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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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헌 추모비
김교헌(1868-1923)의 자는 백유, 호는 무원, 보화, 이칭은 김헌이며, 일제강점기 대종교 제2대 교주이다. 1885년 정시문과에 급제, 한림옥당·병조참의·예조참의·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했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대중계몽운동을 하였고, 개혁내각 수립과 의회개설운동이 좌절되어 17명의 독립협회 지도자가 구속되자 대표위원으로 선정, 만민공동회운동을 전개하였다. 1903년『문헌비고(文獻備考)』 편집위원이 되었다. 1906년 동래감리 겸 부산항재판소판사(東萊監理兼釜山港裁判所判事)와 동래부사로 재직하였다. 그 뒤 비밀단체인 신민회(新民會) 회원과 교우 관계를 맺었으며,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 들어가 현채(玄采)·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고전간행사업에 참가하였다. 1909년에는 규장각부제학으로서 『국조보감(國朝寶鑑)』 감인위원(監印委員)을 겸직하였고, 1910년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었다. 일찍이 민족의 기원과 민족사의 연구에 뜻이 깊어, 대종교가 중광(重光)된 해부터 교인이 되어 각종 문헌을 섭렵, 교(敎)의 역사를 정립하였다. 한편, 영계(靈戒)를 받고 총본사(總本司)의 부전무(副典務)·경리부장을 지내고, 도사교위리(都司敎委理)·남도본사전리(南道本司典理)·총본사전강(總本司典講)을 역임하였다. 1914년 단군 관련 문헌자료를 모아 『신단실기(神檀實記)』를 편찬하였다. 1916년 9월 나철(羅喆)의 뒤를 이어 대종교의 제2대 도사교[都司敎: 교주(敎主)]에 취임하였다. 1917년 일본의 탄압을 피해 총본사를 동만주 화룡현(和龍縣)으로 옮기고 교세 확장을 통한 독립운동 강화와 동포들에 대한 독립정신 교육에 전념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3월 11일 경 길림에서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같은해 12월 대종교 교인만으로 구성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 총재에 교단(敎團)의 지도자인 서일(徐一)을 임명하는 등 적극적인 무력투쟁을 전개, 1920년 9월 청산리에서 김좌진(金佐鎭)이 대승리를 거두게 하였다. 그 뒤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총본사를 영안현(寧安縣)으로 옮겨 선도포교사업(宣道布敎事業)을 통한 구국투쟁에 진력하였다. 1923년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출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나 만주 전역에 걸친 일본군의 토벌작전으로 독립운동 및 교단의 기반이 크게 붕괴되자 병을 얻어 죽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서일 추모비
서일(1881-1921)의 호는 백포, 본명은 서기학이며, 일제강점기 북로군정서 총재로 김좌진과 청산리전투에 참전한 독립운동가이자 종교인이다. 1898년까지 고향에서 한학(漢學)을 배우다가 경성함일사범학교(鏡城咸一師範學校)에 입학하여 1902년에 졸업하고 교육구국사업에 종사하였다. 경술국치 이후 탄압이 심화되자 국내에서 항일투쟁의 어려움을 느끼고 만주로 건너갔다. 1911년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의 잔류병력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匡團)을 조직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무력에 의한 투쟁보다는 청년동지들에 대한 민족정신과 한학을 가르쳐 정신교육에 치중하는 한편, 교육에도 뜻을 두어 간도지방에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다. 1918년 여준(呂準)·유동열(柳東說)·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 등과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을 발표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이듬해 중광단을 토대로 군사적 행동을 위해 계화(桂和) 등과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였다. 1919년 대종교 2세교주인 무원종사(茂園宗師) 김헌(金獻)이 그에게 교통을 전수하려고 하였으나 독립군 양성과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에 힘을 기울이기 위해 교통의 인수를 5년 뒤로 미루었다. 같은 해 8월현천묵(玄天默)·김좌진·계화 등과 함께 정의단을 개편하여 군정부(軍政府)로 만들고, 12월에는 다시 한 민족에게 두 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다 하여, 이것을 토대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하면서 총재에 취임하였다. 또한 틈틈이 대종교의 교리를 연구하며 수도에 힘써 교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저술에도 힘을 기울이며 포교활동도 하였다. 군정서는 각처에 정보연락망을 구축하고 대종교 신도들의 헌금과 함경도민이 마련해준 군자금을 바탕으로 하여 정규병력 1,500명으로 지방치안을 유지하고 신병모집과 무기수입을 담당하였다. 