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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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회총 공적비
양회총(1919 - 1993)은 전남 화순(和順) 사람으로, 이명은 양회종이다.화순군에 잇는 이서(二西)공립보통학교에 재학중인 1936년에 일제의 민족차별교육과 조선학생에 대한 노역(勞役)동원에 반대하여 동맹휴학을 주도하였고, 또 동교의 일인(日人)교장을 쫓아내는데 앞장섰다.그후 이러한 이유로 국내에서 진학이 어렵게 됨으로써 도일(渡日)한 그는 동경 소재 정칙중학교(正則中學校)에 입학하였는데, 1937년 7월에 항일의식을 적은 일기장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40여일 동안 구금되었고 동교를 퇴학당하였다.그 뒤 다시 일본 천엽현(千葉縣) 소재의 명륜중학교(明倫中學校)에 들어갔는데, 이때에는 항일단체인 「라비트그룹」의 간행물인 〈전쟁과 평화〉에 항일기사를 기고하면서 항일활동을 벌였다.그런데 1939년 8월에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귀국하는 도중 그러한 사실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9개월간 구금된 상태에서 곤욕을 치르다가 1940년 5월에 집행유예로 풀려나왔다. 이 일로 그는 또 퇴교를 당했다.그후 다시 일본에 건너간 그는 1943년 9월에 명치(明治)대학을 졸업하였다. 이무렵 일제는 소위 학도병 지원을 강요하면서 조선인 학생을 그들의 전선으로 끌어내고 있었는데 이때 이를 피해 만주로 갔던 그는 그곳에서 일경에 붙잡혔다. 그후 본국으로 송환되어 소집영장을 받았으나 신분증을 변조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고향 후배인 박진철(朴眞哲)의 하숙에 기거하면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1944년 5월에는 동지 11명과 함께 항일결사 성도회(醒道會)를 조직하고, 동회의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동회의 주요활동은 동포학생들을 상대로 민족독립사상을 고양시키는 것과 학병지원 반대 등이었으며, 한편으로는 군수공장에 근로동원된 회원을 통하여 비밀문서를 입수하여 폭탄제조 계획도 세웠다.그런데 1944년 9월에 동회의 활동이 일본 헌병대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붙잡혔다. 붙잡힌 후 삽곡(澁谷) 헌병대로 끌려가 2개월간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11월에 소압(巢鴨)형무소에 이감되었는데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파리장서 독립운동가 추모비
파리장서 독립운동은 1919년 3월 137분의 애국지사들이 일제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무단 식민통치를 강하게 규탄하고 민족독립을 강조한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를 비밀리에 작성하여 당시 제1차 세계대전 후 새로운 국제질서 수립을 위해 열린 파리만국평화회의의 대표단을 비롯해 국내외에 대거 배포해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던 사건을 일컫는다. 현재 파리장서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서울 장충단공원을 비롯 전국 여러 곳에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고창의 파리장서 독립운동가 추모비 역시 이러한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이 파리장서 독립운동가 추모비는 고창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한 고석진, 고예진, 고순진, 고제만 네 분의 독립운동가를 기리고 있다. 이들은 파리장서 서명 이외에도 의병활동 및 계몽활동, 포고문 작성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독립운동을 해 나갔던 분들이다.
