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TOTAL. 729 건
임대수 공적비
임대수(1882-1911)는 충남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충청남도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웠고 1907년 정미조약의 체결 시에도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웠다. 임대수는 충청남도 공주군, 천안군, 청양군, 당진군, 전의군, 직산군, 정산군, 은진군, 아산군, 평탠군 등 19개의 군을 전전하며 활약하였고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구속되어 있던 수백 명의 항일운동가를 구출해냈다. 임태수는 1911년 6월 16일 충청남도 공주군 의당면 태산리 전투에서 일본 제국 경찰과 교전하던 중 동지 6명과 함께 전사, 순국했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장재학 의열비
장재학(1862-1919)은 충청남도 연기군 결성 장씨 가문의 사람으로 일제의 민적(호적) 조사와 납세 정책에 저항한 인물이다. 장재규(동생)와 장화진(아들)도 함께 일제에 저항하였으며 고초를 치렀다. 1915년 3월 12일 충남 연기군 조치원 헌병분견소 소속 헌병 야나기사와 도지로(柳澤藤次郞)가 민적정리를 위해 동소에 비치된 민적부(民籍簿)를 가지고 민적조사를 시행했다. 이에 장재학은 동생 장재규와 논의한 뒤 "본인은 일본신민이 아닌데 일본 관헌이 조선 시대에 등록된 자신의 민적부를 소지한다는 것은 부당하다"면서 동생과 함께 민적부 중에서 본인에 관계된 일부분을 찢어서 소각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5년 5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형법 제258조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6년 4월 출옥한 그는 일제에게 세금을 한 푼도 바칠 수 없다며 납세 거부 운동을 벌였다. 이에 일제가 그의 집안 재산을 강제 압류하는 등 갖은 수단을 동원헀지만, 그는 끝내 굴복하지 않았고, 결국 1917년 1월 23일 그와 아우 장재규는 전남 고흥군 거금도로 유배되었고, 장남 장화진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그는 1919년 1월 4일 고금도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장재학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박윤옥 묘
박윤옥(1915 - 2005)는 평양의 숭인상업학교 재학중이던 1936년 6월에 동교생 김현주(金顯周)·김덕윤(金德潤)등과 함께 농민의 계몽지도 및 민족의식의 고양을 목적한 항일결사 일맥회(一麥會)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해당 조직의 활동이 부진함에 따라 이들은 강력한 결사를 조직할 것을 뜻하고 1937년 2월에 동지 지광호(池光浩)의 집에서 비밀결사 열혈회(熱血會)를 결성하였다. 이때 그는 회장을 맡았다. 동회는 "조선민족 영원의 복지를 위해 조선독립을 기하다"란 회칙을 정하고 그 행동방안으로는 농민대중의 지도를 통한 민족의식의 배양과 농업기술 및 경영을 지도하여 경제적 향상을 도모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회원간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각자의 성명대신 한글문자 한자씩을 암호로 정하였으며, 또 매년 3월 1일, 8월 29일을 열혈회의 기념일로 정하고 이날에는 조국독립을 위한 기도 및 단식을 행하여 항일정신을 기리기로 했다. 그는 1938년 3월에 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 신학부 예과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열혈회 회원들인 김덕윤·김동순(金東舜) 등과 계속 모임을 가지며 사업을 추진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런데 이러한 활동이 일경에 발각되어 그는 1939년 11월에 붙잡혔다. 붙잡힌 후 그는 2년 동안 미결수의 상태로 있다가 1941년 11월에 1심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항소하여 2심에서 징역 4년·집행유예 5년 형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김규열 의열비
김규열(1887-1958)은 청풍 김씨 가문으로 조치원읍 신안리 출신이다. 김규열은 1919년 당시 신안, 서창, 침산, 봉산리에서 있었던 봉화 횃불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조치원 시장에서 만세를 부르다 일본 순사가 휘두른 개머리 판에 맞아 의식 불명이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후 김규열은 기적처럼 깨어났으며 전답 10,000여 평 되는 전 재산을 매각하여 군자금을 조달하였고 미나미 총독을 조치원역에서 살해하려다가 경비가 삼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나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여 유공자로 추서받지 못하였다. 이에 선생의 구국업적을 칭송하기 위하여 2002년 연기군 유림들이 김규열의 의열비를 건립하였고 최창규 전 독립기념관장이 발문을 썼다.
