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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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박 정사(수봉정사)
문영박(1880 - 1930)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자는 장지(章之), 호는 수봉(壽峯). 일명 문박(文樸). 대구광역시 달성군 출신이다.영남의 거유(巨儒)로서 1919년부터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전국 각지를 내왕하면서 군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계속해서 송달해주어 임시정부를 크게 고무, 진작시켰다.이에 보답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에서는 문영박의 사망에 즈음하여 1931년 10월 임시정부 일동 명의로 특발(特發)과 “대한국춘추주옹문장지선생(大韓國春秋主翁文章之先生)”이라는 조문(弔文)을 발송하였다.수봉정사는 수봉 선생이 돌아가신 후 다섯 자제분들이 수봉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협력하여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애국지사 문영박 선생의 생가이기도 하다.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상정 묘
이상정(1896 - 1947)은 일제강점기 충칭육군참모학교 교관, 신한민주혁명당 중앙위원 , 군사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월성(月城). 별명은 이연호(李然浩)·이직(李直). 호는 청남(晴南)·산은(汕隱). 대구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시우(李時雨)로 이시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우로는 이상화(李相和, 李尙火)·이상백(李相佰)·이상오(李相旿)가 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 밑에서 교육을 받았다. 큰아버지가 경영하던 신학문과 민족정기의 요람이었던 강의원(講義院)에서 공부하였다.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성성중학교(成城中學校: 육군유년학교)를 마치고 미술학교·상업학교를 거쳐 고쿠가쿠인대[國學院大學]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졸업 후 1919년 귀국, 3년간 행동적 사도(師道)로서 오산(五山)·경신(儆新)·계성(啓聖)·신명(信明) 등의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조국에서의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1923년 만주로 망명, 북만주에서 약 2년간 민족교육을 통한 항일독립운동을 하였다. 그 뒤 유동열(柳東說)·최동오(崔東旿) 등과 함께 중국 펑위샹[馮玉祥]장군의 서북국민부대의 장성참모로서, 장개석(蔣介石)군대와 통합된 후에도 국민정규군 소장참모로서 항일전선에 참전하였다. 그 뒤 상해와 난징[南京]을 중심으로 쑤저우[蘇州]·항저우[杭州]·우창[武昌]·북경까지 독립 일념으로 중국의 군벌·학자들과 만나면서, 또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 등의 독립지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윤봉길(尹奉吉)에게 폭약을 구해주는 등 독립운동에 전념했으며, 1932년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장개석 국민정부의 초청으로 충칭육군참모학교(重慶陸軍參謀學校)의 교관을 지냈다. 1938년 김구·김규식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의원 및 외교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유동열 등과 신한민주혁명당(新韓民主革命黨)을 조직해 중앙위원 겸 군사부장에 취임하였다. 1941년 중국 육군유격대훈련학교의 교수를 거쳐 1942년 화중군사령부(華中軍司令部)의 고급막료로 난징전[南京戰]·한커우전[漢口戰]에 참전하였다. 이른바 태평양전쟁의 종결과 동시에 육군중장으로 승진되어 일본국 북지나방면 최고사령관 및 그 장병들의 무장해제를 담당하였다. 연합군 동경 진주의 중국군사령부의 막료로 임명되었으나, 소망인 일본군 타도가 실현되었으므로 모든 지위를 사퇴하였다. 충칭에서 광복된 조국의 앞날을 신익희(申翼熙) 등과 토론, 상해로부터 급히 와서 도와달라는 교민들의 요청으로 상해에서 중국인들의 한국인 박해로부터 교민 보호에 진력하였다. 1947년 10월 어머니의 사망소식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40여 일만에 뇌일혈로 죽었다. 유고로 『표박기(飄泊記)』가 있고, 시(詩)·서(書)·화(畫)에 능하였으며, 전각(篆刻)에 뛰어났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최종응 집(월연댁)
최종응(1871 - 1944)은 대구(大邱) 사람이다. 그는 1920년 임시정부(臨時政府) 경북 선정사(宣政使)로 임명되어 동지 고정일(高政一)·윤 철(尹喆)·이태훈(李泰勳) 등과 함께 독립운동자금 조달기반을 조성하였으며 동년 9월 경상·충청·전라도 등지를 순방하며 자산가들의 자산명부를 작성하여 군자금 조달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0년 11월에는 조석환(曺奭煥) 등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할 것을 요구하여 그들에게 8백원을 받아 임정파견원 고일치(高一致)에게 전달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21년 2월 경북 칠곡군(漆谷郡)에 사는 윤병돈(尹炳敦) 등 경북에 거주하는 부호 수명에게 2천원 내지 5천원을 요구하는 군자금납입명령서(軍資金納入命令書)를 송부하고 윤병돈으로부터 300원을 받아 이태훈(李泰勳)에게 전달하였다. 이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혀 1922년 3월 30일 소위 공갈 및 제령 제7호 위반으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동석 묘
정동석(1885 - 1968)은 경북 달성(達城) 사람이다. 1919년 9월 중 중국 상해(上海)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을 위해 경북 대구(大邱)를 중심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고 있는 송두환(宋斗煥)으로부터 권총 2정, 실탄 10여발을 보관 의뢰받아 집에다 은닉하였다.1920년 1월 중 대구(大邱) 신암동(新岩洞) 구장(區長)으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다시 송두환으로부터 권총 3정, 실탄 300여발을 받아 보관하고 있다가, 중국 동삼성(東三省)내의 독립단체를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고자 활동하는 최윤동(崔胤東)·이수영(李遂榮)·노기용(盧企容) 등의 활동이 발각됨에 따라, 1923년 11월 27일 일경에 붙잡혔다.1924년 11월 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총포화약류취체령(銃砲火藥類取締令) 시행규칙 위반으로 징역 10월에 2년간 집행유예를 받고 출옥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송두환 묘
