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TOTAL. 251 건
권준 집
권준(1859 - 11959)은 일제강점기 때, 동양척식회사 투탄 의거, 동경 니주바시 투탄 의거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원명은 권중환(權重煥), 가명은 장수화(張樹華), 호는 백인(百忍) 또는 양무(揚武). 경상북도상주 출신이다. 경성공업전습소를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였다. 1920년 길림에서 의열단 창단에 참여하고, 1921년 북경에서 동지들과 의열단(義烈團)을 창단하고, 이후 의열단의 종로경찰서·총독부·동양척식회사에의 투탄사건과 동경 니쥬바시투탄의거[二重橋投彈義擧] 때 자금조달의 활동을 하다가 국내에서 잡혀 일시 옥고를 겪은 뒤 다시 상해로 망명하였다. 1924년 상해에서 열린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관인으로 참석, 손문(孫文)의 추천장을 받아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 들어가 군사학을 전공, 졸업 후에는 손문의 북벌전쟁에 참여하였다. 1932년난징[南京]에서 국민당의 원조를 받아 한국인 군사학교를 설립하여 간부를 양성하였다. 1937년 조선의용대 비서장으로서 항일무한방위전(抗日武漢防衛戰)에 참가하였다. 1942년 조선의용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휘하의 광복군에 합류할 때 임시정부에 들어가 1944년에 내무부차장이 되었다. 광복 직후 무한지구 교포선무단장과 광복군 제5지대장에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1946년 12월 귀국하였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육군대령으로 특채되어 제106여단장·초대 수도경비사령관·103사단장·서부지구경비사령관 등을 지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안해용 추념비
안해용(1873 - 1951)은 경북 성주(星州) 사람이다. 1913년 만주 통화현(通化縣) 강산두도구(崗山頭道溝)로 망명하였다가 1917년 유하현(柳河縣) 제2구 다화쇠(多花釗)로 이주하였다. 1920년 12월(음) 광복군사령부 참리부장 조병준(趙秉準)을 만나 동사령부에 입대하였으며, 곧이어 경상남북도 특파원으로 임명받고 배일사상이 강렬한 장정의 모집에 노력하였다. 1921년 7월(음)에는 이덕생(李德生)·이수건(李壽健) 등 2명을 도만시켰으며 안동(安東)읍내 기독교교회당에서 장로 김 모(金某)를 설득, 일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또한 1922년 10월 6일(음)에는 상주읍에 있는 교회당에서 목사 김동필(金東弼)에게 독립군 모집권유를 하기도 하였다. 동년 12월 4일 본적지에서 체포되어 압송 도중에는 성주읍내 및 왜관도선장 등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쳐 독립투사의 기개를 과시하였으며, 1923년 1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태희 기념비
이태희(1869 - 1919)는 경상북도 성주(星州) 사람이다.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을 이용하여 이기정(李基定) 등이 주동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날의 독만세운동은 이기정·성대식(成大湜)·송수근(宋壽根)·송우근(宋祐根)·장석영(張錫英)·송훈익(宋勳翼)·김희규(金熙奎)·송준필(宋浚弼)·이봉희(李鳳熙)·송회근(宋晦根)·송문근(宋文根)·송인집(宋寅輯)·송규선(宋圭善)·송천흠(宋千欽)을 중심으로 한 유림과 유진성(兪鎭成)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도들이 연합하여 전개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1시경, 성주 장터에서 시위군중과 함께 대대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해산을 명령하였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날의 독립만세시위는 밤 11시경까지 계속되었는데, 시위군중이 성주경찰서를 습격한다는 소문에 긴장하여 경계를 강화하고 있던 일본 경찰이 시위군중에 대한 횡포가 심해지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투석으로 이에 맞섰다. 그러나 겁을 먹은 일본경찰의 야만적인 발포로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벌이던 그는, 결국 현장에서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승희 묘
이승희(1847-1916)의 자는 계도, 호는 강재, 대계, 한계이며, 대한제국기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선 유학자이자 항일운동가이다. 20세 전후부터 평생을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서 흥선대원군에게 시국대책문을 올려 당시의 정국을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무분별한 개국(開國)에 대해서는 척사소를 올려 성리학적 전통사회의 질서를 옹호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곽종석(郭鍾錫) 등 문인과 함께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각국 공사관에 전달하였다. 