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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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문 흉상
서진문(1900 - 1928)은 일본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노동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일제 경찰의 고문에 희생되었다. 서진문은 1926년 신내천현(神奈川縣) 조선노동조합 집행위원으로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지도하였다. 1927년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입회하여 일본부에 배속되어 한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10월 25일 일왕(日王)의 즉위식인 소위 '어대전(御大典)'을 앞두고 횡빈경찰서(橫浜警察署) 형사들이 신내천 조선노동조합 횡빈지부를 습격하였을 때 서진문을 비롯한 한국인 항일운동 지도자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서진문은 잡혀가기 전부터 심장 맥박이 105까지 올라갈 정도로 병세가 위급하였다. 이에 동지들은 서진문의 석방을 일경에 요구하였으나 이를 들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사를 불러 주지도 않았다. 서진문은 거의 빈사상태가 되어 그해 11월 16일 석방되었고, 그 휴유증으로 출옥 이튿날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거의 죽어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서진문은 유치장에서도 "얼른 이군(李君)을 구원하라! 나는 벌써 살아나지 못하겠다"라고 하면서 같이 검거되었던 동지들을 걱정하였다고 한다. 서진문의 직접적인 사망원인은 일제 경찰의 가혹한 고문 때문이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서진문 묘
서진문(1900 - 1928)은 일본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노동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일제 경찰의 고문에 희생되었다. 서진문은 1926년 신내천현(神奈川縣) 조선노동조합 집행위원으로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지도하였다. 1927년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입회하여 일본부에 배속되어 한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10월 25일 일왕(日王)의 즉위식인 소위 '어대전(御大典)'을 앞두고 횡빈경찰서(橫浜警察署) 형사들이 신내천 조선노동조합 횡빈지부를 습격하였을 때 서진문을 비롯한 한국인 항일운동 지도자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서진문은 잡혀가기 전부터 심장 맥박이 105까지 올라갈 정도로 병세가 위급하였다. 이에 동지들은 서진문의 석방을 일경에 요구하였으나 이를 들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사를 불러 주지도 않았다. 서진문은 거의 빈사상태가 되어 그해 11월 16일 석방되었고, 그 휴유증으로 출옥 이튿날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거의 죽어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서진문은 유치장에서도 "얼른 이군(李君)을 구원하라! 나는 벌써 살아나지 못하겠다"라고 하면서 같이 검거되었던 동지들을 걱정하였다고 한다. 서진문의 직접적인 사망원인은 일제 경찰의 가혹한 고문 때문이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광원 독립운동기념비
조광원(1897 - 1971)은 서울 사람이다. 성공회 신부로 독립자금모집 활동을 벌였으며, 하와이 지부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하와이로 건너간 조광원은 성공회(聖公會) 신부로 선교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한국인 2세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면서 하와이 한인사회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앞장섰다. 또한 성공회 교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미주지역의 독립운동은 지역 특성상 교민사회의 자치 및 단합을 도모하는 한편 독립운동 자금을 수합하여 중국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미국 정부와 국제기구에 대한 독립외교활동도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이후 그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하와이 총지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국독립당 하와이 지부는 애국단의 후신이다. 애국단이 중국지역의 광복전선통일운동에 참가하여 한국독립당을 결성한 데에 따라 하와이에 지부가 만들어졌다. 그는 하와이 한국독립당지부를 이끌어 가며, 중국지역의 특무공작과 한국광복군 편성 등에 경제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른 1944년 9월 경, 그는 미해병대 종군 신부로 지원하여 사이판 전투에 참전하였다. 사이판에서 대일 선전공작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일본군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들을 구출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광양 7의사 3.1운동 기념비
