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TOTAL. 251 건
김석용 묘
김석용(1924-1990)은 1939년 3월에 도일(渡日)하여 1941년 6월 경도(京都)의 도촌토공(島村土工)으로 근무중 궁진(宮津)중학을 졸업하고 토공으로 취직한 전경원(全京元)과 만나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김말도(金末度)·이상문(李相文)등 수명의 동지를 확보하고, 동년 9월부터 여사군(與謝郡)소재 미륵신사 경내에서 누차 회합하고 민족정신고취 및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였다. 그 방법으로는 민족차별의 철폐, 징병제도의 반대, 항공병을 지원해서 일본군 기지 폭격, 일본 경찰에 들어가 대대적인 독립운동전개 등의 계획을 세웠다. 그러던 중 1944년 6월 일경의 토공숙사 일제 수색으로 전경원의 일기장이 발견됨으로써 이러한 활동이 탐지되어 동지들은 모두 붙잡혔다. 그는 심한 고문을 받으며 장기간의 예심 끝에 1945년 9월에야 경도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고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김헌술 묘
김헌술(1924-1988)은 . 일본 경도 중학교 재학중인 1941년 5월에 교유 김영규(金永圭)와 함께 일제의 민족차별에 분개하고, 민족의 자유·행복을 찾기 위해서 독립의 실현이 급선무라는데 뜻을 모으고 항일투쟁을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동년 6월부터 9월까지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의 지도자가 되기 위한 수업을 쌓았는데 한편으로는 일본과 일전을 겨룰 것에 대비하여 군사교육에도 정진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일제의 조선인 징병제도에 반대하여, 만약 징병을 당할 경우에는 조선인 병사들로 하여금 연합군에 투항케 함으로써 일제에 타격을 주어 패전을 촉진케 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앞서 그는 동지포섭에 힘을 쏟아 학우 또는 동향의 지기들에게 일제의 민족차별과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폭로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양하였다. 그러던 중 이러한 활동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1942년 10월에 붙잡혔다. 붙잡힌 후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1943년 6월에 경도(京都)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불경죄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김성국 묘
김성국(1901-1932)은 남만주 일대의 통일된 독립운동 기구인 통의부(統義府)의 활동에 동참해 1924, 5년경에는 중대장 문학빈(文學彬)이 이끄는 통의부 제6중대의 3개 소대 가운데 제3소대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휘하에는 11명의 무장대원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주로 관전현(寬甸縣) 서쪽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26년 여름부터는 손성진(孫聖眞)·마창욱(馬昌郁)·마창수(馬昌洙)·김성호(金成浩) 등의 동지들과 함께 임강현(臨江縣), 안도현(安圖縣) 등지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이다가 중국 경찰에게 붙잡힌 뒤 일제의 삼장경찰서(三長警察署)에 인도되고 말았다. 청진지방법원으로 압송된 그는 1927년 2월 4일 증거불충분으로 출옥하였다. 그 후 만주사변 당시 길림의용군(吉林義勇軍)에서 활약하던 중 일본·중국 혼성군에 붙잡혀 길림(吉林) 부근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두희 묘
김두희(1921-2000)의 이명은 김길남이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30년대 후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교토[京都]의 리츠메이칸[立命館]중학교에 진학하였다. 재학 중이던 1939년에는 학비 마련을 위해 소네자키[曾根]타일주식회사의 직공으로 일하였다. 직공으로 일하면서 일본인의 조선인 차별 대우를 체험하고, 같은 직공으로 일하던 이수영(李秀濚), 양달성(梁達成), 신임휴(申任休) 등과 함께 항일 비밀 결사인 민족부흥회(民族復興會)를 결성하였다. 회원들은 민족부흥회의 목적을 조선 독립으로 정하고, 개별 연구 및 상호 계몽을 통한 민족의식의 앙양과 함께 동포에 대한 차별 철폐 활동을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민족부흥회는 일제 경찰의 취체(取締)를 피하기 위해 표면상 평화회(平和會)라 명명하고, 일본 거주 조선인의 생활 개선과 구제 등을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가장하였다. 