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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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모 기념비
정훈모(1888 - 1939)는 경북 예천(醴泉) 사람이다. 1914년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1919년에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 이상룡(李相龍)독판의 참모로서 활약하였으며, 이후 계속해서 무장항일 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1938년 노령 아르하라(ARKHARA)로부터 삼강성(三江省) 가목사시(佳木斯市)로 귀환하던 중 일만(日滿)혼성군과 교전하다가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고문으로 생명이 위독하여 병보석 되었으나 가목사시 삼남여관(三南旅舘, 主人 : 權孟錫)에서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주진수 기념비(읍내리)
주진수(1875 - 1936)는 일찍이 울진군 원남면(遠南面)에 만흥(晩興)학교를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신교육을 시켰다. 1909년 봄 서울 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신민회(新民會) 간부인 양기탁·안태국(安泰國)·이동녕(李東寧) 등이 민주에 제2의 독립운동기지(基地)를 건설하고자 계획하게 되자, 그는 강원도 책임자로 임명되어 군자금 10만원을 마련하도록 배정을 받았다. 1910년 8월에는 김 구(金九)·양기탁 등과 함께 서울에 총독부에 대립하는 도독부를 설치하였으며, 1911년에는 일제가 조작한 소위 사내(寺內)총독암살사건(일명: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유동열(柳東說)·윤치호(尹致昊)·양기탁·안태국·이동휘(李東輝) 등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간도 이민계획의 실현을 위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던 '안명근(安明根)사건'에도 관여하였다. 출옥후에는 가족을 이끌고 만주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의 추가가(鄒哥家)에 정착하여, 이시영(李始榮)·이상용(李相龍)·이동녕(李東寧)·김동삼(金東三) 등과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는 한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는 등 독립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1919년 9월에는 신참(新站)·황지강(黃地江) 등지에서 임시정부 특파원 전영화(田榮化)와 니콜리스크 정부로부터 파견되어 온 그와 황만영(黃萬榮) 그리고 신참지방의 윤인보(尹仁甫)·신상무(申相武)·안기완(安基完)·이 순(李舜) 등이 모여 미국차관 3백만불의 도입문제와 순회강연 계획 등을 논의하였으며, 그는 니콜리스크 정부의 미국인 고문의 말을 인용하여 "일본인을 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일본국을 적으로 할 것이며, 따라서 일본인을 살해하는 일은 안된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였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연단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1926년 4월에는 정의부(正義府)의 유일당(唯一黨) 촉성에 참여하기 위하여 이규풍(李圭豊)·최소수(崔素水)와 함께 소련에서 길림(吉林)으로 돌아왔으며, 정의부의 양기탁(梁起鐸)·현정경(玄正卿)·곽종대(郭鍾大)·오동진(吳東振)·고활신(高豁信), 천도교의 김봉국(金鳳國)·이동락(李東洛)과 형평사(衡平社)의 이동구(李東求)·송 헌(宋憲) 등이 모여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하였는데 그는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어 정의부의 행정기관으로서 당을 이끌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차이로 고려혁명당은 분열되었으며, 그는 다시 소련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주진수 기념비(매화리)
주진수(1875 - 1936)는 일찍이 울진군 원남면(遠南面)에 만흥(晩興)학교를 설립하여 청소년들에게 신교육을 시켰다. 1909년 봄 서울 양기탁(梁起鐸)의 집에서 신민회(新民會) 간부인 양기탁·안태국(安泰國)·이동녕(李東寧) 등이 민주에 제2의 독립운동기지(基地)를 건설하고자 계획하게 되자, 그는 강원도 책임자로 임명되어 군자금 10만원을 마련하도록 배정을 받았다. 1910년 8월에는 김 구(金九)·양기탁 등과 함께 서울에 총독부에 대립하는 도독부를 설치하였으며, 1911년에는 일제가 조작한 소위 사내(寺內)총독암살사건(일명: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유동열(柳東說)·윤치호(尹致昊)·양기탁·안태국·이동휘(李東輝) 등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또한 간도 이민계획의 실현을 위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던 '안명근(安明根)사건'에도 관여하였다. 