또한 왕청현 십리평(十里坪)에 사관양성소(士官養成所)를 세워 중견사관을 길러내고, 각지에 야간강습소와 소학교를 설립하여 육영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1920년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서 일본 정규군을 크게 무찔렀고 병력을 북만(北滿)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시켰다. 이듬해 일본군의 만주 출병으로 인해 밀산현으로 들어온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최진동(崔振東)의 도독부군(都督府軍) 및 의군부(義軍府), 광복단(光復團) 등 여러 독립군단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하고 총재가 되었다. 1921년 6월 27일 자유시 수비대 29연대, 2군단 기병대대, 라키친 저격연대가 동원되어 사할린 부대에 대한 무장해제에 들어갔다. 그러나 러시아 군인과 항일무장독립군 부대원 사이 의사소통을 할 수 없었고 러시아 군인은 사할린 부대를 구분할 수 없었다. 동원된 러시아 부대는 무장을 한 항일무장독립군에 대하여 무차별적 공격을 감행하였다. 청년장병 다수가 희생당하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같은해 8월 27일 “나라 땅은 유리쪽으로 부서지고 티끌모래는 바람비에 날렸도다. 날이 저물고 길이 궁한데 인간이 어디메뇨.”라는 글귀를 남기고 대종교 수양법의 하나인 조식법(調息法)으로 자결하였다. 저서에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삼일신고강의(三一神誥講義)』, 그리고 계시를 받고 지었다는 『회삼경(會三經)』 등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동삼 공적 안내판(심우장)
심우장은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승려이자 시인, 독립운동가인 한용운과 관련된 한옥으로 시도기념물이다. 2019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33년, 김벽산(金碧山)이 초당을 지으려고 사둔 땅을 기증받아 조선일보사 사장 방응모 사장 등 몇몇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지었다. 이 곳에서 1934년 첫 장편소설인 『흑풍(黑風)』을 집필하여 『조선일보』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조선총독부가 위치하던 남쪽을 등진 곳을 택하여 북향의 집을 짓고 심우장(尋牛莊)이라고 하였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김동삼의 주검을 수습하여 심우장에서 5일장을 치러주었다. 김동삼(1878 - 1937)은 1910년대에 만주에 망명하여 1920년대까지 서간도 독립운동 단체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던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김긍식(金肯植)으로, 김동삼은 만주 망명 후 사용한 이름이다. 또다른 이름으로는 김종식(金宗植)이 있다. 본관은 의성(義城)이며, 자는 한경(漢卿), 호는 일송(一松)이다.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하자 서간도로 망명하여 이회영 등과 함께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경학사를 결성하며 병영인 백서농장을 운영하는 활동을 펼쳤다. 한족회와 서로군정서, 통의부, 국민대표회의, 정의부 등 서간도의 대표적인 단체와 독립군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민족유일당운동에 뛰어들었으며, 항일 공작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국내로 압송되고 옥고를 치르다 옥사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김상옥 항거 터
김상옥(1876 - 미상)은 1919년 3·1 운동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뛰어들어, 반일 비밀 조직인 혁신단을 결성한 뒤 지하 신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해 배포했다. 다음 해에는 풍기 시절부터의 동지인 한훈, 북로군정서의 김동순과 함께 요인 암살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구체적인 암살 계획까지 세운 것이 드러나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이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신익희, 이동휘, 조소앙 등과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1922년 10월 권총 3정과 실탄 800발 및 폭탄 그리고 항일 문서를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한 뒤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인 경찰 및 어용신문 매일신보사의 사원 1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당시 종로경찰서가 독립 운동 탄압의 본산으로 악명이 높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투척 사건 이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피신하던 중, 사이토 총독이 회의에 참석하러 도쿄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암살할 목적으로 서울역 주위를 수일간 배회하다가 종로경찰서 무장 경찰 20여 명에게 포위되었다. 그들과 총격전을 벌여 형사부장을 사살하고 경부 20여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김상옥은 1월 22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1,000여 명의 일본 군경과 3시간 동안 접전을 벌이며 저항하다가 자결했다.
