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TOTAL. 251 건
박용만 유적비
박용만(1881~1928)은 상동청년회, 만민공동회, 보안회 등에 적극 참여하면서 1905년 미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세 번이나 수감될 정도로 개혁과 구국에 대한 의지가 굳건했고 실천적이었다. 1915년을 전후하여 미·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하고 이때를 독립의 기회로 삼기 위해 사회적 조직체인 국민회를 〈정치적 조직〉, 즉 임시정부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對日 독립전쟁을 수행할 독립군 양성과 함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을 설립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군단의 세력을 국내와 중국, 러시아 지역으로까지 확대시키며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갔다. 아울러 임시정부가 탄생할 수 있도록 무형정부론을 앞서 주창하며 <신한민보(新韓民報)>, <신한국보(新韓國報)> 등의 주필을 맡아 우리 민족이 나갈 방향을 제시했다. 박용만의 자주독립정신의 높은 뜻을 길이 후세에게 전하기 위해 1991년 12월 30일 철원군에서 철원초등학교 교정 내에 유적비를 건립하였다.
박건병 집
박건병(1892~1932)은 강원도 철원(鐵原) 출신이고 본적은 강원도 김화이다. 1919년 8월 11일 철원군 동송읍 도피안사에서 대한독립애국단의 군단조직인 철원애국단을 창설하였고 애국단의 학무과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강원도 도단부 설치에 참여하였다. 10월 10일 철원 사요리 우시장에서 만세 시위가 전개될 때, 오세덕과 더불어 군중들에게 시위 참여를 권고하고, 태극기 게양과 인쇄물 배포 등을 주도하였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0년 1월 20일 상해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강원도 대표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1921년 4월 20일 북경 교외 삼패자(三牌子) 화원에서 개최된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에서 국민대표회 주비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21년 9월에는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에 참석하였다. 박건병은 1926년 10월 16일 상해에서 결성된 한국독립유일당 북경촉성회(韓國獨立唯一黨北京促成會)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1932년 1월 10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양옥 묘
최양옥(1893-1983)의 호는 추강이며, 일제강점기 대한독립군 공명단 단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7년 원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 진학 당시 3·1운동 만세시위에 참가하였으며 그뒤 신덕영(申德永)·노형규(盧衡奎) 등과 동지가 되어 전라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임시정부에 조달하는 등 활약하다가 1920년 11월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26년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안창남(安昌男)·김정련(金正連) 등과 함께 대한독립군 공명단(共鳴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피선되었다. 1927년에는 비행사 안창남·김정련 등과 함께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하기 위하여 비행학교(飛行學校) 설립을 계획하고 그에 필요한 기금모집과 공명단 지부를 서울에 설치할 목적으로 김정련·이선구(李善九)와 함께 1929년에 국내로 잠입하였다. 잠입 후 이들은 서울 교외 망우리(忘憂里) 근처에서 일제의 우편차를 습격하여 돈을 빼앗은 뒤 강원도 쪽으로 향하였으나 이를 추격한 일본경찰과 항전을 벌이다가 붙잡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서울형무소 서무과장, 인천형무소장 등을 역임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하였다.
최양옥 공적비
최양옥(1893-1983)의 호는 추강이며, 일제강점기 대한독립군 공명단 단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7년 원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 진학 당시 3·1운동 만세시위에 참가하였으며 그뒤 신덕영(申德永)·노형규(盧衡奎) 등과 동지가 되어 전라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임시정부에 조달하는 등 활약하다가 1920년 11월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26년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안창남(安昌男)·김정련(金正連) 등과 함께 대한독립군 공명단(共鳴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피선되었다. 1927년에는 비행사 안창남·김정련 등과 함께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하기 위하여 비행학교(飛行學校) 설립을 계획하고 그에 필요한 기금모집과 공명단 지부를 서울에 설치할 목적으로 김정련·이선구(李善九)와 함께 1929년에 국내로 잠입하였다. 잠입 후 이들은 서울 교외 망우리(忘憂里) 근처에서 일제의 우편차를 습격하여 돈을 빼앗은 뒤 강원도 쪽으로 향하였으나 이를 추격한 일본경찰과 항전을 벌이다가 붙잡혀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서울형무소 서무과장, 인천형무소장 등을 역임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하였다.
