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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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악 사적비
한기악(1898 - 1941)은 강원도 원주군 부론면 흥호리 출신으로, 언론인, 교육자, 독립운동가였다. 중앙학교와 보성전문 졸업 후, 1919년 일본 동경에서 기독청년회 회원으로 있으면서 3·1독립운동시 독립선언서를 각계에 배포하는 등 활약하다가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수립 및 법무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0년 초 귀국하여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 및 시대일보 편집국장, 조선물산장려회 이사회에서 선전부 이사, 민립대학 기성회를 조직하여 대학 건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초에는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중앙위원에 선출되어 해체될 때까지 활발한 구국운동을 벌였다. 1928년부터 4년 간 조선일보사 편집국장으로 언론을 통한 민족계몽을 위해서 노력하였으며, 1935년부터는 중앙고보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1941년 6월 20일 학교 사택에서 별세하였다. 사적비는 일석 이희승이 글을 썼고, 철농 이기우가 글씨를 새겼다. 월봉 한기악 선생 사적비 건립위원회에서 1981년 6월 20일 사적비를 건립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순교자 부조
김영학(1877 - 1932)은 3·1독립운동 당시 양양(襄陽)의 기독교회 목사로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으며, 동년 10월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의 지부(支部)로서 양양군단(襄陽郡團)을 결성하고 군단장(郡團長)으로 활약하며 조직확대에 힘을 쏟았다. 1920년 1월 강원도단의 조직이 발각되어 일경에 붙잡혀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국외로 나아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 1922년 9월에 노령(露領) 해삼위(海蔘威) 방면의 선교사로 자원하여 노령 지역에서 선교사업 및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가 1929년 소련 공산당에 붙잡혀 10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에 복역 중 1933년 옥중에서 별세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강원애국단 결성지(도피안사)
강원도 철원군 동송에 위치한 도피안사는 1919년 9월 철원의 애국지사들이 상해임시정부의 활동을 지원한 단체인 대한독립애국단의 철원지부를 결성한 곳으로, 6.25 전쟁 시기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해방 후 주둔군에 의해 재건되었다. 철원의 중요한 항일운동이면서 초기 임정의 국내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철원애국단의 회의장소였다.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은 1919년 3·1운동 후 서울에서 결성된 항일 독립운동 단체 대한독립애국단의 강원도 지부인 철원군단으로 1919년 8월 결성되었으며, 강원도의 조직을 총괄하며 애국단강원도단, 철원에서 조직되었고 철원에 본부를 두어 철원애국단으로 불렸다.
강종근 부조
강종근(1901 - 1942)은 서울 사람으로서 1937년부터 1940년까지 교회 신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설교를 하였다. 만주 철령에 있는 육영학교를 다닌 강종근은 이 학교에서 이동교회(裡洞敎會) 목사이며, 민족주의자인 최학기(崔學基)로부터 민족주의 사상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내에 들어와 경성신학교·배재학당 등을 다니면서 민족주의 의식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강종근은 1930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기독교 전도사가 되어 경기도 연천군 연천면에 있는 연천교회에서 근무하였다. 이곳에서 강종진은 신도들에게 민족의식을 함양시키는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1938년 5월 목사가 되어 강원도 금화군 창도면 창도교회(昌道敎會)로 옮겨서도 신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 결과 강종근은 1940년 6월 철원 제일교회에서 목회 활동 중 조선총독부의 '사상범 예비검속령'에 의해 붙잡혔다. 그래서 1941년 10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후 경성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2년 6월 고문으로 인한 신병의 악화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준용, 한용섭 기념비
이준용(1860~1945)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동학교도로서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여 공주 일대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부상을 당하였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는데 이때 의병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해 9월 강원도 춘천에서 거의한 지용기 의병의 대장소를 자신의 집에 설치하게 하고, 전답을 팔아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1919년에는 천도교 춘천교구장으로 있으면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윤도순(尹道淳) 등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비밀리에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3월 28일 춘천 읍내 시장에서 박순교(朴順交)·허기준(許基俊)·허현(許鉉) 등과 함께 수십 명의 시위군중들을 이끌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 시위 현장에서 헌병경찰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고 1919년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았다. 이후 공소하였으나 6월 11일 경성복심법원과 7월 17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용섭(1884~1944)은 강원도 홍천읍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고 이후에는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정착하여 배일사상을 고취하였다.
이준용 묘
이준용(1860~1945)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동학교도로서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여 공주 일대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부상을 당하였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는데 이때 의병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해 9월 강원도 춘천에서 거의한 지용기 의병의 대장소를 자신의 집에 설치하게 하고, 전답을 팔아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1919년에는 천도교 춘천교구장으로 있으면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윤도순(尹道淳) 등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비밀리에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3월 28일 춘천 읍내 시장에서 박순교(朴順交)·허기준(許基俊)·허현(許鉉) 등과 함께 수십 명의 시위군중들을 이끌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 시위 현장에서 헌병경찰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고 1919년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았다. 이후 공소하였으나 6월 11일 경성복심법원과 7월 17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강원도 항일애국선열 추모탑
강원도 항일애국선열 추모탑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국의 독립과 국권 회복을 위해 항일활동을 전개한 강원지역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나아가 후손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탑의 모양은 의병들이 사용하였던 창을 의미하며 동시에 민족정기와 정의를 상징한다.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맞아 강원도 춘천시 중도에 최초로 건립되었으며, 이후 현 위치로 이전되었다.