1940년 6월 중순까지 수십 차례의 회합을 가졌고, 소네자키타일주식회사 공장 등지에서 일본인으로부터 모별과 압제를 당하고 있는 조선인 직공들을 대상으로, 세계 각국의 독립운동 상황 등을 알리며 동지를 규합하였다. 당시 김두희는 교토 지역의 책임자가 되어 동지 규합 등의 활동을 벌였고, 1940년 3월 무렵에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다가 7월 16일 석방되었다. 석방 후에도 비밀 회합을 가지며 동지 규합 활동을 이어갔으나, 1940년 12월 28일 일제 경찰에게 비밀 결사 활동이 발각되며 다시 붙잡혔다. 이어 1941년 5월 5일 나고야[名古屋]지방재판소에서 징역 3년 집행 유예 5년을 언도받고 풀려났다. 2000년 2월 29일 사망하였다.정부는 1986년에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는 건국 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이경희 공적비
이경희(1880 -1949)는 대구(大邱) 사람이다. 그는 1922년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1923년 3월 중순경 김시현(金始顯)·유석현(劉錫鉉) 등이 총독부(總督府)와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조선은행(朝鮮銀行), 그리고 매일신보사 등을 폭파시키기 위해 폭탄을 국내에 반입하자 이에 참여하여 1923년 3월 15일 김시현 등이 무기와 폭탄을 국내에 들여올 때 같이 갖고 온 혁명선언서(革命宣言書) 및 격문(檄文) 수백 장을 황 옥(黃鈺)으로부터 교부받아, 각도지사(各道知事)와 경찰부(警察部)에 우편으로 발송하고, 서울 시내 곳곳에 살포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 일로 인해 붙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7년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하여, 5월 10일 신간회 경성본부 총무간사 겸 경상북도 지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또한 신간회 산하 밀양청년회(密陽靑年會)를 돌보다가 1928년 11월 11일 밀양경찰서에 의해서 검속(檢束) 당하기도 하는 등 항상 일경의 감시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경희 묘
이경희(1880 -1949)는 대구(大邱) 사람이다. 그는 1922년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1923년 3월 중순경 김시현(金始顯)·유석현(劉錫鉉) 등이 총독부(總督府)와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조선은행(朝鮮銀行), 그리고 매일신보사 등을 폭파시키기 위해 폭탄을 국내에 반입하자 이에 참여하여 1923년 3월 15일 김시현 등이 무기와 폭탄을 국내에 들여올 때 같이 갖고 온 혁명선언서(革命宣言書) 및 격문(檄文) 수백 장을 황 옥(黃鈺)으로부터 교부받아, 각도지사(各道知事)와 경찰부(警察部)에 우편으로 발송하고, 서울 시내 곳곳에 살포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 일로 인해 붙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7년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하여, 5월 10일 신간회 경성본부 총무간사 겸 경상북도 지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또한 신간회 산하 밀양청년회(密陽靑年會)를 돌보다가 1928년 11월 11일 밀양경찰서에 의해서 검속(檢束) 당하기도 하는 등 항상 일경의 감시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손양윤 묘
손양윤(1878 - 1939)은 경북 달성(達城) 사람이다.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항상 조국 광복의 염원을 품고 동지들과 그 방안을 상의하였다. 1916년 채기중(蔡基中)·박상진(朴尙鎭)·노백린(盧伯麟)·김좌진(金佐鎭) 등이 조직한 광복단(光復團)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중 1917년 일경에 체포되어, 1918년 1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이 확정되었다. 1924년 8년형으로 감형됨에 따라 출옥하였으나 그의 의기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출옥 후 만주 길림(吉林)으로 건너가 신민부(新民府)에 가입하였으며, 신현규(申鉉圭)·이병묵(李丙默) 등과 국내에 파견되어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1926년 6월경부터 경남지방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5천여원의 군자금을 신민부에 전달하였으며, 일본인으로부터 현금 5백원, 엽총 2정 등을 빼앗아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지 윤치백(尹致伯)·김보연 등이 만주로 복귀하기 위하여 들어가던 도중 밀정 서(徐)모라는 자의 밀고로 체포됨에 따라, 손봉현(孫鳳鉉)·신현규(申鉉圭)·신양춘(申陽春)·윤창선(尹昌善) 등의 동지가 모두 체포되었다. 