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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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의선 집(용인독립운동유적)
오의선(1889 - 1931)은 1889년 태어나 메이지(明治) 대학 중 1919년 2월 2.8독립선언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향리에서 3·1운동에 참가한 뒤 동지들과 같이 상해로 망명,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1921년 베이징에서 박용만이 독립자금 모금을 한 흥화실업은행의 주식 모집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 뒤 국내에 들어와 시대일보 기자 등으로 근무하면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였으며, 사회주의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투옥된 동지들과 그 가족들을 돌보기 위해 국제혁명가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이후 후원회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31년 3월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4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같은 해 5월 6일 옥사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황진남 구 묘
황진남(1897~1970)이 1919년 캘리포니아대학을 다니던 도중, 3월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는 소식이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에 전해졌다. 캘리포니아대학에서 공부하던 황진남은 애국하는 충심이 극도에 달하여, 무슨 방면으로든지 나랏일에 한 부분을 돕고자 하여 자원 퇴학을 했다.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1919년 3월 15일에 재류동포전체대표회를 열고 독립운동 방침을 결정하였다. 전체대표회결의안 제6항에 의하여, 중앙총회장 안창호(安昌浩)를 재미한인의 대표로 선정하고, 황진남과 정인과(鄭仁果)를 통신원으로 임명하여 중국 상하이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되고, 13일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법을 제정하여 의원들을 지방회에서 선거하도록 하였다. 황진남과 정인과는 미국령 대의사로 선출되었다. 황진남은 안창호의 비서로서 그를 도왔으며, 영문에 능숙하여 중국 현지 영자신문 등에 일제의 한국통치 실상을 알리는 영문선전의 문서를 작성하였다. 1920년 2월 임시의정원 상임위원회 제5과(교통)의 상임위원이 되었고, 그해 3월 16일자 『노스차이나 데일리 뉴스』에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그의 기사가 실렸다. 1920년 8월 8일 황진남은 상하이의 대동여사에서 개최된 유학생 주최 미국의원단 환영회에서 참석하였다. 황진남은 여운형·장덕준과 함께 8월 16일 미국 하원의원 쵸스타를 방문하고 일본의 한국지배 실상을 설명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 등 제반 문서를 제공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황진남은 1921년 2월 17일 임병직(林炳稷)과 함께 상하이를 출발하여 프랑스배 아토란츠크호를 타고 유럽으로 향하였다. 황진남은 3월 30일 파리로 가서 파리위원부로 갔다. 그는 원래 파리에서 영국 런던을 경유하여 미국으로 가려고 했지만, 5월 18일 독일로 가게 되었다. 독일로 가 베를린대학에 입학하여 광산학을 전공했다. 독일에서 학업을 하던 황진남은 다시 프랑스 파리로 가서 소르본대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8.15해방 이후 월남하여 여운형과 함께 정치활동을 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육군성 소속으로 일본으로 가서 유엔군총사령부방송(VUNC)이라는 한국어 방송을 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일본 오키나와에서 방송 활동에 종사했다. 1970년 5월 13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규채 행적비
이규채(1884~1947)는 경기도 포천(抱川) 출신으로, 청성학교 교원으로 재직하고, 3·1운동 후 중국에 망명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한국독립당 정치부위원, 신한독립당감찰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32년에 그는 한국독립당의 총무위원장(總務委員長)에 피선되었으며, 본부를 만주(滿洲)에서 북경(北京)으로 옮기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고, 본부를 옮김에 따라 한국독립당군은 해체하게 되었다. 1933년에는 중국 길림(吉林) 육군 제3군 상교참모(上校參謀)가 되어 활약하였으며, 그 이듬해에는 남경(南京)에 본부를 두고 있던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과 한국독립당이 제휴하여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조직하게 되자 그는 감찰위원장(監察委員長)으로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1935년 9월 25일에 중국 상해(上海)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받고 경성형무소(京城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조영원 공적비