출옥후에는 가족을 이끌고 만주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의 추가가(鄒哥家)에 정착하여, 이시영(李始榮)·이상용(李相龍)·이동녕(李東寧)·김동삼(金東三) 등과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는 한편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는 등 독립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1919년 9월에는 신참(新站)·황지강(黃地江) 등지에서 임시정부 특파원 전영화(田榮化)와 니콜리스크 정부로부터 파견되어 온 그와 황만영(黃萬榮) 그리고 신참지방의 윤인보(尹仁甫)·신상무(申相武)·안기완(安基完)·이 순(李舜) 등이 모여 미국차관 3백만불의 도입문제와 순회강연 계획 등을 논의하였으며, 그는 니콜리스크 정부의 미국인 고문의 말을 인용하여 "일본인을 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일본국을 적으로 할 것이며, 따라서 일본인을 살해하는 일은 안된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였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연단에서 쫓겨나기도 하였다. 1926년 4월에는 정의부(正義府)의 유일당(唯一黨) 촉성에 참여하기 위하여 이규풍(李圭豊)·최소수(崔素水)와 함께 소련에서 길림(吉林)으로 돌아왔으며, 정의부의 양기탁(梁起鐸)·현정경(玄正卿)·곽종대(郭鍾大)·오동진(吳東振)·고활신(高豁信), 천도교의 김봉국(金鳳國)·이동락(李東洛)과 형평사(衡平社)의 이동구(李東求)·송 헌(宋憲) 등이 모여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하였는데 그는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어 정의부의 행정기관으로서 당을 이끌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념차이로 고려혁명당은 분열되었으며, 그는 다시 소련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엄주동 추모비
엄주동(1897 - 1974)은 경북 영일(迎日, 현. 포항) 사람이다. 경성고보 교원양성소 재학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1915년 3월 서울에서 이우용(李雨用)·최규익(崔奎翼) 등과 함께 일본인들에게 피탈당하고 있는 각종 산업을 한국인 자신이 부흥시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契)를 조직하고 이진석(李鎭石) 등과 함께 서기로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학생들에게 한국혼을 심어주는 정신적 교육으로 국권회복을 기약하고, 일제의 경제적인 침탈에서 벗어나기 위한 각종 사업을 계획하던 중 1917년 3월 5일 소위 보안법 위반혐의로 체포되었다. 한편 이 일이 있기 전에 그는 대종교에 입교하였으며 1916년 도사교(都司敎) 나 철(羅喆)이 구월산(九月山)으로 봉심(奉審)의 길을 떠나 순국할 때 김두봉(金枓奉)·나주영(羅柱永) 등 5인과 함께 수행하였다. 교주 나 철(羅喆)이 순국한 후에는 만주로 망명, 서 일(徐一) 휘하에서 연락책으로 활동하고, 1920년 청산리(靑山里) 독립전쟁에도 참여하였다고 한다. 1921년 8월에는 상해(上海)로 가 신규식(申圭植)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예관( 觀)이 순국한 후에는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2년에는 간도 용정(龍井)에서 군자금 조달을 위한 미곡상을 경영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인제 공덕비
김인제(1881 - 1962)는 1881년 10월 기계면 봉계리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사서심경(四書三經)에 능했다. 장년이 된 김인제는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읽고 일제에 착취당해 희망조차 잃은 마을을 살리기 위해 34살 때인 1914년부터 2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선진지의 민풍과 산업을 견학했다. 마을로 돌아온 김인제는 주민들로부터 존경받는 김성진을 찾아가 마을을 부흥시킬 것을 의논한 뒤 마을에 성행하던 음주·도박 등 나쁜 풍습을 교정하기 위해 교풍회(矯風會)를 조직해 농업개량과 근검절약을 하는 등 마을 개혁에 앞장섰다. 처음에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점점 근검절약의 풍토가 마을에 조성되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과 상의를 통해 당시 마을의 주산품인 면을 공동판매하고 공동저축을 하는 등 마을 발전에 이바지했다. 또한 업적 중 선구적 백미는 역시 교육이었다. 기언략에 "강육강식의 세계에 맞서 나갈 무기는 단연코 교육이라고' 주장하며 일찍이 서당을 열어 유가문화의 바탕인 한학을 지도하는 한편 문맹퇴치의 일환책으로 개설한 야학운영에도 정신적 후원자가 되어 몽매한 인성을 개도하여 윤상을 체득케하고 삶의 의욕과 질을 높여 드디어 약소민족의 설움을 딛고 궁극적 목표인 자력갱생의 활로를 터득케하였다. 또, 김성진과 함께 주민에게 단책형 묘대, 정조식, 녹비재배, 나락의 건조조제 자급, 비료제조 등을 실시하게 했다. 이로써 각종 농산물의 생산액이 종전에 비해 크게 증가한 것은 물론이고 품질도 매우 향상됐다. 해마다 장족의 발전을 거듭한 결과 근면·자조·협동하는 마을로 되살아났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조선총독부는 전국 보통학교 교과서에 마을 성공사례를 실어 학생들에게 근면·자조·협동정신을 배우도록 했다.
