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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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국민단 결성지(서호)
서호 구국민단 결성지는 독립운동 결사체인 구국민단을 조직하고자 비밀리에 준비모임을 하던 곳이다. 구국민단(救國民團)은 1920년 수원에 조직되었던 독립운동결사단체로 1919년 9월 수원군 동면 남창리에 거주하던 학생 박선태(朴善泰)는 같은 수원군 일형면 하광교리에 거주하던 학생 이종상(李種祥)·이득수(李得壽) 등과 회합하여 조선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선전활동을 펴기로 하고, 1920년 7월경까지 수원일대에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창가집과 『대한민보』 등 다수를 반포하였다. 한편, 1920년 6월 삼일여학교 여교사 차인재(1895-1971)의 소개로 졸업생 임순남, 최문순(1903-미상) 등이 활동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6월 20일에 임순남(林順南)·최문순(崔文順)·이선경(李善卿) 등 여학생을 동지로 포섭하여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 박선태는 단장, 이득수는 부단장이 되어, 조선독립국가의 실현과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입옥 또는 순국한 지사의 가족 및 유족의 구조를 목표로 삼아 활동하였다. 이들은 수원의 서호(西湖) 또는 삼일학교에서 비밀회합을 하며 목표달성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특히 여학생들은 장차 간호부가 되어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한다는 결의를 한 바 있다. 이들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실형 또는 집행유예선고를 받았다.
수원상업강습소 터
1908년 4월 15일 홍건섭, 홍민섭, 김흥선, 양성관, 신준희, 박재윤 등이 중심이 되어 수원군 남부면 남수동에서 수원상업회의소 창립총회를 갖게 되었다. 이어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1909년 2월 2일에 수원상업회의소 부속사업으로 상업에 관한 지식, 기능의 강습을 목적으로 수원상업강습소를 부설하기에 이르렀다. 이 강습소는 오늘날 수원중·고등학교의 모체가 된다. 일반 민중의 교육을 위하여 야학으로 시작하였다. 이는 우리 힘으로 경영하는 민족교육기관으로 경제적 자활을 위한 투쟁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1909년 7월 15일 조선상업회의소령이 공포되면서 이 법령에 의한 새로운 상업회의소 설립기준을 충족하지 못하여 1916년 4월 수원상업회의소가 폐쇄되고 이에 따라 상업강습소도 경영난으로 폐교의 비운에 빠지게 되었다. 여기에 몇사람 유지의 열성으로 그 해 4월 27일 화성학원이라 개칭하고 주학으로 보통과, 중등과, 고등과를 두고, 야학에는 초등과, 전수과를 두게 되었다. 이규재, 최상훈, 정준화, 윤용희 등이 교편을 잡았다. 1926년 2월 20일 홍사훈이 인수하여 같은 해 5월에 화성학원이라는 교명으로 당국의 인가를 얻었으나. 당초 설립목적과는 달리 보통학교 수준의 교육을 실시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화성학원(수원상업강습소)은 애국계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수원의 민족교육기관으로 그 역할을 수행해 나아갔다.
최용신 어록비(샘골교회)
최용신 (1909~1935) 선생은 국권상실기의 암울한 시대에 농촌계몽운동으로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 협성여자신학교 농촌지도사업과에 재학 중이던 1931년 10월 YWCA 교사로 이곳 샘골 (천곡.泉谷)에 파견되어 마을사람들과 YWCA의 지원으로 1933년 1월 천곡학원 건물을 신축하고, 문맹퇴치와 농업기술 및 민족혼과 애국심을 심어주는 교육에 헌신적으로 활동하였으나, 1935년 과로와 영양실조로 인한 장중첩증으로 26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 하였으며 학교가 잘 보이고 종소리가 들리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일리 공동묘지 현 일동 818 번지 일원)에 묻혔다가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선생의 농촌계몽과 독립을 위한 눈물겨운 행적은 심훈(沈薰)의 소설 「상록수(綠樹)」에서 실제화 되어 농촌운동의 귀감이 되었다. 2004년 10월 7일 최용신의 제자인 홍석필이 1억 5천만 원을 기탁함으로써 건립 사업이 구체적으로 추진되어, 천곡(샘골)강습소가 있던 그 자리에 2007년 11월 20일 최용신 기념관을 건립 및 개관하였다. 가까이에는 최용신의 묘와 함께 추모비를 비롯하여 농촌계몽 활동을 했던 교회인 샘골교회, 심훈문학기념비, 최용신의 유훈비와 기념비, 샘골강습소 주춧돌 15기 및 향나무 5그루 등이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최용신 묘
최용신 (1909~1935) 선생은 국권상실기의 암울한 시대에 농촌계몽운동으로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 협성여자신학교 농촌지도사업과에 재학 중이던 1931년 10월 YWCA 교사로 이곳 샘골 (천곡.泉谷)에 파견되어 마을사람들과 YWCA의 지원으로 1933년 1월 천곡학원 건물을 신축하고, 문맹퇴치와 농업기술 및 민족혼과 애국심을 심어주는 교육에 헌신적으로 활동하였으나, 1935년 과로와 영양실조로 인한 장중첩증으로 26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 하였으며 학교가 잘 보이고 종소리가 들리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일리 공동묘지 현 일동 818 번지 일원)에 묻혔다가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선생의 농촌계몽과 독립을 위한 눈물겨운 행적은 심훈(沈薰)의 소설 「상록수(綠樹)」에서 실제화 되어 농촌운동의 큰 귀감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문규 집
정문규(1915 - 1970)는 경기도 안성군 서운면 사람으로, 일본 중앙대학(中央大學)을 졸업하고 국내에서 유한제약주식회사(柳漢製藥株式會社)에서 근무하던 중, 중앙대학 동창인 최승우(崔昇宇) 등에게 “임시정부에서 중견 간부로서 유식(有識) 조선 청년을 모집하고 있으니 중경으로 가자”며 중경 망명을 권유했다. 1943년 3월 이를 결행하여 중국 산해관까지 갔지만 일제 관헌의 단속으로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1944년 7월 정문규는 “조선 청년 다수가 징용당하면 조선 독립의 때에 능력있는 청년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며 징용을 반대하는 격문을 일본 군용열차 등에 배포하기로 계획하고, 일제 고관들을 암살하고 각종 공장을 폭파하기 위한 폭탄 제조 등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 사건으로 정문규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약품취급령 위반 등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루던 중 광복을 맞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문규 공적비
