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TOTAL. 251 건
남자현 기적비(호국공원)
남자현(1872 - 1933)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군사기관과 농어촌을 순회하며 독립정신을 고취시킨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활약하는 한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각 단체와 군사기관, 농어촌을 순회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동만주 12곳에 교회와 예배당을 세워 전도하였으며, 10여 곳에 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여성을 계몽하는 데도 힘썼다. 또한, 남만주 각지를 순회하면서 동포간의 단합과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활약하였다. 1924년 채찬(蔡燦)·이청산(李靑山) 등과 총독 사이토[齋藤實]를 암살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마침 그때 길림(吉林)주민회장 이규동(李圭東), 의성단장(義成團長) 편강렬(片康烈)·양기탁(梁起鐸)·손일민(孫一民) 등이 주동이 되어 재만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발기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크게 공헌하였다. 1928년 길림에서 김동삼(金東三)·안창호(安昌浩) 등 47명이 중국 경찰에 검거되자 지성으로 간호하며 석방운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31년 김동삼이 하얼빈[哈爾濱]에서 붙잡히자 그를 탈출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932년 국제연맹 리튼조사단이 하얼빈에 오자, 흰 수건에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조사단에 보내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33년 이규동 등과 주만일본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죽이기로 하고, 동지와의 연락 및 무기운반 등의 임무를 띠고 걸인노파 차림으로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를 지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6개월 동안 갖은 혹형을 받다가 단식투쟁을 전개하고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하얼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엄순봉 기적비(호국공원)
엄순봉(1906 - 1938)의 일명은 엄형순이며, 일제강점기 남화한인청년연맹, 한족총연합회, 재만주조선인 아나키스트 연맹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집안이 빈궁하여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던 중 생계유지를 위해 1923년 만주로 건너갔다. 농업노동에 종사하다가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이 발발하자 안주할 땅을 찾아 중국땅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상해(上海)부근 남상(南翔)의 입달학원(立達學院) 교사 유자명(柳子明)을 만나게 되면서 남상에서 5리쯤 떨어진 남당(南塘)에서 농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무정부주의 색채가 짙어지게 되었다. 1932년 12월 상해 프랑스조계내의 복이리로정원방(福履理路亭元芳)에서 백정기(白貞基)·원심창(元心昌) 등을 만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3년 5월 오면직(吳冕稙)·주열(朱烈)·안경근(安敬根)과 함께 일제 영사관 밀정 이종홍(李鐘洪)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8월 1일 정화암(鄭華巖)과 함께 105인사건에 연루되었던, 자칭 애국자 옥관빈(玉觀彬)이 당시 상해에 와서 일본 관헌과 내통하고 있음을 알고, 그의 사촌형인 옥성빈(玉成彬)의 집을 찾아 가는 것을 권총으로 처단하였다. 1934년 3월 초순, 당시 아리요시[有吉明] 공사가 무정부주의자들을 탄압하고, 또한 장개석(蔣介石)을 4,000만원으로 매수하여 만주를 포기하게 하고 열하에서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하자,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공사가 일본으로 이 문제를 협의하러 출발하기 전에, 3월 17일 당시 일본인이 경영하던 고급음식점에서 송별회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래서 백정기·이강훈·원심창 등 3명으로 하여금 부근의 중국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살해하도록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어 1935년 3월 25일 이규호(李圭虎)와 함께 정화암·이달(李達)·전이방(田理芳) 등과 협의하여 상해조선인거류민회 부회장인 이용로(李容魯, 일명 李榮魯)가 일본총영사와 내통함을 알고 집으로 찾아가 처단하였다. 거사 직후 붙잡혀 1936년 3월에 사형언도를 받았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최봉환 추모비
최봉환(1895 - 1937)은 영주에서 만주 장백현 14도구로 이주하였다. 1918년경 14도구에서 포목상을 운영하며 대한광복단에 군자금은 물론 포목 상점의 취급 품목인 의류 등을 제공하였다. 대한광복단은 1915년 7월 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결성된 단체로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 달성을 목적으로 조직된 무장독립운동 단체였다. 본부 총사령 박상진(朴尙鎭)[1884~1921의 지휘 아래 만주에는 이석대(李奭大)가 부사령으로 임명되었으며, 이석대가 순국한 뒤에는 김좌진(金佐鎭)[1889~1929]이 파견되었다. 12월에는 우재룡(禹在龍)[1884~1955]이 길림(吉林)에서 주진수(朱鎭洙)[1878~1936] 등과 만주 본부의 성격을 갖는 길림광복회를 결성하고 활동하였다. 경상북도 영주 지역의 잡화상 대동상점(大同商店)이 대한광복단의 거점이자 자금 창구의 역할을 하였듯이, 최봉환의 포목상도 만주 장백현과 관련된 대한광복단원의 비밀 모임 장소와 단원들의 활동 자금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활동을 하던 중 1923년 8월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전투 끝에 체포되었다. 최봉환은 국내로 호송되어 1924년 12월 9일 함흥지방법원 북청지청에서 1919년 제령 7호 「공갈·가택침입·방화미수·총포화약류취체령 시행규칙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최봉환은 출옥 후 옥고 후유증으로 고초를 겪다가 1937년 7월 6일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최봉환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김상률 추모비