이경채 공적비
이병채(1875-1940)는 관동지방에서 활약한 관동9군도창의소의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이다.전라남도 고흥 출신이며.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공포 이후 의병이 각지에서 일어나자 1896년 민용호(閔龍鎬)가 중심이 되어 설치한 관동9군도창의소(關東九郡都倡義所)의 의병장이 되어 최중봉(崔重峰) 등과 관동지역의 사림 및 백성들에게 포유문(布諭文)을 보내고 그 기세를 높여 관동9군도창의소의 의병진이 관동지방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그러나 그 해 가을에는 관군의 포위망에 싸여 부득이 그 활동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1905년 서울 남산골에서 의병 1,000여명을 모집하여 일본군과 일대격전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국권이 침탈된 뒤 1913년에 임병찬(林炳瓚)이 중심이 되어 구성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에서 전라남북도순무중군에 임명되었다. 이후 만주 간도로 망명하여 무장투쟁에 참여하였다.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박희광 상
박희광(1901 - 1970)은 일제강점기 봉천성에서 보민회와 일민단 등 친일파 숙청작업을 담당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밀양(密陽). 일명 박상만(朴相萬, 朴尙萬). 경상북도 선산 출신. 박윤하(朴胤夏)의 아들이다. 1912년 만주로 건너가 1919년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입, 제5중대에 배속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봉천성(奉天省)에는 일제의 앞잡이 단체인 보민회(保民會)와 일민단(日民團) 등이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동포들의 단합을 해치고 있었는데, 대한통의부의 명령에 따라 김광추(金光秋)·김병현(金炳賢)과 함께 이들의 숙청작업을 담당하였다. 1924년 6월 만주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일제 앞잡이였던 보민회장 최정규(崔晶奎)의 집을 습격, 그의 장모와 서기 박원식(朴原植)을 사살하였다. 이어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김병현과 함께 중국경찰에 붙잡혀 일본경찰로 인도되었다. 관동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여순고등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에서 18년간 복역한 뒤 1943년 출옥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우병기 추모비
우병기(1903~1944)는 1903년 11월 10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서 태어났다. 일본 도쿄에서 조선문제시국연구회(朝鮮問題時局硏究會)를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호는 월해(月海)이다.우병기는 1920년대 초 윤상태(尹相泰)가 달성군 월배면[현 달서구 상인동]에 세운 사립 덕산학교(德山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26년 일본 도쿄[東京]로 이주하여 양산제조업에 종사하였으며, 1939년 11월경부터 5명의 동지와 함께 조선문제시국연구회를 조직하고 조선 독립을 도모하였다. 우병기 등은 1941년 8월까지 8회에 걸쳐 모임을 가졌으며, 진천순모(鎭川淳模)[창씨명]·태원용(太原勇)·방산상봉(方山祥鳳)·봉곡태을(蜂谷台乙)·결성시백(結城時伯)·전윤필(全允弼) 등을 새로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모임에서는 주로 중일전쟁 이후의 조선 문제와 통제경제 등에 관한 토론을 벌였고, 향후 시국 대책을 논의하였다. 1941년 12월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재일 한인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었다. 그 와중에 조선문제시국연구회 모임이 탄로나 우병기 등 여러 회원들이 체포되었다. 우병기는 1942년 3월 5일 함경북도 청진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에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고, 10월 26일 복역 중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우병기의 공적을 기려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병욱 송덕비
