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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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138 건
김인전 추모비
김인전(1876-1923)은 1920년 2월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피선되었으며, 특히 재무예산위원으로 일했다. 같은해 4월에는 임시의정원 정무조사특별위원(군사)으로도 활약하며, 장기적 독립전쟁을 위한 방법, 군사교육 실시, 직접적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전열 가다듬기 등을 안건으로 내세워 실천하도록 했다. 동시에 임시의정원의 부의장을 지내다가 1921년 5월에 사퇴하였다. 1921년 8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國務院) 학무차장과 이어 학무총장대리로 활약하였다. 그 뒤 다시 임시의정원 전원위원장(全院委員長)으로 선임되었고, 1922년 5월에는 제4대의정원의장에 선임되어 입법활동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계획, 실천하였다. 그 해 10월 김구(金九)·여운형(呂運亨) 등 16명과 함께 군인양성과 독립전쟁의 비용조달을 목적으로 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결성하였다. 그 후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으로 김구·이유필·김규식(金奎植)·이규홍(李圭洪)·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923년 5월 과로로 순국하니, 임시정부의 모든 요인들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슬픔을 같이하였으며, 상해 외국인묘지(b39)에 안장하였지만, 1993년에 서울현충원 안장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진수린 묘
진수린(1898-1930)은 충남 아산시 신창면 신달리 출신의 항일 독립운동가이며, 1922년경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로부터 군자금 모집을 위해 입국한 사촌 처남 최익수(崔益秀)의 임무를 도왔다. 자신이 근무하던 아산금융조합의 공금을 빼내어 최익수·이종락(李鍾洛)과 함께 중국 상해로 도항하였으며, 그 공금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헌납한 후 임시정부의 재산계 서기로 임명되어 광동(廣東)·무창(武昌)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였다. 1927년 11월 상해 한인독립청년회 등을 중심으로 북경, 광둥, 무창 등 중국 각지의 한인독립청년회 대표가 모여 각 청년회를 통합, 비밀결사체인 재중국본부 한인청년동맹을 창립할 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8년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무를 가지고 비밀리에 귀국하여 고향인 아산 신창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30년 8월 병을 얻어 가석방된 뒤, 1930년 9월에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규갑 묘
이규갑(1888-1970)의 이칭은 원서, 운호이며, 충남 아산 출신 일제강점기 대한청년단원,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6년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를 졸업하고, 1907년 충청남도 홍주 의병에서 운량관(運糧官)으로 활동하였으며, 1919년 2월에 평양지역 대표로 상경하여 3·1운동 준비에 참여하였다.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이 발표되자 그는 동년 3월 20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 13도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를 조직하고 평정관(評政官)에 선출되었다. 서울 독립단 본부특파원으로 1919년 4월 10일 상해에 도착한 이규갑은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에 선임되었으며, 4월 19일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재선되었다. 1919년 7월에는 의정원의 청원위원(請願委員)이 되었으며, 국채통칙(國債通則) 및 공채발행조례(公債發行條例)를 통과시키는 등 의정원 활동에 전념하였다. 또한 상해한인청년단(上海韓人靑年團)의 서무부장 겸 비서부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지속화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1929년 7월 20일에는 신간회 동경지회(東京支會) 집행위원장으로 피선되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한 운동에 앞장섰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동녕 집, 동상
이동녕선생 생가지는 2005년 12월 보수 및 정비가 완료되고, 생가 복원 사업이 이루어졌다. 우물, 이동녕 선생 좌상 등 구조물이 구성되었고, 생가에는 안방, 사랑채 등에 옛 가구 및 인물 모형이 전시되었다. 이동녕(1869 - 1940)은 천안 목천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석오(石吾), 자는 봉소(鳳所)이다. 북간도 용정에 이상설 정순만 등과 같이 서전의숙을 설립하고 청소년 교육에 힘 썼다. 1907년 귀국하여 안창호, 이회영, 김구, 이동휘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고 활약하였으며, 1910년 서간도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13년에는 남만에서 청년운동을 하다가 해삼위로 가서 이상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25년부터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국무위원 겸 주석을 역힘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후 반평생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이끌어 조국광복의 일념에 투쟁하던 그는 1940년 3월 13일 72세 때 사천성기강(四川省綦江)에서 과로로 영면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광복 후인 1948년 9월 22일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애국지사마을 표지석(목천면 동리)
애국지사 마을 표지석은 이동녕 선생이 나서 자란 마을임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천안 독립기념관에서 목천고등학교 언덕길을 올라서 국립중앙청소년수련원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있는 산방천 앞 동리교에 세워져있다. 이 마을에 위치한 석오 이동녕 선생의 생가지는 2015년 12월 천안시에서 복원한 곳으로 이동녕 선생은 1869년 10월 6일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리 79-2번지에서 의성군수를 역임한 교육자 이병옥의 장남으로 태어나 우리나라 최초의 항일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시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투신한 인물이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순구 추모비