김상률(미상 - 1923)은 1919년 4월 15일 한말 의병장 출신인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 등이 중심이 되어 유하현 삼원보 서구 대화사에서 결성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김승렬(金承烈)이라고도 불린다. 동지 5명과 함께 친일기관인 보민회(保民會)를 습격하는 등 친일파 제거에 진력하던 김상률은 1920년 9월 24일 동지 4인과 함께 평북 의주군 사산동 소나무 숲에서 일본 경찰과 충돌하였으며, 이어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이동순(李東順)의 밀고로 일경과 교전하였다. 1921년 3월 중순에는 압록강 유초도에 있으면서 교통국장 백승서(白承瑞)와 함께 안동현 일본영사관과 은행을 습격하고자 협의하던 중 일경 42명의 공격을 받아 반격하다가 밀선을 타고 탈출하였다. 1923년 2월 전덕원(全德元) 계열의 의용군이 의군부(義軍府)를 결성하자 김상률은 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며, 1923년 8월경 유격대장 이경일(李京日)의 지휘 하에 동지 50명과 함께 평북 의주군 청성진 주재소를 습격하다가 피체되어 단식 투쟁을 하다가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손병헌 추모비
손병헌(1870 - 1946)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1년 10월경 봉천성 환인현(桓仁縣) 지방에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관련된 한교공회(韓僑公會)를 재건하여 총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2년 8월 환인현 남구(南區) 마권자(馬圈子)에서 무장독립군인 통군부(統軍府) 등 8개 단체대표가 모여 통의부(統義府)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윤세용(尹世茸)·이장녕(李章寧) 등과 함께 참모부 참모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후 1926년부터는 간도 용정(龍井)에서 대성(大成)중학교의 교사로 민족교육을 실시하며 후진양성에 힘썼다고 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규식 추모비
정규식(1920 - 1950)은 경북 영천(永川) 사람이다. 1941년 8월 일본 대판(大阪)에 소재한 대판공학교(大阪工學校)에 재학하면서 대판시 북구(北區)의 신문배달원 민춘기(閔春基)를 만나 민족해방을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고 민족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방편으로 『한국근대정치사』,『삼민주의(三民主義)』등 민족운동 관련서적을 탐독하면서 중국혁명의 대부 손문(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에 착안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여 한국의 삼천만 민중을 자각·분기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또한 1942년 8월 동 신문점에 최문전(崔文典)이 고용되자 그를 동지로 가담시키고 9월 앵궁공원에서 회합하여 "한국 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중략) 한국 청년층의 의식 선봉분자를 결집하여 독립혁명의 중핵 모체가 될 비밀결사를 조직해서 내외에서 조국 독립에 정진하고 있는 동지, 그 중에서도 만주지방을 본거지로 활동하고 있는 독립군과 연락하고 일본이 대동아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하고 있는 호기를 놓치지 말고, 한국 민중으로 하여금 독립혁명투쟁에 궐기시켜 일거에 목적을 완수해야 한다"는 근본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동지 획득과 동포에 대한 지도 계몽을 당면 목표로 설정한 그는 대판지역 한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세계 정세와 한국통치문제를 설파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함께 1942년 8월 대구사범학교에 재학 중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붙잡혔던 서산옥제(西山玉濟)와 연락하고 9월 상순 동인과 대판에서 회합하여 비밀리에 독립혁명의 중핵 모체인 비밀결사를 조직하려다 발각되어 10월 20일 일경에 붙잡혔다. 1943년 대판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12월 10일 형기가 종료되어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원대 집
이원대(1911 - 1943)는 경상북도 영천(永川) 사람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하고 국외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33년 6월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 국내공작원 안병철(安炳喆)의 알선으로 독립투쟁을 결심하고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33년 남경(南京) 조선의열단 간부학교(幹部學校)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6개월간 소정의 군사훈련을 받았고, 1934년 3월에는 중국군관학교(中國軍官學校) 낙양분교(洛陽分校)에 입교하여 훈련을 받았다. 1935년 그는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남경(南京), 상해(上海) 등지를 왕래하면서 지하공작을 펴다가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나자 중국 경찰에 협조하여 중국인으로 간첩활동을 자행하는 자들을 미행하거나 색출하여 체포 숙청케 하는 다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1936년 재남경(在南京) 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으며, 1938년 1월에는 장사대회전(長沙大會戰)에 참전하였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는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에 배속되어 대적선무공작(對敵宣撫工作), 섬멸작전, 밀정 숙청 등 작전업무에 종사하였는데, 그는 제1구대에 소속되었다. 1943년에는 산서성 부곡(山西省府谷)에서 중대장으로 소속 부대원을 진두 지휘하고 일본군과 격전을 전개하다가 생포되어 북경(北京)으로 압송되었다. 동년 6월 17일에 잔혹한 고문으로 인하여 북경 내일구 동창호동(北京內壹區東昌湖同) 1호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원대 묘
