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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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 전시관
테일러의 본업은 광산업이었다. 1919년 2월 28일 우연히 조선호텔을 들렀다가 고종황제의 국장 취재를 맡아줄 사람을 찾는다는 듣고 통신원(기자)의 일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그날 테일러의 아들이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났고 그는 간호사들이 외국인 전용 병실 침대 밑에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숨기는 것을 목격한 뒤, 이를 입수해 보도하여 한국의 독립운동 소식을 세계에 알렸다. 독립 운동뿐만이 아니라 3·1운동 관련 기사로 한국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렸던 테일러는 3월 3일 치러진 고종의 국장도 취재했다. 테일러는 고종의 국장 취재 이후 3·1운동 관련 후속 보도를 이어갔다. 그는 4월 16일 일본군이 3·1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 교회에서 주민들을 학살한 '제암리 학살사건’ 현장을 찾아 취재했다. 그의 기사는 뉴욕타임즈 4월 24일자에 ‘일본군이 한국인을 학살했다고 전한다(Say Japanese Troops Massacred Koreans)’ 제하 기사로 게재됐고 일본에서 발간되던 영자지 ‘재팬 애드버타이져(The Japan Advertiser)’ 4월 27일과 29일자에도 보도됐다. ‘제암리 학살사건’ 외에도 테일러는 3·1운동을 주도했던 독립투사에 대한 재판도 취재했다. 동아일보 1920년 7월 13일자에 실린 손병희 선생(1861~1922) 등 독립투사 재판 관련 기사에는 “신문기자석에 처음으로 서양 사람 한 명이 들어왔다. 이 사람은 재판의 광경을 제일 먼저 세계에 소개할 미국 연합통신사의 통신원 테일러 씨더라”고 게재돼 있다. 테일러는 1923년 종로구 행촌동 내, 권율 장군의 집터로 알려진 곳에 붉은 벽돌집을 짓고 조선에서의 삶을 영위하지만 일본제국주의가 정점에 치닫던 1942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 당한다. 테일러는 일본의 패망 이후, 미국 정부와 미군정에 편지를 보내며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 노력하지만 1948년 6월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정주해 공적비
정주해(1892~1942)는 충북 괴산 사람이다. 1919년 3월 괴산에서 있었던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후 이청천(李靑天)부대에 참가하여 노령 이만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부터 1930년 5월초까지는 하얼빈도외(哈爾濱道外)에서 동성호(東省號)라는 여관을 경영하면서 독립운동의 연락처로서 활용하였으며, 동년 5월 1일 하얼빈일본영사관 습격사건에 관련되어 일경에 검거되었다. 1942년 11월에 대종교 하얼빈시 안평가(安平街)의 서무사원으로 일경의 대종교 탄압시 대종교 간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고문으로 죽을 지경에 처하여 가석방된지 5일만에 하얼빈시 안평가에서 영면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호암 집
박호암(1912~1984)은 전남 장흥 사람이다. 1929년 4월 숙부 박노영(朴魯泳)을 찾아 부산에서 상해로 건너갔으며, 이곳에서 강만 중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1934년 봄 중국군관학교 낙양 분교에 입교하여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한국혁명군인회에 참가하였다. 1935년 4월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남경 에서 조직된 조선민족 혁명당에 입당하였으며, 특수공작 임무를 띠고 북경·천진 지구로 파견되었다. 북경에서 오광선(吳光鮮)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다가, 1936년 5월 박태양(朴泰陽)·윤여복(尹汝福)·홍종민(洪鍾民) 등 동지들과 함께 천진(天津)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 본국으로 압송된 그는 1936년 12월 14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받고 풀려났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공적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석영 신흥상회
이석영(1855-1934)은 1855년(철종 6년) 이유승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서른 살이 되던 1885년에 영의정을 지낸 거물급 관료이자 한양 인근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자였던 친척 이유원의 양자(養子)로 입적되었다. 연로한 양부 이유원은 3년 뒤 세상을 떠났고, 양부의 재산은 대부분 이석영에게 상속되었다. 구한말 10대 부자, 한양 3대 부자로 꼽히던 이유원의 재산을 상속받은 이석영은 자연히 거부가 되었다. 1910년, 완전히 국권을 빼앗긴 뒤인 9월의 어느 날, 회의에서 여섯 형제는 전 재산을 처분해 일가 전체가 만주로 떠나기로 결의한다. 일제의 눈을 피해 헐값에 처분한 재산은 약 40만 원으로, 이 재산의 대부분은 이석영 선생이 소유하던 땅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석영은 많은 재산을 독립군 자금으로 내놨고 그 돈이 씨앗이 되어 서간도 삼원포에 경학사가 창립되고, 신흥무관학교(신흥강습소)가 설립됐으며,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와 동포들이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에게 1991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정철수 집
정철수(1924~1989)는 1943년 12월 학도병으로 강제 징병되어 중국(中國) 산동성(山東省) 제남(濟南)에 배치되었으나, 곧 탈출하여 항일투쟁 근거지인 태항산(太行山)으로 가서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에 참여하였다. 1944년 9월 화북(華北)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수료하고, 1945년 1월 조선의용군 화북조선인민위문단(華北朝鮮人民慰問團) 대표로 태행구(太行區) 지역을 순회하면서 조선인민을 위로하였다. 정철수는 '조선인민은 해방구 군민들과 함께 작전(作戰)하여 철저히 일본파쇼를 소멸하고 중한(中韓)인민의 해방을 위해 분투할 것을 희망'한다고 역설하였다. 해방 이후 길림시(吉林市)에서 조선중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을 취임하는 등 조선동포를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재수 집
