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TOTAL. 251 건
신팔균 집
신팔균(1882-1924)은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902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대한제국 육군 정위로서 강계진위대에서 활약하다가, 같은 해 7월 군대가 강제해산되자 낙향하여 후진 육성에 진력하였다. 1909년에는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안희제, 이원식, 윤세복, 서상일, 김동삼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만주로 망명, 해외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9년에는 동삼성의 지도자로서 여준, 정안립, 박성태, 박찬익, 정신, 김동삼, 손일민, 김좌진, 서일 등 38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오광선, 이범석, 김경천 등과 함께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2년에는 의군부, 광복단, 광한단, 흥업단 등 8개 단체가 합류하여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에는 사령관에 취임하여 양세봉, 문학빈, 심용준, 박응백 등과 함께 무장 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마적 300여 명이 통의부사령부 소재지인 왕청문 이도구를 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1924년 7월 부하들을 이도구 높은 산에 매복시킨 후 그들과 결전을 행하였으나 탄환이 떨어져 전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신팔균 사적비
신팔균(1882-1924)은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902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대한제국 육군 정위로서 강계진위대에서 활약하다가, 같은 해 7월 군대가 강제해산되자 낙향하여 후진 육성에 진력하였다. 1909년에는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안희제, 이원식, 윤세복, 서상일, 김동삼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만주로 망명, 해외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9년에는 동삼성의 지도자로서 여준, 정안립, 박성태, 박찬익, 정신, 김동삼, 손일민, 김좌진, 서일 등 38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오광선, 이범석, 김경천 등과 함께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2년에는 의군부, 광복단, 광한단, 흥업단 등 8개 단체가 합류하여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에는 사령관에 취임하여 양세봉, 문학빈, 심용준, 박응백 등과 함께 무장 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마적 300여 명이 통의부사령부 소재지인 왕청문 이도구를 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1924년 7월 부하들을 이도구 높은 산에 매복시킨 후 그들과 결전을 행하였으나 탄환이 떨어져 전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조명희 집
조명희(1894-1938)는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호는 포석(砲石) 또는 조생이다.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뒤, 1919년 가을경 일본 도쿄 연교학관에 들어갔고, 일본 유학생 모임이 동우회에서 활동했다. 1921년 여름방학 때는 문화선전을 목적으로 연극단을 조직하여 국내의 각 지역을 순회하며 연설가로 활동했다. 12월 17일 조명희는 황석우 등이 소속된 의권단(義拳團)에 가입했는데, 의권단은 사회주의자와 연계를 맺어 재경친일자(在京親日者)와 밀정(密偵) 등을 징계할 것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조명희는 희곡 작가, 연극운동가, 시인, 소설가로 작품 활동을 하며, 1925년 여름에는 무산계급 예술가들이 중심이 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몸담았다. 1927년 7월에는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낙동강」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했는데, 일제의 수탈과 착취로 고향과 농토를 빼앗기고 도시근로자로 흘러가거나 북간도 등으로 유랑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는 한국 농촌의 궁핍한 생활상을 날카롭게 묘사하였다.1928년 6월 5일 자신의 창작집 『낙동강(洛東江)』과 이기영의 작품집 『민촌(民村)』이 출판되자, 한국 최초로 창작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또한 7월 27일에는 서울 공평동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회관에서, 본 동맹의 경성지회 설립대회 준비위원회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항일과 카프 활동을 계속하자 일제의 그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고 생활상의 곤란도 심하였다. 결국 1928년 8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한인학교에서 교원이 되었다. 1928년 10월에는 연해주에서 「짓밟힌 고려」라는 산문시를 발표했다. 「짓밟힌 고려」는 일제 식민지하에 한국인의 궁핍과 민족의 비참상을 묘사했다. 항일투쟁과 계급투쟁을 통해서 계급해방의식을 형상화했다. 1929년에는 연해주 푸칠로프카(육성촌) 농업화훼학교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가르쳤다. 한글 신문 『선봉』과 잡지 『노력자의 조국』 등을 통해서 문학작품을 발표하였다. 