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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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138 건
김일두 추모비
김일두(1891 - 1967)의 자는 동수, 호는 추산이며, 일제강점기 대한유생독립단 단장, 대한민국임시정부 통신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1907년 원주 민긍호(閔肯鎬)의 의진에 가담하여 강원도·충청북도·경상북도에서 일본군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 1910년 일본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가산을 정리하여 태화상회(泰華商會)로부터 400여 개의 폭탄을 구입하여 경찰서 등을 폭파하려다가 실패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신원으로 국내에 밀파되어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이듬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5월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26년 전라북도 김제에서 다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에 대통령표창, 1980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재환의 묘
이재환(1889 - 1951)은 일제강점기 광복회, 주비단에 가담하여 군자금 모금활동 등을 받은 독립운동가이다. 충청남도 공주에서 살다가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1915년 만주 길림성(吉林省)에서 주진수(朱鎭守)·우이견(禹利見) 등이 국권의 회복과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한 광복회(光復會)에 가입하였고, 1917년 국내에 들어와 독립군자금모집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우이견·안종운(安鍾雲)·소진형(蘇鎭亨)·권영만(權寧萬) 등과 상해임시정부에 보낼 독립운동자금의 모집을 결의하고, 불응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내용의 취지문을 작성하여 각지의 부호들에게 우송하였다. 이에 자금을 거두어 소진형으로 하여금 임시정부 집금원(集金員) 김규일(金圭一)에게 전달하였다. 1920년 임시정부의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심영택(沈永澤)·안종운·장응규(張應奎) 등이 서울에서 조직한 주비단(籌備團)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같은해 12월 강경에서 일본경찰에게 붙잡혀 1921년 4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82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일두 기적비
김일두(1891 - 1967)의 자는 동수, 호는 추산이며, 일제강점기 대한유생독립단 단장, 대한민국임시정부 통신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1907년 원주 민긍호(閔肯鎬)의 의진에 가담하여 강원도·충청북도·경상북도에서 일본군과 싸워 큰 공을 세웠다. 1910년 일본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가산을 정리하여 태화상회(泰華商會)로부터 400여 개의 폭탄을 구입하여 경찰서 등을 폭파하려다가 실패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통신원으로 국내에 밀파되어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이듬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5월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26년 전라북도 김제에서 다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에 대통령표창, 1980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인전 기념비(서문교회)
김인전(1876 - 1923)은 일제강점기 임시의정원 전원위원장, 제4대 의정원의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충남 서산군 한산 출신으로 1914년에 평양장로교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본 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일제가 한국내의 반일 세력을 제거하고 식민통치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무단정치를 하던 시기인 1914-1919년에 본 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20년 2월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 피선되었으며, 특히 재무예산위원으로 재정문제 타결에 솜씨를 보였다. 그 해 4월에는 임시의정원 정무조사특별위원(군사)으로도 활약하였고, 동시에 임시의정원의 부의장을 지내다가 1921년 5월에 사퇴하였다. 1921년 8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원(國務院) 학무차장과 이어 학무총장대리로 활약하였다. 그 뒤 다시 임시의정원 전원위원장(全院委員長)으로 선임되었고, 1922년 5월에는 제4대의정원의장에 선임되어 입법활동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계획, 실천하였다. 그 해 10월 김구(金九)·여운형(呂運亨) 등 16명과 함께 군인양성과 독립전쟁의 비용조달을 목적으로 한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향후 10년 동안 1만여 명의 노병(勞兵)을 양성하여 독립전쟁 요원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웠으며, 100만원 이상의 군자금을 적립하여 역시 전쟁수행에 충당할 목표하에 동지들을 규합, 독려하여 이 운동을 대대적으로 펴나갔다. 또한, 인재를 육성할 계획하에 중국 각지의 군사강습소·병공국(兵工局)·학생단(學生團) 등에 파견하여 전문적인 훈련과 강습을 받게 하였다. 그 뒤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으로 김구·이유필·김규식(金奎植)·이규홍(李圭洪)·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나용균 집
나용균(1895 - 1984)은 전라북도 읍성 사람이다. 어려서는 향리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종로에 정착하였다. 1918년경 일본 동경에 유학 중 윌슨 미국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발표와 제1차 세계대전 종결로 인한 약소국의 독립분위기에 따라 동지 백관수(김도연 등 7명과 같이 적지에서라도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자고 비밀회합을 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하여 일본 동경에서 한국인으로 유학하는 남녀학생 청년 등을 규합하고 독립선언문을 낭독, 대대적인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1919년 2월 8일 적지에서 2 8독립선언을 실현케 하였다. 즉 그는 2 8독립선언을 위한 준비작업으로 재정책임의 사업을 분담하였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귀국, 송진우김성수 최린 등 독립지사를 차례로 방문하고 협조를 당부하였다. 이 같은 학생들의 독립운동 계획에 자극되어 이들은 그들대로 3 1운동을 중앙중학교 중심으로 계획하게 된 것이다. 그는 2 8독립선언이 있은 뒤 주모자가 체포되고 막후 연루자도 미행을 당하는 등 신변에 위협을 느끼자 그해 4월경 상해로 망명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 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었고 법제위원과 정부조사 특별위원 및 정치분과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입법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 추진하였다. 1922년 1월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이동휘 여운형 김규식 등과 한국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동년 5월 10일에는 국민대표회의 주비위원에 선임되어 국민의 대결속과 독립운동을 위한 대동단결에 기여하였다. 광복 후에는 제헌국회의원, 보사부장관,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최영호 기적비