이원대(1911 -1943)는 경상북도 영천(永川) 사람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하고 국외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33년 6월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 국내공작원 안병철(安炳喆)의 알선으로 독립투쟁을 결심하고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33년 남경(南京) 조선의열단 간부학교(幹部學校)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6개월간 소정의 군사훈련을 받았고, 1934년 3월에는 중국군관학교(中國軍官學校) 낙양분교(洛陽分校)에 입교하여 훈련을 받았다. 1935년 그는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남경(南京), 상해(上海) 등지를 왕래하면서 지하공작을 펴다가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나자 중국 경찰에 협조하여 중국인으로 간첩활동을 자행하는 자들을 미행하거나 색출하여 체포 숙청케 하는 다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1936년 재남경(在南京) 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으며, 1938년 1월에는 장사대회전(長沙大會戰)에 참전하였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는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에 배속되어 대적선무공작(對敵宣撫工作), 섬멸작전, 밀정 숙청 등 작전업무에 종사하였는데, 그는 제1구대에 소속되었다. 1943년에는 산서성 부곡(山西省府谷)에서 중대장으로 소속 부대원을 진두 지휘하고 일본군과 격전을 전개하다가 생포되어 북경(北京)으로 압송되었다. 동년 6월 17일에 잔혹한 고문으로 인하여 북경 내일구 동창호동(北京內壹區東昌湖同) 1호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원대 추모비
이원대(1911 -1943)는 경상북도 영천(永川) 사람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하고 국외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33년 6월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 국내공작원 안병철(安炳喆)의 알선으로 독립투쟁을 결심하고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33년 남경(南京) 조선의열단 간부학교(幹部學校)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6개월간 소정의 군사훈련을 받았고, 1934년 3월에는 중국군관학교(中國軍官學校) 낙양분교(洛陽分校)에 입교하여 훈련을 받았다. 1935년 그는 낙양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남경(南京), 상해(上海) 등지를 왕래하면서 지하공작을 펴다가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中日戰爭)이 일어나자 중국 경찰에 협조하여 중국인으로 간첩활동을 자행하는 자들을 미행하거나 색출하여 체포 숙청케 하는 다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1936년 재남경(在南京) 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으며, 1938년 1월에는 장사대회전(長沙大會戰)에 참전하였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는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에 배속되어 대적선무공작(對敵宣撫工作), 섬멸작전, 밀정 숙청 등 작전업무에 종사하였는데, 그는 제1구대에 소속되었다. 1943년에는 산서성 부곡(山西省府谷)에서 중대장으로 소속 부대원을 진두 지휘하고 일본군과 격전을 전개하다가 생포되어 북경(北京)으로 압송되었다. 동년 6월 17일에 잔혹한 고문으로 인하여 북경 내일구 동창호동(北京內壹區東昌湖同) 1호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봉필 기념비
박봉필(1908 - 1945)은 경상북도 예천 출신이다. 1931년 3월 남북 만주 각지에 흩어져 있는 한인 농민의 운동단체인 동성한교농민회(東省韓僑農民會)가 조직될 때 준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4년 만주에서 김시현(金始顯)이 조직한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여 활동하였으며, 1941년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쟁하다가 붙잡혔다. 1942년 만주의 신경고등법원(新京高等法院)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고 장춘형무소(長春刑務所)에 복역 중 일본 관동군(關東軍)에 의하여 총살당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권원하 활동거점(병암정)
권원하(1898 - 1936)는 경북 예천(醴泉) 사람이다. 1919년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동년 8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소재 신흥무관학교 제4기생으로 졸업하였다. 1920년 2월 군정서(軍政署)의 밀명을 띠고 입국하여 군자금 조달 및 무관생도 모집 등 활동을 하다가 동년 7월에 최재화(崔載華)·조강제(趙强濟)·배승환(裵昇煥)·김영철(金永哲) 등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조선일보 지국장을 지내면서 은밀히 항일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7년 6월에는 김상기(金相起)·남병태(南炳台)·박창호(朴昌鎬)·장대발(張大發) 등과 함께 예천군내 청년대회를 개최하고 신간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결의하는 등 구국운동을 하였다. 그는 예천청년동맹회의 집행위원으로서 전예천청소년운동(全禮泉靑少年運動)의 통일을 기하여 계몽운동에 주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원하 독립기념비
권원하(1898 - 1936)는 경북 예천(醴泉) 사람이다. 1919년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동년 8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소재 신흥무관학교 제4기생으로 졸업하였다. 1920년 2월 군정서(軍政署)의 밀명을 띠고 입국하여 군자금 조달 및 무관생도 모집 등 활동을 하다가 동년 7월에 최재화(崔載華)·조강제(趙强濟)·배승환(裵昇煥)·김영철(金永哲) 등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조선일보 지국장을 지내면서 은밀히 항일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7년 6월에는 김상기(金相起)·남병태(南炳台)·박창호(朴昌鎬)·장대발(張大發) 등과 함께 예천군내 청년대회를 개최하고 신간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을 결의하는 등 구국운동을 하였다. 그는 예천청년동맹회의 집행위원으로서 전예천청소년운동(全禮泉靑少年運動)의 통일을 기하여 계몽운동에 주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