방정환 집
방정환(1899 - 1931)은 일제강점기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한 아동문학가이다. 호는 소파(小波). 서울 출신. 아버지는 방경수(方慶洙)이다. 1909년 매동보통학교에 입학, 이듬해 미동보통학교로 전학하여 1913년에 졸업하였다. 그 해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가정 사정으로 중퇴하였다. 1917년 손병희(孫秉熙)의 딸 손용화(孫溶嬅)와 결혼하였다. 그 해에 청년운동단체인 ‘ 청년구락부(靑年俱樂部)’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1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 이듬해인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1주일 만에 석방되었다. 1920년 일본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입학하여 아동예술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하였다. 1921년 김기전(金起田) · 이정호(李定鎬) 등과 함께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소년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5월 1일 처음으로 ‘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1923년 3월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이 잡지는 월간으로서 일본 동경에서 편집하고 서울 개벽사(開闢社)에서 발행을 대행하였다. 같은 해 5월 1일에 ‘어린이날’ 기념식을 거행하고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전단 12만장을 배포하였다. 1925년에는 제3회 어린이날을 기념하는 동화구연대회(童話口演大會)를 개최하였다. 1928년에 세계 20여 개 나라 어린이가 참가하는 ‘세계아동예술전람회’를 개최하였다. 방정환이 남긴 작품은 번안물이 대부분이다. 원문의 뜻과 흐름을 손상시키지 않고 외국어의 장벽을 무난히 돌파하여 동화 번안작가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었다. 그가 번안 내지 개작한 동화들이 지닌 일관된 특징은 풍자와 해학의 정신과 교훈성에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종래의 유교도덕에 얽매어 있던 어린이들을 어린이다운 감성으로 해방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감성 해방은 시대적 상황과 결부되어 그들을 웃기기보다는 울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웬일인지 별 하나/보이지 않고/남은 별이 둘이서/눈물 흘린다.”(형제별)와 같은 동요에서 이러한 모습은 잘 나타나고 있다. 생전에 실천하고 남긴 업적을 간추려보면, 첫째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아동문화운동가요, 사회운동가였다. ‘소년입지회(少年立志會)’의 조직과 3 · 1독립운동 참가, ‘천도교소년회’ 결성 및 육성이나, 아동을 ‘어린이’라는 용어로 ‘늙은이’ · ‘젊은이’와 대등하게 격상시킨 일 및 아동문제연구단체인 ‘ 색동회’ 조직, ‘어린이의 날’ 제정 등이 그것을 입증한다. 둘째로 번안 및 개작작가 · 동화작가 · 동화구연가 · 아동잡지 편집인으로서의 업적이다. 『사랑의 선물』(개벽사, 1922)을 비롯한 본격적인 개작 번안, 창작동화를 남기며 최초의 대표적인 구연동화가로 활약하고 『어린이』지를 통하여 윤석중(尹石重) · 이원수(李元壽) · 서덕촌 등 아동문학가의 발굴, 육성에 힘썼다. 셋째로 아동들을 소박하고 천진난만하며 순진무구하게 보고 감상적 · 관념적 · 권선징악적인 작품을 통해서 그들이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린이의 현실적 · 경제적 어려움을 이해하고 종래의 전통적인 부당한 대우를 시정하여 감성 해방(동심 회복)을 하려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그러므로 그는 금세기 우리나라의 지사(志士)요, 선구적 언론인이요, 교육자요, 문학가로 불려야 마땅한 인물이다. 생전에 발간한 책은 『사랑의 선물』이 있고, 그밖에 사후에 발간된 『소파전집』(박문출판사, 1940) · 『소파동화독본』(조선아동문화협회, 1947) · 『방정환아동문학독본』(을유문화사, 1962) · 『칠칠단의 비밀』(글벗집, 1962) · 『동생을 찾으러』(글벗집, 1962) · 『소파아동문학전집』(문천사, 1974) 등 8종이 있다. 1983년 5월 5일에는 망우리 묘소에 이재철이 비문을 새긴 ‘소파 방정환 선생의 비’가 건립되었으며, 1987년 7월 14일에는 독립기념관에 방정환이 쓴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을 새긴 어록비가 건립되었다. 1978년 금관문화훈장,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경천 집
