌의 집에 머물며 동학 역사서 「도원기서」를 저술하는 것과 동시에 비밀포교를 시작했다. 그렇게 20년 세월이 흘렀고, 정선 일대엔 동학의 교세도 크게 성장했다. 이필제 난 이후 위기의 동학 교단을 삼남(三南)은 물론 전국적인 조직으로 키우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동학유허지 무은담은 유시헌(劉時憲)이 살던 집터로, 한때 해월 최시형이 정선지역에 동학을 일으킨 곳이며, 나아가 동학이 그 교세를 삼남으로 펼쳐나가며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기반을 이룬 곳이기도 하다.
싸내
동학유허지 싸내는 동학 교조인 수운 최제우의 부인 박씨가 말년에 기거하던 곳으로, 수운 최제우가 1864년 참형을 받아 순도한 이후 부인 박씨가 단양 접주 민사엽(閔士葉)의 도움으로 정선 문두곡에서 살다가, 민사엽이 환원하자 이곳저곳을 전전하면서 고통스럽게 살았다. 그 후 2세 교조 해월 최시형이 정선지역에서 자리를 잡게 되자, 도접주 유인상(劉寅常) 등의 주선으로 1872년 이곳으로 정착하게 되었으며, 정선 동학도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다가, 1873년 12월 10일 향년 49세로 환원하였다.
정선 동학농민군 역사비
강원도 정선은 동학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난 1871년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이 정선 남면 무은담에 있는 유시헌 접주 집에 머물며 동학 역사서 「도원기서」를 저술하는 것과 동시에 비밀포교에 나서며 20년 넘는 세월 동학의 교세를 확장했고 정선 일대엔 동학의 교세도 크게 성장하게 되었다. 녹도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정선 동학농민군이 집결했던 곳으로, 그해 11월 이시모리 대위가 이끄는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정선 동학농민군이 싸운 녹도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이 전투로 수많은 농민군들이 전사했고 생포된 이들도 인근에 있는 소나무 숲에서 모두 처형당했다.『정선 동학농민군 역사비』는 정선지역의 농민군 지도자 지왈길의 기일을 맞아 녹도 전투가 있던 장소에 2020년 11월 25일 세웠다.
동학혁명군 위령탑
동학혁명군 위령탑은 1894년에 궐기한 동학혁명군의 업적을 기리는 사적이다. 구국제민의 기치를 높이 든 동학농민군은 총궐기하여 혁명을 요구하였다. 홍천에서는 그 해 11월, 접주 차기석을 중심으로 일본군과 싸웠고, 홍천읍 및 횡성 방면의 관군에 맞서며 내촌면 물걸리에서 혁명의 횃불을 올렸다. 그 후 두촌, 화촌, 동면과 홍천읍에서 격전을 벌렸으며, 내면에서는 여러 차례의 공방전이 발생했다. 일본군의 침략적 출동으로 혁명군에게는 패색이 완연하던 때, 경기, 충청 그 외 여러 고을에서 모여든 동학군과 연합한 홍천의 동학농민군은 끝까지 싸우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 수천 군중이 이곳 서석에 모여 항전하다가 30일(음력10월 23일)에 그 힘을 다하였다. 그 동학혁명군의 정신과 애국혼을 오늘날 되새겨 길이 기념하고자 본 탑이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