송두환(1892-1969)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5월 사재 1,300원을 들여 독립운동가의 연락을 위한 비밀장소로 대구시내에 가옥을 매입해 동료 최해규(崔海奎)를 거주시켜 연락사무를 맡겼다. 그리고 무기와 선전문서 등의 입수방편으로 신의주에도 가옥을 구입해 생질 정욱(挺郁)에게 그 곳에서 장사를 하는 것처럼 하게 하였다. 1920년 고향 달성군에서 동지 수십명과 같이 비밀독립운동단체인 빈민회(貧民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되었다. 이 조직체를 구심점으로 하여 농민 2,300여 명을 규합해 복지활동을 전개하였다. 농민이 잘 살아야 독립운동도 원활히 전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면서 농민의 조직화운동을 계속하였다. 1920년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단일정부로 통합된 뒤, 군자금 모금을 대대적으로 전개할 목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부장 이시영(李始榮)으로부터 임시정부 군자금 모금요원의 위촉을 받았다. 경상북도 일대를 내왕하면서 군자금의 필요성을 역설하던 중 경상남도 의령군 일본경찰 사살사건의 주모자 혐의를 받고 그 해 12월 하순경 남마산(南馬山)에서 붙잡혔다. 1921년 3월 가석방되었지만, 그 해 4월 초순에 다시 잡혀 신의주지방법원지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평양과 서울형무소에서 복역 중 1922년 8월 가석방되어 다시 군자금 모금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3월 경상북도 제2사건 주모자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2년을 구형받았으나, 신의주사건과의 일사부재리원칙이 적용되어 무기소지 등 다른 죄목으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1929년 8월에는 신간회 대구지회 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1930년 11월에는 일본경찰의 감시 아래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해 중앙집행위원장에 김병로(金炳魯)를 선출하고, 중앙위원 전체 40명 중의 1명으로 선출되었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상정 집
이상정(1896 - 1947)은 경상북도 대구(大邱) 사람으로 시인 이상화(李相和)의 형이다. 독립운동을 할 때엔 이연호(李然浩)라는 이명을 사용했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평안북도 정주(定州)에 있는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로 근무하면서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에서 육영사업을 하며 독립운동에 가담, 활동하였다. 1926년부터 1927년까지는 동만주(東滿洲)에서 중국 풍옥상(馮玉祥)의 서북국민부대(西北國民部隊)에서 준장급 참모(准將級參謀)로 활약하였으며, 장개석의 부대와 통합됨에 따라 국민정부(國民政府) 정규군 소장(少將)으로 항일전선에서 활동하였다. 1932년 경에는 남창(南昌) 항공협진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1936년에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하자 중경(重慶)에 있는 임시정부의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중국 육군 참모학교의 교관으로 계속 활동하였다. 1939년 4월에는 민족전선통일을 기하기 위한 청년호성사(靑年呼聲社)를 조직하고 이건우(李健宇)와 함께 잡지 청년호성(靑年呼聲)을 창간하였다. 또한 1940년 9월에 광복군(光復軍) 창설을 적극 지원하였다. 1941년 10월에는 임시의정원 경상도의원에 다시 선출되었으며, 1942년 제3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최동오(崔東旿) 등 27명과 함께 연서로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최단 기간 내에 중 미, 영, 소 등 연합 각국 정부에 향하여 정식으로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할 것"이라는 임시정부 승인에 관한 안을 제안하였다. 1942년 8월에 임시정부에서는 외무부 내에 외교연구위원회를 설치하고 외교 전반에 관한 문제를 연구 제공하도록 하였다. 이에 그는 신익희(申翼熙), 장건상(張建相), 이현수(李顯洙) 등과 함께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1944년에는 강창제(姜昌濟), 홍진(洪震) 등과 함께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을 창당하였으며, 1945년 2월에는 동당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는 또한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중경(重慶)에서 중국 육군 유격대훈련학교 교관에 취임하여 후진 양성에 노력하였으며, 중국군 중장(中將)으로 진급하여 광복 후에는 북지방면(北支方面)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도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인정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상룡 구국기념비
이상룡(1858.11.24 - 1932.05.12)은 호 석주(石洲). 일명 상희(象羲)·계원(啓元). 경북 안동(安東) 출생이다. 1905년 김동삼(金東三)·유인식(柳仁植) 등과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부를 조직, 회장이 되어 협동학교(協同學校)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쓰며, 강연회 등을 통하여 국민계몽운동을 벌였다.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간도(間島)로 망명,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에서 양기탁(梁起鐸)·이시영(李始榮) 등과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열어 교포자녀의 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하였고, 1912년 계몽단체 부민단(扶民團)을 조직, 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한족회(韓族會)를 조직, 동료들의 자치활동에 힘쓰는 한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조직에 참여하여 독판(督辦)으로 활약하였으며, 그 후 1926년 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이 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용원 사적지