심재순 공적비
심재순(1899 - 1939)은 임피보통학교(臨陂普通學校) 졸업 후 사립 구암영명학교(龜岩永明學校)에서 2년간 수업하고 서울에 와 대동인쇄주식회사에 다니면서 부기학교에 통학하였다. 1925년 5월 부기학 연구 목적으로 일본 도쿄로 건너가 츠카하라[塚原某] 경영의 춘양당(春陽堂)인쇄소에 고용되었으나 인쇄소가 폐쇄되어 1927년 9월경부터 일본인 가나자와[金鐸]가 경영하는 인쇄소 동성사(同聲社)에 취업하여 문선공(文撰工)으로 일하였다. 그는 이 인쇄소에서 주로 사상에 관한 문서를 출판하던 중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독립 실현의 수단으로는 먼저 노동자·농민의 조직체를 결성하고 그 단결력으로써 끊임없이 투쟁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기에 이르렀다. 1927년 11월 말경 전북 옥구(沃溝)의 이엽사농장(二葉社農場)에서 소작쟁의가 일어나자 동년 12월 일본 도쿄에서「친애하는 동향 제군에게 격함」이라는 제목으로,‘자본주의제도 아래 현대사회의 유산자 생활의 호사로움과 노동자 생활의 궁핍을 비교하고 그것이 착취와 압박을 능사로 하는 제국주의의 모순적 소산물로 단정’하면서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격문을 작성하고 300매 가량을 인쇄하였다. 군산(群山)·강경(江景)·논산(論山) 등 비옥한 토지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가와사키[川崎]·오오쿠라[大倉]·척식회사(拓植會社)·불이회사(不二會社)·이엽사(二葉社) 등 자본가에 항거하고, 소작인은 농민조합을 조직하여 철저히 투쟁할 것을 촉구한 이 글은 국내의 신현국(申鉉局)·심상악(沈相岳)·심상호(沈相鎬)·황봉규(黃琫珪)·심호택(沈鎬澤)에게 발송되었고, 특히 신현국은 이엽사농장의 소작쟁의에 관련된 농민들에게 이를 배부하였다. 1928년 1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김병우(金柄祐)에게 신간회(新幹會)를 중심으로 역량을 모아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독려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0년 9월 부친의 사망을 계기로 옥구로 귀향하여 활동하다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931년 8월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영현 묘
김영현(1907 - 1944)은 일제강점기 길림성에서 독립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전라북도 군산 출신. 수원고등농림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8년 9월 사상이 불온하고 다른 학생들에게 배일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퇴학처분을 당하였다. 같은 해 12월 중국 길림성(吉林省)으로 망명하여 독립군에 투신한 뒤 군자금 200원을 모금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1932년 7월 권총 등의 총기를 휴대하고 독립군 동지들과 함께 간도 일본영사관을 습격, 교전하던 중 총상을 입고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1933년 12월 청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아 대전·마포·서대문·함흥 등지의 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86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정화암 사적비
정현섭(본명 정화암, 1896 - 1981)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1920년에는 미국 의회의 사절단이 내한하였을 당시, 일본의 침략상과 일본의 학정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게 되자 1921년 10월 중국 북경(北京)으로 망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부터는 상해에서 이회영(李會榮)·신채호(申采浩) 등과 교유하며 조국의 광복운동은 무력투쟁의 방법에 의하여 쟁취하여야 한다고 판단, 폭탄제조 기술을 습득하고 군자금 확보방안을 강구하였다. 1928년에는 안공근(安恭根)·이정규(李丁奎)·한일원(韓一元)·이을규(李乙奎) 등과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을 결성하고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맹하여 활동하였으며, 기관지 "탈환(奪還)"을 발행하여 무장항일 투쟁을 촉구하였다. 1930년 4월에는 신현정(申鉉鼎)·최석영(崔錫榮) 등이 천안의 호서은행에서 5,700원의 자금을 가져오자 유자명(柳子明)·이 달(李達)·이하유(李何有)·오면직(吳冕稙) 등과 함께 재중국 무정부주의자 연맹 상해부(在中國無政府主義者聯盟上海部)를 조직하였으며,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조직하여 본격적인 무력항쟁을 도모하였다. 또한 중국내 무정부주의자의 거두인 유기석(柳基石)을 비롯하여 장도선(張道善)·정해리(鄭海理) 등과 활약하던 중 1931년 1월 4일 원심창(元心昌)이 동경에서 북경을 거쳐 상해에 오게 됨을 계기로 이중현(李中鉉)·유자명(柳子明)과 함께 조직을 좀더 강화하고 상해 등지에서 친일배와 전향자(轉向者) 등을 색출하여 암살 대상으로 지목, 결정하고 동지들에게 실천하게 하였으며 또한 같은 해 11월에는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을 구성원으로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B.T.P)을 조직하여 일본영사관과 병영에 폭탄을 던지는 등 무력항쟁을 계속하였다. 