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TOTAL. 251 건
박영희 공적비
박영희(1896-1930)의 이명은 박두희(朴斗熙), 박영섭(朴寧燮), 박장섭(朴章燮)이며, 만주로 망명 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의 학도단장을 맡았고, 1920년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대한독립군단, 신민부 조직에도 가입 및 참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백손 기념비
김백손(1893-1965)의 이명은 김백순(金伯順)이며, 3.1운동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김영진과 조병채 등이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비밀결사단체인 대한건국단을 조직하였는데, 김백손은 1920년 대한건국단에 합류하게 되었다.충남, 전남, 전북 지방의 부호들을 찾아다니며 군자금을 모집해 북로군정서 김좌진 사령관에게 많은 자금을 전달하였다. 1921년 일경에 붙잡혔고,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애국지사마을 표지석(장암면 북고리)
문경섭(1883-1941)과 문장섭(1896-1967)은 1920년 대한독립군정서에 가입하였고 고향인 부여에서 강철구, 김동진, 박길화, 김정제 등과 함께 독립군을 위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일경에 붙잡혔고, 1923년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강철구 추모비
강철구(1894-1943)의 이명은 해산(海山)이며, 1917년 대종교 교도로 만주로 가 북간도 천영학교 교사가 되어 민족교육에 힘썼다. 1920년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의 비서로 조력하였으며, 같은해 재무국장 윤정현의 명령으로 국내에 파견되어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이후 군자금 모집 운동을 확대시키기 위해 많은 동지들을 확보하였고, 부여에서 박창규, 박남규, 이기범에게 독립공채를 통한 군자금 마련을 지시했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1923년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만주에서 대종교 포교를 진력하였으며, 천영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임병직 기념관
임병직(1893-1976)은 1913년 이승만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오하이오대학 재학 중 한국학생평론을 창간하고 편집장이 되어 한국의 사정을 호소하였으며, 이승만이 하와이에 설립한 한인중앙학원, 한국기독학원 등의 육영사업을 지원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양민학살, 고문 등의 만행을 여론에 환기시키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승만의 비서로서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에서 활약하면서, 일황(日皇)에게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이승만의 친서를 일본공사관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이후 재미한족연합회, 한인국방경비대 등에서 활약했고, 1943년 구미위원부 무관으로 이승만을 도와 한미 외교교섭에 기여하였다. 광복 후에는 대통령 특사, 외무부장관, 유엔대사 등을 역임하며 건국에 이바지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6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임병직 추모비
임병직(1893-1976)은 1913년 이승만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오하이오대학 재학 중 한국학생평론을 창간하고 편집장이 되어 한국의 사정을 호소하였으며, 이승만이 하와이에 설립한 한인중앙학원, 한국기독학원 등의 육영사업을 지원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양민학살, 고문 등의 만행을 여론에 환기시키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승만의 비서로서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에서 활약하면서, 일황(日皇)에게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이승만의 친서를 일본공사관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이후 재미한족연합회, 한인국방경비대 등에서 활약했고, 1943년 구미위원부 무관으로 이승만을 도와 한미 외교교섭에 기여하였다. 광복 후에는 대통령 특사, 외무부장관, 유엔대사 등을 역임하며 건국에 이바지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6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애국지사마을 표지석(초촌면 응평리)
임병직(1893-1976)은 1913년 이승만의 추천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오하이오대학 재학 중 한국학생평론을 창간하고 편집장이 되어 한국의 사정을 호소하였으며, 이승만이 하와이에 설립한 한인중앙학원, 한국기독학원 등의 육영사업을 지원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양민학살, 고문 등의 만행을 여론에 환기시키고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승만의 비서로서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에서 활약하면서, 일황(日皇)에게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이승만의 친서를 일본공사관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이후 재미한족연합회, 한인국방경비대 등에서 활약했고, 1943년 구미위원부 무관으로 이승만을 도와 한미 외교교섭에 기여하였다. 광복 후에는 대통령 특사, 외무부장관, 유엔대사 등을 역임하며 건국에 이바지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6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용환 구 묘