그 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참수하고 조약을 파기하라는 상소를 올려 대구감옥소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1907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일제의 침략을 폭로하는 서한을 보내고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유인석(柳麟錫)·이상설(李相卨)·김학만(金學滿)·장지연(張志淵) 등을 만나 국외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이상설 등과 함께 소만국경에 있는 길림성(吉林省) 봉밀산(蜂密山) 밑 황무지를 사들여 한인(韓人)을 집단 이주시켜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여, 청소년을 교육하고 민중계도와 독립정신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4년 요동으로 가서 한인공교회(韓人孔敎會)를 창립하고, 북경 등의 유교성적지(儒敎聖跡地)를 순례하면서 유교의 진흥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한편, 동삼성(東三省)총독 등 중국고관들과 접촉하여 독립운동에 대한 원조를 청하였다. 그리고 위안스카이[袁世凱]와 손문(孫文)에게 서한을 보내어 한중 양국의 친선결속을 호소하였다. 유고로는 『한계유고』가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승희 집
이승희(1847-1916)의 자는 계도, 호는 강재, 대계, 한계이며, 대한제국기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선 유학자이자 항일운동가이다. 20세 전후부터 평생을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서 흥선대원군에게 시국대책문을 올려 당시의 정국을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무분별한 개국(開國)에 대해서는 척사소를 올려 성리학적 전통사회의 질서를 옹호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곽종석(郭鍾錫) 등 문인과 함께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각국 공사관에 전달하였다. 그 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을사오적을 참수하고 조약을 파기하라는 상소를 올려 대구감옥소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1907년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자 일제의 침략을 폭로하는 서한을 보내고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유인석(柳麟錫)·이상설(李相卨)·김학만(金學滿)·장지연(張志淵) 등을 만나 국외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 이상설 등과 함께 소만국경에 있는 길림성(吉林省) 봉밀산(蜂密山) 밑 황무지를 사들여 한인(韓人)을 집단 이주시켜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여, 청소년을 교육하고 민중계도와 독립정신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4년 요동으로 가서 한인공교회(韓人孔敎會)를 창립하고, 북경 등의 유교성적지(儒敎聖跡地)를 순례하면서 유교의 진흥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한편, 동삼성(東三省)총독 등 중국고관들과 접촉하여 독립운동에 대한 원조를 청하였다. 그리고 위안스카이[袁世凱]와 손문(孫文)에게 서한을 보내어 한중 양국의 친선결속을 호소하였다. 유고로는 『한계유고』가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김성 묘
권기일(1886-1920)의 본명은 권혁린이며, 일제강점기 때, 서로군정서 외무담당과 어사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2년 만주 봉천성(奉天省)으로 망명하여 이시영(李始榮)·김좌진(金佐鎭) 등 항일지도자들과 접촉하였다. 1919년 3월 부민단(扶民團)·자신계(自新契)·교육회(敎育會)를 통합, 한족회(韓族會)가 조직되자 구정(區正)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19년 11월 한족회가 독립군의 양성과 항일독립전쟁의 수행을 위하여 군정부(軍政府)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확대, 개편되자 이에 적극 참여하여 외무담당·어사부장(御史部長)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5월에는 서로군정서 군사훈련학교의 비밀서류를 상해로 옮기기도 하였으나, 같은 해 7월 일본군의 급습을 받아 항전하다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각각 추서되었다.
권기일 순국기념비
권기일(1886-1920)의 본명은 권혁린이며, 일제강점기 때, 서로군정서 외무담당과 어사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2년 만주 봉천성(奉天省)으로 망명하여 이시영(李始榮)·김좌진(金佐鎭) 등 항일지도자들과 접촉하였다. 1919년 3월 부민단(扶民團)·자신계(自新契)·교육회(敎育會)를 통합, 한족회(韓族會)가 조직되자 구정(區正)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19년 11월 한족회가 독립군의 양성과 항일독립전쟁의 수행을 위하여 군정부(軍政府)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확대, 개편되자 이에 적극 참여하여 외무담당·어사부장(御史部長)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5월에는 서로군정서 군사훈련학교의 비밀서류를 상해로 옮기기도 하였으나, 같은 해 7월 일본군의 급습을 받아 항전하다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각각 추서되었다.