1935년 7월에 연해주 스꼬또브 구역 뽀두쓰까 초급 중등학교가 10년제의 중등학교로 승격되자, 조명희는 이 학교의 교원으로 초빙되었다. 조명희는 연해주 지역 학교에서 교원으로 한인 2세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한편, 소비에트 문사 동맹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1936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인 작가들의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었을 때, 매월 6일에 이들을 전문적으로 지도하였다. 9월 27일 하바로프스크에서도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자 이곳에서도 문인들을 지도했다. 스탈린 대 탄압이 시작되면서 1937년 9월 18일 일본 첩자의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1938년 4월 15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결국 조명희는 1938년 5월 11일에 하바로프스크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그러나 이후 1956년 7월 20일 극동주 군법재판소에 의해 복권되었다. 조명희는 스탈린의 정치적 탄압으로 사형을 당하였지만, 연해주에서 문학을 통해 항일정신을 고취했다. 수많은 문학인을 길러낸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불렸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조명희 문학비
조명희(1894-1938)는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호는 포석(砲石) 또는 조생이다.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뒤, 1919년 가을경 일본 도쿄 연교학관에 들어갔고, 일본 유학생 모임이 동우회에서 활동했다. 1921년 여름방학 때는 문화선전을 목적으로 연극단을 조직하여 국내의 각 지역을 순회하며 연설가로 활동했다. 12월 17일 조명희는 황석우(黃錫禹) 등이 소속된 의권단(義拳團)에 가입했는데, 의권단은 사회주의자와 연계를 맺어 재경친일자(在京親日者)와 밀정(密偵) 등을 징계할 것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조명희는 희곡 작가, 연극운동가, 시인, 소설가로 작품 활동을 하며, 1925년 여름에는 무산계급 예술가들이 중심이 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몸담았다. 1927년 7월에는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낙동강」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했는데, 일제의 수탈과 착취로 고향과 농토를 빼앗기고 도시근로자로 흘러가거나 북간도 등으로 유랑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는 한국 농촌의 궁핍한 생활상을 날카롭게 묘사하였다. 1928년 6월 5일 자신의 창작집 『낙동강(洛東江)』과 이기영의 작품집 『민촌(民村)』이 출판되자, 한국 최초로 창작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또한 7월 27일에는 서울 공평동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회관에서, 본 동맹의 경성지회 설립대회 준비위원회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항일과 카프 활동을 계속하자 일제의 그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고 생활상의 곤란도 심하였다. 결국 1928년 8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한인학교에서 교원이 되었다. 1928년 10월에는 연해주에서 「짓밟힌 고려」라는 산문시를 발표했다. 「짓밟힌 고려」는 일제 식민지하에 한국인의 궁핍과 민족의 비참상을 묘사했다. 항일투쟁과 계급투쟁을 통해서 계급해방의식을 형상화했다. 1929년에는 연해주 푸칠로프카(육성촌) 농업화훼학교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가르쳤다. 한글 신문 『선봉』과 잡지 『노력자의 조국』 등을 통해서 문학작품을 발표하였다. 1935년 7월에 연해주 스꼬또브 구역 뽀두쓰까 초급 중등학교가 10년제의 중등학교로 승격되자, 조명희는 이 학교의 교원으로 초빙되었다. 조명희는 연해주 지역 학교에서 교원으로 한인 2세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한편, 소비에트 문사 동맹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1936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인 작가들의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었을 때, 매월 6일에 이들을 전문적으로 지도하였다. 9월 27일 하바로프스크에서도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자 이곳에서도 문인들을 지도했다. 스탈린 대 탄압이 시작되면서 1937년 9월 18일 일본 첩자의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1938년 4월 15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결국 조명희는 1938년 5월 11일에 하바로프스크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그러나 이후 1956년 7월 20일 극동주 군법재판소에 의해 복권되었다. 조명희는 스탈린의 정치적 탄압으로 사형을 당하였지만, 연해주에서 문학을 통해 항일정신을 고취했다. 수많은 문학인을 길러낸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불렸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조명희 시비