그도 서울 태평로에 있던 삼통여관(三通旅舘)에서 동지들과 함께 1928년 7월 30일 체포되었으며, 신현규·신양춘의 두 동지는 일경의 악랄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동년 8월에 재판도 받지 못하고 변사(變死)하였다. 그는 결국 1929년 9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았다가 동년 12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20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10여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940년 말에 중병으로 가석방되었으나 10여 일만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종암 집
이종암(1896 - 1930)은 대구(大邱) 사람이다. 대구공립보통학교(大邱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대구농업학교(大邱農業學校)를 거쳐 부산상업학교(釜山商業學校)에 다니다가 1916년 대구은행(大邱銀行)에 은행원으로 취직한 그는 출납계주임(出納係主任)이 되어 금고 열쇠를 맡아 2년간 재직하였다. 그러나 그는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여 1917년 만주(滿洲)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에 뜻을 둔 동지와 함께 조국광복투쟁을 결의, 비밀결사(秘密結社)를 조직하여 밀양에 거주하던 김대지(金大池)·구영필(具榮泌) 등의 동지를 얻었다. 그는 같은 해 12월 은행 금고 속에 있는 만 구백원의 돈을 꺼내, 동지들과 함께 처음에는 미주(美洲)로 유학코자 하였으나 세계 제1차대전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해(上海)를 거쳐 만주로 갔다. 만주에서 그는 길림성 영안현 동경성(吉林省 寧安縣 東京城)의 간민소학교(墾民小學校)에 주소를 두고 1918년 2월에는 봉천성 통화현(奉天省 通化縣)에 있는 무관학교(武官學校)에 입학하였다. 이어 1919년 3·1독립운동이 발발하자, 직접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교관인 서상락(徐相洛) 등의 동의를 얻어 무관학교를 그만두었다. 이어 1919년 11월 9일 길림성 파호문(巴虎門) 밖에서 김원봉(金元鳳)·이성우(李誠宇)·황상규(黃尙奎) 등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였으며 그와 김원봉은 상해(上海)로 가서 불란서 조계(租界)에 사는 김성근(金聲根)에게 폭탄제조방법을 습득하였다. 그리고 의열단원 곽재기(郭在驥)·이성우(李誠宇) 등은 상해에서 폭탄과 권총을 구입하여 이를 국내로 반입하여 앞으로 있을 거사에 대비하였다. 이종암이 대구은행에서 가져온 돈은 이러한 의열단의 활동자금으로 유용하게 쓰여졌고, 그 일부는 동지인 구영필(具榮泌)에게 전해져 만주 봉천(奉天)의 비밀결사인 삼광상회(三光商會)를 설치하는 자본금으로 쓰여졌다고 한다. 1922년 3월 그는 김원봉·김익상(金益相)·오성륜(吳成崙) 등과 함께 필리핀에서 상해로 오는 일본육군대장 전중의일(田中義一)을 처단하기로 결정하고 전중(田中)이 3월 28일 상해에 상륙할 때 처치하되 차질이 생기면 일본영사관(日本領事館)에서 있을 예정인 연회식 때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거사 당일 전중이 상해의 세관부두로 상륙하자, 세관부두에 김익상과 오성륜 동지가 배치되었으므로 그는 거사의 성공을 빌며 소식을 기다렸으나, 불행히도 전중 암살은 실패하고 두 동지만 일경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1925년 9월 재정사정의 궁핍으로 활동이 힘들어지자 그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을 계획을 세우고, 선전용으로 신채호(申采浩)가 작성한 의열단선언서(義烈團宣言書, 일명 朝鮮革命宣言書)를 지참하고 대구로 잠입하였다. 그곳에서 이병호(李丙浩)의 안내로 이병태(李丙泰)를 만나 자신이 전에 부산금융조합(釜山金融組合)에 예금한 돈을 받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때 이미 일제 경찰의 추적을 받고, 그가 잠시 요양중이던 경북 달성군 달성면(慶北 達城郡 達城面) 이기양(李起陽)의 산장에서 1925년 11월 5일 일경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1926년 12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30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손양섭 추모비
