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TOTAL. 251 건
임면수 구 묘
임면수(1874-1930)는 삼일학교 설립자 중 한 명으로 수원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고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경기도 수원(水原) 사람이다. 1910년 국권이 침탈되자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였으며, 1912년 2월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奉天省柳河縣三源堡)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데 경기도 대표로 참여하였다고 한다. 그는 경학사(耕學社)·부민단(扶民團) 등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여 개척사업과 신흥학교 설립에 기여하는 한편 군자금 조달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1년 2월 길림(吉林)에서 활동중 길림영사관 일경에게 체포되어 평양감옥으로 압송되었으며, 모진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석방되었으나 평생을 고생하다가 병사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재천, 이재현 추모상
안양 지역 출신의 항일 애국지사 우봉(牛峰) 이재천, 해평(海平) 이재현 형제 추모상이다. 우봉·해평 형제는 1913년에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김구 선생 밑에서 독립활동을 펼쳤으며, 이재천은 지난 1935년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고 인천으로 입국 중 일본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으로 옥사하였고, 동생인 이재현은 1940년 9월 광복군 창설과 함께 중국 상해와 홍콩 등에서 광복군으로 독립활동을 벌였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자유를 위하여 일생을 바친 항일 애국지사 이재천·이재현 형제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안양시 자유공원에 본 추모상이 건립되었다.
조용하 묘
조용하(1882 - 1937)는 상해임시정부 외무총장 조소앙의 형이며, 일제강점기 경학사(耕學社), 하와이 한국독립단(韓國獨立團), 한인협회(韓人協會) 등에 가담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자 외교관이다. 조용한은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였는데, 이에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른 뒤, 출옥 후 1928년 5월 다시 중국 상하이로 도항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 외교총장인 친형 조소앙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정화암 묘
정현섭(1896 - 1981)은 전북 김제(金堤) 사람으로, 본명은 정현섭(鄭賢燮). 자는 윤옥(允玉), 호는 화암(華岩)이다. 정화암(鄭華岩)이라고도 잘 알려져 있는데, ‘화암’은 중국에 건너가면서 부르게 된 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무정부주의자 단체인 흑색공포단, 상해해방연맹, 중한청년연합회 등을 결성하여 무력 항일 투쟁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이후 임시정부의 시책에 협조하여 임정을 지원하였다. 1940년부터 광복 때까지 광복군 현지 책임자로서 주중 미 공군에 미·영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를 확인, 보고하는 등 정보활동에 기여하였고, 광복 후 귀국해, 4·19의거 후 통일사회당 정치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8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하였다.
박장호 친필비 - 사군이충
박장호(1850 - 1922)는 1876년 의암 유인석 등과 병자수호조약 반대 상소를 올리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홍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관동의병대장으로 활약하였다. 1910년 나라가 강제 합병되자 만주로 망명하였고 1919년 3.1운동 후 만주에서 여러 독립운동 단체 대표 등 5백여 명이 결성한 대한독립단의 도총재로 선출되어 항일 독립투쟁에 전념하였다. 독립투쟁하던 선생은 1922년 4월 2일 일제가 파견한 밀정에 의해 이국땅에서 순국하였다. 화남 박장호의 서거 90주기를 맞아 2012년에 세워진 친필비 事君以忠(사군이충)과 함께, 주위에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 옥중 휘호비와 백범 김구 휘호비가 같이 서 있다. 事君以忠(사군이충)은 화남 박장호의 친필로, ‘임금을 섬기되 충성으로 섬겨라’하는 가르침을 나타낸 것이다. 1962년 정부에서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혁 독립운동기념비
김혁(1875 - 1939)은 1919년 3월, 용인 신갈지역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한 후 만주로 망명하였고, 그 후 신민부(新民府) 집행위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 교장 등을 역임하면서 김좌진 장군 등과 함께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1928년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언도받고 평양감옥을 거쳐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다 병환이 위독해 가출옥했으나 9년 여 동안의 모진 옥고의 여독을 견디지 못하고 순국, 현재 서울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 132에 안장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남정각 집