김병욱(1888 - 1925)은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인 대한독립광정단(大韓獨立光正團)에 소속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대한독립광정단은 중국 장백현(長白縣)에서 성립된 통합 독립군단으로 1922년 4월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대진단(大震團),태극단(太極團),광복단(光復團)의 일부가 통합하여 조직하였다. 임강현(臨江縣),무송현(撫松縣) 등 압록강 주변 지역을 근거지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것과 함께 이주한인의 산업발전을 도모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후 광정단은 1924년 초부터 조직의 체제를 위원제로 바꾸고 이주한인을 대상으로 한 자치활동에 치중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다는 방침 하에 통의부(統義府),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성단(義成團),고본계(固本契) 등 7개 독립운동 단체들과 통합운동을 전개해 1924년 11월 군정부(軍政府)인 정의부(正義府)에 합류하였다. 김병욱은 1921년 12월 봉천성(奉天省) 장백현(長白縣)에서 광복단(光復團) 장백지단장(長白支團長)을 역임하고, 동단(同團) 대표로 1922년 1월 신한청년회(新韓靑年會) 조직 논의에 참여하였다. 1924년 대한독립광정단 장백지단(長白支團) 지방대장(地方隊長)으로 활동하였으며, 1925년 동단(同團) 총무(總務)로 활동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학이 동상
정학이(1913~1934)는 경북 달성(達城) 사람이다. 1928년 4월부터 동년 9월까지 일본 대판(大阪)에서 대판지구 교포의 인권보호와 친목을 위한 단체를 결성하여 지하실에 인쇄시설을 갖추고 항일조국독립을 위한 벽보를 작성하고 인쇄물을 대판 일대에 배포하였다. 1933년 9월 2일 대판(大阪)에서 피검되어 동년 12월 27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대판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34년 11월 3일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동하 묘
이동하(1875 - 1959)는 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일찍이 서울 계산학교(桂山學校) 교원, 대구 협성학교(協成學校) 교감 등을 역임하였으며, 보문의숙(寶文義塾)을 창립하여 수백명의 청년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점당하자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11년에는 박은식(朴殷植)·윤세용(尹世茸)·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윤세복(尹世復)·김동삼(金東三)외 40명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망명한 후에는 윤세복과 함께 환인현(桓仁縣)에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하여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대종교를 신봉하였다. 이어 흥경현(興京縣)에 흥경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흥경·환인 등의 동포들을 위한 자치기구를 조직하여 회장으로서 일하였다. 1919년 봉천(奉天)에서 체포된 이후에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고 하나 확실한 기록은 발견할 수 없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서달수 묘
서달수(1920 - 1992)는 경북 월성(月城) 사람이다. 1938년 3월에 도일하여 일본대학(日本大學) 정치과에 재학중, 일인의 한국학생차별과 재일교포에 대한 가혹한 처우에 민족적 분개심을 갖고 항일의식을 길렀다고 한다. 그후 그는 동교생 김덕중(金德中)·김홍구(金鴻九) 등과 함께 항일결사 비밀동지회를 조직하였는데 동회는 동경재류 유학생의 단결을 통한 독립사상 고양에 목적을 둔 비밀결사로서 표면상으로는 학술·문예·체육부 등을 두어 학술연구 단체로 위장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동지포섭에 힘을 쏟는 한편 토론회 및 발표회를 개최하면서 항일활동을 벌였다. 그러던 중 동회의 활동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1941년 1월에 붙잡혀 곧 국내로 이송되었다. 그후 그는 1941년 11월에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