손양섭(1921-1945)은 충청남도 대전 사람으로, 일제강점기 말기 연합군 포로의 감시 요원으로 강제 동원되었다. 일제는 1942년 5월부터 육군성의 계획에 의해 조선군에 한국인 포로 감시원 모집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지원자들은 사실상 모집이 아닌 강제 징집의 형식으로 포로 감시원 일을 맡게 되었다. 손양섭을 비롯한 3천여 명의 청년들은 육군부산서면임시군속교육대(陸軍釜山西面臨時軍屬敎育隊, 통칭 野口부대)에서 2개월간 훈련을 받고, 1942년 8월 동남아시아지역으로 출발하였다. 군무원 등 1,400명은 9월 14일 인도네시아 서부 자바의 딴중 쁘리옥(tanjon priok) 항구에 도착하였고, 손양섭은 일본군의 지시에 의해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손양섭은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와서 2년이 된 1944년 6월 계약이 만료되었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손양섭을 비롯한 한인들을 돌려보내주지 않았다. 당시 일제가 연합군에 의해 패할 것을 전망한 한인들은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기로 하였다. 한인 군무원 가운데 지도적 역할을 하던 이활(李活, 본명 이억관)을 중심으로 중부 자바 세마랑(semarang)주 스모워노(sumowono)라는 고원지대에서 1944년 12월 29일 고려독립청년당(高麗獨立靑年黨)을 결성하였다. 당시 고려독립청년당 암바라와(ambarawa)지구에서는 손양섭(孫亮燮)이 책임자가 되어 노병한, 민영학, 조규홍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던 1945년 1월 3일 암바라와 분견소에서 지하 공작하던 손양섭을 포함하여 한인 6명이 말레이(싱가포르) 포로수용소로 갑자기 전속명령을 받게 되었다. 손양섭은 갑작스런 전출 명령에 대해 조직의 정보가 일본군들에게 누설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여, 노병한, 민영학과 밤을 새워 사후책을 강구하였으나 마땅한 방안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1월 4일, 전출명령에 따라 손양섭 등 전출자들은 세마랑분소로 출발하는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세마랑으로 가는 도중 손양섭, 민영학, 노병학은 자동차를 탈취하여 암바라와의 분견소로 가서 무기고로 들어갔다. 손양섭은 부켄기관총을 들고, 민영학과 노병한은 탄환 3천 발을 가지고 사무실 앞에 세워진 차를 타고 소장 관사로 가서 억류소장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하였다. 그 후 계속하여 일본군 어용상인을 사살하고 형무소에 이르러 형무소장의 사살에 성공하고 잠복하였다. 사건이 확대되자 암바라와 억류소장은 긴급히 세마랑 분소에 연락하여 병력을 요청하여 그날 밤 수십 명이 도착하였다. 암바라와의거에서 형무소장 사살에 성공한 민영학은 하복부와 좌 대퇴부에 총탄을 맞아 치명상을 입어 수수밭으로 들어가 자결하였다. 일본군에 쫓겨서 위생 재료창고 안으로 들어온 손양섭과 노병한은 서로 방아쇠를 당겨 자결하였다. 암바라와의거 이후 고려독립청년당 총령 이활은 제2차 의거를 계획하였으나 중간에서 조직이 발각되어 관련자 10명이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일본군사령부에 끌려가 군사재판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조정환 제단비
조정환(1875-1962). 자는 의경(義卿), 호는 남강(南崗)이고 별칭으로 조진(曺珍)이라는 이름을 썼다. 조정환은 파주에 인성학교를 세워 후진을 기르다가 경술 합방 이후에 아세아 시국변론, 일본 대한정책론, 한국 유신론 등의 책을 지어 개혁과 자강을 역설하였다. 3·1운동 후 만주에 건너가 대한독립단에 가입하고 그 후 조병준, 변창근 등과 함께 민국독립단에 가담하여 자의부장으로 활약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21년 군자금 모금 차 입국했다가 다시 만주로 가서, 1923년 상하이 임시 정부의 국민대표자 회의에 참석하고 다물단을 조직하여 투쟁하면서 북경대학에서 강의도 하였다. 1925년 부친상을 당하여 귀국하였으나 백남훈, 홍성하, 박승철 등과 함께 조선사정연구회를 조직하여 민족주의 운동을 모색하였다. 1927년 미국에 있는 동생에게 우국의 한시 한 수를 보낸 뒤 소식이 두절되었으며 이후 묘소 등에 대한 정보가 없어 확인이 필요하다. 정부에서는 1990년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철수 묘