한재수(1912~미상)는 경북 성주 출신으로, 이명은 한지성이다. 그는 1931년 대구상고를 졸업한 뒤, 바로 양친에게 독립운동의 뜻을 밝히고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 국민당의 인재양성 학교인 중앙정치학교에서 4년 수학하고, 1938년에 약산 김원봉이 의열단을 해산하고 만든 조선의용대에 합류해 정치조 선전주임과 외교주임 등을 지냈다. 1942년에는 김원봉 등과 함께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지역 의원으로 선출됐다. 1943년 8월부터는 2년간 한국광복군에서 영국군 요청으로 인도와 미얀마 대일 전선에 파견한 인면전구공작대(대원 9명) 대장으로 활약했다. 영국군을 도와 일본군에 대한 대적선전·포로심문·문건번역 등과 같은 작전을 펼친 이 공작대는 광복군이 연합군과 함께 대일 군사작전을 펼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정율성 집
정율성(1914~1976)은 전라남도 화순군에 거주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음악가이다. 부친을 따라 1917년 광주에서 화순으로 이주하였고, 1922년 능주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24년 다시 광주로 이주하면서 숭일소학교에 입학하여 1928년 졸업하였다. 이듬해 전주 신흥 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1933년 의열단 호남 지역 모집책인 셋째형 정의은(鄭義恩)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제2기생으로 입학하였고 졸업 후에는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여러 독립운동을 펼쳤고 난징과 상하이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첩보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김좌진 유적지
1889년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출생하였다. 집안은 부유한 명문대가 였으며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할 정도로 진취적 개화사상이 강하였다. 1905년 서울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을사늑약 체결 이후 국권회복의 신념을 가지고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국운을 바로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1907년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참여하면서 1909년 《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하였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투옥되어 2년 6개월 간 복역하였다. 1915년 비밀결사 조직 대한광복회에 가입했고, 1916년에는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도 활동하였다. 1917년 대한광복회의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었으나, 예심에서 면소판정으로 석방되었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으며, 대한광복회 조직이 와해되면서 체포 위기에 처했으나 만주에 있어 체포는 면했다. 그 해 12월 무오(戊午)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년 대한정의단의 기반 위에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를 왕칭현[汪淸縣]에 두고 5분단(分團)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광복운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한 뒤, 그 기관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이어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여 사관훈련과 무기입수에도 힘썼다.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한 김좌진 휘하의 독립정예군은 만주 일대에서는 가장 막강한 실력의 군대로, 1920년 이후 10여 년 간 본격적인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靑山里)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나중소(羅仲昭:참모총장)·박영희(朴英熙:부관)·이범석(李範奭:연성대장) 등과 함께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마록구(馬鹿溝) 등지에서 일본군과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일시에 섬멸하였다. 이를 청산리전투라 하여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전쟁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다. 그 후 부대를 이동, 헤이룽강[黑龍江] 부근으로 전진하여 국민회군의 안무(安武), 도독부군의 최진동(崔振東) 등과 연합하고 대한독립군단을 결성,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일본군의 격렬한 보복작전의 전개로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다가 이듬해 헤이허[黑河]사변으로 타격을 받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간부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1927년 만주의 신민부·참의부·정의부의 3부를 통합하려다 실패하자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 단일단결성을 재촉하였다.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회 김봉환(金鳳煥)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김규흥 집