김찬 공적비
김찬(1884 - 미상)의 이명은 김용흘(金庸屹)·김남(金男)이 있다. 도만(渡滿) 경위는 자료의 한계 상 알기 어려우나 1919년 중반 서간도(西間島) 창바이현(長白縣) 17도구(道溝)에서 윤덕보(尹德甫)·이희삼(李熙三) 등과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을 설립하였다. 창바이현은 함경도와 마주한 국경 지방이다. 경술국치를 전후한 시기부터 많은 함경도지역 민족운동가들이 이곳으로 건너갔다. 나아가 1919년 만세운동을 거치면서 민족 의식이 고조되자 이들이 중심이 되어 군비단을 설립하였다. 설립 초기에는 참모장에 선임되었다. 1919년 11월 경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의해 조직이 재정비되자 총무장이 되었다. 단장은 이한평(李漢平)이었고, 그 아래 재무·경무·외교 등의 부서가 편제되었다. 이때 창바이현 8·13·15·18도구 등에 지단(支團)과 지부(支部)를 배치하고 16도구 신창동(新昌洞)에는 통신사무국을 설치했다. 이 같이 짜임새 있는 조직을 갖춘 군비단은 험난한 창바이현의 지리를 십분 이용해 활발한 항일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4월 경에는 경호대장이 되어 본부가 있는 창바이현 17도구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 10월부터 2만 명에 이르는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경신참변이 1921년 4월까지 이어졌다. 이들 일본군의 공격을 경계하기 위해 본부 경호 임무의 책임자가 되었던 것이다. 경신참변 이후 군비단은 일부 병력을 연해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 병력의 군무부장에 임명되어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이후의 활동상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규식 집
김규식(1882 - 1931)은 대한제국 시기에 시위대 장교 등으로 재직하다가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의병 투쟁에 합류, 철원 지역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르고 무기를 구입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기도 했으며, 1919년 12월 북로군정서가 조직되자 사단장으로 취임, 이후 교관 등으로 활동하며 청년 교육에 힘썼다. 1920년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고, 같은 해 대한독립군단이 편성되자 총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 1921년 자유시참변이 일어나자, 김규식은 부대를 재편성하면서 군사를 훈련하고 영농활동을 벌였다. 1925년 신민부, 1926년 고려혁명당 등에서 활동하고 장기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연길현에 학교를 설립하였고, 이후 1931년 3월 공산당원에게 죽임을 당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이석영 광장, 역사박물관 REMEMBER 1910
이석영 광장과 REMEMBER 1910은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석영 선생 6형제의 애국심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기억하는 역사 문화공간으로, 특히 전 재산을 바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석영의 독립정신을 알리기 위해 조성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이석영(1855-1934)은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 일대 토지 등 전 재산을 처분하여 마련한 40만 원(2021년 현재 가치 2조 원 이상)을 조국 독립을 위해 바쳤는데, 우리나라 무장 항일운동의 산실이자 광복군의 초석이 된 신흥무관학교 조성 및 운영에 사용됐다. 이석영 광장에는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석영 선생 6형제가 결의를 다지는 모습을 상징하는 표지석과 6개의 돌, 이석영 선생이 만주로 망명할 당시 건넌 압록강을 상징하는 바닥분수가 조성되어 있으며, 역사체험관으로 꾸며진 REMEMBER 1910 역사 전시관은 남양주 출신 독립운동가 102명의 이름이 벽돌에 새겨져 있는 독립의 계단을 비롯하여 역사 법정, 서대문 형무소, 뤼순(旅順) 감옥을 재현한 친일파 수감감옥 체험 공간과 이석영 6형제, 신흥무관학교 등을 다룬 전시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석영 선산
