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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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한 추모비
조경한(1900~1993)은 전남 순천 사람이다. 1900년 순천군 주암면 한곡리 한동마을[현 전라남도 순천시 주암면 한곡리]에서 태어났다. 1918년부터 만주[중국 동북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단의 국내 연락원으로 참여했다.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단·배달청년회(倍達靑年會) 등에 참여하였다. 1930년 7월 북만주에서 한족자치연합회[한족총연합회의 후신]를 모체로 민족주의 단체들이 한국독립당을 창당할 때, 홍진(洪震)[1877~1946]·지청천(池靑天)[1888~1957] 등과 함께 창당에 직접 참여하고, 선전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한중연합군의 일원이 되었고, 1932년 쌍성보전투에 참여했다. 이후 중국 관내 지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조경한은 1933년 5월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내에 한국독립군 특별반이 설치되었을 때 교관이 되었다. 1937년 8월 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곽 운동 연합 단체로 결성된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에 운영 간부로 선임되었다. 1939년 말부터 1942년 10월경까지 사이에 중국 중앙 전시 간부 훈련(中央戰時幹部訓練) 제4단(第四團) 특과 총대 학원대 한청반(特科總大學員隊韓靑班)의 군사 교관으로 있었다. 1940년 5월 9일에 통일된 한국독립당 집행위원의 일원이 되었다. 또 1939년 11월부터 설치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설기구 선전위원회[주임위원 조소앙]의 위원을 맡았다. 1940년 9월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과 함께 주계장이 되었고, 1940년 10월 광복군 총사령부 경리처장[정훈처장 겸임]에 선임되었다. 1942년 10월 30일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제3분과[재정·예산 결산] 위원에 선출되었다. 1943년 3월 30일 국무회의에서 국무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944년 4월 20일 국무위원으로 당선 취임하였다. 조경한은 해방 후에는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참여했다. 1963년에는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93년 1월 서울특별시에서 타계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조경한 조옥현 집
이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6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백강 조경한 선생과 아우이며 제헌국회의원을 역임한 우청 조옥현 선생의 생가이다. 조경한 선생은 전남 순천시 주암면 한곡리 238번지(한동마을)에서 옥천조씨 20세 우곡 조정순 선생과 고령신씨 사이에서 4남3녀 중 차남(백강 조경한 : 1900~1993)으로 태어났다. 장남 벽하 조태현(1898~1970), 삼남은 제헌국회의원 우청 조옥현(1903~1950.6. 납북), 사남은 조규현(1905~1950)이다. 조경한 선생은 1915년 동래 정동현 여사와 혼인하여 1924년 한곡리 224번지(남측 건너편)로 분가 시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조경한(1900-1993)은 1918년에 만주에 소재한 독립운동단체인 「대한독립단」의 국내지하공작단원으로 항일운동을 활발히 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였고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장례)일에 수많은 주암면민의 애도회를 선생이 주도하여 광천소재 도리봉산에서 거행하였다. 1927년 2월 중국 망명길에 올라 그해 5월 압록강을 건너 중국(만주)에 도착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만주지역에서 왜군과 크고 작은 전투를 100여회 하였는데, 특히 대전자대첩(大甸子大捷)은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과 쌍벽을 이루는 큰 전투였다. 1933년 연말부터는 활동무대를 임시정부로 옮겼으며 1940년 한국독립당 창당과 광복군 창군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망으로 백범 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요인들과 함께 귀국시까지 임시의정원(현 국회)의원, 비서처 부비서장, 국무위원(비서장 겸임) 등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조옥현(1909-1940)은 1927年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예과생으로 수학하면서, 신간회(新幹會) 교토지회[京都支會] 재정부 총무간사로 활동했다. 또한 재일본조선청년동맹과 문화회 등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여름방학 때 귀국하여 재외영광유학생학우회(在外靈光留學生學友會)의 일원으로 전남 영광(靈光)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순회강연을 하다가 20일간 구류된 일이 있었다. 1929년 3월 교토[京都]에서 조국독립을 목적으로 결성된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하여 선전부장으로 활동했다. 동지 규합에 힘을 쏟다가 체포되어 1931년 5월 징역 2년을 받고 3년여 동안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장병준 구 묘
