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TOTAL. 251 건
이우식 묘
이우식(1891~1966)은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남저(南樗)이며, 일본에 건너가 동경 쇼쿠영어학교와 도요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구여순(具汝淳)·최정학(崔正學) 등 동지들과 모의하고 의령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주동한 다음 상해로 망명하였다. 1920년 귀국하여 안희제(安熙濟)·김효석(金孝錫) 등과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를 설립, 경영하면서 비밀리에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였다. 1926년 서울에서 시대일보사(時代日報社), 1927년 중외일보사(中外日報社)를 설립, 사장으로 일하면서 민족의식고취에 노력하였다. 1929년 10월 조선어연구회의 조선어사전편찬회에 가입하여 재정을 지원하였다. 1935년부터는 이인(李仁)·김양수(金良洙)·장현식(張鉉植) 등과 조선어사전편찬의 촉진을 위한 비밀후원회를 조직하여 거액의 재정지원을 하였다. 1942년 1월 이극로(李克魯)·이윤재(李允宰) 등과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조선양사원(朝鮮養士院)을 조직하려다 실패하였다.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을 받고, 1945년 1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의 선고를 받아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2년 2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에는 조선어학회의 재정이사로 선임되었다.1963년에 한글공로상을 받았고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우식 시혜비
이우식(1891~1966)은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 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호는 남저(南樗)이며, 일본에 건너가 동경 쇼쿠영어학교와 도요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구여순(具汝淳)·최정학(崔正學) 등 동지들과 모의하고 의령읍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주동한 다음 상해로 망명하였다. 1920년 귀국하여 안희제(安熙濟)·김효석(金孝錫) 등과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白山貿易株式會社)를 설립, 경영하면서 비밀리에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였다. 1926년 서울에서 시대일보사(時代日報社), 1927년 중외일보사(中外日報社)를 설립, 사장으로 일하면서 민족의식고취에 노력하였다. 1929년 10월 조선어연구회의 조선어사전편찬회에 가입하여 재정을 지원하였다. 1935년부터는 이인(李仁)·김양수(金良洙)·장현식(張鉉植) 등과 조선어사전편찬의 촉진을 위한 비밀후원회를 조직하여 거액의 재정지원을 하였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잔혹한 고문을 받고, 1945년 1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의 선고를 받아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2년 2개월의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에는 조선어학회의 재정이사로 선임되었다.1963년에 한글공로상을 받았고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장두관 묘
장두관(1899~1958)의 이명으로는 장두남이 있다. 1919년 고향인 진주에서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동년 6월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듬해인 1920년에는 청산리독립전쟁에 참가하여 일본군을 격퇴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이후에도 독립군과 행동을 같이하였다고 하나 기록은 발견되지 않으며, 1924년에는 군자금 모집차 국내에 들어와서 진주(晋州)금융조합에 근무하는 박춘성(朴春星)으로 하여금 조합돈을 군자금으로 제공토록 하여 만주로 가져가던 도중 서울에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0년 3월에는 신간회(新幹會) 중앙위원 겸 진주지회 위원장으로 일하였다고 한다. 광복후에는 국군에 입대하여 1954년 대령으로 예편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명시 집
김명시(1907~1949)는 일제강점기 상해한인청년동맹 부인부 책임, 중국공산당 한인지부 선전부 책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대 지휘관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27년 6월 공산대학을 중퇴하고 상하이로 와서 중국공산청년단 상해한인지부에 가입하고 조직부 겸 선전부의 책임과 지부 책임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 해 9월에는 상해한인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부인부(婦人部) 책임에 취임하였다. 1928년 6월에 타이완, 필리핀, 베트남, 인도 등 각국 식민지 민족과 중국인 운동가 300여명과 협의하여 동방피압박민족반제자동맹주비회를 조직하고 위원으로서 활동하였다. 1929년 10월경에는 홍남표와 함께 만주로 가서 한국인 당원들을 중국공산당에 가입시켰다. 재만조선인반일본제국주의대동맹을 조직, 집행위원이 되었으며『반일전선』을 제작하였다. 1930년 5월 30일 자정에 300여명의 한인 무장대가 하얼빈 시내의 기차역과 경찰서, 일본영사관을 공격해 큰 타격을 주었다. 김명시는 홍남표와 함께 상하이로 돌아와 중국공산당 한인지부로 전속되어 선전부 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제국주의 타도와 한국 독립을 목적으로 상해한인반제동맹을 조직하였다. 1932년 3월에 인천에 거처를 마련하고 각종 전단과 함께 등사하여 비밀리에 배포하였고 인천지역 공장의 여성노동자들을 교육하였다. 