김용원(1892-1934)은 충청남도 대덕(大德) 사람으로,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면서 실력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이후에는 항상 조국 광복에 신명을 바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김용원은 향리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사촌인 김태원과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김구 아래에서 경무국원(警務局員)으로 활약하였다. 9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는 황포(黃埔)군관학교에 들어가 군사학을 전수하였다. 군관학교를 수료한 김용원은 1920년 7월,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으며, 북경(北京)에서 박용만, 나창헌 등과 향후 행동계획을 상의하고 비밀히 국내에 들어와 이강의 상해 탈출 공작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강이 만주 안동(安東)에서 체포됨에 따라 다시 상해로 도피하였다. 상해에서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활약하였으며, 1921년 5월에는 김구의 후임으로 임정경무국장에 임명되고 동시에 의정원 청원 징계(請願懲戒) 상임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는 태평양 회의에 관해 임시정부를 후원하고 지도하기 위해 '외교후원회'를 조직하고, 그는 박찬익의 후임으로 간사가 되어 태평양 회의 축하회를 거행하는 동시에 홍진, 신익희, 이진산 등 25명과 함께 연서한 청원서를 재미 각국 대표자에게 송부하여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1922년 3월에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사임하고 1923년에 다시 국내에 들어와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경에게 탐지되어 1924년 9월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체포되어 징역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병에 걸려 형집행 정지처분으로 출옥하였다. 1925년 6월, 출옥 후에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일대에서 다시 동지 규합 및 군자금 모집 등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미행하던 일본인 형사에게 발각되어 1927년 1월 또다시 체포되었으며 1928년 11월에 소위 강도 교사죄로 서울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4년 2월에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병보석을 받고 출옥하였으나 옥중에서 얻은 지병으로 인하여 같은 해 6월 조국의 광복도 보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용원 묘
김용원(1892-1934)은 충청남도 대덕(大德) 사람으로,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면서 실력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이후에는 항상 조국 광복에 신명을 바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김용원은 향리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사촌인 김태원과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김구 아래에서 경무국원(警務局員)으로 활약하였다. 9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는 황포(黃埔)군관학교에 들어가 군사학을 전수하였다. 군관학교를 수료한 김용원은 1920년 7월, 임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으며, 북경(北京)에서 박용만, 나창헌 등과 향후 행동계획을 상의하고 비밀히 국내에 들어와 이강의 상해 탈출 공작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강이 만주 안동(安東)에서 체포됨에 따라 다시 상해로 도피하였다. 상해에서는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활약하였으며, 1921년 5월에는 김구의 후임으로 임정경무국장에 임명되고 동시에 의정원 청원 징계(請願懲戒) 상임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에는 태평양 회의에 관해 임시정부를 후원하고 지도하기 위해 '외교후원회'를 조직하고, 그는 박찬익의 후임으로 간사가 되어 태평양 회의 축하회를 거행하는 동시에 홍진, 신익희, 이진산 등 25명과 함께 연서한 청원서를 재미 각국 대표자에게 송부하여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1922년 3월에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사임하고 1923년에 다시 국내에 들어와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경에게 탐지되어 1924년 9월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체포되어 징역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병에 걸려 형집행 정지처분으로 출옥하였다. 1925년 6월, 출옥 후에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일대에서 다시 동지 규합 및 군자금 모집 등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미행하던 일본인 형사에게 발각되어 1927년 1월 또다시 체포되었으며 1928년 11월에 소위 강도 교사죄로 서울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4년 2월에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병보석을 받고 출옥하였으나 옥중에서 얻은 지병으로 인하여 같은 해 6월 조국의 광복도 보지 못하고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안창호 기념관