최영호(1890-1958)는 평북 의주 사람으로 이명은 최호(崔好), 최명우(崔明宇)이다. 1907년 한국군 부위(副尉)로 의주진위대 등에서 복무하였으며, 군대의 강제 해산 후 일진회(一進會) 타도에 앞장섰다.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의주에서 시위에 앞장섰다가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19년 8월 21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租界)주1에서 안창호(安昌浩)가 발의하고, 홍이관(洪利寬) · 이유필(李裕弼) · 조동호(趙東祜)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로서 『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1923년 임시정부 교통국 이륭양행(怡隆洋行)주2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만주 안동(安東)에 파견되어 활동하다가 1923년 5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이듬해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68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애국지사마을 표지석(세도면 청송리)
조중구(1880-1942)는 1910년 국권침탈 이후 1914년 서간도 합니하(西間島哈泥河)에서 동지들과 광제회(光濟會)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미국 등지에서 발간되는 신한민보(新韓民報)를 국내에 들여와 발행하다가 1915년 초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7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1920년에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1922년 4월까지 의정원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임시선전원에 임명되어 호북성(湖北省) 등지에 파견되어 선전활동을 했으며, 1922년부터는 중국군에 입대하여 무력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조중구 묘
조중구(1880-1942)는 1910년 국권침탈 이후 1914년 서간도 합니하(西間島哈泥河)에서 동지들과 광제회(光濟會)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미국 등지에서 발간되는 신한민보(新韓民報)를 국내에 들여와 발행하다가 1915년 초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7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1920년에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1922년 4월까지 의정원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임시선전원에 임명되어 호북성(湖北省) 등지에 파견되어 선전활동을 했으며, 1922년부터는 중국군에 입대하여 무력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원생 추모비
이원생 선생은 충청남도 서산(瑞山) 사람이다. 1908년 보성(普成)전문학교 강사로 근무하였으며, 1912년에는 경성신문사 이사 및 조선경제회 이사를 역임하였다고 한다.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여하고, 동년 4월에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조국광복운동에 참여하였다. 동년 5월에는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구급의연금 모집위원으로 선출되어 신 정(申檉)·오익표(吳翼杓) 등과 함께 충청도대표로 군자금모집에 전념하였다. 이에 그는 다시 국내에 파견되어 서정섭(徐廷燮)과 함께 충청도 지방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 중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1921년 2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인전 흉상
김인전 목사는 충청남도 서천에서 출생하였다. 1906년 가산을 정리하여 교육계몽운동의 일환으로 한영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14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전주 서문교회 제 2대 담임목사로 1914-1919년까지 사역하였다. 1914년 독립운동 비밀결사회인 송죽형제회를 조직하고 1919년 3.1만세운동의 전라북도 지도자로 만세운동에 관여하였으며, 1920년 인성학교 교장으로 교육현장에서 직접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에 뽑히고, 재무예산위원·정무조사특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비서국장 겸 임시공채관리국장에 임명되고, 1921년 안창호 등과 함께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조직하였다. 1922년 임시의정원 전원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제4대 의장에 뽑혔다. 같은 해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와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였다. 1923년 5월 과로로 순직하였다. 이후 상하이 만국공묘에 묻혔다가, 1993년 8월 유해가 환국하여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80년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갑수 집
김갑수(金甲洙)는 충남 서천(舒川) 사람이다. 1915년 월남 이상재(李商在)와 함께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남양(南陽)대학에 다니면서 여운형(呂運亨)·서병호(徐炳浩)·조동호(趙東祜)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여운형이 이끄는 전 중국대학 축구 대표선수로 선발되어 필리핀에 원정을 가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세계에 호소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주장하였다. 또한 상해의 재해외(在海外) 조선인유학생회를 주도하였다. 1918년 애국동지들을 규합하고자 국내에 진입하였으나 군산에서 일경에게 붙잡혀 고문을 받다가 한국인 간수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상해로 갔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의정원 의원으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이 당시 그는 임시정부 발행채권을 가지고 국내에 들어와 전북 임피(任陂) 등지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노력하였다. 그 후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선으로 독일 베를린에 유학 중 베를린 고려학우회(高麗學友會)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6년 귀국하여 이상재의 권유로 배재학교 교감으로 7개월간 근무하였으나, 일경의 탄압으로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건너가 동흥(東興)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1927년 다시 귀국한 그는 민족 자본의 육성을 위해 전북 완주 봉동에서 윤건중(尹建重)이 설립한 봉우산업조합에 참여하여 이사로 활동하다가 1938년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갑수 묘
김갑수(金甲洙)는 충남 서천(舒川) 사람이다. 1915년 월남 이상재(李商在)와 함께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남양(南陽)대학에 다니면서 여운형(呂運亨)·서병호(徐炳浩)·조동호(趙東祜)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여운형이 이끄는 전 중국대학 축구 대표선수로 선발되어 필리핀에 원정을 가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세계에 호소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주장하였다. 또한 상해의 재해외(在海外) 조선인유학생회를 주도하였다. 1918년 애국동지들을 규합하고자 국내에 진입하였으나 군산에서 일경에게 붙잡혀 고문을 받다가 한국인 간수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상해로 갔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의정원 의원으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이 당시 그는 임시정부 발행채권을 가지고 국내에 들어와 전북 임피(任陂) 등지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노력하였다. 그 후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선으로 독일 베를린에 유학 중 베를린 고려학우회(高麗學友會)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6년 귀국하여 이상재의 권유로 배재학교 교감으로 7개월간 근무하였으나, 일경의 탄압으로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건너가 동흥(東興)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1927년 다시 귀국한 그는 민족 자본의 육성을 위해 전북 완주 봉동에서 윤건중(尹建重)이 설립한 봉우산업조합에 참여하여 이사로 활동하다가 1938년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