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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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금리 애국지사 마을 표지석(임종래)
임종래 선생은 충남 부여군 사람이다. 1928년 2월 부여군 임천면, 충화면에 수리조합(저수지)을 시행하려 하자, 충화면 복금리와 만지리에서 김목현(金穆鉉) 등과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1928년 2월 10일 지주와 주민들이 화합하여 임천면장 임씨에게 수리조합 안한다는 계약서를 요구하고 수리조합 반대 진정서를 군과 도청에 이어 총독부에 제출하였다 .수원지 지질조사 할 때 향리 주민 수백 명이 모여 조사를 못하게 하자 이를 제지하는 임천면장 임씨를 냇물에 집어넣고 폭행, 구타하였다. 이로 인하여 1928년 10월 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요죄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또한 선생은 "일본군 연전 연승의 행진"이라는 신문보도에 대하여 일본군이 중국군과 전투에서 전투마다 패하여 일본군 수십 만 명이 전멸 당하였고, 연합군의 공격으로 일본 비행기와 군함 수백 척이 일시에 전멸당했다는 내용을 전파하다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선생은 1939년 4월 26일 구류되어 동년 5월 9일 금고 8월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윤찬복 충의비
윤찬복은 평남 순천(順川) 사람이다. 기독교 전도사로 있던 그는 1919년 음력 8월 평양(平壤)의 예수교신학교 기숙사에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총무 박승명(朴承明)으로부터 향촌회(鄕村會)를 조직할 것을 권유받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최복길(崔福吉)·정찬성(鄭燦成) 등과 함께 동년 음력 10월 9일경 순천군 제현면(濟賢面)의 예수교계열 여학교에서 수십명의 교인들을 중심으로 대한국민회부인향촌회(大韓國民會婦人鄕村會)를 조직하였다. 그는 동회의 회장을 맡고 최복길·정찬성은 회계를 담당하였다. 동회는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할 것을 목적으로 회원들로부터 4원씩을 모금한 후 그중 1원은 향촌회의 경비로 충당하고 나머지는 군자금으로 적립하였다. 이렇게 하여 모금한 160원을 1920년 3월(음력) 임시정부 요원 차경신(車敬信)에게 교부하였다. 동회는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1921년 1월 조직이 노출되어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병학 추모비
조병학 선생은 충남 부여 사람으로 1931년 10월 충남 부여에서 협의회 활동에 참여하고 1933년 5월 부여농민구락부연합회를 결성하고 항일의식 고취와 조직 확대에 힘쓰다가 1933년 8월 일경에게 체포되어 예심 진행중 1935년 3월 1일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40여 일만인 1935년 4월 9일 고문 여독으로 순국하였다. 해당 비석은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1984년 부여군이 건립하였다.
