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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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동학농민혁명유적지(부안 동학농민군 집강소)
이곳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부안 동학농민군이 머물며 자치를 실현한 부안 도소(道所)였다. 도소는 집강소(執綱所) 또는 도회소(都會所)라고도 한다. 집강소는 우리 역사에서 민중이 최초로 쟁쥐한 민관 협치(協治) 기구로 평가받는다. 1894년 7월 6일(양력 8월 6일), 동학농민군 지도자 전봉준과 전라 감사 김학진(金鶴鎭)이 합의한 관민상화(官民相和)의 원칙에 따라 동학농민군이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며 자치(自治)를 실현한 소통의 공간이었다. 집강소는 동학농민군이 주도하여 설치한 지역, 동학농민군과 관(官)이 공존한 지역, 보수적인 유생을 중심으로 동학농민군에 대항한 지역 등으로 나뉜다. 부안 도소는 부안 현감을 비롯한 지역민의 요청에 따라 김낙철(金洛喆) 대접주 등 동학농민군이 주도하여 폐정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부안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였다. 부안 도소로 사용한 신원재는 부안에 세거하는 신씨의 중시조 덕무공(德武公)을 모시는 덕무공파의 종중 재각이다. 재각 뒤편은 신씨 선산이 있는 고성산(古城山)이다. 편액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이 썼다.
전봉준 피체유적비(녹두장군 전봉준관)
전봉준(1855 - 1895)은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이다. 1855년(철종 6)에 태어나 1895년(고종 32)에 사망했다. 35세경 동학에 입교해 접주가 되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이 극심해 1894년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했고, 인근 접주들에게 사발통문을 보내 봉기를 호소하여 동학농민혁명으로 확대되었다. 폐정개혁안이 성사되어 시정개혁에 전념하다가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구국의 기치 아래 다시 봉기했다. 남도접주로서 12만 농민군을 지휘하며 싸우다가 일본군과 정부군에 진압되었고, 피신 중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본 유적지는 2005년 5월에 복원한 전봉준 장군의 피체지이다. 전봉준 장군이 붙잡혔던 주막을 재현해 놓은 시설로 당시 부엌, 방, 봉당, 가구, 생활용품 등을 전시해 놓았다. 부속채로는 주막의 헛간, 창고를 재현해 놓았으며, 농기구 등을 함께 전시하여 당시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
동학농민혁명봉기비
1892년 10월 17일경 동학교단은 서인주와 서병학이 주도하여 공주에서 교조의 신원을 위한 집회를 개최하여 교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 동학교도에 대한 침탈금지 등을 요구했다. 이어 11월 3일에는 최시형이 교도들을 삼례에 집결시켰다. 공주 집회 때와 유사한 요구를 했지만 이 집회를 통해 전봉준이 동학교단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삼례집회에서 소장(訴狀)을 작성한 것은 서병학(徐丙鶴)이었고 ‘괴수’는 서인주(徐仁周)였다. 서병학에 의해 소장이 작성되기는 했으나, 탄압이 두려워 소장을 고정(告呈)할 마땅한 사람이 없던 차에 자원해서 나선 인물이 바로 우도(右道)의 전봉준과 좌도의 유태홍(柳泰洪)이었다.이후 1894년 3월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한 후 전주성을 점령하였던 농민군은 이른바 〈전주화약〉을 맺고 각 지역으로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9월 초순경 대원군측의 밀사와 접촉하여 중앙정국의 현황과 청일전쟁의 귀추에 대한 최신정보를 입수한 전봉준은 9월 10일 무렵부터 제2차 기포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재기포를 결심한 전봉준은 9월 10일경 삼례에 대도소(大都所)를 설치하고 기병준비에 착수하였다. 삼례는 백여 호도 안 되는 작은 고을이었지만, 도로가 사방으로 통하는 요충이었고 다수의 농민군이 임시거처로 사용할 수 있는 저막(邸幕)이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전봉준은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5, 6일 후에는 직접 손화중과 최경선이 있던 광주와 나주로 갔으며, 김개남에게도 연락하였다.이와 함께 인근 지역의 관아를 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기도 하였다. 9월 9일에는 전라도 금구의 농민군이 고산 관아를 공격하고, 다음 날에는 무기를 탈취하여 전주 쪽으로 향하였다. 10일 밤에는 삼례에 집결하였던 농민군이 여산을 공격하였고, 13일 밤에는 무기를 탈취하여 돌아갔다. 14일에는 삼례에 모여 있던 농민군 8백여 명이 전주성으로 쳐들어가 화포 74문, 탄환 9,773발, 탄자 41,234개, 환도 300자루 등을 무기를 탈취해갔고, 16일에는 백여 명의 농민군이 위봉산성을 공격하여 무기를 빼앗아 갔다. 또 8월 말부터 남원에서 재기포 준비를 김개남도 이 무렵 인근 읍으로부터 무기와 군수물자를 적극적으로 끌어 모았고, 9월 26일에는 손화중도 통문을 돌려 인근 농민군을 광주에 결집시켜 전봉준에 호응하였다.