강인수 묘
강인수(1869 - 1932)의 호는 백서이며, 일제강점기 때, 김좌진의 고문, 참모, 신민부의 검사원 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 강원도관찰부의 주사로 등용되어서 근무하다가 1899년에 사직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상경하여 동지들을 규합, 1907년 6월 동우회를 결성하여 항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특사사건 이후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좌진(金佐鎭)과 항상 행동을 같이하면서 청산리전투에도 비전투원으로 참전하여 물자보급 및 교포의 선무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신민부(新民府)가 결성되자 김좌진의 고문 겸 참모로 활동하였으며, 신민부의 검사원(檢査院)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0년 김좌진이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하자 그로부터 심화병(心火病)에 걸려 고생하다가 1932년에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강역고(疆域考)』·『한말년통사(韓末年痛史)』·『자서전』 등이 있다.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강인수 집
강인수(1869 - 1932)의 호는 백서이며, 일제강점기 때, 김좌진의 고문, 참모, 신민부의 검사원 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 강원도관찰부의 주사로 등용되어서 근무하다가 1899년에 사직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상경하여 동지들을 규합, 1907년 6월 동우회를 결성하여 항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특사사건 이후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좌진(金佐鎭)과 항상 행동을 같이하면서 청산리전투에도 비전투원으로 참전하여 물자보급 및 교포의 선무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신민부(新民府)가 결성되자 김좌진의 고문 겸 참모로 활동하였으며, 신민부의 검사원(檢査院)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0년 김좌진이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하자 그로부터 심화병(心火病)에 걸려 고생하다가 1932년에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강역고(疆域考)』·『한말년통사(韓末年痛史)』·『자서전』 등이 있다.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원식 집
김원식(1889 - 1940)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동북면군사연락위원, 길림전만선반제동맹대회 집행 위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하였다. 1920년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서로군정서 독판(督辦) 이상룡(李相龍)의 지시로 비밀리에 입국하여 전국 유지들과 연락,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1922년 서로군정서를 비롯하여 대한독립단·벽창의용대(碧昌義勇隊)·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평북독판부(平北督辦府)·보합단(普合團)·광한단(光韓團) 등 각 군단 대표들이 모여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로 통합하는데 협력하였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령에 따라 동북면군사연락위원으로 임명되어 북경에 상주하면서 60여 명의 학생들을 난징[南京] 등지로 유학시켰다. 1924년 이후 정의부(正義府)에 투신,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1927년에는 민족 단결과 농민들의 생활 개선을 목적으로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의 설립에 앞장섰다. 1928년 삼부통합운동(三府統合運動) 당시 정의부 대표로 활약하였으나, 뜻이 좌절되자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29년 상해로 가서 당시 국내에서 전개되고 있던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는 군중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이어 곧 상해한인청년동맹을 결성하였다. 1930년 길림전만선반제동맹대회(吉林全滿鮮反帝同盟大會)의 집행 위원에 피선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 뒤 동북면군사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일군에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뒤 다시 만주로 가서 1934년 2월경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대표로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 대표 윤기섭(尹琦燮) 등과 난징에서 회합하여 3월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결성, 활동하였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만식 집
김만식(1866 - 1933)의 자는 형일, 호는 근암이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김만식은 쓰러져가는 나라를 일으키기 위하여 1909년 석주 이상룡(李相龍)을 도와 대한협회 안동지회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10년에는 나라가 무너지자 친족인 김동삼(金東三)과 이상룡 등 안동 출신 인사들이 신민회(新民會)와 더불어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할 때 선발대로서 만주 지역을 왕래하였다. 김만식은 1910년 12월 김대락(金大洛)을 따라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을 뿐만 아니라, 1919년 4월 서로군정서 조직에 참여하여 활약하기도 했다. 그는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를 출입하며 활동하던 중, 1928년 압록강 청성진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김만식은 이때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고생하다가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33년 9월 세상을 떠났다.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규식 집
김규식(1880 - 1945)은 1907년에 안동 진천에 설립된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김동삼(金東三)·이상룡(李相龍) 등 안동 지역 인사들이 신민회(新民會)와 더불어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계획을 추진함에 따라, 1910년 12월 24일 백부(伯父) 김대락(金大洛)을 따라 서간도 삼원포로 망명하였다. 삼원포에 정착한 그는 경학사(耕學社)·부민단(扶民團) 등에 가담하여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노력하였다. 1919년 3월 김규식은 부민단을 한족회(韓族會)로 확대 개편할 때 학무부장으로 선임되어 만주 이주 한인들의 생활 안정에 기여하였다. 또 같은 해 4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조직되자 여기에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그는 정의부(正義府)에 참여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며, 한때 심양에서 동아여관(東亞旅館)이란 여인숙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의 연락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이후 오상현 안가촌으로 이주하여 중국 관내와 러시아 지역 동포와 연락하며 활동하다가, 1944년 8월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