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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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항일민족운동자료 전시관
아산항일민족운동자료전시관은 충남 아산에 위치해있으며, 선장면의 4.4독립운동를 포함한 아산시 항일운동의 체계적인 기록 보존과 미래세대 교육에 활용하기 위하여 조성된 전시관이다. 아산 3.1운동 학술조사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의 스토리텔링을 구성하고 각 지역별 항일운동 전개과정과 항일운동 자료 등을 전시하고,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포토존 및 체험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전개과정 및 특징, 만세운동 전개지역, 참여자명부, 주요인물에 대한 소개, 신문 보도자료와 판결문 등 이미지로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어 아산 3.1운동 역사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충비
오충비(五忠碑,1968년)는 애국지사 이규갑 선생이 어머니 박안라, 형 이규풍 부부, 부인 이애라(앨라), 조카 이민호를 기리기 위해 지은 비석이다. 대한 독립을 위해 힘쓰다가 해외에 묻혔거나 묘소를 찾을 수 없어 조국의 품에 안기지 못한 가족들의 애국 정신을 기리기 위해 영인면 월선리에 건립되었다. 특히, 이규갑 선생의 어머니, 박안라 여사는 충무공 이순신의 9세손인 이도희와 결혼해 아산에 살면서 이규풍, 이규갑 선생을 길러냈다. 1905년 이후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위태로워지자 두 아들들에게 매국노 처단 상소를 올리라고 지시하는가 하면 두 아들을 모두 의병활동에 참여하게 하여 조국의 독립에 힘쓰도록 하셨다. 이에 따라 장남 이규풍 선생은 연해주에서 안중근 의사와 함께 전투에 참여하였고 차남 이규갑 선생은 홍주의병에 참가하게 된다. 이후 박안라 여사 자신도 독립운동에 헌신하고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지만 끝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 곳에서 사망하셨다. 선생의 독립을 위한 교육정신은 집안 대대로 이어져 손자 이민호(李敏浩), 증손자 이길영(李吉永)까지 독립운동가로 장성하게 된다. 충효비는 박안라 여사를 포함하여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규갑 선생 가족들의 행적과 정신을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다.
충국순의비
충국순의비는 창의대장 이규풍 선생과 가족들의 독립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규갑(1888~1970)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이 발표되자 그는 동년 3월 20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 13도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석하여 한성임시정부를 조직하고 평정관 선출되었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서 그의 부인 이애라(李愛羅)는 어린애를 업고 동분서주하다가 아현동에서 일경에게 검문을 당하자 빼앗긴 어린애의 비명을 들으면서도 몸을 뛰쳐 달아나서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 용기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서울 독립단 본부특파원으로 동년 4월 10일 상해에 도착한 그는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의원에 선임되었으며, 4월 19일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으로 재선되었다. 동년 7월에는 의정원의 청원위원(請願委員)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해에는 상해한인청년단의 서무부장 겸 비서부원이 되어 독립운동을 지속화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1929년 7월 20일에는 신간회 동경지회 집행위원장으로 피선되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한 운동에 앞장섰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규풍(1865~1932)은 1909년 안중근(安重根)·이범윤(李範允) 등과 함께 노령 블라디보스톡에 의용군을 조직하여 회령과 경원 등지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후 노령으로 후퇴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후 4월 23일에는 서울에서 개최된 국민대회에서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조성환(曺成煥) 등과 함께 평정관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3월에는 길림에서 열리는 민족혁신파 대표자대회에 노령지역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6년 4월에 길림성 영남호텔에서 정의부의 혁명원로인 양기탁(梁起鐸)을 위시하여 고활신(高豁信)·현정경(玄正卿)·곽종대(郭鍾大)등과 천도교 혁신파인 김봉국(金鳳國)·이동락(李東洛)과 형평사(衡平社)의 이동구(李東求)·송 헌(宋憲) 그리고 노령지역의 대표인 최소수(崔素水)·주진수(朱鎭秀) 등과 함께 고려혁명당을 조직하였다. 그는 고려혁명당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그후 길림성 소수분(小綏芬)에서 다시 노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그이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민호(1895~1944)는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황해도 일부 및 전라·충청도를 돌아다니며 청년들을 모아 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을 추진, 지휘하고 본부로 돌아오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 일제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1922년 가족을 동반하고 노령으로 망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다시 만주로 들어가 신민부 부원으로 활동하던 중, 아버지 이규풍(李奎豊)이 사망하자 북경으로 가서 지하공작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장처명(張處明) 등과 함께 체포되어, 일제의 악독한 고문으로 인해 사경에 