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항일학생의거 터 표지석
부산항일학생의거는 노다이사건이라고도 불리며, 1940년 부산에서 열린 경남학도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에서 일본인 심판 노다이의 부당 행위에 항의하여 일어난 항일학생운동이다.
일제는 1940년 11월 21·22일 양일간 경남의 부산·마산·진주 지역의 갑종 중등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제2회 경상남도지구 갑종중학교 합동야외훈련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훈련대회를 위해 일제는 학생들을 동군과 서군으로 편성하였다. 동군에는 부산제2상업학교, 부산중학교[일본인 학교. 이하 (일)로 표기], 부산제1상업학교(일) 등을 편성하고, 서군에는 동래중학교, 마산중학교(일), 진주농업학교 등으로 편성하였다. 동군은 구포에서, 서군은 진영에서 출발하여 김해 한림정에 도착하는 모의 군사훈련으로서 승부가 걸린 대회였다. 이 훈련의 총책임자는 경남 지구 위수사령관 및 부산 지구 병참사령관 노다이(乃台兼治) 육군 대좌였다. 노다이 대좌는 일본인 학교가 승리할 수 있도록 진군·휴식·야영·보급품 지급 등에서 조선인 학교에 대해 노골적으로 차별하였다. 2일간 모의 전투 훈련을 마친 후 11월 23일 일제는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경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는 진주중학교, 마산중학교, 동래중학교, 부산중학교(일), 부산제2상업학교, 부산제1상업학교(일), 진주농업학교, 울산농업학교 등의 5학년제 중학교, 동래고등여학교, 부산항고등여학교[경남여고 전신], 부산고등여학교(일), 삼도고등실습여학교(일) 등의 여학교, 3년제 을종학교인 김해공립농업학교, 밀양농잠학교, 마산상업학교, 통영공립수산학교, 입정상업학교, 초량상업학교 등이 참여하였다. 대회 종목은 100m·400m 릴레이, 80m 장애물, 넓이뛰기, 높이뛰기, 턱걸이 등의 육상경기, 씨름, 줄당기기, 견인 경주, 담가 운반 등의 단체경기, 수류탄 던지기, 토낭 운반, 비상 소급, 무장 행군 등의 군사 경기 등으로 구성되었다. 주최측은 1회 대회 우승팀인 동래중학교를 비롯한 조선인 학교의 우승을 막고, 일본인 학교가 우승할 수 있도록 민족 차별적으로 대회를 운영하였다. 대회 입장 순서에서 일본인 학교에 이어 조선인 학교를 입장시켰고, 대회 운영도 일본인 학교에 유리하도록 편파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노다이 대좌에 의해 우승이 동래중학교에서 일본인 학교인 부산중학교로 뒤바뀌어 발표되었다. 이에 조선인 학교 학생들은 대회 폐회식에서 일장기 하강을 외면하고, 일본 국가를 거부하였다. 대회 폐회 선언 뒤 학생들은 노다이 대좌를 비롯한 일본인들을 공격하였다. 부산공설운동장부터 시내까지 시위행진을 벌이면서, ‘조선독립만세’ ‘일본놈 죽여라’ ‘너희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라’ ‘무엇이 내선일체(內鮮一體)냐’ 등의 구호를 외쳤다. 또한 경남 지구 위수사령관으로서 대회 총책임자인 일본군 대좌 노다이의 관사를 습격하고, 그를 구타하였다. 이 사건으로 조선인 학생 200여 명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주모자로 지목된 15명이 구속 기소되었다. 재판에서 14명이 징역 8개월 및 징역 8개월·집행유예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또 동래중학교와 부산제2상업학교는 교내 자체적으로 퇴학 21명, 정학 44명, 견책 10명 등의 징계를 실시하였다. 부산항일학생의거는 일제강점기에 전개된 부산 최대의 항일 학생 의거였다. 동래중학교와 부산제2상업학교를 중심으로 부산 지역뿐 아니라 마산과 진주 등 경남 지역 학생들이 함께 참여하였다. 부산항일학생의거는 일제말 전시체제하에서 전개된 대규모 학생 투쟁으로서 일제의 전쟁 동원 정책에 저항하여 민족 독립운동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