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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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138 건
해공로 표지석
해공 신익희(1894 - 1956) 선생은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1919년 김시학, 윤치호, 이상재, 이승훈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고,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 지사들과 연락하다가, 4월 10일에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의원으로 하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국호, 관제,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과 함께 임시의정원의 의원이 되어 법무차장으로 임명되었고, 나중에는 법무총장, 외무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 6월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연구위원회를 설치, 선생은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3년 4월부터는 새로이 대한민국 잠행관제(暫行官制)가 실시됨과 함께 정부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가 새로 설치되어 조소앙, 엄항섭, 유림 등과 함께 선전 계획 수립, 선전 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임시정부의 초창기부터 시작하여 내무차관, 내무총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끈질기게 항일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 광복 후에는 민주당 최고위원, 민의원으로 당선되어 국회의장을 역임한 분이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되었다.
김규식 고향 표지석
우사 김규식(1881-1950)은 일제강점기 파리강화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의 탄원서를 제출한 독립운동가, 정치인, 학자, 종교인이다. 1911년 일본의 교회 탄압이 시작되자,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도착한 그는 조선혁명당의 이름으로 항일전선을 구축하고, 파리에 조선공보국(朝鮮公報局)을 설치하여 그 해 4월 10일 공보국 회보를 발간하는 한편, 젊은 층을 흡수하여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그 대표가 되었다. 이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 명의로 된 탄원서를 강화회의에 제출하고 「한국민족의 주장」 · 「한국의 독립과 평화」 등의 민족선언서를 작성하고 배포하였다.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위원장, 학무총장 등에 선임되었으며, 1921년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여 상설기구를 창설하고, 1927년에 그 의장직을 맡으면서 기관지 『동방민족(東方民族)』을 창간하였다. 1935년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여 그 주석이 되었고, 194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냈다. 1945년 8 · 15광복이 되자 11월 23일 환국한 그는 그 해 12월 27일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문을 국민에게 발표하고 즉각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46년 2월 민주의원 부의장, 3월 미소공동위원회 한국 대표, 5월에 좌우합작 준비작업을 추진하고, 그 해 6월부터 7월까지 ‘미군정 좌우합작위원회’ 예비회담에 참가하였고, 12월 입법의원 의장, 1947년 10월 민족자주연맹 의장이 되었다. 1948년 1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서울 도착을 계기로 더욱 자기의 정치노선에 정열을 쏟아, 남북협상의 정치활동을 펼쳤다. 한편, 교육가와 학자로서 여러 학교에서 강단생활을 하였으며, 1950년에 6 · 25전쟁이 일어나면서 납북되어, 그 해 12월 10일 만포진 근처에서 일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이광 가족묘소
이광(1879 - 1966)은 충북 청주 사람으로 1970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였다. 만주 지방에 민주 정부와 군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만주로 가서 독립기지 설치 및 군관 양성의 사업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였다. 1912년에는 북경에서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중국 대학에서 학업을 마친 후, 1919년 2월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 대표 39명 중 1인으로 참가하였고,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어 상해 임시정부 설립에 공헌하였다. 북경과 남경에서 대한독립당주비회(大韓獨立黨籌備會)와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성암 이광의 묘는 전주이씨 가족묘지 내에 안장되어 있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양우조, 최선화 묘
양우조(1897 - 1964)는 평안남도 강서 사람으로 평양에서 성장하였으며 미국과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로, 상해의 흥사단(興士團)에서 활약 및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 창립,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을 비롯한 여러 단체에 소속되어 활약하였고 임시정부에서 재무부 부원으로서 선전위원 겸임 및 예산결산위원장 등 다양한 직책을 역임했다. 한국광복군 정령(正領)으로 정훈처 훈련과장의 직을 수행하다가, 광복 후 1946년에 귀국하였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 최선화(1911 - 2003)는 인천 출신으로 애국지사 양우조의 부인이며, 1931년 이화여전(梨花女專)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36년 상해(上海)로 건너가 간호대학을 다니다 퇴학 후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 무렵 임시정부 재무 차장이던 애국지사 양우조(楊宇朝)를 만나 그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으며, 이것이 후에 두 사람이 결혼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독립당이 창립되자 가입하여 임시정부를 적극 뒷바라지하였으며, 한국혁명여성동맹(韓國革命女性同盟),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 등에 참여하여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신익희 추모비
해공 신익희(1894 - 1956) 선생은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으로, 1919년 김시학, 윤치호, 이상재, 이승훈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고,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 지사들과 연락하다가, 4월 10일에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의원으로 하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국호, 관제,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과 함께 임시의정원의 의원이 되어 법무차장으로 임명되었고, 나중에는 법무총장, 외무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 6월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연구위원회를 설치, 선생은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3년 4월부터는 새로이 대한민국 잠행관제(暫行官制)가 실시됨과 함께 정부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가 새로 설치되어 조소앙, 엄항섭, 유림 등과 함께 선전 계획 수립, 선전 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임시정부의 초창기부터 시작하여 내무차관, 내무총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끈질기게 항일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 광복 후에는 민주당 최고위원, 민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국회의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한 해공 신익희 선생의 추모비는 해공 신익희 선생 추모비 건립위원회에서 1985년에 건립하였다.
