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TOTAL. 138 건
임시정부 서울연통부지 표지석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서울연통부(聯通府)는 1919년 중국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내와 연락을 취하고, 국내행정을 담당하기 위해 비밀리에 만든 조직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연통부 터는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순화동 동화약품의 옛 사옥 자리에 해당한다. 1919년 3·1운동 직후인 4월 13일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후 임시정부는 임시정부활동의 선전, 독립운동지도, 군자금모집 등의 목적으로 국내에서의 조직기반을 확대하고자 했다. 이에 만들어진 것이 임시정부 직할의 연통부·교통국(交通局) 등이다. 서울연통부는 국내행정을 담당하는 조직으로, 연통제에 따라 국내의 각 도(道)·군(郡)·면(面)에 비밀행정기관을 두어 명령전달·군자금 모집 등을 담당했다. 그리고 교통국은 통신담당기구로 국내외 정보수집과 분석 등을 담당했다. 임시정부는 군자금 마련을 위해 독립공채를 발행하거나 의연금을 거뒀다. 이 자금은 연통부나 교통국 조직망을 통해 임시정부에 전달됐다. 서울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부를 설치하려는 시도는 상해에서 파견된 이종욱(李鍾郁)이 1919년 10월에 연건동에서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의 송세호(宋世浩), 대동단(大同團)의 나창헌(羅昌憲) 등과 수차 회합을 가지면서 태동했다. 이때 화천정 5번지 동화약방 주인이자 독립운동가인 민강(閔橿)이 임시정부와의 통신 및 문서 수발을 담당할 연락장소로 자신의 집을 내놓아 이곳이 서울연통부의 연락거점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후 연통제는 각 도에 확대 설치됐으나,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피하여 비밀리에 조직해야 하는 관계로 순조롭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황해도·평안도·함경도는 잘 진행되는 편이었으나, 강원도·경상도·전라도 등지에서는 불가능했다. 연통제는 비밀조직이기 때문에 일제의 감시가 심했고, 활동하다가 비밀이 누설되어 탄압과 수난을 당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 결과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구금된 사람도 많았다. 연통제 활동에 참여한 사람은 교사·학생·전도사·승려 등 직업 및 신분에 관계없이 다양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 연통제는 오래가지 못하고 1921년 후반에 이르러 소멸되고 말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연통부 터는 원래 조선 숙종(肅宗)의 왕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태어난 곳이다. 이후 1898년에 동화약방이 들어섰다가 1930년부터 2014년까지는 동화약품의 사옥이 있었다. 현재 해당 자리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연통부 터’를 가리키는 표지석이 있다.
김구 동상
김구(1876~1949)는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이승만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김구 집(대명헌)
김구(1876~1949)는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이승만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인천항과 김구 조형물
김구(1876 - 1949)는 일제강점기 안명근사건, 안중근 하얼빈 의거, 모스크바3상회의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1876년(고종 13)에 태어나 1949년에 사망했다. 젊은 시절 항일 투쟁 중에 두 차례 투옥, 동학 입교, 출가, 기독교 입교 등 분주하게 살았다.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을 역임했고,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주도하고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했다.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임하다 환국한 후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전심하다가 1949년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김구 투옥지(인천감리서 터)
1883년 8월 19일 인천 개항장의 통상사무를 취급하기 위해 인천감리서를 설치하였던 곳이다. 1895년 3월부터는 이 곳에 개항장재판소가 설치되어 개항장의 재판권을 행사하였다. 인천개항장 재판소는 22살의 청년 김구가 "치하포사건"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복역하던 중 탈출한 일화로 널리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개항 후 조선정부는 외국인 거주지 설정, 외국상인들의 출입, 선박의 입출항 및 국제교역 등 새로운 업무를 전문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1883년 8월 19일 인천 개항장에 인천감리서를 설치하였다. 또한 1895년 3월부터는 인천감리서 내에 개항장재판소가 설치되어 개항장의 재판권을 행사하였다 인천감리서는 갑오개혁에 따른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고종 32년(1895) 5월 26일에 일시 폐지되기도 하였으나, 개항장에서 처리해야 할 업무가 증가되고 그 중요성이 부각되어 1896년 8월 7일 감리서가 다시 설치되었다. 그러나 일제 국권침탈로 1906년 9월 24일 인천감리서도 폐지되기에 이르렀고 그 담당 사무는 그해 10월 1일부터 통감부 이사청에서 관할하게 되었다.