이르게 되자 가석방되어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1944년 5월 29일 끝내 별세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애라(1894~1922)는 영명여학교 교감 이규갑(李奎甲)과 결혼 후 공주 영명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1917년 평양의 정의여학교에 전근되어 근무하던 중, 3·1독립만세시위에 가담하였다가 평양서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남편을 돕기 위해서 서울로 올라온 그는 한남수(韓南洙)·김사국(金思國)·홍면희(洪冕熹)·이규갑(李奎甲) 등이 비밀히 연락 회합하면서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국민대회를 소집하는데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는 어린애를 업고 동부서주하였는데, 아현동(阿峴洞)에서 일 헌병에게 몸수색을 당하게 되자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린애의 비명을 들으면서도 뛰쳐 달아나는 등 눈물겨운 일화를 남겼다. 이 아기는 애처롭게 사망하였는데 애국부인회에서 장사를 지내었다고 한다. 남편을 쫓아 만주 간도로 건너갔던 그는 국내에 연락차 도문(圖們)을 거쳐 입국하다가 함북 웅기(雄基)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상준 추모비
김상준 의사는 충남 예산(禮山) 사람이다. 국권상실 이후 1916년 김한종(金漢鍾)·김경태(金敬泰) 등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안을 논의하여 1917년 말까지 총독부를 습격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인 투쟁보다는 조직적인 활동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비밀결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였다. 대한광복회는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일부 인사들과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이 제휴하여 결성한 혁명단체로서,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행동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이었고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하여 혁명기지로 삼는 한편, 혁명군을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의협투쟁으로서의 총독처단 계획 및 친일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김한종·이재덕(李在德)과 함께 광복회의 고시문을 작성하여 지방 자산가들에게 우송하였으며 또한 김재창(金在昶)·정태복(鄭泰復)과 더불어 정인교(鄭仁敎)를 비롯한 지방 자산가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펴던 중 그는 1917년 일경에 붙잡혀 징역 4년 형을 선고받고 1년여의 옥고를 치른 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원묵 묘
김원묵 선생은 충남 예산(禮山) 사람으로 그의 친척으로 애국지사 김재풍, 김재정, 김한종 의사가 있다. 1917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여 항일활동을 폈는데, 대한광복회는 1915년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일부 인사들이 제휴하여 결성한 혁명단체이다. 동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전국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에 관한 포고문을 발송했는데, 그는 김한종(金漢鍾)·김경태(金敬泰)·이재덕(李在德)·김상준(金商俊) 등과 함께 충청도 지방 부호들의 명단을 작성한 후 고시문·포고문 등을 우송하며 군자금 수합활동을 폈다. 또한 김한종·김경태·임봉주(林鳳柱) 등이 1918년 1월 충남 아산군(牙山郡) 도고면(道高面) 면장으로 친일행동을 자행하던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할 때, 이에 필요한 편의를 제공했으며 처단 시 사용한 권총을 보관하고 있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1919년 2월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재정 묘
을사조약이 늑결되어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되는 즈음인 1906년 5월 민종식(閔宗植)을 의병장으로 일어난 홍주의병(洪州義兵) 부대에 가담하여 소모관(召募官)으로 활약하였다. 그 뒤 재야에 은둔하고 지내던 중 1917년 3월 충청도 일대에서 국권회복을 위하여 조직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의 조직책임을 맡아 활동하던 아들 김한종(金漢鍾)과 장두환(張斗煥)을 도와주며 동회(同會)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벌이다 1918년 1월 24일 친일파 아산군(牙山郡) 도고면장(道高面長) 살해사건에 연루되어 붙잡히고 말았다. 1918년 10월 1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면소처분을 받고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재풍 묘
김재풍 선생은 충남 예산(禮山) 사람이다. 1917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활동하였다.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 등이 주도한 대한광복회는 1915년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통합하여 결성된 혁명단체였다. 대한광복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여 만주(滿洲)의 독립군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할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행동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대 강령이었고,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하여 혁명기지로 삼는 한편 혁명계획은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의협 투쟁으로서의 총독처단과 친일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김재풍은 동단의 충청도 책임자 김한종(金漢鍾)의 지시를 받고 김상준(金尙俊) 등과 함께 홍성(洪城)의 정인교(鄭仁敎)를 비롯한 충청도의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다. 또 광복회의 포고문에 날인할 인장을 새겨 김한종에게 교부하여 동단의 군자금 수합활동을 도왔다. 그러던 중 1918년 초 동단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그는 일경에 붙잡혀 1919년 9월 경성복심법원에서 태(笞) 90도형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한종 묘