이순구(1892-1950)는 충청남도 천안 사람으로, 1919년 3월 29일 홍일선, 김교선, 한동규, 이백하 등과 함께 4월 1일의 갈전면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거사일에 아우내 장터에서 조인원, 유관순 등이 주동한 독립만세시위에 합류하여 장터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만세시위에 참가하도록 권유하였다. 이날 오후 1시경이 장터에 모인 시위군중 3,000여 명 앞에서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시위대가 뒤따라 외쳤다. 가열된 시위 군중이 헌병주재소를 향하여 접근하자, 이에 놀란 일본 경찰이 주재소에서 기총을 난사하고, 또 천안에서 불러들인 일본 헌병과 수비대들도 평화적인 시위대열에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두르며 시위자를 탄압하니, 19명이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하였다. 이에 이순구는 김교선, 한동규, 이백하 등과 100여 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주재소로 달려가서, 쇠스랑으로 주재소 유치장 벽을 때려부수며 시위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9월 11일, 징역 2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세영 유허비
이세영(1870-1941)은 을미사변에 격분하여 1906년 민종식, 채광묵, 박창로 등과 홍주의병을 일으켰으나 일본군에게 패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종식(閔宗植)·채광묵(蔡光默) 등과 함께 의병봉기를 모의하였고, 1906년 의병장 민종식의 참모장으로 활약하였으나, 홍주성에서 패하여 붙잡혀 황주로 종신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같은 해 독립의군부 충청·전라·경상도 등 3도의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08년 4월 동생 이창영과 성명학교(誠明學校)를 세우고, 교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대한협회 은산지회(殷山支會)를 조직하였으며, 1913년 3월 독립의군부 함경·평안·황해도의 3도사령으로 활약하였고, 그해 6월 만주로 망명하고, 대종교에 입교하여 상교(尙敎)가 되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모부 차장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5월 신흥무관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리고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에 참여하여 군사부장, 10월에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군사위원장이 되었으며, 1930년에는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를 조직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정원택 공적비
정원택(1890 - 1971)은 1910년에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으며, 1912년 상해(上海)에서 신규식 등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하였다.1918년에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사절단의 자금을 간도(間島), 노령(露領)에서 인수하여 전달하였으며 1919년에는 대한독립의군부(義軍府)의 조직에 참여하여 서무를 담당하였다고 한다.1919년 4월에는 의군부의 기밀사(機密事)로 상해(上海)에 출장하여 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길림(吉林)의 상황을 보고하고 국내에서 새로 온 청년들에게 폭탄제조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19년 4월에 개최된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였다. 당시의 임시정부는 재정(財政)의 조달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그 동안은 각 지방에서 모여든 인사들 중에 자금을 가져오는 이도 있었고, 또 각기 가까운 계통을 통하여 자금이 들어오기도 하였지만 정부의 조직 또는 운영을 위하여 이를 솔선하여 공식적으로 희사하는 경향이 적었으며, 또 정부의 조직과 함께 5월에 개최된 제4차 의정원 회의에서는 구급의연금(救急義捐金)의 모집을 결정하고 각 도별로 구급 의연금 모집위원을 선출하였지만 그것이 당장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신규식(申圭植)·조소앙(趙素昻) 등 임정 요인들은 동년 5월초에 의정원 의원인 김덕진(金德鎭)과 함께 그를 국내로 밀파하여 서울의 정두화(鄭斗和)를 찾아 자금 조달을 원조 받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귀국 도중에 일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곽중규 집
곽중규의 부친 곽준희, 동생 곽중선 모두 독립유공자이다. 곽중규(1891 - 1950)은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옥천군 이원면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대전형무소에서 3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다. 1921년 9월 미국으로 가던 중 중국 상해에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1922년 3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비서로 취임하였다가 이어 비서장(秘書長)으로 승진하여 활동하였다. 1924년 인성학교(仁成學校)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교포 자녀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시키는데 힘썼다. 그 뒤 1925년 3월 18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어, 나창헌(羅昌憲)·최석순(崔錫淳)·강창제(姜昌濟) 등과 함께 임시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탄핵안(彈劾案)을 제출하고, 임시의정원에 보고하여 면직 처리케 하였다. 1926년 명성(明星)사진관을 개업하여 독립운동의 비밀연락장소로 제공하였고, 1929년엔 상해 프랑스 조계로 이사하여 성광(星光) 사진관을 개업, 독립운동을 위한 연락장소로 활동케 하였다. 이어서 1931년 9월부터 윤봉길(尹奉吉)을 사진관에 은신하게 하였으며, 동생 곽중선(郭重善)으로 하여금 윤봉길에게 상해의 지리와 풍습 등을 알려주고 장차 거사에 대비케 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도(忠淸道)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1932년 4월 윤봉길의 의거 후 중경(重慶)으로 전란(戰亂)을 피하여 이동하였다. 1933년 4월 상해로 돌아와 한족유일독립당촉성회(韓族唯一獨立黨促成會)의 간부로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또한 공산당(共産黨)과 제휴하여 강소성(江蘇省) 법남구지부(法南區支部)에 가입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붙잡혀 신의주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같은 해 12월 11일 신의주지방법원(新義州地方法院)에서 소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5년 5월 가출옥하여 천진(天津)에 있는 동생 곽중혁(郭重赫)의 집에 머물러 있다가 신변의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1938년 석가장(石家莊)으로 이주하여 계속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규식 기념공원