동학농민군 출진상
전봉준이 이곳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제2차 봉기를 준비한 곳이다. 1894년 10월의 삼례농민봉기는 국권수호를 위하여 일어선 반일항전의 출진(出陣)이었다. 일본군의 국권침탈만행에 일어선 10만여 동학농민혁명은 주적을 관군에서 일본군으로 돌리고 서울에 입성하여 일본군을 격멸하고자 이곳 삼례에서 북진을 시작하였다.
동학농민혁명 대둔산항쟁전적비
1894년 1월 고부농민봉기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한국의 근.현대사의 일대 사건이자 봉건적 사회질서를 타파하고 외세의 침략을 위해 반봉건.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세운 최초.최대의 민중항쟁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전국적으로 일어난 항쟁이기에 그 흔적이 대둔산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대둔산은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입지조건을 가지고 있어 동학농민혁명의 진행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1894년 2차 봉기 이후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농민군 주력이 삼례를 출발하여 여산, 논산을 거쳐 공주 우금티에서 관군.일본군과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지만 화력과 조직력의 열세로 결국 패하였다. 우금티 전투 패배 이후 농민군 일부는 대둔산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관군.일본군에 맞서 항전하였다. 1894년 12월 중순부터 다음 해 2월 중순까지 70여일 간 항전하던 농민군은 1895년 2월 18일(음력 1.24)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함락되었다. 대둔산 항전지는 다른 지역의 동학농민군이 대부분 사라진 이후에도 마지막까지 저항한 역사적 현장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극명하게 보여주며, 당시 원형이 상당부분 보존되어 있어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계승.발전시킬 수 있는 상징적인 곳이라 할 수 있다.
갑오동학혁명기념비
갑오동학혁명기념비는 운암 3대 운동 기념비 중 하나이며, 임실 지역 동학농민군을 기리기 위해 후손인 최동안, 김정갑 등이 건립한 비석 중 하나로 총공사비 1,170만원 들여 1983년 6월에 3대운동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임실 지역은 남원에 대도소를 차리고 전라좌도를 통할하던 김개남의 휘하에 있던 지역이며, 임실의 동학농민군은 1894년 6월 중순부터 읍내에 도소를 설치하고 현감 민충식(閔忠植)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당시 대접주는 최봉성(崔鳳成), 김영원(金榮遠)이었으며 도접주는 최승우(崔承雨)를 비롯하여 30여명의 접주가 있었다. 운암은 임실동학의 발상지로서 최찬국, 최승우, 김영원, 김학원, 한영태,송광호, 이용수, 이종필,최유하,신학래,최봉상등 많은 동학지도자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며 운암에서 3.1만세운동이 가장 먼저 일어나 조직적인 참여로 6개월 여간 전 군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멸왜 운동에는 박영창, 최종기, 김한경, 정상열, 박성언등이 105일 특별 기도를 봉행하였으며 그 후 5년간 통상 심고를 실행하여 오던 중 1938년 무인년에 해주에서 발각되어 황해도 경찰국에 검거되었으며 임실에서는 최종기, 김한경, 박성언 등이 검거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멸왜운동은 8.15해방까지 비밀리에 전개되어 민족의 독립을 위한 초석을 다지는데 많은 기여를 하였음은 물론 후손들에게 나라사랑과 자주독립 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다.