김규흥(1872~1936)은 충북 옥천(沃川) 사람이다. 1919년 임시정부의 파견원으로 김규식(金奎植)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0년대 초 북경에서 흥화실업은행(興華實業銀行)을 세우며 무장투쟁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 1908년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되자 임시정부에 참가하였으며, 한국 독립을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던 김규식을 지원하고자 파리로 파견되었다. 그는 파리에서 김규식 등과 함께 한국의 독립문제를 국제사회에서 보장받기 위해 힘을 쏟았으나, 열강의 외면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파리강화회의 이후 중국에 돌아온 그는 북경을 활동 무대로 삼아 박용만(朴容萬) 등과 함께 무장투쟁노선에 입각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무장투쟁방략을 추진한 군사통일회의를 주도하던 박용만 등은 대조선국민군(大朝鮮國民軍)을 조직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이를 위해서는 자금의 확보가 필요한 일이었다. 김규흥은 그와같은 무장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1921년 박용만과 함께 흥화실업은행(興華實業銀行)을 설립하였다. 흥화실업은행은 겉으로는 금융기관을 표방하였으나, 실은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 위한 방편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이들은 주식금 모집을 위장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모집된 자금으로 이들은 북경과 만주지역에 토지를 구입하는 한편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동지들을 불러모아 경작케 하면서 농한기에는 훈련을 실시하여 점차 각 군사단체를 통일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23년 대규모의 주식금 모집 계획이 뜻과 같이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한인사회의 건설 및 군사양성의 계획을 달성하지는 못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장호 묘
박장호(1850~1922)는 1905년 소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국권이 침탈되자 1906년 홍천에서 거의하여 관동의병의 영도자로서 활약하였으며 1907년에는 운강 이강년(雲岡李康秊)과 함께 연합하여 계속 일군과 대전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조국이 강점되어 국내에서의 항쟁이 불가능해지자 계속적인 투쟁을 위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에는 3·1독립운동이 일어나 국내로부터 도만해오는 청년들이 수십만에 이르자 동년 4월 15일 각지에 산재해 있는 의병영수·유림수뇌·보약사(保約社)대표·농무계(農務契)·포수단(砲手團)대표 등 560여명이 유하현 삼원보 서구대화사(柳河縣三源堡西溝大花斜)에 회집하여 종래의 개별적인 행동을 지양하고 단일체로 통합하여 체계화한 항전을 전개하고자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때 그는 대한독립단의 최고책임자인 도총재(都總裁)에 추대, 부총재 온당 백삼규(溫堂白三奎), 총단장 조맹선(趙孟善), 군사부장 전덕원(全德元) 등의 간부를 임명하고 결사복국(決死復國)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이를 위해서 각현에 지단(支團)·분단(分團)을 설치하고 보민회·강립단 등 친일단체의 숙청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대한독립단은 년호문제로 기원 독립단과 민국 독립단으로 분열되었는데 그는 전덕원(全德元)·이웅해(李雄海)·김평식(金平植) 등과 같이 기원독립단 즉 구왕조(舊王朝)에 충성하는 복벽운동(復酸運動)에 주력하는 수구파(守舊派)에 속하였다. 그러나 후에는 임시정부와 공동보조를 취하게 되어 1921년 5월에는 군사활동을 단일화시키기 위한 광복군총영을 설립하게 되니 이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총지휘하던 그는 일제가 파견한 밀정에 의하여 이역땅에서 암살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동희 묘
최동희(1890~1927)는 서울 종로 사람이다. 천도교 제2세 교주인 해월 최시형(崔時亨)의 아들이다. 1919년 이채우(李采雨)·김영순(金永淳)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천도교 의정회 혁신파에 소속되었다가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활동하였다. 1922년 7월에는 천도교 중심의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부위원장 겸 외교부장으로서 이종훈(李鍾勳)·홍병기(洪秉箕)·송 헌(宋憲) 등과 함께 활동하다가 김광희(金光熙)·강도희(姜道熙) 등과 함께 연해주(沿海州)로 건너갔다. 1926년 4월 5일에는 길림에서 양기탁(梁起鐸)·현정경(玄正卿)·오동진(吳東振)·곽종대(郭鍾大)등과 천도교 혁신파인 김봉국(金鳳國)·이동구(李東求)·송 헌(宋憲) 그리고 노령에서 온 그를 비롯하여 이규풍(李奎豊)·주진수(朱鎭秀) 등과 혁명원로들이 독립투쟁을 결의하고 고려혁명당을 조직하게 되자 그는 중앙위원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1927년 1월 26일 지병이 악화되어 중국 상해 적십자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용만 집
박용만(1881 - 1928)은 상동청년회, 만민공동회, 보안회 등에 적극 참여하면서 1905년 미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세 번이나 수감될 정도로 개혁과 구국에 대한 의지가 굳건했고 실천적이었다. 1915년을 전후하여 미·일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하고 이때를 독립의 기회로 삼기 위해 사회적 조직체인 국민회를 〈정치적 조직〉, 즉 임시정부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對日 독립전쟁을 수행할 독립군 양성과 함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을 설립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군단의 세력을 국내와 중국, 러시아지역으로까지 확대시키며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를 해 나갔다. 아울러 임시정부가 탄생할 수 있도록 무형정부론을 앞서 주창하며 <신한민보(新韓民報)>, <신한국보(新韓國報)> 등의 주필을 맡아 우리 민족이 나갈 방향을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