1933년에는 이강훈(李康勳)·원심창(元心昌)·백정기(白貞基)·유기문(柳基文)·이용준(李容俊)·진수방(陳樹芳)·전화민(田華民) 등 간부들을 규합하여 상해해방연맹(上海解放聯盟)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그리고 동년 3월 17일에는 일본 주중 상해공사(日本駐中上海公使)인 유길명(有吉明)이 중국의 유력인사 100여 명을 무창로(武昌路) 육삼정(六三亭)이라는 일본요리집에 초청하여 연회를 베푼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원심창(元心昌)·이강훈(李康勳)·백정기(白貞基)에게 권총 2자루와 폭탄 1개, 수류탄 4개를 주고 육삼정 부근 송강춘(松江春)이라는 중국 음식점에서 유길명(有吉明)이 나오는 것을 대기하던 중, 일본 밀정의 밀고에 의하여 거사 직전에 백정기·이강훈 등이 체포되었다. 1936년 1월부터는 남화연맹의 기관지 "남화통신(南華通信)"을 매월 발간하여 항일의식을 고취시켰으며, "맹혈단(猛血團)"이라는 별동대를 조직하여 무력투쟁을 하도록 하였고, 1937년 9월에는 중국인 무정부주의자를 규합하여 "중한청년연합회"를 결성하는 한편, "항쟁시보(抗爭時報)"를 발간하여 한·중 양국민의 공동투쟁을 도모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시책에 협조하여 임정을 지원하였으며, 1940년부터는 이 강(李剛)·신정숙(申貞淑)·전복근(全福根)·강치명(姜治明) 등과 함께 상해 방면에서 잠복, 활동하며 광복군의 현지 책임자로서 주중 미공군에 미·영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를 확인, 보고하는 등 정보활동에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8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정화암 집
정화암(1896 - 1981)은 일제강점기 흑색공포단, 항해해방연맹, 중한청년연합회 등을 결성 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윤옥(允玉), 호는 화암(華岩). 본명은 정현섭(鄭賢燮). 전라북도 김제 출신이다. 할아버지는 정철연(鄭轍淵)이고 아버지는 정환전(鄭桓全)이다. 외조부는 진주강씨(晉州姜氏) 강흔계(姜昕季)이고, 처부는 김제조씨(金堤趙氏) 조응식(趙膺植)과 수원백씨(水原白氏) 백원보(白元普)이다. 1919년 3·1운동 때 고향에서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1920년 8월 극동을 시찰하는 미국의원단의 한반도 방문 때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건의하려다 일본경찰에 쫓기게 되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8년 이회영(李會榮)·신채호(申采浩) 등과 조국광복운동은 혁명적 무력투쟁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협의하였다. 중국국민혁명의 원로 리스쳉[李石曾]·우중후이[吳鍾暉] 등과 제휴, 동방자유혁명자연맹[東方自由革命者聯盟]을 조직하였다. 1930년 4월 20일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 11월에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해 직접적인 무력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재중국무정부주의자 유기석(柳基石)을 만나 유자명(柳子明)·장도선(張道善)·정해리(鄭海理)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31년 1월 원심창(元心昌)이 상해로 오면서 조직을 강화하고 상해 일대에서 친일배 및 전향자 등을 색출, 사살해 독립운동에 일대 활력을 불어넣었다. 1933년 3월 이강훈(李康勳)·원심창·백정기(白貞基)·유기문(柳基文)·이용준(李容俊)·진수방(陳樹芳)·전화민(田華民) 등과 규합, 상해해방연맹(上海解放聯盟)을 결성하였다. 1933년 3월 중순 일본 주중(駐中) 상해공사 아리요시[有吉明]가 중국 유력자를 육삼정(六三亭)에 초청해 연회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일본공사를 사살하려고 계획했으나 밀정의 고발로 거사 직전에 잡혔다. 1936년 국내 호서은행(湖西銀行)에서 탈취한 5만 7,000원을 기금으로 기관지 『남화통신(南華通信)』을 발행해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그리고 별동대 맹혈단(猛血團)을 편성하는 한편, 중국 항일운동세력과 연합해 중한청년연합회(中韓靑年聯合會)를 조직했으며, 『항쟁시보(抗爭時報)』를 발간하였다. 1940년부터 푸젠성[福建省] 내에서 이강(李剛)과 함께 광복 때까지 광복군 활동의 현지 책임자를 지냈다. 특히, 이 때 일본군의 수송로를 폭파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생포된 연합군의 포로를 구출하는 공작에도 공헌하였다. 또한, 일본 군내의 한국인 학도병 탈출 공작도 아울러 전개하였다. 광복 후 귀국해, 4·19의거 후 통일사회당 정치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나의 회고록』이 있다. 198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홍순갑 추모비