해월신사 동학교리 설법장소 은둔지
해월신사 동학교리 설법장소는 동학의 2세 교주 해월신사 최시형 선생이 장수교인 김신종을 데리고 주치리 새목티 허선의 집에서 35일간의 설법을 시작하신 것이 처음이며 강진면에서 15일간 설법한 곳이다. 해월신사 은둔지는 동학 2대교주 최시형이 1894년 9월 동학 우금치 전투 등 격전이 벌어지는 시기의 대부분을 여기서 머물며 상황을 주시하였던 곳이다. 11월 25일 김제 원평에서 전봉준과 함께 손병희 동학군이 후퇴하여 갈담을 거쳐 찾아온 손병희(3세 교주)를 만나 12월 초 충청지역으로 도피하였다. 최시형(1827~1898)은 조선 말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에서 일하다가 1861년 동학에 입교하여,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의 동학 경전을 발간했다. 동학의 육임제(六任制) 조직 확립 및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는 한편 1893년 이후 교조 신원 운동에 전력했는데, 당시 교조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 아래 추진되던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했고, 동학군의 재기포(再起包) 때 북접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 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의 혼성군에게 연패하자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사형당했다.
박봉양 불망비
박봉양은 이족(吏族) 출신으로 봉양은 자(字)이고 보명(譜名) 문달(文達)이다. 운봉 서천리에 서 있는 〈박봉양(一目) 장군비〉의 원래 이름은 〈갑오토비사적비(甲午討匪事蹟碑)〉이며, 〈박봉양 장군비〉는 최근 박씨 후손들이 기단부에 새겨놓은 것이다. 일목(一目)이라는 별칭은 그가 한쪽 눈이 없었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1891년(고종 28)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에 7위로 급제하여 주서(注書, 정7품)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운봉의 대표적 부자로서 권세가 막강하였다. 〈오하기문〉에 따르면 성품이 다소 거친 그는 지방 관리들을 마음대로 꾸짖고 욕보였으며, 지방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렸으며, 금을 수레로 실어 나르며 조정의 권세가를 섬겼다. 그의 뜻을 조금이라도 거슬렀다가는 바로 보복을 당하였기 때문에 지방 전체가 그의 난폭한 위세에 복종하였다고 한다. 전형적인 악질 토호였다. 1891년에는 암행어사 이면상에게 걸려 체포되어 압송되던 도중 포졸에게 뇌물을 주고 풀려난 뒤 민씨척족의 실력자 민영준에게 15만 냥을 바치고 과거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고 전주성에서 물러난 농민군이 각 고을로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활동을 시작하면서 세상이 바뀐 것을 목도하며 위협을 느낀 그는 가재(家財)를 약탈당할까 두려워 장수의 농민군 접주 황내문(黃乃文)에게 입도하였다. 한 달 가량 부적과 주문(呪文)을 익혔지만, 신통한 영험이 없고 입도자의 재물도 계속 약탈하여가자 동학과 단절하였으며, 오히려 재물을 풀어 민보군을 조직하여 농민군에 대적하였다.그는 1894년 7월 26일 조상의 영전에 곡하고 족친들과 뜻을 같이 하는 30여 명과 하인 10여 명을 모아 민보군을 조직하였다. 당시 김개남은 남원을 떠나 임실 상여암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운봉에 대한 농민군의 영향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또한 운봉은 고원지대로 남원에서 운봉에 가려면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야 했으므로 천혜의 요새와 같은 지형을 가졌다. 박봉양은 이런 지형을 이용하여 농민군으로부터 운봉을 지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8월 22일에 새로 부임한 현감 이의경(李義絅)이 협력하고 나서자 더욱 자신이 생겼다. 운봉의 민보군에는 함양의 포군 150명이 합세하고, 경상감사 조병호가 총통(銃筒) 300정과 화약 수천 근을 제공하는 등 경상도와 인근 지역에서 호응하는 자들이 몰려들어 그 규모가 5,000여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이에 따라 남원 동학농민군들은 배후를 위협하는 운봉 민보군에 대한 방비를 위해 운봉에서 산동으로 넘어오는 방아치 아래에 있는 부동(釜洞, 부절리) 농민군에게 방어하도록 하였다. 영상일기에는 8월 19일 부동의 농민군 강감역(姜監役)과 유학규(劉學圭)가 다른 읍의 농민군 수천 명을 거느리고 남원부에 있던 활과 포와 화약을 부동으로 실어갔다고 하였다. 이 무렵 남원에 들른 전봉준이 직접 박봉양을 찾아가 농민군과 대적하지 말 것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그는 거절하였다.박봉양은 김개남이 이끄는 남원 농민군의 주력이 북상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개남은 10월 14일에 5천 병력을 이끌고 남원을 떠나 전주로 향하였다. 김개남은 남원의 화산당(花山堂) 접주인 이문경(李文卿)과 남원 오수 접주 김홍기, 임실 접주 최승우, 흥양 접주인 유복만, 담양 접주 남응삼, 장수 접주 황내문에게 남원성을 지키도록 맡겼다. 이들이 거느린 병력은 약 3천명 정도였다.
