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해외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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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준 구 묘
김문준(1894-1936)의 호는 목우이며, 1919년 제주3.1운동을 주도했던 항일운동가이다. 1910년 3월에 사립 의신학교(義信學校)를 졸업하였으며, 1912년에 제주공립농업학교(제주관광산업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하였다. 1915년에는 경기도 수원의 조선총독부 수원고등농업학교를 졸업하였는데 졸업 동기생으로 백남운(白南雲)[1895~1974]·이훈구(李勳求)[1896~1961] 등 뛰어난 인물들이 있었다. 같은 해 3월에 경기도 수원의 권업모범장에 취업하였다. 이후 1918년 4월까지 정의공립보통학교에서 2년 6개월 동안 근무하였으며 공립학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에 있는 중앙보통학교(중앙초등학교의 전신)에서 근무하였으며 1925년 3월부터 1927년까지 교장을 지냈다. 1919년 3·1운동 당시에 제주3.1운동을 지도하였다.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9월에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산하 오사카조선인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또 일본 화학노동조합 오사카지부, 서부전기노동조합 등 각종 노동조합을 결성해 파업을 주도하고,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협동전선체였던 신간회 오사카지부 결성을 주도하였다. 1929년 가을에는 오사카 치안당국이 김문준의 우수한 지도로 오사카 조선인노동조합이 1만 7천여 명의 조합원을 가지게 되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도 하였다. 또한 김문준은 1929년 7월에 제주도 출신 소년들을 중심으로 오사카 조선소년동맹을 조직하였고, 일본 선박업자들의 횡포에 맞서 ‘우리는 우리의 배로’라는 구호 아래 제주 출신인이 오사카와 제주를 왕래하기 위해 제주통항조합준비위원회 결성을 주도하였으며 1930년 4월에 동아통항조합을 결성해 복목환(伏木丸)이 취항하였다. 1930년 4월에는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오사카조선인노동조합의 북부지부를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오사카 화학노조로 해소하고 같은 해 5월에 일본화학산업노조 오사카지부로 바꿔 책임자가 되었으며 오사카지부의 선전물이었던 『뉴스』 및 격문과 『제2무산자 신문』 등을 배포하는 등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일본공산당의 확대 강화를 지도하였으며 한글신문이었던 『민중신문』을 발행하였다. 1930년에는 오사카 고무공장 파업을 주도하다가 검거되어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았으며 1932년 4월에는 오사카공소원에서 2년 6월을 선고받아 사카이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한편 투옥 중에는 조몽구(趙夢九)[1908~?]가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화학노조 오사카지부 책임자가 되어 투쟁을 계속하였다. 일제 경찰은 “1930년 8월 17일 오사카에서 천호모공장 쟁의 비밀지도부 회의 중 거괴(巨魁) 김문준(당시 일본화학산업노조 오사카지부 상임) 등 조선인 5명과 일본인 3명을 검거하였다.”고 밝힐 정도로 김문준을 높이 평가하였다. 출감 후인 1935년 6월 15일에는 오사카에서 한글신문이었던 『민중시보』를 창간해 조선인들의 생존권 투쟁과 권익옹호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이후 1936년 5월 25일에 수감 생활 중 폐결핵이 악화되어 오사카 도네야마치료소에서 치료 중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은 일본인 좌익단체와 합동으로 치렀고, 일본 노동운동가들이 김문준 시신을 제주도로 운구하겠다고 하자 일제 경찰이 막을 정도로 존경을 받았다. 현재 제주시 조천읍 조천공동묘지에는 당시 일본에서 보내온 비석이 서 있다. 비문은 고순흠(高順欽)[1893~1977]이 썼으며, 김문준의 문하생이었던 김광추가 대표로 운구위원이 되어 조천으로 유해를 옮겨 도민장(島民葬)을 거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으로 조천리 민장으로 결정하고 안세훈(安世勳), 김유환, 김시용 등이 당시 일본에 있던 고순흠과 연락을 취하면서 1937년 3월 25일에 조천공동묘지에 김문준의 시신을 안장하였다. 김문준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조선인들을 위해 노동조합 운동을 주도적으로 수행하여 조선인뿐 아니라 일본인 노동운동가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던 탁월한 노동운동가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이 패전한 이후 일본 제국주의 압박에 투쟁한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에 기여한 인사들을 위해 오사카성[大阪城] 공원에 현창대판사회운동지전사(顯彰大阪社會運動之戰士)라는 비가 세워졌는데, 이 비에 김문준·조몽구도 일본인과 함께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의 활동이 일본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00년 8월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이운강 독립항쟁기