홍순갑(1896 - 1929)의 호는 우당이며, 일제강점기 민정부 중앙집행위원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재학 중 3·1 운동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이상재(李商在) 지도 아래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1921년에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며, 출옥 후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신채호(申采浩)와 함께 활동하였다. 1928년 만주로 건너가 신민부(新民府)에 가입하여 민정부(民政部) 중앙집행위원으로 국내외에서 항일운동을 하였다. 1929년 3월 신의주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혀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신의주 형무소에서 복역 중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영호 구국운동 추념비
김영호(1894 - 1940)는 1894년 6월 3일 전라북도 전주군(全州郡) 전주면(全州面) 완산정(完山町, 현 전주시 완산구 완산동 에서 태어났다. 활동 당시 전주읍내에서 철물상을 하였고,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전주지역 만세시위를 촉발시키는 주도자 역할을 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자 천도교 전주교구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를 전주 읍내 각지에 배포하였다. 3·1운동이 전개되기 전인 1919년 2월 27일 서울 수송동(壽松洞)에 거주하던 보성사(普成社) 간사 인종익(印宗益)이 이종일(李鍾一)로부터 독립선언서 약 3천여 매를 받아 천도교 전주교구에 전달하며 3월 2일 밤까지 사람 왕래가 많은 사거리에 배포토록 하였다. 이때 민영진(閔泳鎭)·조성덕(趙聖德)·김성문(金成文) 등과 함께 가담하여 전주 지역에 만세시위를 촉발시켰다. 이후 서울로 상경하여 1919년 8월 서울에서 조직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하였다. 대한국민회 전주지부(全州支部)를 설치하고 재정부장으로 활동하였다. 대한국민회는 1920년 3월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고 독립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해 경고문 등 각종 인쇄물을 인쇄하였다. 이때 경고문 50매를 받아 전주 읍내에 배포하였다. 이와 더불어 같은 해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보낸 애국금통지서(愛國金通知書)를 받고 독립운동자금 모금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이일로 1922년 2월 15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8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백정기 가족묘
백정기(1896 - 1934)는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1919년 8월 그는 동지 4명과 함께 서울·인천에 잠복하여 일군(日軍)의 기관 파괴를 계획하다가 사전에 탄로되자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하였다. 1920년 겨울 재차 서울에 잠입하여 군자금 조달을 위해 활약하던 중 1921년 봄 중부경찰서에 구금되었으나 광부로 변성명하고 본적과 행적을 속여 방면되었으며 경향 각지와 북경 등지를 왕래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여름 그는 중대사명을 띠고 동경에 잠입하여 조천수력공사장(早川水力工事場)에 은신하여 대파괴를 계획하였으나 발각되어 북경에 귀환하였다. 1925년 상해에서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하였으며, 7월에는 상해에 총파업운동이 일어나자 남화청년(南華靑年) 아나키스트연맹과 연락하고 노동운동을 전개하여 10여만의 대노동조직을 만들고 노동운동으로서 혁명운동이 되도록 지도할 목적으로 한때 철공장의 직공생활까지 하였다. 1927년 가을 남경(南京)·상해 등지의 한중(韓中) 양국의 동지를 규합하여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에서 민남25현( 南二五縣) 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라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3,500의 대오를 편성하고 공산군과 지방 토비(군벌)에 대한 수호 및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9월 남경에서 개최된 한국·중국·일본·필리핀·베트남·인도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인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대회(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大會)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30년에 북만(北滿)으로 가서 재북만한국무정부주의연맹(在北滿韓國無政府主義聯盟)의 동지들과 자유혁명자연맹(自由革命者聯盟)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혁명의식의 고취와 민중훈련에 전력하였다. 