김경천(1888-1942)은 만주와 노령에서 독립군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복무하던 중 1919년 동경에서 2·8독립선언이 있자 민족적 책무를 자각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마침내 1919년 6월 6일 이청천과 함께 만주로의 망명을 단행하였다. 만주로 망명한 후 신의주 대안 안동현(安東縣)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8월 총재인 안병찬(安秉瓚)의 체포로 인하여 대한독립청년단에서의 활동도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김경천은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서간도 유하현(柳河縣)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그후 대일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구입을 위해 북간도를 경유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으나 그곳도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인하여 일본군의 감시와 조선인 체포로 인하여 활동을 전개하기 어려웠다. 이에 산림지대인 수청지역으로 이동하여 산림속에 일단 피신하였다. 그런데 당시 수청지역도 일본의 조정을 받는 중국계 마적들이 수시로 출몰하여 한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에 곤궁에 처해있는 재러동포들을 구하기 위하여 의용군을 모집, 마적 소탕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즉 그는 처음에는 수청지역 창해청년단(滄海靑年團)의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마적소탕에 전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결국 1920년 수청지역에서의 마적 퇴치활동으로 시베리아지역에서 그 명성을 크게 얻었고, "김장군(金將軍)"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마적토벌에 성공한 후 그는 수청지역을 중심으로 군정(軍政)을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만일 중국인이나 러시아인도 관할구역을 벗어나 타지역으로 이동하고자 할 때에는 그가 발행하는 증명서를 소지하여야만 하였다. 아울러 재러동포들의 안정된 삶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민정(民政)도 단행하였다. 1921년 봄 연해주 수청군 인접지역인 올가군에서 300여명에 달하는 통합빨치산 부대가 조직되자 김경천은 그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수청의 아누치노(도비허)구역에 있는 백군 까벨부대와 전투를 전개하였다. 또한 까르뚜크 마을의 치열한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수청 다우지미에서 활동하고 있던 그는 1921년 초 수청 고려의병대에 초빙되어 군대의 총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수청의병대의 지도자가 된 그는 계속해서 수청지역의 마적 퇴치에 노력하였다. 1921년 8월 수청의병대는 러시아 참모부의 지령에 따라 모두 도비허로 이동하였다. 그는 9월 러시아 유격대 셉첸꼬 부대의 제안에 따라 의병대의 일부를 올가항에 보내는 한편 나머지 대원들은 아누치노로 이동시켰다. 특히 그의부대는 동포들의 요구에 따라 마적들을 방비하기 위하여 수청의 뜨레치푸진과 수주허에 주둔하였다. 10월 김경천부대는 러시아 적군과 연합하여 수청에 주둔한 백군을 공격하여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패하여 일본군과 백군의 추격을 받게되자 그는 기병을 데리고 이만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이만으로 이동한 김경천 부대는 1922년 정월 이만에서 백군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적군의 사령관이 백군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청의병대와 더불어 러시아 적군도 함께 지휘하여 이만을 점령하였다. 이어 그는 1922년 3월 러시아 적군과 연합하여 약골리가를 공격하였다. 이에 러시아 백군은 우수리스크 쪽으로 쫓겨났다. 이어 백군이 한반도쪽으로 퇴각할 듯 보이자 그는 이들을 추격하기 위하여 일본군의 경계선을 뚫고 추풍지역으로 돌격하였다. 그가 이처럼 승리를 거두게 되자 1922년 7월 연해주의 혁명군사위원회는 그를 뽀시에트 군사구역 조선부대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1922년 9월 그는 뽀시에트로 이동 중 상부 시지미촌에서 백군 패잔병들과 전투를 전개하였다. 수청의병대는 그의 지휘아래 기마공격을 강행하여 승리하였다. 1922년 러시아와 중국 국경지방에 있는 단체는 각 단의 통일을 도모하는 동시에 장정의 모집과 무기의 수집에 힘써 10월 일본군의 철퇴가 완료되기 직전에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였다. 고려혁명군 총재는 이중집(李仲執)이며 소재지는 추풍(秋風)이었는데, 고려혁명군 동부사령관을 그가 담당하였으며, 본부는 그의 근거지인 수청에 두었다. 1922년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자 12월 말, '조선인 유격연합대 해산 및 국민전쟁 참가자 귀가'에 대한 우보레비츠 총사령의 명령이 내려왔다. 