이운강(1895 - 1972)은 황해도 장연(長淵) 사람이다. 1919년 서간도 지역의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 1회를 졸업하고, 성적이 우수하여 그곳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1919년 8월 북로군정서 김좌진(金佐鎭) 사령관의 요청으로 북간도 왕청현 십리평(汪淸縣十里坪)에 설치된 사관연성소의 교관으로서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1919년 12월 북로군정서 제4중대 제2소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20년 10월 독립군 전투사상 미증유의 대승전을 거둔 청산리독립전쟁에서 전공을 세웠다. 이후 만주에서 계속 육영사업 및 항일 투쟁을 하였다고 하나 이에 관한 기록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강평국 추도비
강평국(1900 - 1933)1900년 6월 19일 제주도(濟州島) 제주읍(濟州邑) 일도리(一徒里)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강년국(姜年國)이며, 세례명은 아가다이다. 1910년 신성여학교(晨星女學校)에 입학하여 1915년 3월 제1회로 졸업했다. 1918년 4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들어갔다. 동급생들인 최은희(崔恩喜)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상의했으며, 1919년 3월 1일 경성여자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에 참여했다. 강평국은 대한문 앞 등을 돌면서 만세를 불렀다. 같은 동급생인 최은희와 최정숙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강평국은 다행히 검거를 면했다. 1921년 제주에서 친구 최정숙과 함께 여성의 문맹 퇴치와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여수원(女修園)을 설립하였다. 1924년 3월 8일 제주도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에서 최정숙·고수선 등과 함께 여성의 수양기관인 ‘부인회’를 조직했다. 1925년 12월 26일 제주도 전체에 여성들의 권익을 신장시키고자 불교포교당에서 제주여자청년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였고, 강평국은 사회부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강평국은 어릴 때부터 친구인 고수선과 의사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로 하였다. 고수선은 서울의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京城女子醫學專門學校)에 입학하였고, 강평국은 일본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東京女子醫學專門學校)에 입학하였다. 일본에서 강평국은 여러 사회단체에 적극 참여했다. 1927년 1월 16일에 창립된 동경조선여자청년동맹의 초대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3월 15일 재동경 동부조선노동조합 제2회 정기대회에 참가하여 부인부(婦人部) 위원이 되었다. 그해 8월 3일 동경조선노동조합 서부지부 주최와 신간회 동경지회·노동농민당 성서(成西)지부 후원으로 고전회관(高田會館)에서 열린 ‘조선총독폭압정치(朝鮮總督暴壓政治) 폭로연설회(暴露演說會)’에 동경여자청년동맹 대표로 연설을 하였다. 그 외에 강평국은 1928년 1월 10일 재동경조선청년동맹과 학우회가 주최한 재동경청년단체 합동위원간담회에 동경여자청년동맹 대표로 참석하였다. 신간회 동경지회가 1927년 5월 7일 와세다대학 스콧트홀에서 창립된 이후,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 동경지회 발기회가 12월 27일 개최되었다. 박화성(朴花城)이 위원장에 강평국이 서무부 위원에 선출되었다. 근우회 동경지회 창립대회는 1928년 1월 22일 동경제대기독교청년회관(東京帝大基督敎靑年會館) 개최되었으며, 박화성이 위원장, 강평국이 정치문화부 위원에 뽑혔다. 강평국은 일본에서 학업을 하며 여러 사회단체에 참여하면서 영양실조와 빈곤에 시달리다가,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3학년을 수료하고 제주도로 돌아왔다. 그러나 고향인 제주도에서도 폐환이 더욱 악화되어 1933년 8월 12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2019년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효행자 독립유공자비(전동면)
전동면사무소 앞에 위치한 독립유공자 효행자 비. 비석 뒷면에 새겨진 건립기에 따르면 본 비석은 1993년 12월 연기군에서 군민의 문화유산을 남기고자 고장 내 효행자와 독립유공자들의 이름을 새기는 과정에서 세워졌다. 연기군 내 여러 지역에 세워져있으며 본 사적은 전동면 119지역대에서 전동손짜장 방향으로 가는 길목 사이에 위치하였다. 독립유공자로 성함이 새겨진 분들은 김승화, 남상열이다.
