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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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이강희 공적비
애국지사 지오 이경희형제 공적비는 지오 이경희선생과 동생인 해은 이강희선생 두 형제의 공적비이다. 이경희(1880 - 1949)는 1922년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1923년 3월 중순경 김시현(金始顯)·유석현(劉錫鉉) 등이 총독부(總督府)와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조선은행(朝鮮銀行), 그리고 매일신보사 등을 폭파시키기 위해 폭탄을 국내에 반입하자 이에 참여하여 1923년 3월 15일 김시현 등이 무기와 폭탄을 국내에 들여올 때 같이 갖고 온 혁명선언서(革命宣言書) 및 격문(檄文) 수백 장을 황 옥(黃鈺)으로부터 교부받아, 각도지사(各道知事)와 경찰부(警察部)에 우편으로 발송하고, 서울 시내 곳곳에 살포하였다. 그는 이 일로 인해 붙잡혀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7년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하여, 신간회 경성본부 총무간사 겸 경상북도 지회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또한 신간회 산하 밀양청년회(密陽靑年會)를 돌보다가 1928년 11월 11일 밀양경찰서에 의해서 검속(檢束) 당하기도 하는 등 항상 일경의 감시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강희(1898 - 1942)는 이경희의 친동생으로 1898년 2월 17일 대구 무태에서 태어나셨다. 형을 따라 서간도(西間島)로 들어갔다가 중국 상해에서 여운형(呂運亨)의 도움으로 중국 상해 호강대학교에 재학 중 형이 의열단 사건으로 투옥되자 국내로 들어와 신간회 부산지회 총무, 부산학우회 서무간사, 부산협동조합장 등 민족운동에 전력하다가 1928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노차용(盧且用), 장택원(張澤遠), 정대봉(鄭大鳳) 등과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보강을 위해 비밀결사당을 조직하고 활동하던중 일경에 체포되어 2년의 옥고를 치룬 뒤 다시 중국으로 망명, 용정 대성(大成)중학교 영어교사와 교감을 겸임 후세교육에 힘쓰며 기다리시다가 1942년 이역만리에서 44세의 짧은 생애를 마쳤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정호 묘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김정호의 묘이다. 김정호(?-1955)는 천안 사람으로, 본관은 안동, 이명은 김승호(金昇鎬)이다. 양성읍(현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상하이 임시정부의 명을 받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독립단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독립 자금을 모금하고자 국내로 밀입국하여 광복회원으로 활동하며 서울 중앙 우체국에서 5만 원 상당의 금액을 탈취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27년 체포되어 7년의 징역을 살았다. 이후에도 만보산사건으로 다시 6개월의 옥고를 치렀으며, 1942년 상해 임시 정부의 밀령으로 중국을 벗어나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징역을 살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 공로 훈장을 추서하였다.
유창순 묘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유창순의 묘이다. 유창순(1880-1943)은 충청남도 천안의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 국권을 뺏기자, 국권회복을 위해 채기중, 유장렬 등과 함께 1913년 풍기에서 풍기광복단을 결성하였다. 유창순은 풍기광복단에서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기 구입과 군자금 모집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이 통합하여 1915년 대한광복회를 결성할 때에도 참여하여 친일 부호 처단에 앞장섰다. 대한광복회의 혁명계획인 의협 투쟁으로서의 총독 처단과 친일 부호 처단 등을 위해 유창순은 경상도 지방의 친일 부호를 조사하여 명단을 작성하는 한편 그들에게 보내는 광복회 명의의 포고문을 발송하였다. 그리하여 1917년 11월에는 채기중·강순필, 임봉주 등과 함께 칠곡의 친일 부호 장승원을 처단하였다. 이때 대한광복회의 처단 고시문을 붙여 광복회가 널리 알려지게 되며 조직이 발각돼 유창순은 1918년에 피체되었고, 10여 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조병옥 집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조병옥의 생가이다. 조병옥(1894-1960)은 충청남도 천안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경찰관이자 정치가이다. 1914년 미국으로 건너가 안창호가 주도한 흥사단(興士團)의 조직결성에 참여하였으며, 뉴욕 거주 동포들을 중심으로 한인회(韓人會)를 조직하고 총무를 맡아 독립운동의 진상을 미국에 알리는 등 외교활동에 힘썼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의 결성에 참여하여 35명의 간사 중 일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으며 1929년 신간회 복대표위원회에서 교육부장과 경성지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에서는 이에 호응하여 민중대회(民衆大會)를 개최할 것을 계획하고 이를 준비하던 중 조병옥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이 일경에 붙잡혀 그는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2년에 조선일보 전무 겸 영업국장을 맡아 민족언론의 육성에 힘썼으며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붙잡혀 2년간의 예심 끝에 고등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풀려났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독립투쟁의사 광복회원 기념비(삼거리 공원)
충청남도 천안에 위치한 독립투쟁의사 광복회원기념비이다. 천안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광복회의 회원이었던 장두환, 유창순, 성달영, 유중협, 강석주, 조종철, 김정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대한광복회는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이 1915년 통합하여 결성된 혁명단체이다. 1910년대 헌병경찰제에 의한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정치가 자행되던 시기에, 폭력혁명적 투쟁으로 맞선 대한광복회의 행보는 우리 민족에게 독립에의 희망을 잃지 않게 하였다. 또한 일제의 조선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가난한 민중들이 고통받음에도, 자신들의 안일만을 위해 민족성을 포기한 친일 부호배에게 철퇴를 가하며 민족정기를 일깨워 주었다. 대한광복회의 의열투쟁 방략은 이후 암살단, 의열단, 한인애국단으로 명맥을 이어가며 독립운동을 지탱하는 한 축이 되었다.