적군은 지금까지의 동맹군인 한인독립군에 대해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그는 실의에 빠져 있었는데, 이러한 때에 상해(上海)에서 독립운동단체들이 모두 모여 재기를 모색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에 그는 1923년 2월 상해에 가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에 실망한 그는 1923년 4월 노령 블라디보스톡으로 다시 돌아와서 구로지코 부근에 무관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여 갔다. 또한 그는 1924년 3월에는 한족군인구락부를 조직하여 본부를 블라디보스톡에, 그리고 지부는 니콜리스크에 두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활동도 러시아당국의 한인정책과 노령출신 2세들과의 갈등으로 점점 쇠퇴하고 말았다. 김경천은 그후 1930년대 전반기까지는 주로 블라디보스톡에서 한족군인구락부라는 것을 조직하여 산산이 흩어진 항일역량을 다시 수습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군사학과 일본어를 가르쳤다. 그후 소련정부에 의해 옥고를 치르고 강제 노동수용소에 수감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김상옥 의사비, 김상옥 어록비
김상옥(1876 - 미상)은 1919년 3·1 운동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항일 운동에 뛰어들어, 반일 비밀 조직인 혁신단을 결성한 뒤 지하 신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해 배포했다. 다음 해에는 풍기 시절부터의 동지인 한훈, 북로군정서의 김동순과 함께 요인 암살을 위한 조직을 만들어 구체적인 암살 계획까지 세운 것이 드러나 상하이로 망명했으며, 이곳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김구, 이시영, 신익희, 이동휘, 조소앙 등과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였다.1922년 10월 권총 3정과 실탄 800발 및 폭탄 그리고 항일 문서를 휴대하고 서울에 잠입한 뒤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인 경찰 및 어용신문 매일신보사의 사원 1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당시 종로경찰서가 독립 운동 탄압의 본산으로 악명이 높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투척 사건 이후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해 피신하던 중, 사이토 총독이 회의에 참석하러 도쿄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암살할 목적으로 서울역 주위를 수일간 배회하다가 종로경찰서 무장 경찰 20여 명에게 포위되었다. 그들과 총격전을 벌여 형사부장을 사살하고 경부 20여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김상옥은 1월 22일 서울 종로구 효제동에서 1,000여 명의 일본 군경과 3시간 동안 접전을 벌이며 저항하다가 자결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김익상 의거 터 표지석
김익상(1895 - 1943)는 일제강점기 총독부폭파, 다나카암살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경기도 고양 출신.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기독교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광성연초공사(廣城煙草公司)의 기계 감독으로 근무하였다. 1920년 만주 봉천(奉天)으로 전근된 것을 기회로 비행사가 되기 위해 비행 학교가 있는 중국 광둥[廣東]으로 갔다. 그러나 중국 내전으로 인해 학교가 폐교되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해로 돌아왔다. 상해에서 전차 회사의 전차 감독이 되어 잠시 일을 보다가 항일 운동에 몸바칠 것을 결심하고 북경으로 가서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였다. 1921년 단장 김원봉(金元鳳)으로부터 총독 암살 밀령을 받고 국내로 들어와 전기 수리공으로 변장하고 9월 12일 총독부에 잠입하여 2층 비서과(총독실로 오인)와 회계과장실에 폭탄을 던졌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불발이었으나 회계과장실에 던진 폭탄은 폭발하였다. 총독부가 폭발로 인해 혼란 상태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현장을 빠져 나와 평양을 거쳐 중국으로 무사히 탈출하였다. 