조소앙 집
조소앙(1887 - 1958)은 파주 교하에서 출생한 것으로 전해지며, 일본 유학 시절인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동료 유학생들과 함께 우에노 공원(上野公園)에서 을사오적 등 매국노를 규탄하는 대회를 개최하고 다양한 단체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에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하여 신규식, 박은식, 홍명희 등과 함께 박달학원에서 청년 혁명가를 양성하였다. 1917년에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국제사회당대회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의제로 제출하여 국제사회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19년 2월에 만주에서 독립운동가 39명 명의의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고, 4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1948년에 사회당을 창당하고, 1950년 총선에서 당선되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어 1958년에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김진우 묘
김진우(1883 - 1950)는 강원도 영월 사람으로, 병장기 대신 붓을 들어 대나무를 강직하게 그려낸 항일 서화가(書畵家)였다. 12세에 항일 의병장인 의암 유인석(柳麟錫)을 스승으로 모시고 서간도 전장을 누비며 수많은 의병 전쟁을 치렀고, 1919년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강원도 대표의원을 지냈으며, 1921년 2월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의 소집을 요구하는 문건 ‘아(我) 동포(同胞)에 고(告)함’을 발표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동년 9월 국내 활동을 위해 귀국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평양지방법원(平壤地方法院) 신의주지청(新義州支廳)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4년 8월에는 건국동맹(建國同盟)을 결성하는 등 독립활동을 하였으나 해방 후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안타깝게 사망했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안경근 묘
안경근(1896 - 1978)은 황해도 신천(信川) 출신으로, 1918년 사촌 형 안중근(安重根)이 독립투쟁의 근거지로 삼았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2월에는 상해로 이동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당시 임정 경무국장이었던 백범 김구(金九)를 보좌하면서 일제 관헌과 밀정 숙청에 전력투구하였다. 노주군관학교와 운남군관학교 교육과정을 마친 후, 만주에서 정의부(正義府) 군사부의 위원, 상해에서 황포군관학교의 구대장, 낙양군관학교의 교관으로 근무한 군사 전문가로서, 재상해한국독립당대회에 참석하여 밀정 이종홍의 교살과 애국단 조직에 참여하였고, 한국독립군특무대의 대원으로도 활약하며 1930년대 후반부터는 김구의 그림자 역할을 했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여운형 집
몽양 여운형(1886~1947)은 경기도 양평 출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다.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흥화학교(興化學校)와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독립운동가ㆍ언론가ㆍ정치가. 호는 몽양(夢陽). 대한민국 임시 정부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조선중앙일보사 초대 사장을 지냈다. 광복 후에는 건국 준비 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좌우익의 합작을 추진하다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엄항섭 집
엄항섭(1898 - 1962)은 보성법률상업 전문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1919년 9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부 참사가 되었으며, 1924년 4월에 상해한인청년동맹회를 조직하고 재정부장을 수행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26년 12월에는 임시의정원 헌법 기초위원으로 선임되어 1917년 4월에 제정 공포된 대한민국 임시약헌을 수립하는 데 일조하였고, 1936년 11월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을 거쳐, 1941년 11월에는 외무 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944년 5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의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었고, 김구의 판공비서로 활동하였으며, 광복 후 1945년 11월 23일에 귀국하여 김구와 함께 활동하다가 6.25 당시 1950년 9월 납북되었으며 1962년 7월 30일에 사망하였다. 1989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조성환 집 터
조성환(1875 - 1948)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과 군무부장 등을 역임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을 거쳐 1919년 4월에는 노령지역 대표위원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과 군무부 대표위원이 되었다. 1919년 8월 7일 만주에서 대한군정부를 조직하고, 12월 북로군정서로 개편하여 군사부장에 취임하고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였으며, 1931년에 임시의정원 경기도 위원, 1934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피선되었다. 1936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군무총장을 거쳐, 1937년에 한국 광복 전선 결성에 참가하였으며, 1939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되었고, 11월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장으로 중국 시안(西安)에 파견되어 한국광복군 창설에 기여하였다. 현재 보통리고택으로 지정되어 있는 이곳은 조성환의 부친인 조병희가 독립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재산과 함께 매각하였다고 한다.
김병조 추모비
김병조(1877 - 1948)는 평북 정주군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목회자이자 독립운동가로 1919년 3월 1일 항일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서명하고 3월 1일부터 평북 일원을 순행하며 각처에 격문을 보내고 궐기를 독려하다 3월 25일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3년 6월 만주로 옮겨 항일운동과 교육사업 등 15년간 활동하다 1933년 귀국하여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해방 후 반탁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1946년 12월 24일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 중 1950년 9월경 순국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며, 동시에 한국교회 순교자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