김철수(1896-1977)는 호는 춘재이며, 일제 강점기 부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행정가이다. 1896년 5월 4일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상삼리 328번지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기장에 살던 매형인 박인표(朴仁杓)가 경영한 사립기장보통학교를 다녔다. 부모가 동래군 좌이면 구포리로 이사하자, 구포의 구명학교[현 구포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부산상업학교[구 부산상업고등학교, 현 개성고등학교]로 진학하여 1913년에 졸업하고, 7월 일본 도쿄 게이오대학[慶應大學]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재동경한국유학생학우회에 가입하였고, 신익희·이광수·장덕수·최팔용·김도연·윤현진(尹顯振)·송계백·백관수 등과 두터운 교분을 맺으면서 『학지광(學之光)』 발간에 참여하였다. 1918년 조선 학회에서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그해 9월에는 최팔용·김도연·이광수·송계백 등과 함께 100여 명의 유학생을 규합하여 비밀 결사인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여 2·8 독립 선언 운동을 준비하였다. 1919년 2·8 독립 선언에 대표 위원으로 참가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6월 26일에 열린 제2심에서 출판법 위반 혐의로 9개월 금고형을 선고 받고 동경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3월 9일 출옥하여 부산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고려상회를 경영하고 있던 박인표가 갑자기 사망하여, 이를 정리하고 고향의 전답을 팔아 부산상사라는 무역 회사를 열고 민족 자본 육성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이 무렵 발흥하던 청년 운동에 뛰어들었다. 1920년 7월 양산청년회를 결성하여 초대 회장에 선출되었고, 12월 2일 조선청년회연합회 총회에서 상임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에는 조선물산장려회에 참가하여 경리부원이 되었다. 이에 조선청년연합회 및 조선물산장려회가 주최하는 순회강연에 강사로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무렵 안재홍(安在鴻)의 권유로 시대일보사의 경제부장을 맡았고, 1928년 3월 신간회 양산지회의 설립에 준비 위원과 검사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김철수의 영향으로 신간회 양산지회의 중심 과제는 협동조합 운동이 되었다. 1936년 이후 일제의 감시와 협박으로 더 이상 활동이 어려워지자 양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에 참여하였고, 독립촉성국민회의 경상남도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1946년 자유민보사 사장을 지냈다. 미군정 하에서 1946년 입법 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47년 제2대 경상남도지사로 임명되었다. 정부 수립 후 1949년 적십자사 경남지사 초대 지사장을 지내고, 1960년 자유당 경상남도당 위원장으로 4월 혁명을 맞았다. 이후 1963년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였고, 노인진흥회를 결성하였으며, 3·1동지회 이사장 등을 지냈다. 1977년 5월 18일 사망하였다. 1980년에 건국 포장, 1990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박재혁 집
박재혁(1895-1921)은 일제강점기 의열단에서 부산경찰서장 하시모도에게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이다.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무역상회의 고용인으로 일하다가, 1917년경부터 상해 등 중국 각지와 싱가포르 등지를 돌아다니며 무역에 종사하였으며, 중국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유를 가졌다. 1920년 8월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과의 연락으로 상해로 가 의열단에 입단하고, 9월 상순 고서(古書) 짐 속에 폭탄을 숨겨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13일 부산에 돌아왔다. 이튿날 부산경찰서로 찾아가 평소 안면이 있던 서장 하시모도[橋本秀平]를 만나 진기한 고서를 보여준다며 봇짐을 풀고 짐 속에 있던 폭탄을 꺼내어 서장을 죽이려는 의도를 밝힌 다음, 폭탄을 던졌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두 사람 모두 중상을 입었다. 중상을 입고 붙잡혀, 1921년 3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과 폭탄으로 인한 상처로 고통을 겪다가 단식을 하던 중 옥사하였다. 1962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