김용환 선생은 충남 서산(瑞山) 사람이다. 1919년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김용환은 동 단에 가입하여 군자금 지원에 주력하였다. 즉 직물업에 종사하면서 종제(從弟)인 정두화(鄭斗和) 등으로부터 6천 6백여 원의 거금을 거두어 동 단의 활동자금으로 제공하였다. 동년 음력 6월에는 당시 중국 항주(杭州)에 거주하던 신규식(申圭植)에게 대동단의 외교사무를 위임토록 하라는 동단의 밀명을 받고 중국 항주로 건너갔으나 불행히 콜레라에 감염되어 항주의 절강병원(浙江病院)에서 치료를 받던 중 순국하였다. 김용환은 병상에 있어 공무에 지장이 있는 것을 두려워하여 국내의 본가에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리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항일운동을 전개하면서 객지에서 죽는 것이 오히려 영광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가 남긴 유묵(遺墨)으로는 그의 일기와 시국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인원 우국기념비
조인원(1875 - 1950)의 호는 야운이며,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3월 3일 고덕면 대천리 한내장 만세운동의 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5월 대한민국임시정부 파견원인 이영식(李英植)과 더불어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충청도지단을 조직했다. 조인원은 서무부장을 맡아 지단장 서병익(徐丙益), 부단장 김석주(金錫周) 등과 함께 독립운동 관련 문건을 배포하는데 주력했다. 1920년 12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열국이 승인해도 정치적 명령이 국내에서 떨치지 못하는 것은 일제 때문이니, 조선인은 세금을 납부하지 마라. 만약 이에 따르지 않으면 독립군이 국내로 들어올 때 후회할 것이다.”라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명의의 선전물을 예산군 삽교면 역촌리 등에 부착한 일로 체포된 조인원은 1921년 9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조인원은 출감 후 일제의 감시가 삼엄해지자 계몽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어 문맹 퇴치에 힘썼다. 1945년 광복이 되어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봉환할 때 동참하였으며, 말년에는 고향에서 살다가 1950년 12월 21일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신현상 묘
신현상(1905 - 1950)의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호는 일연(一鳶)이다. 호적상의 이름은 신현정(申鉉鼎)이다. 1929년 상해로 건너 가 상해 노동대학을 수료하고,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국내로 돌아왔다. 그는 고향인 예산에서 정미업을 하던 최석영(崔錫榮)과 협조하여 1930년 2월 호서은행(湖西銀行) 예산지점에서 위조 환증을 이용하여 5만 8천원을 인출하는 데 성공,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이에 그가 북경(北京)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다는 소식에 접한 독립투사들은 벅찬 희망에 부풀었고, 상해에서 활약하던 김 구(金九)는 정화암(鄭華岩)으로 하여금 북경으로 향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천진(天津) 일본영사관 경찰에 탐지되어 1930년 4월 30일에 체포되고 말았다. 본국으로 압송된 그는 1930년 12월 2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가 전달한 자금의 일부는 동지들의 무정부주의운동 자금으로 활용되어, 유자명(柳子明)·장도선(張道善)·정해리(鄭海理) 등은 1930년 4월 20일 상해 법계(法界)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의 결맹식을 거행하고 선언강령 규약을 발표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신현상 추모비
신현상(1905 - 1950)의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호는 일연(一鳶)이다. 호적상의 이름은 신현정(申鉉鼎)이다. 1929년 상해로 건너 가 상해 노동대학을 수료하고,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국내로 돌아왔다. 그는 고향인 예산에서 정미업을 하던 최석영(崔錫榮)과 협조하여 1930년 2월 호서은행(湖西銀行) 예산지점에서 위조 환증을 이용하여 5만 8천원을 인출하는 데 성공,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이에 그가 북경(北京)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다는 소식에 접한 독립투사들은 벅찬 희망에 부풀었고, 상해에서 활약하던 김 구(金九)는 정화암(鄭華岩)으로 하여금 북경으로 향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천진(天津) 일본영사관 경찰에 탐지되어 1930년 4월 30일에 체포되고 말았다. 본국으로 압송된 그는 1930년 12월 2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그가 전달한 자금의 일부는 동지들의 무정부주의운동 자금으로 활용되어, 유자명(柳子明)·장도선(張道善)·정해리(鄭海理) 등은 1930년 4월 20일 상해 법계(法界)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의 결맹식을 거행하고 선언강령 규약을 발표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태준 비
이태준(1883 - 1921)의 호는 대암이며, 경남 함안(咸安) 사람이다. 의사(醫師)로 몽고(蒙古)수도 고륜(庫倫)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던 중, 1918년 9월 김규식(金奎植)이 파리강화회의 참석에 필요한 여비를 마련키 위해 몽고로 오자 그에게 독립운동자금 2천 달러를 제공하여 활동을 도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