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해외항일운동
사건설명
TOTAL. 251 건
김정식 집
김정식(1888 - 1941)의 자는 일중이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강점당하자 김정식의 큰아버지 김대락은 김동삼(金東三), 이상룡(李相龍) 등과 더불어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이에 김정식도 김대락을 따라 망명하여 길림성 유하현 삼원포에서 김대락을 도우며 독립군 기지 건설에 노력하였다. 김정식은 1919년 서로군정서에 참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1920년에는 간도 참변으로 동포 사회가 폐허가 되자, 이를 재건하기 위해 다시 국내로 들어와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이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후 김정식은 흑룡강성 하얼빈 아성현 취원창을 개척하여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성로 집
김성로(1885 - 1922)의 자는 맹옥, 호는 일산, 이명은 김종훈이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김성로는 1907년 류인식(柳寅植)·김동삼(金東三) 등이 설립한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입학, 졸업하였다.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문중 어른인 백하 김대락(金大洛)을 따라 중국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독립군 기지 건설을 위해 안동 애국지사들이 많이 모인 길림성 유하현에서 1916년 부민단 설립에 참여하였다. 김성로는 1919년 신흥무관학교를 제4회로 졸업하였다. 동년 3월 부민단이 한족회로 확대·발전될 때 적극적으로 참가하였고, 김동삼의 후임으로 서무사장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또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서무를 맡아 만주 이주 한인들의 생활 안정에 노력하기도 하였다. 1920년 청산리·봉오동 전투 보복으로 일제가 경신참변을 일으켜 만주 한인 동포사회는 크나큰 피해를 입었다. 이를 회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김성로는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국내로 파견되었다. 국내로 들어온 김성로는 고향 마을 부근인 임하(臨河)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김동삼이 흥경현 왕청문에서 설립한 통의부 공작대가 모집된 군자금을 인수하고자 국내로 들어오다가 평안북도 정주에서 발각됨에 따라, 이와 관련된 김성로도 1921년 중국 봉천에서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김성로는 1921년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22년 4월 30일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받았으며,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동삼 집
김동삼(1878 - 1937)의 본명은 긍식(肯植), 자는 한경(漢卿)이었는데, 만주로 망명해서는 이름을 동삼(東三), 자는 성지(省之), 호는 일송(一松)으로 고쳤다. 김동삼은 서간도 독립군 기지 개척의 선구자였으며, 만주 독립군의 통합에 노력했던 독립운동가이다. 한국 근대 질곡의 긴 역사 속에서 독립을 향한 김동삼의 본격적인 행보는 1907년부터 시작되었다. 김동삼은 1907년 3월 류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하중환(河中煥) 등과 함께 안동에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고 교감으로 활동하였다. 협동학교에 재직하면서 그는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와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해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1911년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에 도착한 김동삼은 신흥강습소를 설립하고 경학사 사장 이상룡(李相龍)을 도와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힘을 쏟았다. 1913년 3월부터 이름을 중국 동삼성(東三省)의 호칭을 따서 ‘동삼(東三)’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1914년에는 신흥학교 1~4회 졸업생들과 그 분교, 노동야학 졸업생 385명을 인솔하여 통화현 팔리초 깊은 산 속에 백서농장(白西農庄)을 건립하고, 그 장주(庄主)가 되었다. 이는 김동삼이 만주 독립군의 거장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시점이다. 1919년 국내 3·1운동의 영향으로 길림에서도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는데, 이때 김동삼은 민족 대표 39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3·1운동의 영향으로 서간도 한인 사회도 이에 호응하여 같은 해 4월 경학사의 후신이었던 부민단을 전 서간도 지역으로 확대하여 한족회를 설립하고, ‘군정부’라는 독립군 조직을 편성하였다. 