김개남 추모비
김개남(金開南, 1853년 9월 15일 ~ 1894년 12월 3일)은 1894년 동학 농민 선언의 지도자이자 혁명가로서 전봉준, 손화중과 동학농민군 3대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 족보에 실린 이름은 영주(永疇), 어릴적 이름은 기선(琪先), 성인이 되어 기범(箕範), 본관은 도강(道康)이다. 동학에 입도한 후 동학의 교리에 따라 태평천국으로 밝은 이상적인 나라를 남쪽으로부터 연다는 뜻으로 호를 개남(開南)으로 정했다. 동학농민혁명기에는 김개남대접주, 개남장(開南丈) 또는 개남장군(開南將軍)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전주화약 이후 전봉준은 금구,원평에 대도소를 설치하여 전라우도를 호령하였고, 김개남은 남원에 대도소를 설치하여, 무주, 진안, 용담, 장수, 순천, 낙안, 고흥 등을 비롯한 전라좌도를 호령하였다. 또한 김개남은 휘하의 김인배로 하여금 순천에 영호도회소(嶺湖都會所)를 설치하게 하여 하동,진주 등 영남의 서남부지방까지 그 세를 떨쳤다. 제2차 봉기 시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은 충청감영이 있던 공주로, 김개남의 동학농민군은 병영이 있던 청주로, 손화중의 동학농민군은 나주로 진격하였다. 김개남은 11월 10일 청주병영을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에 패한 후 진잠을 거쳐 태인으로 돌아와 태인 너듸마을(산내면 장금리) 매부인 서영기 집에 피신해 있다가 임병찬의 고발로 12월 1일 황헌주에게 체포되어 전주로 이송되었다. 전라관찰사 이도재는 김개남의 명성에 겁을 먹고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하는 일이 위험하다고 느껴 12월 3일 임의로 처형하고 그 머리만 서울로 이송하여 12월 25일 서소문 밖에 3일 간 효시(梟示)되었다. 향년 42세였다.
손화중 추모비
손화중(1861 - 1895)의 자는 화중, 호는 초산, 이칭은 손정식이며, 개항기 삼례지방의 교조신원운동과 관련된 천교도인이다. 1881년(고종 18)에 처남 유용수(柳龍洙)를 따라 지리산 청학동에 갔다가 동학에 입도(入道)하여 수도하다가, 1883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포교하였다. 정읍군내 농소리(農所里)·입암리(笠巖里)·신면리(神綿里)·음성리(陰城里)를 전전하다가, 전라북도 무장(茂長)에 가서 김모(金某)의 집에 포교소를 설치하였다. 언제 접주가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1892년 전라북도 삼례의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에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였다. 1893년에는 광화문 복합상소 때 호남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으며, 충청북도 보은 장내리(帳內里) 집회에서도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는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1894년 동학군의 전주화약 후에는 전라남도 나주 지방으로 가서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제2차 동학혁명운동이 일어나던 10월 일본군의 배후상륙에 대비, 최경선(崔景善)과 같이 나주 부근에 주둔하였다. 전봉준(全琫準)이 공주를 공략하다가 실패한뒤, 나주성을 공격했으나 지형관계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해 12월 일단 광주로 후퇴, 입성하였다가 전라북도 흥덕(興德)에 있는 이모(李某)의 재실(齋室)에 숨어 있었으나, 1895년 1월 6일 재실지기 이봉우(李鳳宇)의 고발로 체포되었다. 전주감영으로 압송되었다가 서울로 이송, 여러 차례의 심문 끝에 전봉준·김덕명(金德明)·최경선·성두환(成斗煥)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
김개남 처형지 곤지산 안내석