조영원(1891 - 1974)은 유신학교 졸업 후 1920년 상해로 망명하여 상해 임시 정부 의정원 의원, 임정 국무원 비서장 서리 등을 지냈고, 1926년 촉성회 대표로 만주에 파견되어 김좌진 장군이 영도하던 신민부의 군사 위원으로 활약하면서 해림 신창학교를 창설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다. 1931년 한국 독립군 총사령부 총참모 등으로 활약 중 1933년 만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사형수로 복역하다가 5년 간 집행유예로 본국에 압송되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김대지 집
김대지(1891-1942)는 경남 밀양의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조국 광복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비밀결사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하였으며, 황상규, 고인덕, 김원봉 등과 동화학원(東和學院)에서 2세 교육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1917년부터는 만주의 길림(吉林), 봉천(奉天) 지방을 왕래하면서 국권회복운동을 계획하다가 체포되어 1918년 5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동삼성(東三省)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계획하였으며, 이어서 김동삼, 이시영, 조소앙, 이회영 등과 함께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0일, 초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의정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동년 11월에는 밀양군 조사원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 후 임시정부 교통 차장, 내무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1921년 11월에는 북경(北京)에서 임시정부와 별개로 조직된 조선공화정부(朝鮮共和政府)에 참여하여 이상용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그는 내무총장에 임명되어 소위 삼남파(三南派)에 의한 정부를 경영하기로 하였다. 1920년에는 김원봉의 의열단(義烈團) 조직을 지원했으며, 곽재기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및 일제 요인 사살 계획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1925년까지 의열단장 김원봉의 자문에 응하여 무장 항일 투쟁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8년에는 다시 만주로 들어가 길림성(吉林省) 영고탑(寧古塔)에서 의료업에 종사하면서 지하활동을 계속하다가 빈강성(濱江省) 파언현(巴彦縣)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진 기념비
윤현진 선생은 경상남도 양산(梁山) 사람이다. 1906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명치대학교(明治大學校) 법과에 입학 법률공부를 하였다. 그는 재학 중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를 조직하고 총무로 선임되어 항일투쟁을 하였다. 졸업 후 귀국함과 동시에 1909년에는 백산 안희제(安熙濟) 등과 비밀결사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양산(梁山)에 의춘(宜春)학원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는 고향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 활동하고, 압록강을 건너 단신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그곳에 모인 독립지사 수십 명과 교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노백린(盧伯麟)·여운형(呂運亨)·신익희 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이어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되어 임정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특히 백산상회자금(白山商會資金) 30만원을 임시정부 군자금으로 헌납함으로써 재정압박을 다소 완화시켰다. 이어 임시정부 상임위원회에서 재무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제2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다시 내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동년 5월에는 구급의연금모집위원이 되어 어려운 임시정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하였다. 1920년에는 독립신문사를 주식회사로 확장하고 안창호와 같이 주금(株金)모집의 발기인이 되어 홍보활동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21년 5월에는 국민대표회의기성회(國民代表會議期成會)를 조직하여 활동했으며, 같은 해 중한국민호조사를 결성, 중국과 같이 공동의 적인 일본을 섬멸할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할 것을 결의하였다. 구국의 일념에서 건강을 돌보지 않고 구국투쟁에 헌신하던 그는 상해에서 30세로 요절하였다. 일제의 신문인 조일신문(朝日新聞)에서도 "형극(荊棘)의 배일 수완가 윤현진의 사(死)"라는 제목 하에 그의 사망은 임시정부의 패망이라고까지 논평할 만큼 그의 위치는 뚜렷하였다. 그는 임정요인들의 애도 속에 국장(國葬)으로 상해의 정안사(靜安寺)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1995년 유해봉환, 대전현충원 안장)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진 집