이때 김동삼은 한족회의 서무사장(庶務司長)을 맡았다가, 11월 ‘군정부’가 서로군정서로 개편되면서 참모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1922년 6월 경신참변으로 붕괴되어 버린 동포 사회와 독립군을 통합하기 위해 남만통일회를 주도하여, 통군부(統軍府)를 탄생시켰다. 8월 30일 전만한족통일회가 결성되고, 통군부가 통의부(統義府)로 확대 개편되자, 교육부장이었던 김동삼은 통의부 총장을 맡게 되었다.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위해 1923년 1월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열리자 김동삼은 서로군정서와 남만주의 한인 대표로 참석하여 의장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을 위해서 노력하였다. 당시 국민대표회의가 임시정부의 개조론·창조론으로 대립할 때 그는 개조론에 가세하였으나, 그 회의는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지속적으로 독립운동 단체 통합에 힘쓰던 김동삼은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북만주로 가서 활동을 모색하던 중 하얼빈에서 일제 밀정의 밀고로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는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37년 4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시신은 평소에 그를 존경하던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이 거두어 장례를 지냈는데, 유언대로 화장하여 한강에 유해를 뿌렸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김지섭 기념비
김지섭(1884 - 1928)의 자는 위경, 호는 추강이며, 의열단원으로서 일본 왕궁에 폭탄을 투척한 독립운동가이다. 1907년 보통학교 부교원 검정시험에 합격하여 상주보통학교에 부임하였다가 1년 만에 사직하였다. 1908년에 상경하여 광화신숙 일어전문과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익혔다. 재판소 번역관 시험에 합격하여 1913년까지 번역관보, 통역생 겸 서기 등의 관직 생활을 하였다. 3 · 1운동 이후 중국 관내, 만주, 옌하이저우〔沿海州〕를 오가며 앞날을 모색하던 중 1921년 가을경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2년에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3년 간토대지진〔關東大地震〕이 일어나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우리나라 동포들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의열단 지도부는 이를 응징한다는 차원에서 도쿄〔東京〕의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지고 주요 관리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김지섭은 이를 실행할 의열단 기밀부 특파원에 자원하였다. 1923년 12월 20일 소형 폭탄 3개와 나카무라 히코타로〔中村彦太郞〕라는 가명의 일본인 명함 30매를 가지고 석탄 운반선을 이용하여 상하이를 출발하였다. 12월 31일 후쿠오카〔福岡〕에 도착하자 몰래 상륙하여 도쿄로 향하였다. 1924년 1월 5일 도쿄에 도착하여 무기한 연기된 제국의회를 대신해 왕궁을 폭파할 준비에 나서 낮 동안 왕궁 근처를 답사하였다. 그날 저녁 오후 7시 20분경 양복 주머니에 3개의 폭탄을 감추고 왕궁 근처에 도착해 불심검문을 받게 되자 폭탄 하나를 경찰에게 던졌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폭탄 2개를 꺼내 들고 왕궁 정문 앞 다리로 뛰어가 안전핀을 뽑지 못한 채 폭탄을 던졌다. 폭탄 3개는 모두 터지지 않았고 그 자리에서 붙잡혔다. 1월 6일 히비야경찰서〔日比谷警察署〕를 거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 예심에 회부되면서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 수감되었다. 4월 24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예심이 종결되었다. 폭발물 취체 벌칙 위범, 강도 미수와 선박 침입죄로 정식 재판에 회부되었다. 11월 6일 도쿄지방재판소는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도쿄공소원에 공소를 제기하여 1925년 3월부터 2심 재판이 시작되었다. 변호인들이 재판장의 불공정한 재판에 항의해 기피신청을 하자 “나는 조선 사람이니 일본 사람인 재판장이 어떠한 사람이 되든지 똑같을 것이니 기피신청(忌避申請)을 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나는 아무 죄가 없으니 무죄를 선언하든지 제1심의 검사 청구대로 사형에 처하든지 하여 달라.”라고 하며 법정투쟁을 벌였다. 1925년 8월 12일 공소심에서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변호사가 상고하자 이를 취하하는 서면을 제출하였다. 이후 도쿄 외곽의 지바형무소〔千葉刑務所〕로 이감되었다. 옥고를 치르던 중 1928년 2월 20일 뇌내출혈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追敍)되었다.