장병준(1893~1972)은 전라남도 무안(務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에 전라남도 무안(務安)에서 광무황제(光武皇帝) 안장식(安葬式)을 거행한다고 집합시킨 주민들 수천 명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부르도록 유도하고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고, 일경의 추격을 피하여 상해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전라도 의원으로 피선되었으며, 제4차 의정원회의에서 그는 손두환(孫斗煥)·한위건(韓偉健)·장도정(張道政)·임봉래(林鳳來) 등 의원과 연서(連署)하여 "한 나라에 국회가 둘이 될 수 없으니 임시의정원과 국민의회는 시급히 통일하여야 한다는 것과, 상해(上海)에 설립된 의정원은 정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이를 분립(分立)하기 어려운 즉 다른 곳에 설립된 의회를 속히 본 의정원에 통일케 하자"는 제안을 제출하여 통과하도록 하였다. 1920년 초에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귀국한 그는 서울에서 이동욱(李東旭) 등과 3·1독립운동 1주년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할 계획을 추진하다가 일경에 탐지되어 동년 3월 20일에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동년 12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9년에는 신간회(新幹會) 목포(木浦) 지회장에 취임하였으며 중앙대표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장병준 집
장병준(1893~1972)은 전라남도 무안(務安)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에 전라남도 무안(務安)에서 광무황제(光武皇帝) 안장식(安葬式)을 거행한다고 집합시킨 주민들 수천명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부르도록 유도하고 앞장서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고, 일경의 추격을 피하여 상해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전라도 의원으로 피선되었으며, 제4차 의정원회의에서 그는 손두환(孫斗煥)·한위건(韓偉健)·장도정(張道政)·임봉래(林鳳來) 등 의원과 연서(連署)하여 "한 나라에 국회가 둘이 될 수 없으니 임시의정원과 국민의회는 시급히 통일하여야 한다는 것과, 상해(上海)에 설립된 의정원은 정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이를 분립(分立)하기 어려운 즉 다른 곳에 설립된 의회를 속히 본 의정원에 통일케 하자"는 제안을 제출하여 통과하도록 하였다. 1920년 초에 군자금을 조달하고자 귀국한 그는 서울에서 이동욱(李東旭) 등과 3·1독립운동 1주년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거행할 계획을 추진하다가 일경에 탐지되어 동년 3월 20일에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동년 12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9년에는 신간회(新幹會) 목포(木浦) 지회장에 취임하였으며 중앙대표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철 기념비
김철(1886~1934)은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서 출생하였다. 1912년 서울에서 경성법률전수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1917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신한청년당을 창당하였고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의 특사 크레인을 초청하여 윌슨에게 보내는 대한의 자주독립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전달하였다. 1919년에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교통부차장, 교통부총장대리, 군무장, 재무장, 무임소장, 국무원 비서장 등 국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30년 중국인과 공동항일전선을 형성하여 한중항일대동맹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이봉창 의사의 일황 저격사건과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살 의거를 김구 선생과 같이 주도하였다. 1934년 중국 항주에 있는 광자병원에서 급성폐염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1962년 건국공로훈장(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철 숭모비
김철(1886~1934)은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서 출생하였다. 1912년 서울에서 경성법률전수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1917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신한청년당을 창당하였고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의 특사 크레인을 초청하여 윌슨에게 보내는 대한의 자주독립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전달하였다. 1919년에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교통부차장, 교통부총장대리, 군무장, 재무장, 무임소장, 국무원 비서장 등 국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30년 중국인과 공동항일전선을 형성하여 한중항일대동맹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이봉창 의사의 일황 저격사건과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살 의거를 김구 선생과 같이 주도하였다. 1934년 중국 항주에 있는 광자병원에서 급성폐염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공로훈장(독립장)이 추서하였다.