김한종(1883 - 1921)의 자는 경수, 호는 일우이다. 의병장 민종식(閔宗植)의 휘하에서 소모관(召募官)으로 활약한 김재정(金在貞)의 맏아들이다. 국권이 일제에 의하여 침탈당하자 구국을 맹세하고 1915년 박상진(朴尙鎭)·우재룡(禹在龍)·권영만(權寧萬)·양제안(梁濟安)·김경태(金敬泰) 등과 함께 대구에서 비밀결사인 광복회(大韓光復會)를 조직하였다. 광복회는 1916년 노백린(盧伯麟)·김좌진(金佐鎭) 등 동지를 규합하여 전국 규모의 독립운동단체로 거듭났다. 김한종은 충청지부장으로 임명되어 총사령 박상진과 더불어 각지의 부호로부터 국권회복운동의 자금을 거두었다. 1918년 1월에는 김경태·임봉주(林鳳柱)를 파견하여 친일 악질관리인 충청남도 아산의 도고면장(道高面長) 박용하(朴容夏)를 사살하였다. 그해 1월 조직이 발각되면서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경성복심법원은 1919년 9월 22일 기각하였다.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1921년 8월에 총사령 박상진과 함께 처형되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한종 집
김한종(1883 - 1921)의 자는 경수, 호는 일우이다. 의병장 민종식(閔宗植)의 휘하에서 소모관(召募官)으로 활약한 김재정(金在貞)의 맏아들이다. 국권이 일제에 의하여 침탈당하자 구국을 맹세하고 1915년 박상진(朴尙鎭)·우재룡(禹在龍)·권영만(權寧萬)·양제안(梁濟安)·김경태(金敬泰) 등과 함께 대구에서 비밀결사인 광복회(大韓光復會)를 조직하였다. 광복회는 1916년 노백린(盧伯麟)·김좌진(金佐鎭) 등 동지를 규합하여 전국 규모의 독립운동단체로 거듭났다. 김한종은 충청지부장으로 임명되어 총사령 박상진과 더불어 각지의 부호로부터 국권회복운동의 자금을 거두었다. 1918년 1월에는 김경태·임봉주(林鳳柱)를 파견하여 친일 악질관리인 충청남도 아산의 도고면장(道高面長) 박용하(朴容夏)를 사살하였다. 그해 1월 조직이 발각되면서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경성복심법원은 1919년 9월 22일 기각하였다.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1921년 8월에 총사령 박상진과 함께 처형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승복 구 묘
이승복(1895 - 1978)은 애국지사 이남규(李南珪)의 손자로 이명은 이징복이다. 1913부터 6년간 노령과 북만주에서 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永)·이시영(李始榮)·이상설(李相卨)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였다. 1920년에는 박은식(朴殷植)과 함께 〈청구신문(靑丘新聞)〉을 발간하고 신문활자를 노령으로 운반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6개월간 구금당하였다. 1923년 김상옥(金相玉)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파의거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동년 7월 홍명희(洪命熹)·홍증식(洪增植)·김 찬(金燦) 등과 함께 사상단체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를 조직하였다. 1927년에는 이관용(李灌鎔)·권태석(權泰錫) 등과 함께 신간회 예산지회를 주도·조직하였다. 또한 1928년 6월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의 정기총회에서 평의원으로 선출되어 민족교육에 힘썼으며 1927∼1931년 동아일보 이사 겸 영업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언론창달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의 진상을 보도하였다는 이유로 안재홍(安在鴻)과 함께 일경에 붙잡혀 징역 8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6년경에는 중국 남경(南京)·상해(上海) 등지의 독립운동 단체나 중국 군관학교에 입교를 원하는 국내의 청년들을 그곳의 지도자들에게 소개시켜 주며 독립투사의 양성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남규 3대 항일투쟁 사적비
이남규선생 3대 항일투쟁 사적비는 이남규, 이충구, 이승복 3대에 걸친 독립지사의 애국 정신을 계승하고자 건립하였다. 이남규(1855 - 1907)는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본과 일전을 벌일 것을 상소하고 두문불출하다가, 1906년 5월 민종식의진의 홍주성 전투에서 선봉장에 임명되었으나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홍주성 전투 패퇴 후 그를 찾아 온 민종식 의병장의 은신처를 제공하고 재기를 돕다가 거사일 직전인 1906년 10월 2일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고초를 겪고 풀려났으나, 일진회의 밀고로 1907년 9월 다시 체포되어 같이 의병에 참여했던 그의 아들 이충구(1874 - 1907)와 함께 순국했다. 이승복(1895 - 1978)은 이남규의 손자로 1913~1934년 사이에 국내와 만주 노령 지역을 드나들며 군자금 모금, 임시정부 연통제 활동 등 독립운동과 언론활동을 했고, 1927년 신간회 발기인으로도 참여했다.
김한종 순국기념비
김한종(1883 - 1921)의 자는 경수, 호는 일우이다. 의병장 민종식(閔宗植)의 휘하에서 소모관(召募官)으로 활약한 김재정(金在貞)의 맏아들이다. 국권이 일제에 의하여 침탈당하자 구국을 맹세하고 1915년 박상진(朴尙鎭)·우재룡(禹在龍)·권영만(權寧萬)·양제안(梁濟安)·김경태(金敬泰) 등과 함께 대구에서 비밀결사인 광복회(大韓光復會)를 조직하였다. 광복회는 1916년 노백린(盧伯麟)·김좌진(金佐鎭) 등 동지를 규합하여 전국 규모의 독립운동단체로 거듭났다. 김한종은 충청지부장으로 임명되어 총사령 박상진과 더불어 각지의 부호로부터 국권회복운동의 자금을 거두었다. 1918년 1월에는 김경태·임봉주(林鳳柱)를 파견하여 친일 악질관리인 충청남도 아산의 도고면장(道高面長) 박용하(朴容夏)를 사살하였다. 그해 1월 조직이 발각되면서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경성복심법원은 1919년 9월 22일 기각하였다. 다시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사형이 확정되었다. 1921년 8월에 총사령 박상진과 함께 처형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