그러나 몇 달 후 조선공산당 재건 조직운동이 발각되어 1932년 5월 신의주에서 체포,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1933년 12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언도받고 1939년 신의주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하였다. 1939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편한 이후 텐진과 베이징 등 일본 점령 지구에 파견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때 김명시는 ‘여장군’ ‘백마 탄 여장군’으로 불렸다. 1945년 12월 22일에 개최된 조선부녀총동맹 결성대회에 참가하여 국내외 여성운동의 실상을 알리고 조선부녀총동맹의 선전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7년 6월 전라도에서 발생한 우익테러사건과 관련해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조사단원의 일원으로 활약했으며 민주여성동맹 대표로 미군정청을 방문하여 미군정 사령관 하지(John Reed Hodge) 중장에게 반탁시위항의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2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상조 순교기념비
이상조(1913-1945)는 경남 통영(統營) 사람이다. 1938년 일본 동경의 입교(入敎)대학 재학중 원용오(元容五) 등과 10수회에 걸쳐 만나 항일사상 고취 방안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졸업 후 귀국하여 독립자금 모집 및 학교를 건설하여 교원을 양성, 독립운동의 기반을 조성할 계획을 세웠다. 1942년 3월 입교대학 졸업 후에는 동경의 회사에 취직하여 교포 회사원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등 지하운동을 계속하였다. 1943년 4월 귀국하여 그의 형이 경영하는 동방흥약사에 근무하면서도 이러한 지하활동을 계속하다가 1944년 1월 부산에 출장 중, 화가산(和家山) 경찰 형사대에 붙잡혀 일본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결국 같은 해 3월 26일 화가산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모진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1945년 9월 20일에 순국하였다. 그의 유해는 광복후 1946년 5월 윤봉길·백정기·이봉창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 되었으며, 동년 6월 2일 부산의 영도(影島)교회에서 추도식을 갖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조무준 사적비
조무준 선생은, 경남 하동(河東) 사람이다. 1941년 1월 일본 구주의학전문학교(九州醫學專門學校) 3학년에 재학하고 있을 때 일본으로 유학온 한국인 학생들에게 민족독립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동지규합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동년 9월에 열린 유학생의 신입생 환영회 및 송별회에서 일제의 패전은 필연적으로 조국독립은 이때 달성되어야 함을 각성시키고 한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역설하면서 활동하다가 1941년 10월 21일 일경에게 피체되어 1942년 5월 7일 기소되었다. 애국지사 조무준 사적비는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 67번지 함월정 인근에 위치한다. 이에 1942년 11월 9일 복강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태준 기념관
이태준(李泰俊) 선생은 경남 함안(咸安) 사람이다. 의사(醫師)로 몽고(蒙古)수도 고륜(庫倫)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던 중, 1918년 9월 김규식(金奎植)이 파리강화회의 참석에 필요한 여비를 마련키 위해 몽고로 오자 그에게 독립운동자금 2천 달러를 제공하여 활동을 도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태준 집
이태준 선생은 경남 함안(咸安) 사람이다. 의사(醫師)로 몽고(蒙古)수도 고륜(庫倫)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던 중, 1918년 9월 김규식(金奎植)이 파리강화회의 참석에 필요한 여비를 마련키 위해 몽고로 오자 그에게 독립운동자금 2천 달러를 제공하여 활동을 도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강홍렬 비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그는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돌아와 3·1독립운동의 조직적 확대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 후 중국 상해로 건너가 1923년 5월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대회(國民代表大會)에 보천교(普天敎)의 대표자격으로 참가하였다. 후에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의 권유로 의열단에 입단하여 보다 조직적이고 투쟁적인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1924년 국내에 잠입하여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경찰관서 등 일제의 주요 관서 폭파 및 고관 암살 등을 기도하던 중 일경에 의해 붙잡혔다. 그리하여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7호 위반죄가 적용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합천에서 삼일의숙(三一義塾)을 설립하여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광복이 될 때까지 임정의 경남내무부장(慶南內務部長)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종철 공적비
김종철(1888 - 1941)은 3.1독립운동 이후 의용단에 가입했고 경남 일대에서 활동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붙잡혔지만, 일본인 순사를 사살하고 만주로 탈출한 뒤 의열단에 입단하여 1928년까지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90년 정부에서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박열 생가, 추모비, 박열 의사 기념관