정문규(1915 - 1970)는 경기도 안성군 서운면 사람으로, 일본 중앙대학(中央大學)을 졸업하고 국내에서 유한제약주식회사(柳漢製藥株式會社)에서 근무하던 중, 중앙대학 동창인 최승우(崔昇宇) 등에게 “임시정부에서 중견 간부로서 유식(有識) 조선 청년을 모집하고 있으니 중경으로 가자”며 중경 망명을 권유했다. 1943년 3월 이를 결행하여 중국 산해관까지 갔지만 일제 관헌의 단속으로 목적을 달성치 못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1944년 7월 정문규는 “조선 청년 다수가 징용당하면 조선 독립의 때에 능력있는 청년을 상실하게 될 것”이라며 징용을 반대하는 격문을 일본 군용열차 등에 배포하기로 계획하고, 일제 고관들을 암살하고 각종 공장을 폭파하기 위한 폭탄 제조 등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 사건으로 정문규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및 약품취급령 위반 등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루던 중 광복을 맞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오창선 묘
오창선(1884 - 1974)은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이며, 1919년 양성과 원곡 지역의 3.1운동 선봉 주동자이다. 그는 원곡면, 양성면 주민 2천여 명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여 일경 주재소와 우편소,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방화하고, 시위군중과 함께 뒷산에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원태근 유물
원태근(1882-1950)은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의 강제체결에 격분한 그는 일제의 침략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응징하여 한국인의 항일의지를 만천하에 알릴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기회를 기다리던 중 1905년 11월 22일 이등박문과 임권조(林權助)가 경기도 수원(水原)에서 수렵을 한 뒤 경부선(京釜線) 철도열차에 승차하여 오후 6시 13분경 안양(安陽 : 지금의 安養)역을 출발한지 얼마 안된 때에 이등박문을 목표로 투석하여 이등의 왼쪽눈과 안면에 부상을 입혔다.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05년 11월 하순 경성헌병사령부(京城憲兵司令部)에서 태(笞) 10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원태근 의거지
원태근(1882-1950)은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의 강제체결에 격분한 그는 일제의 침략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응징하여 한국인의 항일의지를 만천하에 알릴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기회를 기다리던 중 1905년 11월 22일 이등박문과 임권조(林權助)가 경기도 수원(水原)에서 수렵을 한 뒤 경부선(京釜線) 철도열차에 승차하여 오후 6시 13분경 안양(安陽 : 지금의 安養)역을 출발한지 얼마 안된 때에 이등박문을 목표로 투석하여 이등의 왼쪽눈과 안면에 부상을 입혔다.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05년 11월 하순 경성헌병사령부(京城憲兵司令部)에서 태(笞) 10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원태근 의거비
원태근(1882-1950)은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의 강제체결에 격분한 그는 일제의 침략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응징하여 한국인의 항일의지를 만천하에 알릴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기회를 기다리던 중 1905년 11월 22일 이등박문과 임권조(林權助)가 경기도 수원(水原)에서 수렵을 한 뒤 경부선(京釜線) 철도열차에 승차하여 오후 6시 13분경 안양(安陽 : 지금의 安養)역을 출발한지 얼마 안된 때에 이등박문을 목표로 투석하여 이등의 왼쪽눈과 안면에 부상을 입혔다.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05년 11월 하순 경성헌병사령부(京城憲兵司令部)에서 태(笞) 10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원태근 부조
원태근(1882-1950)은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의 강제체결에 격분한 그는 일제의 침략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응징하여 한국인의 항일의지를 만천하에 알릴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기회를 기다리던 중 1905년 11월 22일 이등박문과 임권조(林權助)가 경기도 수원(水原)에서 수렵을 한 뒤 경부선(京釜線) 철도열차에 승차하여 오후 6시 13분경 안양(安陽 : 지금의 安養)역을 출발한지 얼마 안된 때에 이등박문을 목표로 투석하여 이등의 왼쪽눈과 안면에 부상을 입혔다.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05년 11월 하순 경성헌병사령부(京城憲兵司令部)에서 태(笞) 10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원태우 집
원태근(1882-1950)은 경기도 시흥(始興) 사람이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의 강제체결에 격분한 그는 일제의 침략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응징하여 한국인의 항일의지를 만천하에 알릴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기회를 기다리던 중 1905년 11월 22일 이등박문과 임권조(林權助)가 경기도 수원(水原)에서 수렵을 한 뒤 경부선(京釜線) 철도열차에 승차하여 오후 6시 13분경 안양(安陽 : 지금의 安養)역을 출발한지 얼마 안된 때에 이등박문을 목표로 투석하여 이등의 왼쪽눈과 안면에 부상을 입혔다.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05년 11월 하순 경성헌병사령부(京城憲兵司令部)에서 태(笞) 10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