윤현진 선생은 경상남도 양산(梁山) 사람이다. 1906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명치대학교(明治大學校) 법과에 입학 법률공부를 하였다. 그는 재학 중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를 조직하고 총무로 선임되어 항일투쟁을 하였다. 졸업 후 귀국함과 동시에 1909년에는 백산 안희제(安熙濟) 등과 비밀결사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양산(梁山)에 의춘(宜春)학원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는 고향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 활동하고, 압록강을 건너 단신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그곳에 모인 독립지사 수십 명과 교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노백린(盧伯麟)·여운형(呂運亨)·신익희 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이어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되어 임정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특히 백산상회자금(白山商會資金) 30만원을 임시정부 군자금으로 헌납함으로써 재정압박을 다소 완화시켰다. 이어 임시정부 상임위원회에서 재무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제2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다시 내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동년 5월에는 구급의연금모집위원이 되어 어려운 임시정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하였다.1920년에는 독립신문사를 주식회사로 확장하고 안창호와 같이 주금(株金)모집의 발기인이 되어 홍보활동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21년 5월에는 국민대표회의기성회(國民代表會議期成會)를 조직하여 활동했으며, 같은 해 중한국민호조사를 결성, 중국과 같이 공동의 적인 일본을 섬멸할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할 것을 결의하였다. 구국의 일념에서 건강을 돌보지 않고 구국투쟁에 헌신하던 그는 상해에서 30세로 요절하였다. 일제의 신문인 조일신문(朝日新聞)에서도 "형극(荊棘)의 배일 수완가 윤현진의 사(死)"라는 제목 하에 그의 사망은 임시정부의 패망이라고까지 논평할 만큼 그의 위치는 뚜렷하였다. 그는 임정요인들의 애도 속에 국장(國葬)으로 상해의 정안사(靜安寺)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1995년 유해봉환, 대전현충원 안장)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진 순국비
윤현진 선생은 경상남도 양산(梁山) 사람이다. 1906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명치대학교(明治大學校) 법과에 입학 법률공부를 하였다. 그는 재학 중 조선유학생학우회(朝鮮留學生學友會)를 조직하고 총무로 선임되어 항일투쟁을 하였다. 졸업 후 귀국함과 동시에 1909년에는 백산 안희제(安熙濟) 등과 비밀결사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양산(梁山)에 의춘(宜春)학원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는 고향에서 만세시위에 적극 가담 활동하고, 압록강을 건너 단신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그곳에 모인 독립지사 수십 명과 교류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노백린(盧伯麟)·여운형(呂運亨)·신익희 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이어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되어 임정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특히 백산상회자금(白山商會資金) 30만원을 임시정부 군자금으로 헌납함으로써 재정압박을 다소 완화시켰다. 이어 임시정부 상임위원회에서 재무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제2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다시 내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동년 5월에는 구급의연금모집위원이 되어 어려운 임시정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하였다.1920년에는 독립신문사를 주식회사로 확장하고 안창호와 같이 주금(株金)모집의 발기인이 되어 홍보활동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21년 5월에는 국민대표회의기성회(國民代表會議期成會)를 조직하여 활동했으며, 같은 해 중한국민호조사를 결성, 중국과 같이 공동의 적인 일본을 섬멸할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할 것을 결의하였다. 구국의 일념에서 건강을 돌보지 않고 구국투쟁에 헌신하던 그는 상해에서 30세로 요절하였다. 일제의 신문인 조일신문(朝日新聞)에서도 "형극(荊棘)의 배일 수완가 윤현진의 사(死)"라는 제목 하에 그의 사망은 임시정부의 패망이라고까지 논평할 만큼 그의 위치는 뚜렷하였다. 그는 임정요인들의 애도 속에 국장(國葬)으로 상해의 정안사(靜安寺)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1995년 유해봉환, 대전현충원 안장)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교재 묘