김응섭 집
김응섭은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며, 본관은 풍산(豊山). 이명은 김응범(金應範)이고, 자는 경장(景章), 호는 동전(東田)이다. 김응섭은 1908년 재경 영남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교남교육회의 본회 임원으로 참가하여 교육구국운동에 앞장서서 활동하였다. 1911년 1월에서 1912년 6월까지 평양지방법원의 판사, 검사를 역임한 뒤 대구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13년 대구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회에 가입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고, 1919년 파리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영어로 번역하였다. 이후 김응섭은 만주로 망명,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여 이주 한인들의 정착 생활을 위해 활동하였다. 3·1운동 직후에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법무장관으로 활약했으며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를 시찰하였다. 1920년 3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한족회(韓族會)의 조직을 쇄신하고 법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21년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2년 베르흐네우진스크 고려공산당연합대회에 출석해 임시집행부 위원이 되었다. 동년 6월 남만주군정서부총재로 활약하면서 김찬규를 국내의 경상북도 지역으로 파견해 군자금을 모집케 하였다. 그리고 이즈음 경상북도 출신의 김시현(金始顯), 신태식 등과 함께 의용단의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1923년 의열단에 가담하였다. 동년 6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해, 창조파의 일원으로서 국민위원회 결성에 합류하였다. 1924년 11월 정의부가 발족되자 김응섭은 중앙심판원장을 맡아 활동하며 만주 지역 독립운동계의 대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념 문제나 통합 방법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동년 12월 김응섭은 길림성(吉林省) 반석현(盤石縣)에서 안동 출신 이광민(李光民) 등과 함께 한족노동당을 결성하고 상무집행위원장 겸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7년 9월경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간부가 되었다. 1928년 2월 길림성 반석현에서 한족노동당을 개편해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을 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이 때 경상북도 출신의 김동삼·김원식·이영형·김상덕·이일심 등도 참여하였다. 동맹원은 경상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약 3천 내지 4천에 달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김응섭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남만주 지역에서 사회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1928년 5월 길림성에서 개최된 전민족유일당 조직촉성회의에 재만농민동맹 대표자로 참석해 촉성회파의 일원이 되었다. 남만주 지역에서의 재만농민동맹의 활동은 1930년대 중국공산당 만주성 반석현위원회의 구성을 가능케 했고, 나아가 뒷날 동북인민혁명군의 유력한 기반이 되었다.
김응섭 집(영감댁)
본관은 풍산(豊山). 이명은 김응범(金應範)이고, 자는 경장(景章), 호는 동전(東田)이다. 1878년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에서 태어났다. 의열단원 김지섭(金祉燮)의 일가이다. [활동사항] 김응섭은 1908년 재경 영남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교남교육회의 본회 임원으로 참가하여 교육구국운동에 앞장서서 활동하였다. 1911년 1월에서 1912년 6월까지 평양지방법원의 판사, 검사를 역임한 뒤 대구에서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13년 대구에서 결성된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회에 가입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고, 1919년 파리에 보낼 독립청원서를 영어로 번역하였다. 이후 김응섭은 만주로 망명,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여 이주 한인들의 정착 생활을 위해 활동하였다. 3·1운동 직후에는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법무장관으로 활약했으며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를 시찰하였다. 1920년 3월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한족회(韓族會)의 조직을 쇄신하고 법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21년 이르크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2년 베르흐네우진스크 고려공산당연합대회에 출석해 임시집행부 위원이 되었다. 동년 6월 남만주군정서부총재로 활약하면서 김찬규를 국내의 경상북도 지역으로 파견해 군자금을 모집케 하였다. 그리고 이즈음 경상북도 출신의 김시현(金始顯), 신태식 등과 함께 의용단의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1923년 의열단에 가담하였다. 동년 6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해, 창조파의 일원으로서 국민위원회 결성에 합류하였다. 1924년 11월 정의부가 발족되자 김응섭은 중앙심판원장을 맡아 활동하며 만주 지역 독립운동계의 대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념 문제나 통합 방법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동년 12월 김응섭은 길림성(吉林省) 반석현(盤石縣)에서 안동 출신 이광민(李光民) 등과 함께 한족노동당을 결성하고 상무집행위원장 겸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7년 9월경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간부가 되었다. 1928년 2월 길림성 반석현에서 한족노동당을 개편해 재만농민동맹(在滿農民同盟)을 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이 때 경상북도 출신의 김동삼·김원식·이영형·김상덕·이일심 등도 참여하였다. 동맹원은 경상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약 3천 내지 4천에 달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김응섭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남만주 지역에서 사회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1928년 5월 길림성에서 개최된 전민족유일당 조직촉성회의에 재만농민동맹 대표자로 참석해 촉성회파의 일원이 되었다. 남만주 지역에서의 재만농민동맹의 활동은 1930년대 중국공산당 만주성 반석현위원회의 구성을 가능케 했고, 나아가 뒷날 동북인민혁명군의 유력한 기반이 되었다.