김철 동상
김철(1886 - 1934)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김철(金澈, 1886~1934)은 전라남도 함평군 출신으로, 본관은 영산(永山), 자는 성필(成弼), 호는 일강(一江)이다. 어릴 때 이름은 김영탁(金永鐸), 이명은 김중청(金重淸)이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후 영광에 있는 광흥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09년에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다니다가 일본으로 유학하여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을 졸업하고 1915년에 귀국하였다. 1917년에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1918년 신한청년당 창립에 참여하였다. 잠시 고향으로 돌아와 재산을 처분하고 상하이로 돌아갔다. 1920년 7월에 열린 궐석재판(闕席裁判)에서 신한청년당 대표로 국내에 파견되어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는 이유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19년 3월부터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준비에 가담하였다. 그해 4월 10일 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어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제정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데 한 축을 담당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재무부 위원, 교통차장, 지방선전부 부총판 등을 역임하고, 1920년 5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직할로 설립된 육군무관학교 교관에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이외에 대한적십자회에서 활동하였고, 특히 상해대한교민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1년 9월 상해대한교민단 본구(本區) 임원이 된 이래, 1932년 윤봉길 의거로 항저우〔杭州〕로 피신할 때까지 꾸준히 활동하였다. 1922년 3월부터 8월까지는 교민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23년 1월에 시작된 국민대표회의에 전라남도 대표로 참석하여 개조파의 입장에서 헌법기초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25년 박은식이 제2대 대통령으로 구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내각에서 외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26년 김구 국무령 체제가 수립되면서 법무장으로 선임되었다. 1927년에는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 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29년 11월 김영탁(金永鐸)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고, 1933년부터 대한민국임시의정원에서 전라도의원 등 여러 직책을 거치며 지속적으로 활동하였고 국무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회의 비서장으로 선임되었으나, 급성폐렴에 걸려 6월에 숨을 거두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追敍)되었다.
김철 묘
김철(1886 - 1934)은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김철(金澈, 1886~1934)은 전라남도 함평군 출신으로, 본관은 영산(永山), 자는 성필(成弼), 호는 일강(一江)이다. 어릴 때 이름은 김영탁(金永鐸), 이명은 김중청(金重淸)이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후 영광에 있는 광흥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09년에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다니다가 일본으로 유학하여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을 졸업하고 1915년에 귀국하였다. 1917년에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1918년 신한청년당 창립에 참여하였다. 잠시 고향으로 돌아와 재산을 처분하고 상하이로 돌아갔다. 1920년 7월에 열린 궐석재판(闕席裁判)에서 신한청년당 대표로 국내에 파견되어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는 이유로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19년 3월부터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준비에 가담하였다. 그해 4월 10일 밤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어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제정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데 한 축을 담당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재무부 위원, 교통차장, 지방선전부 부총판 등을 역임하고, 1920년 5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직할로 설립된 육군무관학교 교관에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이외에 대한적십자회에서 활동하였고, 특히 상해대한교민단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1년 9월 상해대한교민단 본구(本區) 임원이 된 이래, 1932년 윤봉길 의거로 항저우〔杭州〕로 피신할 때까지 꾸준히 활동하였다. 1922년 3월부터 8월까지는 교민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23년 1월에 시작된 국민대표회의에 전라남도 대표로 참석하여 개조파의 입장에서 헌법기초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25년 박은식이 제2대 대통령으로 구성된 대한민국임시정부 내각에서 외무총장에 임명되었다. 1926년 김구 국무령 체제가 수립되면서 법무장으로 선임되었다. 1927년에는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 집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29년 11월 김영탁(金永鐸)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고, 1933년부터 대한민국임시의정원에서 전라도의원 등 여러 직책을 거치며 지속적으로 활동하였고 국무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4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회의 비서장으로 선임되었으나, 급성폐렴에 걸려 6월에 숨을 거두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追敍)되었다.
정광호 탄생지 표지석