양기하 집
양기하(1878-1932)는 충청남도 계룡 사람이다. 공주군수로 재직하던 중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여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셨고, 1919년 3월 대한독립단을 조직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셨다. 그 후 광복군사령부 정보국장으로 항일투쟁을 하시던 중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독립외교활동을 지원하셨다. 또한 1922년 10월 김구 선생과 "노동하며 군인이 되는" 한국노병회를 결성하여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모금에 주력하셨다. 1930년을 전후하여 조선혁명군을 조직하여 항일무장 투쟁을 전개하던 중 1932년 2월 만주 관전현에서 일본경찰대와 만주군의 습격을 받고 격전 중 순국하셨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배영진 공적비
배영진(1864 - 1919)은 1912년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건너가 1912년 만주 동삼성에서 한족회가 조직되자 지방연락책으로 일하였다. 한상룡(李相龍), 김대락(金大洛), 김동삼(金東三) 등과 이주동포의 정착을 협의하고 황무지 개척과 청년교육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1919년 3월 국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만주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독립만세운동에 활동하시다 신병으로 이국땅에서 향년 56세로 서거하셨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오동진 추모비
오동진(1889 - 1944)은 김좌진, 김동삼과 함께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3대 명장으로 꼽힌다. 호는 송암(松菴), 이명은 순천(順天)이다. 평양의 대성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으로 내려와 일신학교를 설립하고 청소년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후 만주로 망명해 윤하진 등과 광제청년단 및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조직했다. 1920년에는 광복군 총영장이 되어 독립군을 편성하고 항일전투를 전개했다.그 후 1926년 고려혁명당을 조직해 일본 군사시설과 국내의 경찰관서 등을 파괴하다 체포되어 18년의 옥살이 끝에 1944년 충남 공주형무소에서 55세로 생을 마감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송철 추모비
송철(1896 - 1986)의 이명으로는 송휘규가 있다. 전주 신흥학교와 군사 영명학교를 졸업하고신흥학교에서 수학, 물리학을 가르쳤다. 1916년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에는 U.C.L.A, 버클리대학 등에서 전기수력학을 전공하였다. 이후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에 가입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 나갔다. 특히 1929년 여름에는 뉴욕·시카고·로스앤젤레스·몬타나·오레곤 등지의 5개 지부 대표가 로스앤젤레스에서 회합,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北美總會)를 결성할 때, 이살음·임병직(林炳稷) 등과 같이 로스앤젤레스 대표로 참석하였다. 북미총회에서는 재정 분야를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총회장을 역임하는 등 북미총회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1943년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 회관을 마련하는데 중추역할을 맡았다. 한편 1941년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토의 결과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결성되고 호놀룰루에는 위원회의 의사부(議事部)가, 로스앤젤레스에는 집행부(執行部)가 각각 구성될 때, 그는 집행부의 위원(총 14명)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42년 경위군(警衛軍, 일명 猛虎軍)을 조직하였을 때 재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경위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인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인가까지 받아 독립운동에 기여하기 위해 편성되었던 것이다. 비록 미군의 지휘를 받는 미국내의 군대였지만, 이 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일전쟁에서 해외 한인 의용군의 기간부대가 되어 즉시 출동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제 묘
김정제는 충청남도 보령 출신으로, 김동삼이 민족교육을 위해 신흥무관학교를 설치하였을 때 총무를 맡아 양규열, 이근호, 채 찬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1920년에는 한족회의 실업 과장이자 상무 사장으로 임명되었고, 1921년에는 대한독립군정서에 가입하여 충청남도 부여 지방에서 강철구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출옥 후에 만주로 망명하여 정의부가 조직되자 박정조, 백남준과 함께 재만한인의 생계를 지원하였고, 1926년에는 고활신, 김학선, 김탁, 오대영 등과 함께 정의부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27년에는 김기풍, 김진호, 오동진, 김동삼, 현정경 등과 함께 만주 지방으로 이주한 농민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농민호조사를 조직하여 산업상 생산의 증가, 교육 발전, 위생 및 보건의 향상을 위해 힘쓰는 등 지속적인 노력을 이어갔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대통령 표창을,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좌진 묘
