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TOTAL. 729 건
고양독립운동기념탑
고양독립운동기념탑은 고양시 일산문화광장에 있으며, ‘대한독립, 그날의 함성, 현재·미래의 평화 번영’을 부제를 지닌 높이 31m, 길이 8m×8m의 규모이다. 주탑의 형상은 고양의 5천 년 역사 가와지볍씨와 꽃봉오리, 비상하는 날개, 기도하는 손의 형상이 좌우 대칭 모양으로 표현돼 있다. 기념탑의 좌측 은색 파동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고양의 현재와 미래의 찬란한 모습을, 우측의 금색 파동은 역사 속에 살아 숨 쉬는 고귀하고 뜨거운 애국심을 표현했다. 기념탑 하부에는 고양 출신 독립운동가 74인의 공적과 공훈을 표기한 ‘공간의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고양시, 광복회 고양시지회에서 2018년 8월 건립하였다.
현충탑(고양시현충공원)
고양시 현충공원 현충탑은 6·25전쟁 당시 고양시 출신으로 참전하였다가 전사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1971년 고양시청이 건립하였다. 2010년 12월에 고양시는 현충탑 인근의 공원화 사업(고양현충공원)을 완료하고 기존의 현충탑을 헐고 재건립하였으며 위패실 설치와 태극단 묘역 정비도 마쳤다. 현충탑 재건립을 통해 현충시설로서의 목적뿐 아니라 고양시 출신으로 순국한 호국영령의 넋을 기리기 위해 위패실을 새로 설치, 400여 위를 안치하여 애향심 고취와 애국 애족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현충공원의 위패실은 2010년 12월 준공하여 417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위패실 앞, 즉 현충탑의 뒷면에 ‘고양을 빛낸 독립운동가’ 74인의 명단이 명각되어 있다.
성기석 묘
성기석(1920 - 1990)은 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으로, 조선방송국(朝鮮放送局)과 개성방송소(開城放送所)에서 근무하면서 단파수신기(短波受信機)를 제작하여 해외방송을 청취하면서 임시정부(臨時政府)와 연합군(聯合軍)의 승전과 광복군(光復軍)의 활동 등 국제정세를 수시로 청취하여 독립운동가들에게 전달하였다. 1942년 12월 27일 일경에게 발각되어 붙잡혔으며 1943년 9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무신전신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이하여 출옥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성기석 공적비
성기석(1920 - 1990)은경기도 파주(坡州) 사람이다. 1940년 조선방송국(朝鮮放送局)에 기술직으로 근무할 때 단파수신기(短波受信機)를 제작하여 해외방송을 청취하면서 임시정부(臨時政府) 소식과 구미외교부(歐美外交部) 활동을 알게되어 독립운동 상황을 가친(家親)을 통하여 이인(李仁)·조병옥(趙炳玉) 등에게 전달하였다. 1942년 8월 개성방송소(開城放送所)로 전근되어 소장인 이인덕(李仁德)과 단파수신기를 제작하여 미국과 임시정부의 한국어 방송을 통하여 연합군(聯合軍)의 승전과 광복군(光復軍)의 활동 등 국제정세를 수시로 청취하여 민족지도자들에게 전달하였다. 그러나 1942년 12월 27일 일경에게 발각되어 붙잡혔다. 이 일로 인하여 1943년 9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무신전신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여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광주시 항일운동기념탑
광주시 항일운동기념탑은 남한산성을 기점으로 진행되었던 광주지역 항일운동의 특성을 반영하여,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수많은 사람이 모여 일제에 저항하던 의지를 묘사하였으며 광주, 이천, 양근 등 세 진영이 주축으로 연합하여 남한산성 성벽을 넘어 국가를 수호하고자 하는 모습 자체를 상징하도록 하였다. 남한산성을 의미하는 부조벽 좌측에는 3.1운동 모습을 연출하고, 우측에는 남한산성에서의 의병항쟁 장면을 연출하였다.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광주 출신으로 구한말 의병 춘경 구연영 의병장,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신 정암 이종훈 선생, 임시정부를 대표한 해공 신익희 선생 3인을 재조명하며, 항일운동사에 중요한 격전지이자 역사적인 장소인 남한산성에 항일운동을 재조명하는 뜻을 담아 2020년에 광주시 항일운동기념탑을 건립하였다.