유병하 집
유병하(1898 - 1987)는 일제강점기 의열단군자금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1922년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김시현(金始顯)·김지섭(金祉燮)·권정필(權正弼)·황옥(黃鈺)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의 지시에 따라 김시현·유석현(劉錫鉉)·황옥·장건상(張建相) 등이 조선총독부·조선은행·동양척식주식회사·경성전기회사 등 일제의 주요기관을 폭파하기 위하여 1923년 다량의 폭탄과 총기를 만주로부터 국내에 반입하였다. 이 때 부족한 거사자금은 국내에서 조달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유시태(柳時泰)와 함께 서울 내자동의 이인희(李麟熙)에게 군자금 5,000원을 요구하였으나, 그와 같이 막대한 자금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며 이를 거절하자, 먼저 50원을 받고 잔액은 후일 받기로 하였다. 그 뒤 같은 달 21·24일에 유시태가 남영득(南寧得)과 함께 이인희의 집에 찾아가 군자금 잔액을 독촉하다 일본경찰에 의하여 이른바 ‘의열단군자금사건’에 연루된 12명의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그 해 8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겸호 기념비
이겸호(1895 - 1942)의 이칭은 석이며, 일제강점기 서로군정서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만주로 건너가 이상룡(李相龍)·이시영(李始榮)·김동삼(金東三) 등과 독립운동기지건설에 노력하였다. 1918년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서 군사교육을 수료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군자금모금을 위해 귀국하여 활동하였으며, 1923년에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제1소대원 이덕숙(李德淑)·신형섭(申亨燮) 등과 군자금모금활동을 하던 중 일본경찰에 붙잡혀 1925년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 이상촌건설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붙잡혀 1년 7개월간 구금되었다.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이겸호 집
이겸호(1895 - 1942)의 이칭은 석이며, 일제강점기 서로군정서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만주로 건너가 이상룡(李相龍)·이시영(李始榮)·김동삼(金東三) 등과 독립운동기지건설에 노력하였다. 1918년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서 군사교육을 수료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가입,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군자금모금을 위해 귀국하여 활동하였으며, 1923년에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제1소대원 이덕숙(李德淑)·신형섭(申亨燮) 등과 군자금모금활동을 하던 중 일본경찰에 붙잡혀 1925년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 이상촌건설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붙잡혀 1년 7개월간 구금되었다. 1980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함양박공 의훈·의열·의연 사적비
박건(1880 - 1943)의 본명은 박의연, 이명은 박해사이며,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09년 아우 박의열과 함께 영릉의진에 참여하였다. 1912년 아우 박의열과 함께 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 등을 따라 1912년 서간도 통화현(通化縣)으로 망명하였다. 1913년 10월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였으며, 1914년에는 하서구(下西溝)에서 남흥학교(南興學校)를 설립하였다. 1919년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이상룡·김동삼 등과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였으며,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적기단(赤旗團) 대표로 참석하였으나, 의견 대립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만주로 돌아온 박건은 지린성[吉林省] 황기둔(黃旗屯)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1927년 3월 신숙(申肅) 등이 독립촉성회를 결성하기 위하여 전만대표자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때 박건은 북만(北滿) 대표로 선출되었다. 1933년 중국 하얼빈[哈爾濱]에서 남자현(南慈賢)·이규동(李奎東) 등과 함께 일본 대사 무등신의(武藤信義)를 제거하기로 계획하였으나, 남자현이 체포되어 실패하였다. 1980년 정부는 박건에게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의열(1889 - 1930)의 호는 하산, 이명은 박세진, 박하산이며,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형 박의연과 함께 신돌석(申乭石)이 이끄는 영릉의진에 참여하였고 1912년에 형과 함께 서간도 퉁화현[通化縣]으로 망명하였다. 1914년 퉁화현 하서구(下西溝)에서 남흥학교(南興學校)를 설립, 1919년 한족회(韓族會) 퉁화 지방 천가장(千家長)을 역임하는 등 한국 교민의 생활 안정과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2년 8월 통합 독립군 세력인 대한통의부 제1회 중앙 의회에서 통화총관소(通化總管所) 통화검찰감(通化檢察監)에 임명되었다. 1923년 대한통의부 통화총감(通化總監) 이기완(李基宛)의 지휘로 소대장 및 참사(參事)를 맡아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여 무기와 탄약을 탈취하기 위한 모의를 하였다. 1924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아청현(阿城縣) 주위안창(聚源昶)에서 동원학교(東源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어 민족교육에 주력하였으며, 1925년 남만주의 통합 독립운동 단체인 정의부 부교(副校) 및 지방조직책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북만주 빈장현[濱江縣] 8구(八區)에서 빈장정민소[濱江精米所]와 주허현[珠河縣] 하동(河東) 오길밀하(烏吉密河)에서 400여 일경(日耕)의 농장을 경영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31년 1월 7일 주허현(朱虛縣)[지금의 상지현(尙志縣)] 오길밀하(烏吉密河)라는 곳에서 공산주의자 조명(趙明)에 의해 피살되었다. 