안창호(1878-1938)는 호는 도산(島山)이며 일제강점기 이토히로부미 암살사건, 상해 훙커우공원 폭탄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다.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상경하여 언더우드가 경영하는 구세학당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서구문물을 접하였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필대은과 함께 평양에서 관서지부조직을 맡게 되었다. 이 때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1898년 서울 종로에서 이상재(李商在) · 윤치호(尹致昊) · 이승만(李承晩) 등과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였으며, 1899년에는 강서군 동진면 화암리에 강서지방 최초의 근대학교인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하였다. 190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 친목회를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1905년 4월 대한인공립협회(大韓人共立協會)를 설립하였다. 귀국 후 1907년에 이갑(李甲) · 양기탁(梁起鐸) ·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07년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평양과 대구에 출판기관인 태극서관(太極書館)을 건립하였으며,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산업 육성에도 힘썼다. 1909년에는 박중화(朴重華) · 최남선(崔南善) · 김좌진(金佐鎭) · 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계몽운동 및 지도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1909년 10월에 있었던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3개월간 일제에 의하여 체포되었다가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산동성(山東省)에서 민족지도자들과 청도회의(靑島會議)를 열었다. 그러나 자금관계와 급진파의 반대로 실패, 시베리아를 거쳐 1911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13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설하여 본국에서 이루지 못한 대성학교 · 신민회 · 청년학우회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1914년 11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장에 선출되었다. 1915년 6월 23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회장에 취임하며 동포의 단결을 강조했다. 1919년 3 · 1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아 독립운동방략 작성, 연통제(聯通制) 수립, 각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상해 소집 등을 실행하였다.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에 취임한 지 2년째인 1921년에 임시정부 내각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다 실패하여 사임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하였다. 1924년에는 북중국 만주방면을 시찰, 여행하며 이상촌(理想村) 후보지를 탐사하고 난징에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하였다. 1924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각지를 순행하며 국민회와 흥사단의 조직을 강화하였으며, 1926년 중국에 돌아와서 만주 길림성 일대를 답사하여 이상촌사업을 추진하였다. 1927년 길림에서 군사행동단체의 통일과 대독립당(大獨立黨)의 결성을 토의하던 중 동지 200여 명과 함께 중국경찰에 감금되었다가 중국 내 사회여론이 비등하게 되어 20일만에 석방되었다. 1930년 1월 상해에서 이동녕 · 이시영 · 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제창하였다.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 상해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서울로 송환되었다. 4년의 실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5년 2년 6개월만에 가출옥하여 지방순회 후 평안남도 대보산(大寶山) 송태산장(松苔山莊)에서 은거하였다. 1937년 6월 수양동우회사건(修養同友會事件)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일본경찰에 붙잡혀 수감중, 같은 해 12월에 병으로 보석되어 이듬해 3월 경성대학부속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졸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여운형 묘
몽양 여운형(1886~1947)은 경기도 양평 출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다.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흥화학교(興化學校)와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독립운동가ㆍ언론가ㆍ정치가. 호는 몽양(夢陽). 대한민국 임시 정부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조선중앙일보사 초대 사장을 지냈다. 광복 후에는 건국 준비 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좌우익의 합작을 추진하다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피우정 터(김성숙 집 터)
김성숙(1898-1969)은 호(號)는 운암(雲巖)이고 이명(異名)은 성암(星巖),창숙(昌淑)등이 있다. 1916년 출가하여 용문사, 봉선사에 있으면서 '성숙'이라는 법명을 받음. 이 곳에서 손병희, 김법린, 한용운 등과 교류함.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격문을 뿌려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중국에 건너가 창일당, 의열단, 광저우 혁명,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전선연맹 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약산 김원봉 선생과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을 지냈으며 1942년 민족전선연맹을 해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통합 후 내무차장, 국무위원 등을 지냈다. 1945년 몽양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였으나 여운형의 피살로 세력이 기울었으며 이후 근로인민당 재건 사건, 통일사회당 사건 등으로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였다는 혐의로 옥고를 치름. 1964년 지인들이 비나 피하라는 의미의 ‘피우정(避雨亭)’을 지어줌, 1969년 4월 12일 별세하였다. 1982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2004년 7월 국립묘지에 유해를 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