정광호(1895 - 미상)는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교통부 참사, 임시의정원 전라도 대의원, 상해유화학생회 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1월 동경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재학 중 최팔용(崔八鏞) 등 한국인 유학생 등과 2·8독립선언을 계획하였으며, 백관수(白寬洙) 등과 동경에서 김마리아(金瑪利亞) 등 한국인 여학생 10여 명을 2·8선언에 참여하도록 권유하기도 하였다. 그해 2월 2일 2·8독립선언문을 휴대하고 귀국하여 서울에서 김범수(金範洙)·김기형(金基亨) 등 10여 명과 같이 2·8독립선언 초안을 국내에서 재제작하여 배포하기로 하고, 2월 4∼5일까지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 김기형 집에서 선언문을 인쇄하였다. 같은 해 3월 인쇄된 선언문을 휴대하고 광주시에서 최한영(崔漢泳)·김강(金剛) 등 5명과 같이 광주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한 뒤, 3월 10∼13일 사이에 광주시민 2,000여 명을 규합하였다. 규합된 시민을 선도하여 1919년 3·1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런데 6월 1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궐석배판을 받아 이른바 보안법·출판법 위반죄목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일본경찰의 미행과 감시가 더욱 심해지자 선편으로 상해(上海)에 도착한 후 프랑스 조계(租界)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 등의 영접을 받았다. 1920년 2월 13일 부터 임시정부 교통부 참사로 근무하다가 1921년 2월 14일 사임하고 3월 18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전라도 대의원으로 선임되어 입법활동에 참여하였다. 1921년 9월 동지들과 같이 상해유화학생회(上海留華學生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소집되어 개최될 때, 6월 20일 창조파(創造派)의 한 사람으로 김규식(金奎植)·원세훈(元世勳) 등 30여 명과 같이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을 조직하였다. 같은 해 9월 러시아로 가서 소련에 의지하려다가 마침 레닌(Lenin, N.)이 죽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1924년 3월 동지들과 같이 중국으로 귀환하였다. 1926년 7월 29일 상해에서 안창호(安昌浩)·조상섭(趙尙燮)·진희창(秦熙昌) 등 10여 명과 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27년 귀국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89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정태봉 기적비
정태봉(1893 - 1942)은 일제강점기 신간회 대구지회 총무간사를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전라남도 화순 출신이다. 1920년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의 군자금 모집 요청서를 받자, 대구에 사는 동지 김두환(金斗煥) 등 10여 명과 연합해 경상도 일대의 부호 명단을 작성하고 금품을 모았다.같은 해 11월 25일부터 1921년 2월 20일까지 3개월간 6만 8000원(圓)을 임시정부의 무기 구입 자금 목표액으로 결정한 뒤, 각 동지에게 200여 원의 책임모집 액수를 배당하였다. 그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조선정부를 창립한 총재 정갑룡(鄭甲龍), 부총재 정을룡(鄭乙龍) 명의의 취지문 수십 통을 작성, 배포하였다.군자금 모집 활동중 대구에서 붙잡혀 5년을 선고받고 항고, 1921년 10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만기 복역하였다. 1928년 6월 20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유일당운동에 영향을 받은 신간회(新幹會) 대구지회의 서무와 총무간사로서 대구시 달성공원(達城公園) 뒷산 송림에서 동지 6명과 유사시 거사할 수 있는 단체를 조직하기로 합의, 극당(極黨)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그들은 독립운동 방법으로 동삼성에서 농경지를 구입한 뒤 농민을 이주시켜 경작하게 하면서 청년들을 모아 유사시 활용할 수 있게 훈련시켰다. 이에 필요한 군자금은 동지 노차용(盧且用)으로 하여금 모금하도록 하였다. 1928년 5월 11일 대구 시내 총포점에서 신호용 권총을 구입, 소지하고 대구 시내에 거주하는 김교성(金敎成)을 방문해 취지를 설명하고 협조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즉각 거절당하여 협박하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공갈,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으로 5년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기각되어 복역하였다. 1942년 칙령 제10호에 의거, 징역 2년 7월 11일로 감형되어 복역 중 순국하였다.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노진룡 묘
노진룡(1894 ~ 1950)은 전라북도 고창(高敞) 사람이다. 1919년 말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밀명을 띠고 파견된 이종욱(李鍾郁)은 국내 각지에 임시총판부(臨時總辦府)를 설치하였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열망하던 중 임시정부의 총판부설치에 적극 찬동하여 전북감독부(全北監督府)를 조직하고 감독에 취임하였으며, 부감독에 오의균(吳毅均), 재무원에 이휴열(李烋烈) 황종관(黃鍾寬), 고문에 강대직(姜大直) 이석열(李錫烈) 나홍균(羅鴻均) 이종택(李鍾澤) 등을 임명하고 군자금 모집, 격문 살포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22년 5월에 노진문(魯鎭文) 김성균(金聲均) 등과 함께 전북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1923년 3월 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신익희 친필 육영기념비
해공 신익희(1894 - 1956) 선생은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으로, 1919년 김시학, 윤치호, 이상재, 이승훈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고,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 지사들과 연락하다가, 4월 10일에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의원으로 하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국호, 관제,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과 함께 임시의정원의 의원이 되어 법무차장으로 임명되었고, 나중에는 법무총장, 외무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 6월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연구위원회를 설치, 선생은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3년 4월부터는 새로이 대한민국 잠행관제(暫行官制)가 실시됨과 함께 정부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가 새로 설치되어 조소앙, 엄항섭, 유림 등과 함께 선전 계획 수립, 선전 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임시정부의 초창기부터 시작하여 내무차관, 내무총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끈질기게 항일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 광복 후에는 민주당 최고위원, 민의원으로 당선되어 국회의장을 역임한 분이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