이석영(1855-1934)은 1855년(철종 6년) 이유승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서른 살이 되던 1885년에 영의정을 지낸 거물급 관료이자 한양 인근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자였던 친척 이유원의 양자(養子)로 입적되었다. 연로한 양부 이유원은 3년 뒤 세상을 떠났고, 양부의 재산은 대부분 이석영에게 상속되었다. 구한말 10대 부자, 한양 3대 부자로 꼽히던 이유원의 재산을 상속받은 이석영은 자연히 거부가 되었다. 1910년, 완전히 국권을 빼앗긴 뒤인 9월의 어느 날, 회의에서 여섯 형제는 전 재산을 처분해 일가 전체가 만주로 떠나기로 결의한다. 일제의 눈을 피해 헐값에 처분한 재산은 약 40만 원으로, 이 재산의 대부분은 이석영 선생이 소유하던 땅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석영은 많은 재산을 독립군 자금으로 내놨고 그 돈이 씨앗이 되어 서간도 삼원포에 경학사가 창립되고, 신흥무관학교(신흥강습소)가 설립됐으며,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와 동포들이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에게 1991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중건 기념비
김중건(金中建, 1889~1933)은 함남 영흥 사람으로 1908년 고향에서 연명(鍊明)학교를 설립하여 교육활동을 하였으며, 1913년 만주로 건너가 건원학교, 도전학교, 덕수학원, 쟈피구학원, 이도구학원, 팔포강학원 등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힘썼다. 1920년 11월에는 만주 안도현에서 대진단(大震團)이라는 독립군 부대를 조직하여 활약하였으며, 1928년 이후에는 만주 지역 동포사회에서 조선민사(朝鮮民社), 농우동맹(農友同盟), 진우회(震友會) 등을 조직하여 농촌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3년 3월, 그를 시기하던 공산주의자에 의해 피살되었다. 소래 김중건 기념 사업회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83년 10월 16일 이 비를 세웠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나운규 상
춘사 나운규(1902-1937)는 함북 회령(會寧) 사람으로, 1919년 4월 초순 회령에서 3·1독립운동에 참가하였고, 이후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에 투신하였다. 1920년에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는데 4명의 동지와 함께 회청선(會淸線) 7호 터널 폭파 및 전선 절단 임무 등 항일전선의 대열에 적극 투신하였으나 1921년 1월 일경에게 체포되어 고향으로 압송되었으며, 1921년 3월 5일 소위 보안법 및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영화계로 진출하여 한국 영화예술을 개척하였고, 「아리랑」 등 주로 민족적 성향이 강한 영화를 제작하여 일제히 항일 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공헌하였다. 문화체육부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에서 1995년 4월 20일 춘사 나운규 선생 흉상을 세웠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병욱 묘
이병욱(1897~1978)은 서울 출생으로, 1919년 3·1독립운동 후 만주로 망명하여 봉천(奉天)과 북경(北京), 상해(上海), 남북 만주의 동지들과의 연락 사무에 종사하였으며, 1920년 무기를 국내로 운반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1922년에 조직한 통의부(統義府)에 가담하여 활약하였으며, 1924년 국내로 진입하여 통의부(統義府) 지부를 설치하고, 각 지방의 부호에게 협박장을 보내어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재차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0년 형을 받고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출옥 후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1932년 10월, 재차 만주로 망명하여 지하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유일한 동상
유일한(1894-1971)은 1926년 ‘건강한 국민만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민족 기업 유한양행을 창립하고, 부천시에 근대적 제약공장과 유한대학을 설립하였다. 1971년 76세를 일기로 영면하면서 개인 재산 전부를 사회에 환원하였다. 평생을 참 기업인, 교육가, 독립운동가, 그리고 사회사업가로서 위대한 족적을 남긴 높은 뜻을 기리어, 2000년 3월 1일 부천을 빛낸 인물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상을 부천시에서 건립하였으며 부천중앙공원에 위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