1932년 2월 상해사변 직후에 "BTP"라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고 일제에 대한 파괴공작을 추진하였다. 이듬해 3월 17일 주중일공사(駐中日公使) 유길명(有吉明)이 일본정객, 참모부원 및 중국의 친일정객, 군인 등 백여명을 상해 홍구(虹口) 육삼정(六三亭)이란 일본인 요정에 초대한다는 기밀을 탐지하여 습격할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던 중 일제의 역습을 받아 동일 이강훈(李康勳) 등과 함께 붙잡혔다. 그는 일본장기법원(日本長崎法院)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지병이던 페병이 재발·악화되어 1934년 6월 5일 오후 11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백정기 집
백정기(1896 - 1934)는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1919년 8월 그는 동지 4명과 함께 서울·인천에 잠복하여 일군(日軍)의 기관 파괴를 계획하다가 사전에 탄로되자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하였다. 1920년 겨울 재차 서울에 잠입하여 군자금 조달을 위해 활약하던 중 1921년 봄 중부경찰서에 구금되었으나 광부로 변성명하고 본적과 행적을 속여 방면되었으며 경향 각지와 북경 등지를 왕래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여름 그는 중대사명을 띠고 동경에 잠입하여 조천수력공사장(早川水力工事場)에 은신하여 대파괴를 계획하였으나 발각되어 북경에 귀환하였다. 1925년 상해에서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하였으며, 7월에는 상해에 총파업운동이 일어나자 남화청년(南華靑年) 아나키스트연맹과 연락하고 노동운동을 전개하여 10여만의 대노동조직을 만들고 노동운동으로서 혁명운동이 되도록 지도할 목적으로 한때 철공장의 직공생활까지 하였다. 1927년 가을 남경(南京)·상해 등지의 한중(韓中) 양국의 동지를 규합하여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에서 민남25현( 南二五縣) 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라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3,500의 대오를 편성하고 공산군과 지방 토비(군벌)에 대한 수호 및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9월 남경에서 개최된 한국·중국·일본·필리핀·베트남·인도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인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대회(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大會)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30년에 북만(北滿)으로 가서 재북만한국무정부주의연맹(在北滿韓國無政府主義聯盟)의 동지들과 자유혁명자연맹(自由革命者聯盟)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혁명의식의 고취와 민중훈련에 전력하였다. 1932년 2월 상해사변 직후에 "BTP"라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고 일제에 대한 파괴공작을 추진하였다. 이듬해 3월 17일 주중일공사(駐中日公使) 유길명(有吉明)이 일본정객, 참모부원 및 중국의 친일정객, 군인 등 백여명을 상해 홍구(虹口) 육삼정(六三亭)이란 일본인 요정에 초대한다는 기밀을 탐지하여 습격할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던 중 일제의 역습을 받아 동일 이강훈(李康勳) 등과 함께 붙잡혔다. 그는 일본장기법원(日本長崎法院)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지병이던 페병이 재발·악화되어 1934년 6월 5일 오후 11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백정기 기념관
백정기(1896 - 1934)는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1919년 8월 그는 동지 4명과 함께 서울·인천에 잠복하여 일군(日軍)의 기관 파괴를 계획하다가 사전에 탄로되자 만주 봉천(奉天)으로 망명하였다. 1920년 겨울 재차 서울에 잠입하여 군자금 조달을 위해 활약하던 중 1921년 봄 중부경찰서에 구금되었으나 광부로 변성명하고 본적과 행적을 속여 방면되었으며 경향 각지와 북경 등지를 왕래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여름 그는 중대사명을 띠고 동경에 잠입하여 조천수력공사장(早川水力工事場)에 은신하여 대파괴를 계획하였으나 발각되어 북경에 귀환하였다. 