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TOTAL. 251 건
오광선 집 터
오광선(1896 - 1967)은 1896년 죽능리 어현에서 정철화 의병의 중군장으로 활약한 오인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5년 만주로 건너가 1918년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교관과 서로군정서 제1대대 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청산리대첩 후에는 대한독립군단에서 활동을 했으며 자유시 참변 후에는 이청천 장군과 함께 한국독립군으로 활약하였다. 김구의 주도하에 중국육군군관학교의 낙양분교(洛陽軍官學校) 한인특별반 교도관으로 역임했다. 1940년 1월 베이징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 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후 광복군 국내지대장으로 활동했다. 1967년 5월 작고하였다. 1962년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정현숙 집
정현숙(이명 정정산)(1900 - 1992)은 결혼 후 부군인 오광선을 따라 1919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오광선이 신흥무관학교와 한국독립군 등에서 대일 항전을 벌일 때 정현숙은 독립군 활동을 배후에서 도왔으며, 1936년 부군이 피체된 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요인 뒷바라지를 도맡아 했다. 한국여성동맹 맹원으로도 활동하며 오희영·희옥 두 딸을 광복군으로 길러낸 여성독립운동가의 전형을 보여준 정현숙은 오인수 의병장으로부터 시작된 「용인 3대 독립운동가문」 일원으로 만족과 향토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1995년 정부에서는 정현숙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고, 2020년 4월에는 오광선과 함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나운규 부조
춘사 나운규(1902 - 1937)는 함북 회령(會寧) 사람으로, 1919년 4월 초순 회령에서 3·1독립운동에 참가하였고, 이후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에 투신하였다. 1920년에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 항일전을 전개하였는데 4명의 동지와 함께 회청선(會淸線) 7호터널 폭파 및 전선절단 임무 등 항일전선의 대열에 적극 투신하였으나 1921년 1월 일경에게 체포되어 고향으로 압송되었으며, 1921년 3월 5일 소위 보안법 및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영화계로 진출하여 한국 영화예술 개척 및 「아리랑」 등 주로 민족적 성향이 강한 영화를 제작하여 일제하 항일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공헌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수흥 동상
이수흥(1905~1929)은 1905년 9월 11일 경기 이천에서 태어나 이천 공립보통학교 수학 후, 한때 입산하여 승려생활을 하다가 1923년 19세 때 만주로 망명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義府)에서 활동하였다. 1926년 5월 국내로 들어와 참의부 제2중대 특무정사 자격으로 황해도 평산을 거쳐 경성에 잠입한 후 동소문파출소에서 일제 경찰과 교전을 벌이고 독립군 자금 모집을 위해 안성 부호의 아들을 처단하였으며 이천 현방경찰주재소와 백사면사무소를 공격하였다. 일경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투쟁을 이어나갔으나 반역자의 밀고로 체포된 후, 경성지방법원으로부터 사형을 언도받고,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한 채 1929년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유택수 추모비
유택수는 경기도 이천(利川) 사람으로, 동생 유남수와 함께 참의부(參議府) 국내 특파원 이수흥(李壽興)을 도와 무장항일 활동을 하였다. 1926년 5월 이수흥이 일 요인암살 및 군자금 모집 등을 목적으로 국내에 들어오자, 동소문파출소 습격 2개월 후인 동년 9월 10일 이수흥을 도와 경기도 안성에서 부호 박승륙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하다가 박승륙이 불응하자 그의 아들 박태병 등을 사살하였다. 10월 20일에 이수흥이 이천의 현방리(玄方里) 주재소 등을 습격한 뒤에는 동생과 함께 그를 도피시켜 주었으며, 10월 25일에 그는 서울 수은동(授恩洞) 전당포를 습격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하다가 주인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6년 11월 마침내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수년간의 옥고 끝에 1928년 12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1929년 2월 2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유택수의 애국애족의 거룩한 혼을 영원히 기리고 계승하고자 1984년 11월에 추모비를 세웠으며 이수흥공원 내에 자리하고 있다.