박열(1902 - 1974)은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여 천황과 황실요인 폭살을 계획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함양(咸陽). 초명은 박준식(朴準植) 또는 박혁(朴爀). 경상북도 문경 출신이다. 함창보통학교(咸昌普通學校)를 졸업한 뒤 1917년 경성제2고등보통학교(京城第二高等普通學校)에 입학,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퇴학당하자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서 수학하였다. 이 무렵 일본의 사회운동가인 오스기[大杉榮]·사카이[堺利彦] 등과 접촉하며 사회주의운동에 투신하였다. 1921년 김판국(金判國)·김약수(金若水)·조봉암(曺奉岩)·서상일(徐相日) 등 20여 명과 함께 신인연맹(新人聯盟)과 흑양회(黑洋會)를 통합하여 흑도회(黑濤會)를 창설하여 사회주의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2년 김약수 등 공산주의계열과 분리, 무정부주의자들을 규합하여 풍뢰회(風雷會, 일명 黑友會)를 결성하였으며, 이 단체의 기관지로 『흑도(黑濤)』·『불령선인(不逞鮮人)』·『현대사회』 등을 발간하였다. 1923년 비밀결사인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였다. 9월로 예정된 일본 황태자 결혼식을 기하여 일본 천황을 비롯한 일본 황실요인을 일거에 폭살시키려고 자기의 애인인 가네코[金子文子]와 같이 거사계획을 추진하던 중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가 발생하고 불령사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붙잡혔다. 1926년 대역죄로 일본 대심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으나 곧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22년 2개월만에 석방되었다. 1946년 일본거류민단의 전신인 신조선건설동맹(新朝鮮建設同盟)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재일거류민단으로 개편되자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직후 귀국하여 장학사업에 종사하던 중 6·25 때 납북되었다. 저서로는 『신조선혁명론』이 있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천세헌 기념비
천세헌(1879 - 1945)은 일제강점기 대한인국민회 뉴욕지방총회장,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시카고지방지회 대표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상주 출신이다. 1903년 하와이로 이주해 사탕수수밭의 노동자와 상인으로 생계를 꾸렸다. 1910년 본토인 뉴욕으로 이주해 해외지역 한인의 통일연합기관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 뉴욕지회에 가입해 조국의 독립과 한인교포들의 민족교육 실시를 위해 노력하였다. 1914년에는 안창호(安昌浩)·송종익(宋鍾翊) 등이 조직한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고 활동하였다. 1917년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뉴욕지방총회장으로 선임되어 회관의 임대료를 출연하는 등 회의 운영을 위해 노력하였다. 1919년 4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 독립운동 후원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선전을 목적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韓人自由大會)를 개최하자, 이 대회에 참석해 임시정부의 승인과 지원, 외교사무소의 설치 등을 결의하였다. 1921년 8월 대한인국민회에서 그 해 11월 워싱턴에서 개최되는 5대열강회의에 맞춰 대한민족대표단을 조직하고, 국내 및 상해 임시정부과 연락해 ‘대한 인민의 건의서’를 작성·제출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이에 뉴욕에서 서재필 등과 함께 대한민족대표단 후원회를 조직하고 동포들로부터 특별의연금 220여 달러를 모금해 대표단의 외교선전 경비에 충당케 하였다. 1922년에는 대한민족대표단의 일원으로 중국 상해에 파견되어 동년 4월 임시정부의 개편을 위한 국민대표회의를 열 것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임시정부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안창호 등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고 각 단체들의 입장을 조정했으며, 임시정부를 새롭게 창조하려는 창조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천세헌은 임시정부의 개선이 어려워지자 1923년 미국으로 돌아와 음식점을 경영하며 가난한 한인들을 도와 ‘한인들의 은사’라고 불리워졌다. 1933년에는 시카고에서 한민족을 업신여기는 일본인 마쯔에[松江]를 처단해 민족정신을 고취하려고 하였다. 1939년 10월 로스앤젤레스의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소장파들이 중국 한구(漢口)에서 조직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후원하기 위해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美洲後援會)를 조직하였다. 그러자 1940년 7월 강영승(康永昇)과 함께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시카고지방지회를 설립하고 서기·대표로 활동하면서 중국 관내에서 전개되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40년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서재필의 지시를 받고 미국 군사정보부와 접촉해 미주 한인들의 대일참전 문제를 협의하였다. 이후에도 독립자금을 출연해 조국의 독립운동을 후원하다가 1945년 6월에 서거하였다.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