1925년 상해에서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하였으며, 7월에는 상해에 총파업운동이 일어나자 남화청년(南華靑年) 아나키스트연맹과 연락하고 노동운동을 전개하여 10여만의 대노동조직을 만들고 노동운동으로서 혁명운동이 되도록 지도할 목적으로 한때 철공장의 직공생활까지 하였다. 1927년 가을 남경(南京)·상해 등지의 한중(韓中) 양국의 동지를 규합하여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에서 민남25현( 南二五縣) 민단편련처(民團編練處)라는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3,500의 대오를 편성하고 공산군과 지방 토비(군벌)에 대한 수호 및 농민자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9월 남경에서 개최된 한국·중국·일본·필리핀·베트남·인도 등의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인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대회(東方無政府主義者聯盟大會)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30년에 북만(北滿)으로 가서 재북만한국무정부주의연맹(在北滿韓國無政府主義聯盟)의 동지들과 자유혁명자연맹(自由革命者聯盟)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혁명의식의 고취와 민중훈련에 전력하였다. 1932년 2월 상해사변 직후에 "BTP"라는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조직하고 일제에 대한 파괴공작을 추진하였다. 이듬해 3월 17일 주중일공사(駐中日公使) 유길명(有吉明)이 일본정객, 참모부원 및 중국의 친일정객, 군인 등 백여명을 상해 홍구(虹口) 육삼정(六三亭)이란 일본인 요정에 초대한다는 기밀을 탐지하여 습격할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던 중 일제의 역습을 받아 동일 이강훈(李康勳) 등과 함께 붙잡혔다. 그는 일본장기법원(日本長崎法院)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지병이던 페병이 재발·악화되어 1934년 6월 5일 오후 11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강평국 집
강평국(1900-1933)의 본명은 강년국(姜年國)이며, 세례명은 아가다이다. 1910년 신성여학교(晨星女學校)에 입학하여 1915년 3월 제1회로 졸업했다. 1918년 4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들어갔다. 동급생들인 최은희(崔恩喜)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상의했으며, 1919년 3월 1일 경성여자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에 참여했다. 강평국은 대한문 앞 등을 돌면서 만세를 불렀다. 같은 동급생인 최은희와 최정숙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강평국은 다행히 검거를 면했다. 1921년 제주에서 친구 최정숙과 함께 여성의 문맹 퇴치와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여수원(女修園)을 설립하였다. 1924년 3월 8일 제주도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에서 최정숙·고수선 등과 함께 여성의 수양기관인 ‘부인회’를 조직했다. 1925년 12월 26일 제주도 전체에 여성들의 권익을 신장시키고자 불교포교당에서 제주여자청년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였고, 강평국은 사회부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강평국은 어릴 때부터 친구인 고수선과 의사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로 하였다. 고수선은 서울의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京城女子醫學專門學校)에 입학하였고, 강평국은 일본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東京女子醫學專門學校)에 입학하였다. 일본에서 강평국은 여러 사회단체에 적극 참여했다. 1927년 1월 16일에 창립된 동경조선여자청년동맹의 초대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3월 15일 재동경 동부조선노동조합 제2회 정기대회에 참가하여 부인부(婦人部) 위원이 되었다. 그해 8월 3일 동경조선노동조합 서부지부 주최와 신간회 동경지회·노동농민당 성서(成西)지부 후원으로 고전회관(高田會館)에서 열린 ‘조선총독폭압정치(朝鮮總督暴壓政治) 폭로연설회(暴露演說會)’에 동경여자청년동맹 대표로 연설을 하였다. 그 외에 강평국은 1928년 1월 10일 재동경조선청년동맹과 학우회가 주최한 재동경청년단체 합동위원간담회에 동경여자청년동맹 대표로 참석하였다. 신간회 동경지회가 1927년 5월 7일 와세다대학 스콧트홀에서 창립된 이후,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 동경지회 발기회가 12월 27일 개최되었다. 박화성(朴花城)이 위원장에 강평국이 서무부 위원에 선출되었다. 근우회 동경지회 창립대회는 1928년 1월 22일 동경제대기독교청년회관(東京帝大基督敎靑年會館) 개최되었으며, 박화성이 위원장, 강평국이 정치문화부 위원에 뽑혔다. 강평국은 일본에서 학업을 하며 여러 사회단체에 참여하면서 영양실조와 빈곤에 시달리다가,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3학년을 수료하고 제주도로 돌아왔다. 그러나 고향인 제주도에서도 폐환이 더욱 악화되어 1933년 8월 12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2019년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