김개남(1853 - 1895)의 자는 기선, 기범, 초명은 김영주이며, 19세기 후반 동학농민혁명 당시 호남창의소 총관령 등을 역임한 동학교단의 호남 대접주이다. 동학에는 1890년경에 입도(入道)주1한 것으로 추정된다.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신앙과 후천개벽사상(後天開闢思想)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수행과 포교에 힘써 1891년에 접주가 되었다. 같은 해에 동학의 제2대 교조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한편으로 호남 지방 접주들과 자주 접촉을 하면서 친교를 맺게 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고부 접주 전봉준(全琫準), 무장 접주 손화중(孫華中), 금구 접주 김덕명(金德明), 주산 접주 최경선(崔景善) 등이었다. 1892년 전라도 삼례(參禮) 지역에서 교조신원운동 당시에도 교도들을 이끌며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로 인하여 명성이 높아져 호남 지방의 동학 지도자가 되었다. 1893년 보은집회에서 수만의 동학 교도들이 모여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양(斥倭洋)의 깃발을 내걸고 시위를 벌였을 때, 또다시 호남 교도들을 동원하여 대접주(大接主)주2의 임첩(任帖)을 받았다. 그러나 두 차례의 시위가 성과 없이 끝나고 각지에서 동학 교도에 대한 가혹한 탄압이 가해지자, 남접(南接)주3의 강경파 접주들은 독자적인 대책을 모색하게 되었다. 1894년 초 전봉준이 고부민란(古阜民亂)을 주도하자, 손화중과 함께 동학군을 일으켜 4월에는 백산(白山)에 동학 운동본부인 호남창의소(湖南倡義所)를 설치하고 전봉준을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한 뒤 총관령(總管領)주4을 맡았다. 전주화약(全州和約)주5 이후 전라도와 경상도 사이 요충지인 남원을 공략하기 위해 대군을 동원하여 진입하였고, 남원 진입 후 적극 세력을 확장하였다. 전라도 동북부 군현들인 순창 · 용담 · 금산 · 장수 등지의 동학 조직을 장악하였으며, 경상도 함양과 안의까지 세력권 확대를 시도하였다. 이후로도 계속 남원에 주둔하였고 전라좌도를 관할하면서 폐정개혁을 추진하였다. 동학농민군 해산 후 재봉기를 처음 시도한 대접주도 남원의 김개남이었다. 김개남은 10월경에 수만 대군을 거느리고 임실을 거쳐 전주로 들어왔다. 전주감영에는 신임 인사를 하러 남원부사와 고부군수가 와 있었다. 김개남은 서슴지 않고 이들을 처형하였다. 10월 말에는 예하의 일대 병력을 금산으로 보내서 읍내를 점거하였다. 금산에 들어간 김개남군은 읍내에 호된 보복 행위를 자행하였다. 김개남군은 거쳐 온 군현마다 이러한 지나친 행위로 인해 인심을 잃고 말았다. 이후 11월 들어 북상할 계획을 시도하여 충청도 진잠현(鎭岑縣)을 점령하였고, 이튿날 신탄진(新灘津)을 거쳐 청주를 공격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장거리를 행군해 온 김개남군은 앞장선 일부가 청주성에 접근하였다가 기습을 당하며 무너졌다. 김개남군은 전라도로 돌아가서 더 이상 대군의 위세를 갖지 못하였다. 어떻게 해산하였는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김개남은 결국 체포되고 1895년 1월 8일 전주장대(全州將臺)에서 참수당하였다.
동학전적지 완산칠봉 표지석
완산칠봉은 전주의 남쪽에 위치한 산으로 장군봉, 탄금봉, 매화봉, 옥녀봉 등 7개의 봉우리를 통칭한다. 동학농민군이 1894년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한 후 5월 8일 철수할 때까지 경군과 전투를 벌인 곳이다. 전봉준이 이끄는 민군은 완산칠봉과 용머리고개에 진을 친 후 신묘한 전략으로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전주성에 들어섰다.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은 외곽에서 공격해 들어와 용머리고개에서 농민군과 관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며 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전주확약이 맺어졌다.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다음날인 4월 28일 전주에 도착한 초토사 홍계훈은 이곳 완산칠봉에 진을 치고 전주성을 공격하였다. 농민군은 격렬히 저항하였으나 결국 5월 3일 전투에서 수백 명의 농민군이 사살당하고 전봉준이 부상을 입을 정도로 크게 패하였다. 결국 5월 8일 홍계훈이 이끄는 경군에게 전주성을 내어 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