문창숙 위령비
문창숙(1898~1928)은 황해도 신계(新溪) 사람으로, 1919년 신계에서 3·1독립운동에 참가 후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만주 통화현(通化縣)으로 망명, 동년 9월경 신흥무관학교 수료 후, 1923년 참의부(參議府) 중대부사(中隊副士)가 되어 소대장으로서 부하 17명을 이끌고 집안현(輯安縣)에서 밀정 홍종흡 사살 및 항일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이후 참의부 중대장으로서 국내에 진입하여 적과 수차 교전하였으며 군자금 모집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7년 음력 11월에는 평북 강계 지방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었으며, 이듬해 고등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동년 4월 23일 평양형무소에서 30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원심창 흉상
원심창(1906~1971)은 경기도 진위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무정부주의 사회실현운동과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고향에서 전개된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를 수용하여 항일운동을 벌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흑우회·흑풍회·흑우연맹·흑색공포단 등 주로 무정부주의 계열의 단체에서 활동하는 한편 의열 투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32년 중국 천진에 있는 일본영사관 등 주요 기관을 폭파할 것을 모의하였고, 항일선전문을 등사하여 상해의 한국 동포에게 배포하기도 하였다. 1933년 3월 17일에는 상해에서 주중 일본공사인 아리요시 처단을 추진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는데, 1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풀려났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원심창 의사를 추모사업의 일환으로 평택 성동국민학교 총동창회에서 성금을 모아 그의 모교인 성동초등학교 내에 1991년 12월 20일 원심창 의사 흉상을 건립하였다.
원심창 집
원심창(1906~1971)은 경기도 진위 출신으로, 일제강점기 무정부주의 사회실현운동과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고향에서 전개된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무정부주의를 수용하여 항일운동을 벌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흑우회·흑풍회·흑우연맹·흑색공포단 등 주로 무정부주의 계열의 단체에서 활동하는 한편 의열 투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32년 중국 천진에 있는 일본영사관 등 주요 기관을 폭파할 것을 모의하였고, 항일선전문을 등사하여 상해의 한국 동포에게 배포하기도 하였다. 1933년 3월 17일에는 상해에서 주중 일본공사인 아리요시 처단을 추진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는데, 12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풀려났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강지형 묘
강지형(1881~1931)은 경기도 포천 가산(加山) 사람으로, 1919년 3·1운동 이후 임시정부 및 국민대회에 관한 구체적 방안 토의 및 「국민대회(國民大會) 취지서(趣旨書)」 작성 시 13도 대표 25인 가운데 1인으로 참가하였다. 그 후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 중국 길림에서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여, 1920년 국내로 들어와 대한독립단 지단(支團) 조직 및 유인물 제작, 자금확보 등을 위한 활동, 독립군의 국내 진입 시 일제히 호응할 수 있도록 사전 준비를 하던 중 일경에게 탐지되어 체포되었다. 1921년 9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박인호 묘
박인호(미상~1924)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제2차 봉기에 참가하여 충남 일대에서 정부군·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1904년 진보회의 갑진개화운동 주도하면서 동학교도의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1908년 1월 18일 천도교 대도주(大道主)가 되어 천도교 조직을 활용하여 개화문명의 보급과 독립사상 고취를 위해 활동하였다. 1919년 2월 21일 3·1독립운동의 민족대표 손병희의 명으로 3·1독립운동 경비 지원 및 2월 28일에 천도교 이종일·이종린·윤익선 등과 함께 협의하여 〈조선독립신문〉을 천도교 경영 인쇄소 보성사(普成社)에서 몇만 매를 인쇄하여 3·1독립운동 때에 전국으로 배포케 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였으며, 3월 1일 천도교 대도주로서 3·1독립운동의 중앙지도체 49인 중 한 사람으로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를 받고 다음날 1년 8개월 만에 풀려났다. 이후 융희황제의 국장을 기회로 6·10만세운동을 준비할 때 이들과 연계하여 격문 10만여 매를 인쇄한 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독립단」이란 도장을 조각 날인하여 58개 지방도시에 배부하는 등 거사를 도왔다. 1936년 멸왜기도(滅倭祈禱)를 지시한 것이 발각되어 병석에서 심문을 받는 등 다년간 조국의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재윤 묘
이재윤(1849~1911)은 경기도 양주(楊州) 출신으로 대과급제(大科及第)하여 벼슬이 우승지(右承旨)에 이르렀으나, 일제의 침략적 야욕에 대처하기 위하여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을 전개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1905년 을사늑약(乙巳條約) 이후 스승 면암의 뒤를 따라 의병장이 되었다. 이후 중국에 원세개(袁世凱)에게 구원병을 요청하고, 비밀리에 중국 관헌들과 일제를 한반도에서 몰아낼 일을 협의하였으나, 한반도가 일제식민지가 되자, 1911년 7월 13일 목을 매고 자결 순국하였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옥영준 묘
옥영준(1892-1957)은 1906년 부친을 따라 만주로 건너갔으며, 1919년 전덕원(全德元)이 대한독립단원 수십명을 거느리고 국내에 들어와 활동할 때 함께하였다. 평북 용천군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후에는 다시 만주로 건너가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 (198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