전라남도 광양 지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김영석(金領錫)·최준수(崔俊秀)·서성식(徐聖植)·서찬식(徐贊植)·이기수(李基壽)·박병원(朴炳元)·나종길(羅鍾吉) 등 7명의 젊은 애국지사들의 독립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66년 4월 1일 옥룡면 주민들이 세운 기념비이다. 기단 위에 오석(烏石)의 비신(碑身)과 두 마리 용을 새긴 옥개석을 얹은 형태로 높이는 2.6m, 너비는 0.6m이며, 부지 면적은 6㎡이다. 비신의 앞면에는 '칠의사삼일운동기념비(七義士三一運動記念碑)'라고 한자로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20세 안팎의 젊은 애국지사들의 위국충의(爲國忠義)를 후세에 전하는 비문이, 왼쪽 옆면에는 7명의 이름이 그 후손의 이름과 함께 새겨져 있다. 원래 옥룡면사무소 부근에 세웠던 것을 옥룡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 전몰호국용사추모비와 함께 나란히 세웠으며, 2003년 5월에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하였다. 광양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7일 옥룡면의 유생 정성련(鄭星鍊)이 광양읍 장터에서 단독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을 시작으로 4월 1일에도 광양읍 장터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나 여러 사람이 검속되었다. 옥룡면 운평리의 서당 견룡재(見龍齋)에서 백중기의 가르침을 받던 김영석·최준수·서성식·서찬식·이기수·박병원·나종길 등 7명은 선배들의 만세운동에 자극을 받아 자신들도 동참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2일, 이들은 태극기를 만들어 들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읍내를 향하여 가다가 일제 헌병에게 체포되어 심한 폭행을 당하였으나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만세운동의 정당성을 항변하며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임창모 묘
임창모(?~1909)는 전라남도 광주(光州) 출신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임창모는 능주(綾州) 출신 양회일(梁會一)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907년 능주(綾州)를 공격하고 다시 광주를 치려다가 날이 저물어 화순(和順)·동복(同福)의 경계인 흑토치(黑土峙)에 둔병하던 중 적에게 포위를 당하였다. 포위망을 탈출할 수 없게 되자 양회일이 선등대호(先登大呼)하여, 힘껏 싸웠으나 역부족하여 결국 체포되었다. 그후 양회일은 광주 형무소에서 장흥으로 옮겨졌으나 단식 7일 만에 순국하였고 임창모는 지도(智島)로 유배되었다가 1908년 해배(解配)되어 귀가하였다. 임창모는 해배되자 마자 안규홍의 의진에 입대하여 선봉장(先鋒將)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안규홍의 보성의진은 파청대첩(巴靑大捷)·진산대첩(眞山大捷)·원봉산(圓峰山) 전투 등에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의병운동사상 기념비적인 승리를 구가하였다. 6월 이후 임창모는 독립부대를 편성하여 안규홍 의진과 분진(分陣)하여 보성( 城)을 거점으로 활동하였으며, 전성기에는 부하가 2∼3백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1909년 10월 12일 일본의 의병대토벌전이 전개되어 흑석산(黑石山)에서 일군과 접전하던 중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순동 집
박순동(1920~1969)은 전남 순천 사람이다. 그는 1945년 학병으로 미얀마 전선에 끌려갔다가 탈출하여 미군 첩보요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미군포로수용소 시절「자유한인보(自由韓人報)」를 발간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에 힘을 쏟았다. 박순동은 1945년 3월 학병으로 미얀마 쿰(Kume) 전선에 배치되었으나, 4월 경 동료 이종실(李鍾實) 등과 함께 일본군을 탈출하여 당시 인도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에 투항하였다. 이들은 대일항전을 자청하였고, 이에 따라 인도내에 있던 미군 OSS에 넘겨지게 되었다.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한 그는 같은 해 5월 OSS의 특수공작인 '냅코작전'(Napko Project)에 참여하였다. 냅코작전은 '한국 내에 당장 침투하여 첩보, 지하조직 조성 등의 활동을 하고 사보타지와 무저항운동으로 이어갈 것'을 목적으로 한 미군의 국내 침투작전으로, 이를 통해 2300만 한국 국민이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지한다는 것을 전세계에 알리는 효과를 기대한 것이었다. 특수훈련이 끝나면 각각 5∼10명의 공작조로 나뉘어 서울, 평양, 평남의 농촌지역 등 국내 각지에 침투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같은 해 5월 이들은 OSS의 첩보요원훈련(諜報要員訓練)을 받기 위해 미서부 산타카타리나 섬으로 이동하였다. 같은 해 6월부터 OSS의 냅코작전을 위한 첩보활동, 태업선동, 무선연락 등의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으나, 태평양전쟁의 종전으로 말미암아 참전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황덕환 추모비
황덕환(1895~1929)은 전남 영광 사람이다. 신민부에서 친일파 제거에 기여한 독립운동가로 1916년 중국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1919년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3년 동안 옥고를 치렀고 그 후 다시 서울에서 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여 신민부에서 군사위원장 김좌진 휘하에서 별동대장에 임명되어 맹렬한 활동을 하였다. 특히, 친일단체인 하얼빈 조선인민희 토벌과 악명 높았던 해림시 조선인민회장 배두산 제거에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체포되어 여순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일인이 한국인에 대하여 매일같이 모욕적인 언사를 하므로 적개심에 불타 일인을 칼로 찔러 죽였다. 이에 다시 사형언도를 받게 되어 1929년 9월 20일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송내호 묘