허장환 추모비
허장환(1857 - 미상)은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고 의병대장 민긍호 선생이 속초리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할 당시 군자금을 대며,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초대 영귀미 면장으로 부임한 허장환은 1917년까지 면장으로 재직했으며, 퇴임 이후에는 가재를 정리해 교육사업과 가난한 백성들을 구하는데 힘썼다. <화동의숙〉이라는 학교를 세워 교육활동에 전념했으며, 동면에 좌운초교가 설립되자 모든 재산을 장학사업에 기증하기도 했다. 허장환의 재직 당시 면 소재지였던 좌운1리 주민들은 그의 고귀한 뜻을 기리기 위해 1961년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가평의병 3.1항일운동기념비
가평의병 3.1항일운동기념비는 1895년 을미의병 운동과 3·1운동에 참여한 가평지역의 선현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기념비이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된 뒤, 단발령이 내려지며 전국에서 을미의병운동이 일어났는데 가평지역에서도 380여 명의 의병이 봉기하였다. 또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할 때도 가평지역에서도 3,200여 명의 군민이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1991년 가평군에서 설립한 이 기념비는 왼쪽 면에는 의병운동에 참여한 선현들의 성함이, 오른쪽 면에는 3·1운동에 참여한 선현들의 성함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역사는 증언한다'라는 제목의 글을 새겼다.
현학근 사적비
1919년 3·1운동 때 덕천(德川) 서문시장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1924년 경기도 가평(加平)으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였다.1934년 11월 12일 임일봉(林一奉)과 오일보(吳一寶)의 권유로 태극교(太極敎)에 입교했다. 태극교는 겉으로 종교를 표방했으나, 명칭에서 보듯이 민족적 성격이 짙은 단체였다. 평소 민족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태극교에 입교하여 일제의 식민통치를 부정하는 한편 조선 독립을 이루기 위해 동지 규합을 위한 포교 활동을 벌였다. 1934년 11월 15일, 그는 정태용(鄭泰鏞)에게 “조선은 언제까지나 일본에 예속하는 것이 아니라, 4·5년 후에는 악질이 유행하고 병란·재앙이 일어나 현재 인민의 대부분은 사망하고 그때 정왕(鄭王)이 나타나 조선을 독립시키고 충청도 계룡산에 도읍을 정하여 왕위에 즉위하고 태극교도는 정왕을 섬기어 영귀한 생활을 하게 되는 고로 태극교에 입교하여 독신해야한다”고 권유하여 입교시켰다.이후 차원익(車元翼) 등을 대상으로 “태극교는 천의에 기초하는 것으로 태극의 세(조선 독립)도 가깝고 성천을 통하여 모국을 얻어 교도는 고위로 나아가 영원히 영귀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포교를 통해 동지들을 규합했다.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면서, 현학근은 1939년 1월 10일 체포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적목리 공동생활유적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 창씨개명, 종교탄압과 강제징용을 피해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광복이 될 때까지 산기슭 곳곳에 반지하식 움집을 짓고 공동생활을 하면서 숯 생산과 벌목 등을 하며 생활한 공동생활유적이다. 본래 1986년 가평군 향토문화재 제 13호로 지정되었으나 동일한 번지내에 유적이 추가로 확인되면서 2015년에 제 13-1호, 13-2호로 지정되었다. 적목리 공동생활유적 2(가평군 향토문화재 제13-2호)에서 약 1.0km 떨어진 곳에 적목리 공동생활유적 1(가평군 향토문화재 제13-211호)가 존재한다.
장효근 집
장효근(1867 - 1946)은 서울 출신으로 이종일(李鍾一)·오세창(吳世昌) 등과 같이 「제국신문(帝國新聞)」·「대한민보(大韓民報)」를 창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만세보(萬歲報)」를 발간하여 배일사상의 고취와 일진회의 반민족적 행위를 비판하였다. 그는 1898년(광무 2)에 이종일·심상익(沈相翊)·염중모(廉仲模) 등과 함께 제국신문을 창간하여 중류이하의 민중과 부녀자를 대상으로 자주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강제 폐간될 때까지 언론계에서 활약하였다. 1906년(광무 10)부터 1907년(융희 1)까지는 천도교주 손병희(孫秉熙)의 제창으로 만세보를 창간하고, 당시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반민족적 행위를 맹렬히 비판하는 등 민족사상 고취에 진력하였다. 1919년 2월 27일에는 천도교 산하 보성사(普成社) 총무로 있으면서, 3·1독립선언서 21,000매를 인쇄하여 배포한 혐의로 3월 1일 체포되어,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5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2년 2월 6일 제2의 3·1운동을 계획하여 주도하였으나, 일본경찰에게 사전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25년 이후 경기도 고양(高陽)으로 내려와 독립의 일념으로 일기와 시로 마음을 달래면서 여생을 보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