남정각(1897 - 1967)은 호는 오산(午山)이며 이명(異名)은 영득(寧得·英得)이다. 경기도 용인(龍仁)에서 출생하였다. 서울기독교청년회 공업과를 중퇴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기도 수원(水原)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1920년 3월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하여 중국청년회(中國靑年會) 어학과를 다니다 중퇴, 창춘[長春]·톈진[天津]·상하이[上海] 등지에서 독립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다 1922년 6월 항일 무력독립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행동대원으로 국내의 일제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서울에 있던 김한(金翰)과 폭탄반입을 협의하였으나 자금부족으로 구하지 못하고, 1923년 2월 권정필(權正弼)·유시태(柳時泰)·유병하(柳秉夏) 등과 자금 마련을 위해 3차례에 걸쳐 서울 내자동(內資洞)의 부호 이인희(李麟熙)에게 찾아가 군자금을 요구하다 잠복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24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8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한 후 1929년 톈진으로 건너가 톈진교민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광복이 되자 교포의 귀국을 위해 노력하였고, 귀국 후에는 고려동지회(高麗同志會)에 가입하여 건국사업을 위해 활동하였다. 1967년 1월 29일 병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남정각 유허비
오산 남정각(1897 - 1967)의 생가 터이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수원 등지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이듬해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해 장춘·텐진 등지를 순력하였다. 장춘에서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난 뒤 1922년 6월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의열단에서는 국내의 일제기관 파괴와 요인을 암살하고자, 서울에 있던 김한과 김원봉 사이를 오가면서 폭탄의 수입준비를 진행하던 중 김한이 검거되어 폭탄을 구하지 못하였다. 그해 텐진으로 가 독립운동비용을 보충하기 위해서 동지 권정필·유시대·유병하와 협의한 뒤 권총을 휴대 서울 이인희 집에 찾아갔다가 잠복한 경찰에 붙잡혔다. 출감 후 다시 텐진으로 망명하여 텐진교민회를 조직,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정철수 묘
정철수(1924 - 1989)는 고려말기의 충신 정몽주의 대종손으로, 보성전문학교 3학년 재학 중 학도병으로 강제 징병되어 중국 산동성 지난에 배치되었지만, 동료 두 명과 함께 탈출에 성공했다.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투항한 뒤, 항일투쟁 근거지인 태항산으로 가 조선의용군에 참여하였다. 이 때 이름을 고철로 고친 후, 조선 의용군 등에서 항일 무력 투쟁을 펼쳤다. 해방 이후 지린에서 조선중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취임하는 등 조선동포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그 후 1983년 한국방송공사(KBS)의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통해 고국에서 노모가 애타게 찾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1985년에 아들을 데리고 영구 귀국하였다. 사후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하희옥 묘
하희옥(1890 - 1978)은 1914년부터 1945년까지 미주 대한인국민회 아크론지방회, 뉴욕지방회, 시카고지방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14년 8월 샌프란시스코지방회(桑港地方會) 회원, 1917년 9월 대한인국민회 은행채 보상 발기자로 활동하고, 1918년 10월 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新韓民報)』 식자기계 청장을 위해 동맹자를 모집하였으며, 1919년 1월 15일 오하이오주 아크론 지방회 설립 발기인 및 구제원, 1921년 뉴욕지방회 서기로 활동하였다. 1924년 12월 복설(復設)된 시카고지방회의 재무·부회장 등으로 1945년까지 활동하며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2015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삼악학교 터
삼악학교 터는 여준이 인재 양성을 위해 고향에 설립한 삼악학교가 있던 곳이다. 삼악학교는 여준에 의해 1908년 9월 원삼면 능촌리에 세워졌다. 여준은 가족과 형이 살고 있는 능촌리를 방문하여 외가측 친척인 오태선, 오용근 등과 학교 설립을 협의하였다. 설립준비과정에서 학교 건물이 없어 난관에 부딪혔으나, 오항선이 자기 집을 기부하면서 삼악학교를 건설하게 되었다. 삼악은 쌍령산·구봉산·문수산에 둘러싸인 곳에 세워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여준(1862 - 1932)의 본명은 여조현(呂祖鉉)으로 롱징(龍井) 서전서숙에서 교육활동을 하였다. 신민회에 가입하면서 이승훈과 함께 1907년 12월 오산학교 설립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후 상동청년학원에 잠시 파견되었는데, 이 시기 자신의 고향에서도 인재를 양성하고자 삼악학교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한국광복군에서 활약했던 오광선은 이 학교를 졸업한 후 여준의 추천으로 상동청년학원에 입학하여 장지영에게 교육을 받았다. 구국모험단·흥사단 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최초의 모스크바 비행학교 유학생이었던 김공집 역시 삼악학교에서 1913년부터 1년간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오희옥 집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출신 오희옥(비공개 - 생존)의 집안은 3대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독립운동 명문가」로, 할아버지는 오인수 의병장, 아버지는 오광선 광복군 장군, 어머니 정현숙과 언니 오희영은 독립운동가이다. 1927년 만주에서 태어난 오희옥은 언니 오희영과 함께 1934년 중국 류저우(柳州)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해 첩보 수집을 하고 일본군 내 한국인 사병을 탈출시키는 등 광복군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