애국지사마을 표지석(홍산면 조현리)
독립운동가 조병철은 1931년 고향인 부여군 홍산면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펼 것을 목적으로 야학을 개설하고 항일독립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을 쏟았다. 1933년 7월 항일농민운동에 힘쓰던 중 일경에 피체되었다. 피체된 지 3년만인 1936년 6월 예심에 회부되어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받고 공주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 조병순은 1931년 고향인 부여군 홍산면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펼 것을 목적으로 야학을 개설하고 항일독립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을 쏟았다. 1933년 10월 7일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어 1935년 3월 1일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옥중 여독으로 동년 4월 9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독립유공자탑
서산의 독립운동은 한말 의병운동에서 시작됐다.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 이후 재봉기한 창의대장 민종식의 홍주의병과 1907년 군대해산 이후 봉기한 정주원 의병에 적지 않은 수의 서산 출신의병들이 참여했다. 이후 서산지역의 독립운동은 이철영, 김상정과 같이 직접 몸으로 항거하는 의협투쟁과 국채보상운동, 애국계몽운동으로 이어졌고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3.1운동, 청년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의열 투쟁에 나선 독립단 서산지단원 서병철, 조선민족대동단 소속으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음암면 유계리 출신의 김용환, 의친왕을 수행하고 상해 임시정부로 향했던 한기동 등과 같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치는 국외 독립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항일투쟁으로 전개됐다. 전국에서 일어난 학생운동에도 서산출신 학생들은 빠지지 않았다. 운산면 출신 유흥수 선생은 대구사범학생 시절 항일학생단체인 다혁당을 결성해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다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지난 2021년 서산지역 독립운동가 발굴 용역에서 542명이 새롭게 발굴되면서 서산지역의 독립운동에 대해 다시 조명하는 계기가 됐다. 무엇보다 타지역과 비교에서 월등이 많은 숫자의 독립운동가들이 나왔다. 조사는 문헌조사와 일제강점기 당시의 형행기록조사, 관련 주민들의 구술채록을 통해 진행됐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의병 9명, 계몽운동 278명, 3.1운동 112명, 국내항일 82명, 독립운동 지원 1명, 만주방면 2명, 문화운동 11명, 중국방면 1명, 청년운동 42명, 학생운동 3명, 기타 1명이다. 이를 보면 이름 없는, 밝혀지지 않은 독립운동에 나섰던 수많은 서산 주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난지도에서 최구현 의병과 함께 일본수비대에 항전했던 김태순 의병, 광주학생운동 연합시위 참여를 권유하고 경성역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김병묵 학생, 비밀결사단체 독서회, 적우회 등 적색일반사용인조합 조직해 항일운동에 나선 17세의 민태규, 1929년 광주학생운동 참가, 1934년 신건설사건(제2차 카프검거사건) 주동자로 활동했던 윤붕원 등 일부는 총을 들고, 일부는 대한독립청년단 활동으로, 계몽운동으로, 국채보상운동과 군자금 모집으로, 또 학생은 학생운동으로, 그리고 일반 주민들은 3.1만세시위로 참여했다.
김상정 집