구연영 집
구연영(1864-1907)은 경기 광주사람이고 호는 춘경(春景)이다. 어려서 한학(漢學)을 수학하고 한때 정부관리로 재직하였으나 기울어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관직을 사임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공포에 격분한 그는, 1895년 12월 31일 김하락, 조성학, 김태원 등과 함께 거의하여 경기도 이천에서 이천수창의소를 결성하였다. 이천수창의소는 경기도 연합의진의 성격을 띠었으며, 전투적이고 대규모적인 조직편제를 갖추어 1896년 1월 백현(魄峴)에서 일본군을 섬멸하였는데, 백현전투는 을미의병사상 최초의 대규모 승리였을 뿐 아니라 의병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한 쾌거였다. 이어 2월 이현(梨峴)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폈으며 전열을 재정비하여 2천여 명으로 군세를 증강한 후 심진원(沈鎭元)의 광주의진(廣州義陣), 이석용(李錫容)의 양근의진(陽根義陣)과 함께 남한산성의진(南漢山城義陣)을 형성하여 남한산성을 공략, 입성하였다. 구연영은 1897년 기독교에 입문하여 1898년 서울 상동교회에서 웹엣청년회를 조직,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1902년에는 전도사로서 이천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그는 장춘명(張春明)·한창섭(韓昌燮)·차화춘(車化春) 등 수십명의 동지와 함께 구국회(救國會)를 조직하고 신도대회를 통해 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를 성토하며 항일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구국계몽활동을 폈다. 또한 이천·여주(驪州)·광주(廣州) 일대를 순회하며 상인들의 철시투쟁을 유도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던 중 1907년 7월 16일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구국회 지도자들이 붙잡힐 때 피살·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설철수 묘
설철수(1914 - 1981)은 경남 창원(昌原) 출신으로, 1934년 경남 창원군 소학교 학생들에게 항일독립사상을 고취시켰고, 1934년 9월 삼동공립보통학교(三東公立普通學校) 훈도(訓導)로 임명된 후 역사 수업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 후 통영제일공립심상소학교(統營第一公立尋常小學校)에서도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다 일경에 붙잡혀 1938년 12월 20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출판법으로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설철수는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조맹선, 조천일, 조창선, 조만선 기념비
조창선(1897 - 193)은 황해 평산(平山) 출신으로, 1920년 7월 비밀결사 주비단(籌備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동년 11월에는 경고문을 자산가들에게 배포하였고, 1921년 4월에는 20여 명의 동지들과 협의하여 공채증서와 군자금 모집 통지서를 동장을 통해 평산군 고지면(古之面)의 동민들에게 배부토록 하여 평산군 일대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수합하였다.그 후 밀정 처단 사건 이후 이만석의 자택에 은신하고 있던 중 일경에게 발각되어 치열한 교전 끝에 붙잡혀, 1923년 1월 3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5월 10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6월 11일 평양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애국지사 조창선 영모기념비는 후손들이 2015년에 건립하였다.
김포시 독립운동기념관
일제강점기에 경서 지방의 대표적인 장터였던 양촌면 오라니 장터과 월곶면 군하리 장터에서 3.1만세운동이 조직적으로 벌어졌다. 김포시 독립운동기념관은 자랑스러운 역사의 고장 양촌읍의 오라니 장터 3.1만세운동을 재조명하고 애국지사의 투철한 애국정신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2013년 2월에 김포시 양촌읍에 개관되었다.
김용식 묘
김용식(1897~미상)은 평남 성천(成川) 사람이며, 성천 지역의 부호로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군자금 모금 및 전달을 지원하고 대한국민회 성천 지회의 재정부장에 취임하여 동지들을 규합시키고, 독립신문과 등사한 배일 격문을 성천 읍내에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성천 경찰서원에게 체포되어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천규 구 묘
박천규(1902-1967)는 평북 선천(宣川) 사람으로, 1919년 9월 30일 독립청년단(본부 : 안동현(安東縣))의 의주지부 조직에 가담하여 동지 10여 명을 규합하는 한편 독립운동자금을 모연하였는데, 1920년 4월 초 이 사실이 탄로나 일경에게 체포되어, 동년 6월 29일 신의주지청에서 소위 제령(制令) 7호 위반이란 혐의로 징역 5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하고 의사로서 의료활동에 종사하였고 1943년 오산중학교(五山中學校)에서 교의(校醫)로 근무하면서 청소년들에게 애국정신을 앙양하기 위한 계몽 활동을 하다가 동년 8월에 정주(定州)경찰서에 체포되어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한순회 묘
한순회(1885-1961)는 경기도 광주(廣州) 사람으로, 광주군 천도교구장(天道敎區長)이던 그는 1927년 8월 신간회 광주지회가 설립될 때 지회장으로 선출되어 지회 활동을 주도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 장차의 활동 자금으로 쓰기 위한 특별희사금 모집에 나섰는데, 이 사실이 일경에게 포착되어 1938년 3월 4일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붙잡혔고, 동년 5월 12일 석방되기까지 옥고를 치렀다. 1993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