1922년 일본의 전 육군대신이며 육군 대장인 다나카[田中義一]가 필리핀을 거쳐 상해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의열단으로부터 다나카 암살이라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를 위해 동지 오성륜(吳成崙, 본명 李正龍)과 같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 1차 저격은 오성륜이 담당하고, 만약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2차 저격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28일 선편으로 황푸탄[黃浦灘]에 도착한 다나카가 배에서 내려오자, 준비하고 있던 오성륜이 다나카를 향하여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발사 순간 신혼여행차 상해에 오던 영국 여인이 다나카의 앞을 막아섬으로써, 총탄은 영국 여인에게 명중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 때 계획에 따라 달아나는 다나카를 향하여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폭탄마저 불발하여 거사가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재빨리 현장을 탈출하려고 할 때 중국 경찰이 추격해 오자 공포를 쏘며 주장로[九江路]를 지나 쓰촨로[四川路]로 달아났으나, 즉사한 영국 여인의 남편이 쏜 권총에 맞고 쓰러져 붙잡히고 말았다. 4월 1일 상해 일본 총영사관에서 예심을 마치고 5월 3일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압송되어 9월 25일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검사의 공소로 공소원(控訴院)에서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누차 감형되어 21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회영기념관
이회영(1867 - 1932)는 일제강점기 신민회 중앙위원, 항일구국연맹 의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우당(友堂). 서울 출신. 아버지는 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이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7년 2월 귀국한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4월경 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 등과 같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활약하였다. 한편,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할 것을 협의하여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李相卨)을 책임자로 하여금 교포 교육에 주력하도록 하였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릴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 특사로 파견되자 서전서숙의 경영을 위해 여준(呂準)을 만주로 파견하였다. 그 뒤 1908년 헤이그에서 돌아 온 이상설을 만나기 위해 만주로 찾아가서 앞으로의 진로를 협의한 끝에 국외활동은 이상설이, 국내활동은 자신이 담당하기로 협의하고 귀국하였다. 우선 교육진흥운동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 동지들을 각 학교에 파견하여 교육에 진력하도록 하고, 자신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학감으로 취임, 교육사업에 진력하였다. 1909년 봄 양기탁의 집에서 김구(金九)·이동녕·주진수(朱鎭洙)·안태국(安泰國)·이승훈(李昇薰) 등과 비밀리에 신민회간부회의를 소집하고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를 후보지로 결정하였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자 전가족이 만주로 건너가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하였다. 1911년 교민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1912년 독립군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뒤의 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였다.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Wilson, W.)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자극되어 국내외에서 독립기운이 활발해지자 오세창(吳世昌)·한용운(韓龍雲)·이상재(李商在) 등과 밀의한 뒤, 고종의 국외망명을 계획하고, 시종 이교영(李喬永)을 통해 고종에게 상주하여 쾌락을 얻었으나,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上海)에 수립되었으나 의견 차이로 분란이 끊이지 않자 상해보다는 북경(北京)에 체류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중국에 있던 동지들이 상해로 집결하여 조직한 항일구국연맹의 의장에 추대되었다. 1932년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행동강령으로 일본군기관 및 수송기관 파괴, 일본요인 및 친일파 숙청, 일본외교기관 폭파 등을 결정하고, 중국국민당과 교섭하여 자금과 무기지원을 확약받았다. 그 해 11월 만주에 연락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공작망을 조직하여, 주만일본군사령관 암살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대련(大連)으로 향하던 도중, 대련의 일본수상경찰에 잡혀 악독한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정규 구 묘