김규식(1881-1950)의 호는 우사(尤史)이고, 이명은 김중문(金仲文), 왕개석(王介石), 위이민(余一民)이다. 6세에 고아가 되었는데, 선교사 언더우드의 보살핌으로 성장하였으며, 미국에서 공부한 이후, 1904년부터 1913년까지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 YMCA학교 교사, 경신학교(儆新學校) 학감으로 있었고, 1910년부터 1912년까지는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역임하였다. 1918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약소민족대회 및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조선혁명당의 이름으로 항일전선을 구축하고, 파리에 조선공보국(朝鮮公報局)을 설치하여 공보국 회보를 발간하고, 이후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대표가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로 된 탄원서를 강화회의에 제출하고 「한국민족의 주장」 · 「한국의 독립과 평화」 등의 민족선언서를 작성, 배포하였다.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위원장, 학무총장 등에 선임되었으며, 1935년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여 그 주석이 되었고, 194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다. 1945년 8 · 15 이후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46년 2월 민주의원 부의장, 3월 미소공동위원회 한국 대표를 했고, 1947년 10월 민족자주연맹 의장이 되었다. 1948년 2월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수립안에 반대하고, 김구와 연합하여 그 해 2월 남북협상을 제안하였으며, 남북협상 5원칙을 제시하고, 4자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북한측의 제2차 남북협상 제의를 거절하고, 통일독립촉성회를 결성하여 그 이전의 5 · 10남한단독총선거에 ‘불반대 · 불참가’했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황학수 집
황학수(1877~1953)의 자는 필옥(弼玉), 호는 몽호(夢乎), 이명은 이국현(李國賢)이다. 1898년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참위(參尉)에 임관되었고, 이후 육군유년학교(陸軍幼年學校)의 교관이 되었다. 1907년 8월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자 동명학교(東明學校)를 설립하였고,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3·1운동 이후에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원 및 군무부 비서국장으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1920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참모장과 중앙집행위원 및 군사부장(軍事部長)을 역임하면서 무장독립투쟁에 헌신하였다. 1922년 통군부(統軍府)가 조직되자 군사부장을 역임하였으며, 여러 일이 있은 후, 1923년 통의부로 돌아와 군사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한국노병회, 1927년 신민부(新民府)에 참여하였으며, 1930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도 참여하고, 1932년 한국독립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에 참여하였으며 1938년 7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위원, 1939년에 임시의정원 의원에 재선되었다. 그 뒤 충칭[重慶]에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었으며 생계부장(生計部長)으로 활동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연병호 집
연병호(1894-1963)는 충청북도 괴산(현 증평) 사람으로, 1919년 4월에 서울에서 이병철과 협의하여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을 조직하였다. 이후 조용주, 안재홍, 김홍식, 김연우, 김태규, 이의경, 조소앙 등이 합류하여 역할을 맡았다. 그중 연병호는 조용주와 함께 외교원으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청년외교단은 임시정부 지원을 목적으로 창립된 최초의 단체로, 임시정부에 대하여 국내의 독립운동에 관한 정보를 통신하여 주는 것,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보내는 것, 그리고 선전활동을 통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19년 11월, 경상북도 도 경찰은 비밀결사 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애국부인회와 연계하여 서울에 본부, 각 지방에 지부를 두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때 연병호도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1920년 6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 다시 상해로 탈출한 그는 1921년 4월 한인대동(韓人大同)을 목적으로 조소앙과 함께 세계한인동맹회(世界韓人同盟會)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2년 7월에는 국민대표회의 개최 등으로 독립운동 단체들의 분규가 심해지자, 안창호, 김현구, 조소앙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수습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서로의 의견이 부합되지 않자, 조소앙, 김용철, 조완, 이기룡 등과 함께 탈퇴하였다. 1929년 말에는 안창호, 이동녕, 김구, 엄항섭, 이시영 등과 함께 중국국민당과 연계하여 조국광복운동의 통일을 기하기 위한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발기 조직하였으며, 1934년 2월에는 윤기섭과 함께 재남경(在南京) 한국혁명당 대표로서 재만(在滿) 한국독립당 대표 홍진, 홍면희, 김원식 등과 회합하고 독립 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양 단체를 통합하여 새로이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조직하였다. 1935년 1월 재남경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의 대표자 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집행위원이던 연병호는 정무(政務)위원회 주임으로 선출되어, 의열단(義烈團)을 다시 통합하여 1935년 7월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으로 발전 조직하였다. 그는 또한 1934년에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뽑혀 1935년 10월까지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이 무렵에 독립공론(獨立公論)을 발행하여 민족정신 고취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렇게 활동하던 그는 일제 앞잡이인 이갑녕(李甲寧)의 저격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총영사관의 경찰의 추적을 받아 1937년 1월 7일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된 그는 징역 8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0월에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