정부는 박의열에게 1977년 건국포장,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박의훈(1895 - 1983)의 호는 호산, 이명은 박명진이며,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13년 백형 박건과 중형 박의열을 따라 만주 환런현[桓仁縣]으로 이주하였다. 1917년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였다. 1922년 대한통의부 제4중대원으로 입대하여 섭외 임무를 담당하였다. 1930년 5월 독립군 결사대원 50여 명과 함께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하였고, 1931년에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였다. 1933년 이청천(李靑天)·오광선(吳光鮮) 등과 함께 산해관(山海關)으로 이동하여 은신하였다. 1934년에는 하얼빈 교외 승덕가(承德街)에서 중국인과 함께 동풍태정미소(東豊泰精米所)를 경영하였다. 1936년 7월에는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서 학생 모집을 위해 파견 온 황인식(黃仁植)·김기대(金基大) 두 청년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여비를 마련해 주었다. 1945년 광복 이후 귀국하였다. 정부는 박의훈에게 1977년 건국포장,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남자현 집(추모각)
남자현(1872 - 1933)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군사기관과 농어촌을 순회하며 독립정신을 고취시킨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활약하는 한편,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각 단체와 군사기관, 농어촌을 순회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동만주 12곳에 교회와 예배당을 세워 전도하였으며, 10여 곳에 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여성을 계몽하는 데도 힘썼다. 또한, 남만주 각지를 순회하면서 동포간의 단합과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활약하였다. 1924년 채찬(蔡燦)·이청산(李靑山) 등과 총독 사이토[齋藤實]를 암살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미수에 그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마침 그때 길림(吉林)주민회장 이규동(李圭東), 의성단장(義成團長) 편강렬(片康烈)·양기탁(梁起鐸)·손일민(孫一民) 등이 주동이 되어 재만독립운동단체의 통일을 발기하자 이에 적극 참가하여 크게 공헌하였다. 1928년 길림에서 김동삼(金東三)·안창호(安昌浩) 등 47명이 중국 경찰에 검거되자 지성으로 간호하며 석방운동에 온 힘을 기울였다. 1931년 김동삼이 하얼빈[哈爾濱]에서 붙잡히자 그를 탈출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932년 국제연맹 리튼조사단이 하얼빈에 오자, 흰 수건에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조사단에 보내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33년 이규동 등과 주만일본대사 무토 노부요시[武藤信義]를 죽이기로 하고, 동지와의 연락 및 무기운반 등의 임무를 띠고 걸인노파 차림으로 하얼빈 교외 정양가(正陽街)를 지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6개월 동안 갖은 혹형을 받다가 단식투쟁을 전개하고 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하얼빈에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엄순봉 집
엄순봉(1906 - 1938)의 일명은 엄형순이며, 일제강점기 남화한인청년연맹, 한족총연합회, 재만주조선인 아나키스트 연맹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집안이 빈궁하여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던 중 생계유지를 위해 1923년 만주로 건너갔다. 농업노동에 종사하다가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이 발발하자 안주할 땅을 찾아 중국땅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상해(上海)부근 남상(南翔)의 입달학원(立達學院) 교사 유자명(柳子明)을 만나게 되면서 남상에서 5리쯤 떨어진 남당(南塘)에서 농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무정부주의 색채가 짙어지게 되었다. 1932년 12월 상해 프랑스조계내의 복이리로정원방(福履理路亭元芳)에서 백정기(白貞基)·원심창(元心昌) 등을 만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3년 5월 오면직(吳冕稙)·주열(朱烈)·안경근(安敬根)과 함께 일제 영사관 밀정 이종홍(李鐘洪)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8월 1일 정화암(鄭華巖)과 함께 105인사건에 연루되었던, 자칭 애국자 옥관빈(玉觀彬)이 당시 상해에 와서 일본 관헌과 내통하고 있음을 알고, 그의 사촌형인 옥성빈(玉成彬)의 집을 찾아 가는 것을 권총으로 처단하였다. 1934년 3월 초순, 당시 아리요시[有吉明] 공사가 무정부주의자들을 탄압하고, 또한 장개석(蔣介石)을 4,000만원으로 매수하여 만주를 포기하게 하고 열하에서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하자,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공사가 일본으로 이 문제를 협의하러 출발하기 전에, 3월 17일 당시 일본인이 경영하던 고급음식점에서 송별회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래서 백정기·이강훈·원심창 등 3명으로 하여금 부근의 중국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살해하도록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어 1935년 3월 25일 이규호(李圭虎)와 함께 정화암·이달(李達)·전이방(田理芳) 등과 협의하여 상해조선인거류민회 부회장인 이용로(李容魯, 일명 李榮魯)가 일본총영사와 내통함을 알고 집으로 찾아가 처단하였다. 거사 직후 붙잡혀 1936년 3월에 사형언도를 받았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