김정호 구 묘
김정호(미상-1955)는 천안 사람으로, 본관은 안동, 이명은 김승호(金昇鎬)이다. 양성읍(현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상하이 임시정부의 명을 받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독립단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독립 자금을 모금하고자 국내로 밀입국하여 광복회원으로 활동하며 서울 중앙 우체국에서 5만 원 상당의 금액을 탈취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27년 체포되어 7년의 징역을 살았다. 이후에도 만보산사건으로 다시 6개월의 옥고를 치렀으며, 1942년 상해 임시 정부의 밀령으로 중국을 벗어나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징역을 살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 공로 훈장을 추서하였다.
김정호 묘
김정호(?-1955)는 천안 사람으로, 본관은 안동, 이명은 김승호(金昇鎬)이다. 양성읍(현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상하이 임시정부의 명을 받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독립단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던 중, 독립 자금을 모금하고자 국내로 밀입국하여 광복회원으로 활동하며 서울 중앙 우체국에서 5만 원 상당의 금액을 탈취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27년 체포되어 7년의 징역을 살았다. 이후에도 만보산사건으로 다시 6개월의 옥고를 치렀으며, 1942년 상해 임시 정부의 밀령으로 중국을 벗어나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징역을 살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 공로 훈장을 추서하였다.
독립투쟁의사 광복회원 기념비
대한광복회는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이 1915년 통합하여 결성된 혁명단체이다. 1910년대 헌병경찰제에 의한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정치가 자행되던 시기에, 폭력혁명적 투쟁으로 맞선 대한광복회의 행보는 우리 민족에게 독립에의 희망을 잃지 않게 하였다. 또한 일제의 조선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가난한 민중들이 고통받음에도, 자신들의 안일만을 위해 민족성을 포기한 친일 부호배에게 철퇴를 가하며 민족정기를 일깨워 주었다. 대한광복회의 의열투쟁 방략은 이후 암살단, 의열단, 한인애국단으로 명맥을 이어가며 독립운동을 지탱하는 한 축이 되었다.
이관구 묘
이관구(1885-1953)는 황해도 송화 출신으로, 상경하여 박은식, 양기탁의 언론사업에 종사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회문대학 등에서 수학한 뒤, 1913년 국민당의 제2차혁명에 참가하였다. 이후 1914년 귀국하여 해주(海州)에서 유림계의 이종문, 오순원 등과 밀의하여 항일격문을 작성하고 배포하였다. 그리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신규식이 주도한 동제사에 가입하였으며, 고향의 가재를 매각하여 삼달양행, 상원양행을 설립하였고, 박상진이 주도한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대외업무를 맡았다. 그는 신흥학교의 이시영에게 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박상진과 함께 무기 확보에 힘을 쏟았으며, 총독암살을 계획하고 회원 성낙규, 조선환을 서울에 잠입시켰다. 1917년에는 귀국하여 대한광복회의 황해도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유림출신 인사들을 동회에 가입시키며 조직 확대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1918년 초 동회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유중협 묘
유중협(1891-1959)은 충청남도 천안 사람으로, 1913년 채기중, 유창순, 유장렬 등이 조직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에서 활동하였다. 풍기광복단은 대부분은 의병적 성향의 인물들로 구성되어, 실천 방략은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기 구입과 군자금 모집이었다. 1915년에 풍기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들이 제휴하여 혁명단체인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자, 유중협은 이에 가입하여 군자금 수합 활동에 힘썼다. 대한광복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군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따라서 혁명계획은 군자금 모집,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 건설, 의협 투쟁으로서의 총독 처단 계획 및 친일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유중협은 충남 천안지방을 중심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던 중 1918년 초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한태석 사적비
한태석(1876-1949)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1906년 민종식(閔宗植) 의병부대에 합류하고 홍주성 교전 등에 참전하며 계속해서 활동하다가, 1916년 비밀결사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할 때 재정적으로 지원하였으며, 1920년 8월 사이토[齋藤實] 총독과 정무총감(政務總監)을 저격, 사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으나 한우석(韓禹錫)이 붙잡힘에 따라 무산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경태 묘
김경태(1879-1921)는 1917년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의열투쟁의 선봉에 섰고, 대한광복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滿洲)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서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김경태는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며 친일부호 처단에 앞장서 1918년 1월 김한종(金漢鍾)·장두환(張斗煥)·임봉주(林鳳柱) 등과 함께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하였다. 이후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됨에 따라 일경에 붙잡혀 임세규·채기중과 함께 1921년 8월에 사형을 집행당하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