송내호(1895~1928)는 전남 완도 사람이다. 소안면 비자리 송윤삼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4년 서울 중앙고보 졸업 후 귀향하여 사립보통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한,일,중,영,독,불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고향 완도에서도 거사할 것을 계획하고 3월 15일 천도교,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11월에는 만주 관전현에서 조국광복을 목적으로 조직된 대한독립단(大韓獨立)의 취지에 적극 찬동하고 이에 가입하였으며, 전라도 지단(支) 책임을 맡았다. 군자금 모집 활동을 진행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921년 9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조국광복에 대한 염원에는 변함이 없어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1925년 2월 15일 창립총회에서 안재홍(安在鴻)·권동진(權東鎭)·신석우(申錫雨)·김준연(金俊淵) 등 35명과 함께 간사가 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위석규 의열비
위석규(1878 - 1913)는 전남 장흥(長興)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체결되자 망국의 한을 품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1907년 청국(淸國) 원세개(袁世凱)의 구원을 얻어 일본을 타도하려고 하였으나, 그 국력이 일본을 구축하는 데에는 미약함을 느끼고, 노령(露領)으로 망명하여 해삼위(海蔘威)를 거점으로 박태문(朴泰文)·강명운(姜明雲)·국사성(鞠思成)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3년 4월 이역에서 요절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안후덕 집
안후덕(1905 - 1949)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년회 상해지부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24년 2월 사재를 정리하여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1928년 2월 군자금 모금의 사명을 띠고 귀국, 자기 소유 토지를 저당잡히고 4만 5000원(圓)을 가지고 상해로 갔다. 그 금액 중 2만 2000원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나머지 2만원은 한인청년동맹(韓人靑年同盟)에 운동자금으로 헌납하였으며, 이 청년회 상해지부 총회에서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9년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귀국하던 중 신의주에서 일본경찰에 잡혀 그해 11월 경성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정진감 기념비
정진감(1921 - 2008)은 1940년 9월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직공 또는 잡역 등에 종사하는 한편, 대판청년회(大阪靑年會) 예비교(豫備敎) 중학교에 다녔다. 이어 1941년 4월에는 대판야간중학교(大阪夜間中學校) 이부(二部) 3학년에 편입하였다. 그는 일본에 건너온 이후 일인의 재일한인에 대한 극심한 민족차별과 비참한 생활상을 목도하면서 한민족의 자유와 행복은 오직 조국독립과 민족해방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1941년 12월 일제의 도발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1942년 5월 9일에 우리 민족청년에 대한 징병제 실시가 발표되자, 이를 계기로 5월 중순경 동급생인 윤병윤(尹炳允)·고방웅(高房雄)·이형휘(李炯徽)·김규장(金圭藏)·하백문(河白文) 등과 비밀리에 회동, 한국독립청년당(韓國獨立靑年黨)을 결성하고 40여차례에 걸쳐 회합을 가지면서 동지규합과 정신계도에 진력하던 중, 1943년 3월 2일 일경에 붙잡히고 말았다. 1944년 1월 26일 대판지방재판소(大阪地方裁判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항일마을 표지석(북평 이진마을)
북평 이진마을은 1909년 항일 의병운동과 1930년대 전국 최대 조직인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중심 마을이다. 이진마을 출신인 황두일은 1909년 서남해안에서 활동했던 의병대장 중 한 명이었다. 황두일을 비롯한 해남의병들은 북평면 성동암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왜군에 밀려 대흥사 심적암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그러나 심적암에서 일본군에 의해 의병 대부분은 참사를 당하고 황두일도 이후 사형을 당한다. 1930년대 북평 이진마을을 중심으로 전국최대 항일조직인 전남운동협의회가 구성된다. 중심인물은 이진마을 출신인 동경 유학파 김홍배였다. 전남운동협의회는 해남 완도를 비롯해 10개 군에 걸쳐 조직된 당시 최대 규모의 항일조직이었다. 이진에 있던 사설학원인 동강학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이들은 주로 성도암과 심적암에서 비밀모임을 갖고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이들의 활동은 2년여 만에 막을 내리지만 활동범위가 워낙 넓어 사건 발각 당시 연행된 숫자만도 1000여명이 넘었고 구속된 사람은 57명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