김정규(1993 - 1960)는 함남 함흥(咸興) 사람이다. 1913년 간도 용정촌(龍井村)에서 북장로파 계열의 영국인 목사 박걸(朴傑)이 혼춘(琿春)지회를 설립할 때 참여하여 박태항(朴兌恒)·한수현(韓秀鉉)과 함께 선교활동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20일 중국 길림성(吉林省) 혼춘지방의 독립만세운동에 있어서 주동자인 황병길(黃炳吉)의 뒤를 이어 연설하고, 시위에 모인 군중 800여명과 함께 큰 태극기를 앞세우고 군중들은 손마다 작은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행진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1919년 9월 11일 노령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회장인 문창범(文昌範)으로부터 "국제연맹회의에서 한민족의 독립문제를 논의할 때 세계 각국의 여론을 환기하기 위하여 군중들에 의한 시위를 거사하여야 한다."는 밀서를 받고 고일섭(高日燮)·안태국(安泰國)·김한익(金漢益) 등과 함께 협의하여 대한국민의회 본부에 시위운동 후원자의 파견을 요청하는 한편 시위운동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등의 활동을 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손명근 기념비
손명근(1871 - 1942)은 경기도 고양군 뚝도(高陽郡纛島)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주 길림성 관전현에서 박장호(朴長浩)를 도총재(都總裁)로 하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고 사한장(司翰長) 김기한(金起漢)과 함께 동년 11월 국내에 파견되었다. 대한독립단은 국내 각군과 면에 그 지단(支團)을 설치하고 만주와 국내가 서로 연결하여 독립은 목적으로 하는 선전문을 인쇄 배포하고, 단원 및 군자금을 모집함과 아울러 독립군이 국내 진공시 무력항쟁에 호응하도록 하는 계획을 실천하기 위한 사명을 부여하고 김기한 등을 국내에 밀파하였다. 이에 그는 함경도와 강원도 지방에 보낼 '격고국내진신사림(檄告國內縉紳士林)'이라는 격문을 비롯하여 '경고 국내동포중 왜인 관리자', '경고 국내 경향 각부호' 등 인쇄물 다수를 볏자루에 넣어 자기 집으로 보내 보관하였다. 이들은 서울에 총기관인 중앙본부를 설치하고, 각도, 군지단을 설치하기 위하여 1920년 말까지 군자금 모집, 단원 모집 및 인쇄물 배포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탐지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1921년 6월 30일 경성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도록 예심판결을 받았으나, 동년 9월 30일 옥고를 치르고 증거불충분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서진문 집
서진문(1900~1928)은 일본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노동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일제 경찰의 고문에 희생되었다. 서진문은 1926년 신내천현 조선노동조합 집행위원으로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지도하였다. 1927년 고려공산청년회에 입회하여 일본부에 배속되어 한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10월 25일 일왕(日王)의 즉위식인 소위 어대전을 앞두고 횡빈경찰서 형사들이 신내천 조선노동조합 횡빈지부를 습격하였을 때 서진문을 비롯한 한국인 항일운동 지도자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서진문은 잡혀가기 전부터 심장 맥박이 105까지 올라갈 정도로 병세가 위급하였다. 이에 동지들은 서진문의 석방을 일경에 요구하였으나 이를 들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의사를 불러 주지도 않았다. 서진문은 거의 빈사상태가 되어 그해 11월 16일 석방되었고, 그 휴유증으로 출옥 이튿날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신문기사에 따르면 거의 죽어가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서진문은 유치장에서도 얼른 이군을 구원하라! 나는 벌써 살아나지 못하겠다라고 하면서 같이 검거되었던 동지들을 걱정하였다고 한다. 서진문의 직접적인 사망원인은 일제 경찰의 가혹한 고문 때문이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