김구 역사거리
김구(1876~1949)는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이승만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김구 동상
김구(1876 - 1949)는 일제강점기 안명근사건, 안중근 하얼빈 의거, 모스크바3상회의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1876년(고종 13)에 태어나 1949년에 사망했다. 젊은 시절 항일 투쟁 중에 두 차례 투옥, 동학 입교, 출가, 기독교 입교 등 분주하게 살았다.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경무국장·내무총장·국무령을 역임했고,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주도하고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했다.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임하다 환국한 후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전심하다가 1949년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한성임시정부 13도 대표자 회의 집결지 표지석
인천 만국공원(현재 자유공원)은 1919년 3월 9일 인천에서의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이자, 4월 2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13도 대표자 회의가 열린 곳이다. 1919년 3월 7일과 8일 인천부 각지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3월 9일에는 만국공원과 시내에 수백명의 시위대가 모여 독립만세를 외친 후 해산하였다. 만세운동이 한창이던 3월 이교헌, 윤이병, 윤용주, 최전구, 이용구, 김규 등이 이규갑에게 임시정부 수립을 제안하였다. 인천시내 만세운동이 잦아들던 1919년 4월 2일 만국공원에서 홍진, 이규갑, 홍면희, 안상덕 등 13도 대표들은 이날 독립운동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 임시정부 수립을 결의하였다. 이 임시정부는 상해 및 노령 대한국민의회와 더불어 3대 임시정부의 하나로서 임시정부 정통성의 근간이 된 한성임시정부이다. 13도 대표들은 임시정부 선포문을 통하여 국민대회 취지를 포고하였다. 따라서 한국이 독립국임과 함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음을 대내외에 알린 것이다. 이때 발표된 정부 주요 인사는 이승만, 이동휘 등 24명이었다. 이후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헌법이 공포되면서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통합하게 되었다. 홍진(1877 - 1946)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법무총장, 외무총장, 한국독립당 중앙감찰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8월 나라가 일제에 강점당하자 검사직을 사임하고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 뒤, 1919년 2월까지 독립운동가를 위해 법정투쟁을 계속하였다. 그 해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가담하여 충청북도 청주군 연락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4월 인천시 만국공원에서 비밀리에 13도 대표들과 국민대회를 열고 한성임시정부를 조직한 뒤 법무차장에 선임되었다. 그 뒤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임시의정원의원·법제위원장을 지냈고, 또한 충청북도 충주군 조사위원과 충청도선거위원장으로도 활약하였다. 1921년 4월 상해 대한교민단 단장에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2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에 선임된 뒤 내무총장·외무총장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1926년 7월 국무령에 임명되었고, 9월에는 외무총장까지 겸임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시정 3대 강령을 제시하였다. 1930년 7월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그 당수로서 군민회의의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당군을 한국독립군으로 개편하고 총사령에 지청천을 선출, 항일 중국군과 연합전선을 펴 치열하게 싸웠다. 1932년 일제가 만주국을 세우자 1933년 난징으로 가 산해관 이남과 미주·노령 등지에 흩어져 있는 각 혁명단체들이 하나로 합쳐 항일전선을 펼 것을 절규하였다. 1934년 동삼성에서 조직된 한국독립당과 난징에서 조직된 한국혁명당을 통합하여 신한독립당을 재조직하고 조소앙과 같이 지도하였다. 이어서 미주에 있는 대한독립단동지회·국민회·부인애국단·단합회·애국단 등과 교섭하여 1937년 8월 1일 한국광복진선이 출범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해운정
해운정은 1940년, 당시 진월면장을 지내던 안상선(소설가 안영 부친)이 진월면 차동마을 본가 소유의 나무를 베어 실어 나르고 찬조해 배알도 정상에 건립한 정자다. 안상선 면장은 당시 친분이 두터웠던 독립운동가 백범(白凡) 김구 선생으로부터 친필 휘호를 받아『海雲亭』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해운정은 지역의 기관장과 방문한 인사들이 올라 담소를 나누고, 지역민들도 즐겨 찾는 명소였는데, 1959년 태풍 사라호로 붕괴되고 말았다. 2015년 광양시가 지역민들의 뜻을 수렴해 정자를 복원하였다.
김구 추모비
김구(1876~1949)는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이승만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김구 은거지
김구(1876~1949)는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이승만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명성황후를 살해한 일제를 응징하고자, 김구는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鴟河浦)에서 왜병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監理營)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898년 3월 9일 인천감옥에서 탈옥하여 이곳 쇠실에서 달포 여를 은거하며 동국사기를 가르치며 민족정기를 일깨웠다. 떠날 때 이별의 아쉬움을 담은 이별난시를 남긴 후 중국으로 망망하였고, 해방 후 귀국하여 쇠실의 집집마다 친필휘호를 써 보냈다.
백범 김구선생 은거 기념관
김구(1876~1949 는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이승만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 주민들의 호응과 보성군의 도움으로 은거비를 세웠으나 내용이 빈약하여 2006년에 주민들의 숙원사업으로 은거기념관을 지을 것을 건의하여 전라남도의 후원 및 백범선생 기념사업회의 도움으로 기념관을 준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