1889년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출생하였다. 집안은 부유한 명문대가 였으며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할 정도로 진취적 개화사상이 강하였다. 1905년 서울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을사늑약 체결 이후 국권회복의 신념을 가지고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국운을 바로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1907년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참여하면서 1909년 《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하였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투옥되어 2년 6개월 간 복역하였다. 1915년 비밀결사 조직 대한광복회에 가입했고, 1916년에는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도 활동하였다. 1917년 대한광복회의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었으나, 예심에서 면소판정으로 석방되었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으며, 대한광복회 조직이 와해되면서 체포 위기에 처했으나 만주에 있어 체포는 면했다. 그 해 12월 무오(戊午)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년 대한정의단의 기반 위에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를 왕칭현[汪淸縣]에 두고 5분단(分團)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광복운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한 뒤, 그 기관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이어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여 사관훈련과 무기입수에도 힘썼다.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한 김좌진 휘하의 독립정예군은 만주 일대에서는 가장 막강한 실력의 군대로, 1920년 이후 10여 년 간 본격적인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靑山里)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나중소(羅仲昭:참모총장)·박영희(朴英熙:부관)·이범석(李範奭:연성대장) 등과 함께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마록구(馬鹿溝) 등지에서 일본군과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일시에 섬멸하였다. 이를 청산리전투라 하여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전쟁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다. 그 후 부대를 이동, 헤이룽강[黑龍江] 부근으로 전진하여 국민회군의 안무(安武), 도독부군의 최진동(崔振東) 등과 연합하고 대한독립군단을 결성,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일본군의 격렬한 보복작전의 전개로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다가 이듬해 헤이허[黑河]사변으로 타격을 받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간부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1927년 만주의 신민부·참의부·정의부의 3부를 통합하려다 실패하자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 단일단결성을 재촉하였다.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회 김봉환(金鳳煥)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애국지사마을 표지석(구룡면 용당리)
충청남도 부여에 위치한 애국지사마을 표지석 (구룡면 용당리)이다. 박길화(1872-1952)는 충청남도 부여 사람으로, 1912년 향리에서 삼학서원을 설립하여 청소년들에 대한 민족사상교육에 전념하였다. 강철구와 1920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군정서에 가입하여 총재 서일의 비서역으로 활약하다가 독립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의 독립공채를 소지하고 입국하여 함북 회령, 청진 및 서울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1년 박길화는 동지들과 함께 독립군을 적극 지원하기로 결의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여 강철구에게 전달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에 강철구는 소지하고 있던 모든 공채를 처분하고 다시 만주로 건너가려고 준비하던 중, 이러한 사실이 일경에 탐지되어 동지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따라서 박길화도 1923년 4월,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영희 집
박영희(1896-1930)의 이명은 박두희(朴斗熙), 박영섭(朴寧燮), 박장섭(朴章燮)이며, 만주로 망명 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의 학도단장을 맡았고, 1920년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대한독립군단, 신민부 조직에도 가입 및 참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