김상정 선생은 충남 서산(瑞山) 사람이다.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유거하던 광무황제가 갑자기 훙거한 소식을 듣고 발상문을 작성하여 면사무소 게시판에 게시하고 훈자서 발상하였다. 동년 3월 23일 서산군 해미면에서 3.1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일경들이 민심을 회유한다는 명목으로 면민대회를 개회하였을 때 면민들에게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환기시키고 "불납세(不納稅)는 물론 왜왕의 명령을 맹세코 복종할 수 없다" 하며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작성하여 조선총독에게 발송하였다. 동년 9월 12일에는 면서기가 왜경을 대동하여 소위 호세고지서(戶稅告知書)를 배부하자 "왜왕 대정(大正)은 한국과는 대대로 원수라 죽어서라도 원수를 갚겠다" 하고 중지 2절을 칼로 끊어 혈서를 써서 조선총독에게 발송하였다. 1921년 9월 12일에는 혹심한 전매령에 항거하여 담배를 재배케 하고 '대한유민(大韓遺民) 김상정 종불굴초(種不屈草)'라는 표시를 만들어 세웠는데, 왜경이 벌채를 명하자 손칼로 좌측 귀를 자르고 더러운 소리를 듣지 않겠다며 혈서로 자신의 의지를 나타냈다. 1937년 2월에는 삭발을 하지 않고 상복을 벗지 않음은 사상이 불온하다고 청양주재소에서 무참히 구타당하여 척추절상으로 종신까지 허리를 쓰지 못하였다. 1946년 1월 1일에는 광복으로 환국한 임시정부는 혈서철을 보고 이 사실을 알아 김구 주석 명의의 특행 찬양문을 보내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상정 묘
김상정 선생은 충남 서산(瑞山) 사람으로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유거하던 광무황제가 갑자기 훙거한 소식을 듣고 발상문을 작성하여 면사무소 게시판에 게시하고 훈자서 발상하였다. 동년 3월 23일 서산군 해미면에서 3.1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일경들이 민심을 회유한다는 명목으로 면민대회를 개회하였을 때 면민들에게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환기시키고 "불납세(不納稅)는 물론 왜왕의 명령을 맹세코 복종할 수 없다" 하며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작성하여 조선총독에게 발송하였다. 동년 9월 12일에는 면서기가 왜경을 대동하여 소위 호세고지서(戶稅告知書)를 배부하자 "왜왕 대정(大正)은 한국과는 대대로 원수라 죽어서라도 원수를 갚겠다" 하고 중지 2절을 칼로 끊어 혈서를 써서 조선총독에게 발송하였다. 1921년 9월 12일에는 혹심한 전매령에 항거하여 담배를 재배케 하고 '대한유민(大韓遺民) 김상정 종불굴초(種不屈草)'라는 표시를 만들어 세웠는데, 왜경이 벌채를 명하자 손칼로 좌측 귀를 자르고 더러운 소리를 듣지 않겠다며 혈서로 자신의 의지를 나타냈다. 1937년 2월에는 삭발을 하지 않고 상복을 벗지 않음은 사상이 불온하다고 청양주재소에서 무참히 구타당하여 척추절상으로 종신까지 허리를 쓰지 못하였다. 1946년 1월 1일에는 광복으로 환국한 임시정부는 혈서철을 보고 이 사실을 알아 김구 주석 명의의 특행 찬양문을 보내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신간회 서산지회 사적지 표지석
1928년 4월 신간회 서산지회가 창립되었다. 간부는 회장 이원생(李源生), 부회장 이윤기(李潤基), 간사 김영찬(金榮燦)·조석구(趙錫九)·이일순(李一淳)·이순택(李淳澤)·유태열(柳泰烈)·명□수(明□洙)·김원제(金元濟)·박원서(朴元瑞)·신봉균(申鳳均)·이동만(李東萬)·이광훈(李光熏)·송원일(宋源一) 등이었으며 대부분 서산 읍내의 유력 인사들이었다. ‘민족 독립 쟁취’, ‘기회주의 배격’ 등의 강령을 내걸고 창립된 신간회는 일제 강점기 국내에 조직된 민족 운동 단체 중 가장 규모가 큰 단체였다. 창립 당시 신간회 지부는 전국 141개 지역[회원 수 약 4만 명]에 걸쳐 조직되었으며, 충청남도 지역에는 서산을 포함하여 강경, 공주, 당진, 대전, 부여, 예산, 천안, 홍성 등지에 조직되었다.
김상정 추모비
김상정 선생은 서산 사람으로, 1919년 1월 21일 덕수궁에서 유거하던 광무 황제가 갑자기 훙거한 소식을 듣고 발상문을 작성하여 면사무소 게시판에 게시하고 훈자서 발상하였다. 동년 3월 23일 서산군 해미면에서 3.1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나자 일경들이 민심을 회유한다는 명목으로 면민대회를 개회하였을 때 면민들에게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환기시키고 "불납세(不納稅)는 물론 왜왕의 명령을 맹세코 복종할 수 없다" 하며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작성하여 조선 총독에게 발송하였다. 동년 9월 12일에는 면서기가 왜경을 대동하여 소위 호세고지서(戶稅告知書)를 배부하자 "왜왕 대정(大正)은 한국과는 대대로 원수라 죽어서라도 원수를 갚겠다" 하고 중지 2절을 칼로 끊어 혈서를 써서 조선총독에게 발송하였다. 1921년 9월 12일에는 혹심한 전매령에 항거하여 담배를 재배케 하고 '대한유민(大韓遺民) 김상정 종불굴초(種不屈草)'라는 표시를 만들어 세웠는데, 왜경이 벌채를 명하자 손칼로 좌측 귀를 자르고 더러운 소리를 듣지 않겠다며 혈서로 자신의 의지를 나타냈다. 1937년 2월에는 삭발을 하지 않고 상복을 벗지 않음은 사상이 불온하다고 청양주재소에서 무참히 구타당하여 척추절상으로 종신까지 허리를 쓰지 못하였다. 1946년 1월 1일에는 광복으로 환국한 임시정부는 혈서철을 보고 이 사실을 알아 김구 주석 명의의 특행 찬양문을 보내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헌태 독립투사비