조명희(1894-1938)는 충청북도 진천 사람으로, 호는 포석(砲石) 또는 조생이다.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뒤, 1919년 가을경 일본 도쿄 연교학관에 들어갔고, 일본 유학생 모임이 동우회에서 활동했다. 1921년 여름방학 때는 문화선전을 목적으로 연극단을 조직하여 국내의 각 지역을 순회하며 연설가로 활동했다. 12월 17일 조명희는 황석우(黃錫禹) 등이 소속된 의권단(義拳團)에 가입했는데, 의권단은 사회주의자와 연계를 맺어 재경친일자(在京親日者)와 밀정(密偵) 등을 징계할 것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조명희는 희곡 작가, 연극운동가, 시인, 소설가로 작품 활동을 하며, 1925년 여름에는 무산계급 예술가들이 중심이 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에 몸담았다. 1927년 7월에는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낙동강」이라는 단편소설을 발표했는데, 일제의 수탈과 착취로 고향과 농토를 빼앗기고 도시근로자로 흘러가거나 북간도 등으로 유랑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는 한국 농촌의 궁핍한 생활상을 날카롭게 묘사하였다. 1928년 6월 5일 자신의 창작집 『낙동강(洛東江)』과 이기영의 작품집 『민촌(民村)』이 출판되자, 한국 최초로 창작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또한 7월 27일에는 서울 공평동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회관에서, 본 동맹의 경성지회 설립대회 준비위원회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항일과 카프 활동을 계속하자 일제의 그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고 생활상의 곤란도 심하였다. 결국 1928년 8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한인학교에서 교원이 되었다. 1928년 10월에는 연해주에서 「짓밟힌 고려」라는 산문시를 발표했다. 「짓밟힌 고려」는 일제 식민지하에 한국인의 궁핍과 민족의 비참상을 묘사했다. 항일투쟁과 계급투쟁을 통해서 계급해방의식을 형상화했다. 1929년에는 연해주 푸칠로프카(육성촌) 농업화훼학교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가르쳤다. 한글 신문 『선봉』과 잡지 『노력자의 조국』 등을 통해서 문학작품을 발표하였다. 1935년 7월에 연해주 스꼬또브 구역 뽀두쓰까 초급 중등학교가 10년제의 중등학교로 승격되자, 조명희는 이 학교의 교원으로 초빙되었다. 조명희는 연해주 지역 학교에서 교원으로 한인 2세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한편, 소비에트 문사 동맹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1936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인 작가들의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었을 때, 매월 6일에 이들을 전문적으로 지도하였다. 9월 27일 하바로프스크에서도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자 이곳에서도 문인들을 지도했다. 스탈린 대 탄압이 시작되면서 1937년 9월 18일 일본 첩자의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1938년 4월 15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결국 조명희는 1938년 5월 11일에 하바로프스크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그러나 이후 1956년 7월 20일 극동주 군법재판소에 의해 복권되었다. 조명희는 스탈린의 정치적 탄압으로 사형을 당하였지만, 연해주에서 문학을 통해 항일정신을 고취했다. 수많은 문학인을 길러낸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불렸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신영호 집
충청북도 청주에 위치한 신영호의 고택이다. 1919년 당시 경성중앙학교(京城中央學校) 재학생의 신분으로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귀향하였다. 3월 9일에는 청주농업학교 기숙사(淸州農業學校)로 가서 학생들에게 서울의 독립만세운동 상황을 알렸다. 그리고 청주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자고 제의하여, 독립선언문과 경고문 등을 제작하고 인쇄하는 등 거사 준비를 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그해 4월 9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 형을 선고받고 항고했으나 5월 5일 대구복심법원과 5월 31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마을 표지석(덕촌리)
덕촌리 독립운동가 마을은 독립운동가 정순만 선생의 고향 마을인 덕촌리에 선생의 독립운동사와 충북·청주의 독립운동사를 기억할 수 있도록 조성된 마을이다. 대통령 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 위원회 주관 기념사업 공모에 선정되어 청주시의 1호 마을 아카이브 사업으로 조성되었다. 독립운동가 마을 표지석, 태극기 거리, 애국의 길, 정순만 선생 기념관, 3.1운동 만세 광장 등 다양한 콘텐츠로 꾸며져 있다. 정순만 선생은 상동청년회에서 을사조약 반대투쟁을 주도하다 실패하고 일제에 대한 실효성 있는 투쟁을 위해서는 국민의 애국사상을 고취시키는 것이 최선책이라 결의하고 고향 덕촌으로 낙향하였다. 이 때 하동 정씨 문중에게 발의하여 설립한 것이 덕신학교이다. 덕신학교는 농민을 대상으로 교육 계몽 및 생활에 필요한 기초 지식을 제공하기 위하여 설립되었으며 구한말 민족적 자각이 증대하고 근대 의식이 성장할 즈음에 경제력을 가진 지방 유지 및 선각자들은 민족교육에 참여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덕신학교