이교재(1887-1933)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남도, 경상북도 일대에서 「독립선언서」을 배부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진주형무소에서 3년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 경상남북도 상주대표로 임명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9월 임시정부 밀명을 받고 국내 잠입하여 경북 통영군 통영면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대구지방법원에서 5년의 징역형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상해로 망명하다가 신의주에서 붙잡혀 서울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동안 복역한 뒤 다시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약하였다. 그 후 김구(金九)의 위임장을 가지고 국내로 은밀히 들어와 군자금을 모집하거나 정보의 수집 및 전달, 밀정의 파악 등으로 맹활약중 일본경찰에 다시 붙잡혔다. 6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아 부산형무소에서 복역중 1933년 2월 옥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홍권 공훈비
하우 김홍권 선생은, 1909년에 안희제 이원식 남형우 김사용 김기수 윤병호 서상일 김동삼 등과 함께 대동청년당이라는 비밀결사 조직 단체를 만들어 국내외에서 지하 공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4월 13일에는 상해 임시정부 재무위원으로 피임되었으며, 4월 23일, 24일에 개최된 임시의정원 제2차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차장제의 폐지와 위원제 사용의 결의, 각 부 위원의 선정, 임시 의정원 성립 반포 등이 결의되었다. 또한, 같은 해 5월 6일에는 제4차 임시의정원의 의결에 따라 윤현진 조동진 등과 함께 경상도 지방의 구급의연금모집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제4차 의정원 회의에서는 구급의연금의 모집, 인두세의 징수, 내외에 공채모집 등의 안건이 결의되었던 것이다. 의연금의 모집 방법은 각 의원이 먼저 내고 다음에 국내에 모집위원을 파견하고, 그리고 상해에 오는 동포에게 받아서 임시정부의 자금 확보의 재원으로 삼아 항일 독립 활동을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이와 같은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홍권 비
김홍권 선생은 경상남도 하동 출신이다. 1909년에 안희제(安熙濟) 이원식(李元植) 남형우(南亨祐) 김사용(金思容) 김기수(金基洙) 윤병호(尹炳浩) 서상일(徐相日) 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이라는 비밀결사 조직 단체를 만들어 국내외에서 지하 공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4월 13일에는 상해 임시정부 재무위원으로 피임되었으며, 4월 23일, 24일에 개최된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제2차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차장제의 폐지와 위원제 사용의 결의, 각 부 위원의 선정, 임시 의정원 성립 반포(頒布) 등이 결의되었다. 또한, 같은 해 5월 6일에는 제4차 임시의정원의 의결에 따라 윤현진(尹顯振) 조동진(趙東珍) 등과 함께 경상도 지방의 구급의연금(救急義捐金)모집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제4차 의정원 회의에서는 구급의연금의 모집, 인두세의 징수, 내외에 공채모집 등의 안건이 결의되었던 것이다. 의연금의 모집 방법은 각 의원이 먼저 내고 다음에 국내에 모집위원을 파견하고, 그리고 상해에 오는 동포에게 받아서 임시정부의 자금 확보의 재원으로 삼아 항일 독립 활동을 전개하자는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이와 같은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대지 묘
경상북도 경주에 위치한 김대지의 묘이다.김대지(1891-1942)는 경남 밀양의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조국 광복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고, 비밀결사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하였으며, 황상규, 고인덕, 김원봉 등과 동화학원(東和學院)에서 2세 교육을 실시하였다고 한다. 1917년부터는 만주의 길림(吉林), 봉천(奉天) 지방을 왕래하면서 국권회복운동을 계획하다가 체포되어 1918년 5월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동삼성(東三省)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계획하였으며, 이어서 김동삼, 이시영, 조소앙, 이회영 등과 함께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0일, 초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의정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동년 11월에는 밀양군 조사원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 후 임시정부 교통 차장, 내무위원 등을 역임하였으며, 1921년 11월에는 북경(北京)에서 임시정부와 별개로 조직된 조선공화정부(朝鮮共和政府)에 참여하여 이상용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그는 내무총장에 임명되어 소위 삼남파(三南派)에 의한 정부를 경영하기로 하였다. 1920년에는 김원봉의 의열단(義烈團) 조직을 지원했으며, 곽재기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및 일제 요인 사살 계획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1925년까지 의열단장 김원봉의 자문에 응하여 무장 항일 투쟁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8년에는 다시 만주로 들어가 길림성(吉林省) 영고탑(寧古塔)에서 의료업에 종사하면서 지하활동을 계속하다가 빈강성(濱江省) 파언현(巴彦縣)에서 순국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