정헌태 선생은 충남 서산 출신이다. 정헌태는 경성제일고보(京城第一高普)를 다니던 중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가한 뒤 북간도(北間島) 지린성[吉林省] 연길(延吉)로 망명하였다. 동년 음력 11월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 간도전위대 소속 모연대장 이제안(李濟安)의 지휘 아래 북간도 지방에서 독립운동자금 및 동지규합을 위해 잠시 활동하다가, 국내로 돌아와 개성의 광진학교(廣進學校)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26년 3월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의 일본대학(日本大學) 전문부 사회과에 다녔다. 일본 유학 중 그는 동년 6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조선유학생연합웅변회(朝鮮留學生聯合雄辯會)에 참가하여 한국인의 해방을 호소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27년 5월 신간회(新幹會) 동경지회(東京支會)가 세워질 때 간사를 맡아 활동하다가 일본대학 3학년을 중퇴하고 국내로 돌아왔다. 귀국 후 동년 12월 신간회 경성지회의 조직부 상무간사 등에 선임되어 각 지회 주최의 강연회에 연사로 참가하여 민지계발에 힘썼다.그는 1928년 조선공산당 조직이 와해되자 이를 재건하기 위해 이준열(李駿烈) 등과 함께 1929년 1월 조선공산당 잠정 조직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동년 3월 당의 잠정조직을 조선공산당재조직준비위원회로 개칭하고 야체이카·고려공산청년회·조선피압박동맹회 등의 조직에 착수하였다. 이때 그는 고려공산청년회 조직부 임무를 맡았다. 그는 동지 포섭에 힘을 쏟아 민병회(閔丙會)를 비롯하여 고학당 출신 정관진(丁寬鎭)·김태래(金泰來)·김성기(金成琦)·박치우(朴治宇)·전진한(錢鎭漢) 등을 입회시키고 동년 3월 하순 고려공산청년회의 부서를 정하였다. 또한 그는 이준열 등과 함께 1929년 3월 고학당 내에 조직한 조선학생혁명당(朝鮮學生革命黨)을 조선학생전위동맹으로 확대 개편하면서 고려공산청년회의 조직 기반을 강화시켜 나갔다. 이러한 학생전위동맹은 고려공산청년회 행동 조직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서울지역 각 학교에 독서회를 설치하며 학생운동을 통할 지도하는 조직체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안상훈(安相勳) 등과 함께 열성자대회(熱誠者大會)를 추진하던 중 1929년 6월 당재조직준비위원회와 산하 고려공산청년회가 발각되면서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2년 7월 대전형무소로 이감 도중 ‘조선민족 독립만세’ 등을 외친 혐의로 징역 8월이 가형되어 7년 8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임종연 집
애국지사 임종연의 생가는 충남 서천에 위치해있으며, 임종연이 생전에 살았던 집이다. 임종연(1882-1945)의 이명은 임지호(林之虎)이며, 1920년 7월 조선민단(朝鮮民團)이 주최한 강연회에서 박무병과 함께 독립사상을 고취(鼓吹)한 강연인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연제로 「우리 민족은 분기하여 독립을 관철하여야 한다'고 강연을 하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며, 징역 8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임종연 공훈비
임종연(1882-1945)의 이명은 임지호(林之虎)이며, 1920년 7월 조선민단(朝鮮民團)이 주최한 강연회에서 박무병과 함께 독립사상을 고취(鼓吹)한 강연인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연제로 「우리 민족은 분기하여 독립을 관철하여야 한다」고 강연을 하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며, 징역 8월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