덕신학교는 청주 옥산면 덕촌리를 중심으로 당시 집성촌을 이루고 있던 하동 정씨 가문에서 독립협회와 상동청년회 간부로 활동하던 정순만 선생을 중심으로 1906년 5월 15일 설립한 학교이다. 초대 이사장은 초대 이사장 정재봉이었다. 개교 당시 당시 청주지역의 대표적인 사립학교 중 하나였으며 1909년 8월 정식 인가를 받았고 1911년에 제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하였다. 한편, 덕신학교는 2016년 독립운동가마을이 조성되면서 그 안에 복원된 형태의 건물로 세워졌다. 덕신학교에는 정순만 선생의 일대기와 청주 항일 독립운동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덕신학교 뒤편에는 조선시대 설립된 문절 영당이 있고, 문절 영당은 1769년에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워 좌익공신 3등으로 책록 되고 하원군에 봉해진 문절공 좌찬성 정수충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다. 영당 내부는 개방되지 않으며 외부에서만 둘러볼 수 있다. 또한 주민들이 만세 횃불 시위를 벌였던 응봉산이 뒷산에 있고 1km 길이의 애국의 길과 횃불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정순만 추모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 산13-1 독립운동가마을 표지석 맞은편에 애국지사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덕촌리 독립운동가마을 표지석 앞에는 덕신학교옆 재실 앞에 있던 안내판과 추가로 만든 것이 서 있었다. 이 비는 정순만 선생과, 선생의 아들이 되는 정양필 선생, 그리고 정양필 선생의 부인이자 정순만 선생의 며느리가 되는 이화숙 선생을 추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세 분 모두 건국훈장을 수훈한 유공자이며, 이에 따라 이 곳은 독립운동가 마을로써 추모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독립운동가 정순만, 정순만 선생은 충북 청원 사람으로 1873년 옥산면 덕촌리에서 출생했다. 국내외에서 온 생애를 대한민국독립운동에 바쳤고, 상동교회에서는 간부로서 을사늑약 결사반대 상소운동을 주도하였다. 귀향후 애국심을 고취하는 교육사업을 전개하며 집안 어른들을 설득 종재를 내어 덕신학교 설립을 발의 하였다. 1906년 국내에서 독립운동 한계를 절감 1906년 북간도로 망명 후 용정에서 이상설과 함께 최초의 신교육기관으로 민족운동의 요람이요 중국 조선족 교육사의 서막인 서전서숙을 설립 후 운영했다. 연해주(러시아 블라디보스코)로 옮겨 해조신문을 창간하였고 한인 사회 지도자로 활동하며 안중근 의사 의거 때에는 계획을 주도하였고, 안의사 구명 운동등 독립운동가로 격렬히 활약하였다. 정부는 선생의 업적을 기려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하동정씨 부사직공파 세천비
충북 청원군 옥산면 덕촌리는 한말 국권회복 운동과 만주 및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정순만 선생이 태어나신 곳이다.마을 입구에 있는 하동정씨 세천비와 충렬문, 정확한 위치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덕촌리 20-4다.정순만 선생은 충북 청원(淸原) 사람이다. 1896년 3월에 이승만(李承晩)·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 창립에 참여하였다.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도총무부장으로 활약하다가 이승만(李承晩)·유근(柳瑾)·나철(羅喆)·안창호(安昌浩)·남궁억(南宮檍)·양기탁(梁起鐸) 등 367명과 함께 붙잡혔다.1902년부터 1904년 사이에 이승만(李承晩)·박용만(朴容萬) 등과 삼만(三萬)으로 결의하여 의형제를 맺고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간도(間島) 용정(龍井)에서 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여준(呂準) 등과 함께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민족교육과 독립사상을 주입시켰다. 또한 독립군(獨立軍) 양성 등에 주력하였다. 1907년에는 안창호(安昌浩)·김구(金九)·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양기탁(梁起鐸)·이회영(李會榮)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또한 해아(海牙) 밀사의 여비 1만 8천원을 교포로부터 모금하여 전달하였다.1909년에는 러일전쟁(露日戰爭) 및 경술국치(庚戌國恥)를 전후하여 이범윤(李範允)·이상설(李相卨)·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박은식(朴殷植)·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노령(露領)에서 활약하였다. 1910년 연해주(沿海州) 지역에서 〈해조신문(海朝新聞)〉·〈대동공보(大東共報)〉 등을 발간하였다. 또한 13도 의군부(義軍府)·성명회(聲明會)·권업회(勸業會) 등을 창설하여 민족계몽 및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11년 6월 21일에 별세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홍승로 묘
홍승로는 일본 중앙대학에 재학중인 1920년에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東京朝鮮苦學生同友會)의 총무로 활동하면서 동회를 재일고학생의 통합적 조직체로 발전시키는데 주동적 역할을 담당했다. 동년 4월에 영친왕(英親王) 이 은(李垠)과 일본의 이본궁녀(梨本宮女)와의 성혼이 있게되자 이들 회원들은 이를 조국독립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결혼식장에 폭탄을 투척하여 결혼식을 저지하는 한편 식장에 참석하기로 된 조선총독을 비롯하여 일인고관을 처단하고 또 일제기관을 폭파하여 한국독립의 기세를 올리고자 했다. 따라서 이들은 거사에 앞서 폭탄을 제조하여 2차례에 걸쳐 폭탄의 성능을 시험해보면서 준비를 추진하였으나 사전에 이러한 계획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한편 동년 9월, 미의원단 일행이 동경에 체류할 때, 그는 동지 4명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미의원단 일행이 숙소인 제국호텔로 향하는 길목에서 기다리다가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그후, 그는 동우회란 이름으로 30여명 규모의 순회연극단을 조직하고 1921년 6월에 귀국하여 전국각지를 돌면서 연극을 통한 민중계몽에 앞장섰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