연기출신 독립의열명사 숭모비
연기출신독립의열명사 숭모비는 세종시 조치원읍 침산리 충령탑공원에 위치해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이곳에 조치원 신사를 건립하여 일본천황에게 예배하는 장소로 사용했다. 광복 후 조치원 신사를 없앴고, 6.25전쟁 이후 충령탑을 세우고 나라를 위하여 싸우가 순국하신 애국지사의 넋을 기리는 추모의 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숭모비 외에도 보훈의 빛(조형물), 충령탑, 조국통일기원비가 공원 내에 세워져있다.
서장환 집
서장환(1890 ~ 1970)은 대구 달성출신으로 서성준(徐聖濬이라는 이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항일 비밀결사조직 상의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과 의병가족을 도왔고, 만주와 상해지역으로 군자금을 송달하였다. 또한 기미년 3.1운동 때에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배포하다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끝에 병으로 풀려났다. 1920년 상해 임시정부를 도와 군자금 모금에 힘썼고, 1921년 자유신보를 간행하여 일제식민지의 부당성을 전세계에 알리기에 힘썼다. 그 후 일본경찰의 끊임없는 감시와 구속을 피하여 1933년 계룡산 신도안으로 일가족이 이주한 후 항일 비밀결사 십이일민회를 조직하였으며, 계롱산에서 동흥의숙(東興義塾)이란 서당을 열고 청소년 교육과 민족의식 고취에 힘쓰면서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을규 집
이을규(1894 - 1972)는 3.1독립운동 직후 전 조선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결성한 대동단에 가입하여 1919년 10월 대동단의 본부를 상해로 이전하기로 계획하고, 그해 10월 10일 동단의 총재 김가진을 1차로 망명시킨 뒤 의친왕(懿親王)의 상해망명을 추진하였다.강태동과 함께 상해에서 귀국한 그는 의친왕의 망명을 추진하는 한편 상해임시정부로부터 송달된 각종 선전물 3천5백매를 배포하면서 적극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정남용과 함께 의친왕(懿親王)을 상해까지 수행하는 임무를 맡았던 그는 그해 11월 9일 서울을 출발하였으나, 이 사실을 탐지한 일경의 추격을 받아 이들 일행은 11월 11일 만주 안동역에서 피검되었는데, 이 때 그는 일제의 포위망을 뚫고 검거를 피할 수 있었다.하지만 1920년 1월 재입국했다가 붙잡히고 말았다.결국 그는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에 다시 상해로 건너가 무력투쟁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무기제조 및 무장훈련에 힘을 쏟았다. 그 후 만주로 넘어간 그는 1929년 7월 김좌진 등이 주도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에 참여면서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계열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계룡의 독립운동가 비
한훈(1889 - 1950)은 1913년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였고, 1919년에는 조선독립군정서에 가입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1920년 일본 고관들을 암살할 계획을 추진하던 중 체포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배영직(1882 - 1926)은 농촌자력갱생운동을 펼쳤고,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지수(1845 - 1911)는 중추원의관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고, 일제가 그를 회유하기 위해 노인은사금을 주자 거절하며 칼로 자결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양기하(1878 - 1932)는 교육사업에 전념하여 젊은이들에게 항일민족의식을 심어주었다.그 후 남만에서의 마지막 무장항일투쟁의 역사를 장식한 지도자였으나 일제의 습격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철영 사당(숭의사)
이철영(1867 - 1919)는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일제의 모든 정책을 거부할 것을 촉구하는 창의문(倡義文)을 지어 배포하였다. 1909년 민적법이 공포되자 일본에 맞서 투쟁하다 체포되어 10여년간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 후에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항쟁하다가 1919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철영 묘
이철영(1867 - 1919)는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일제의 모든 정책을 거부할 것을 촉구하는 창의문(倡義文)을 지어 배포하였다. 1909년 민적법이 공포되자 일본에 맞서 투쟁하다 체포되어 10여년간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그 후에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항쟁하다가 1919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독립유공자 기념비(공주보훈공원)
독립유공자 기념비는 공주보훈공원 내에 위치해있으며, 2015년 광복 7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하였다. 기념비는 기억, 사람, 미래 세 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기억'은 태극 모양을 형상화하여 표현하였고, '사람'은 추모의 벽으로 '미래'는 주 조형물로 표현한 테마이다. 기념비 하단에는 공주 출신 독립유공자 88명의 이름을 새겨져 있다. 공주보훈공원 내에는 충령탑, 위패봉안실 등 다른 사적들도 존재한다.
윤용주 묘
윤용주(1884 - 1949)의 아호는 현천(玄天),성첨(聖瞻)이며 이명은 이민하(李敏河)이다. 1919년 4월 2일 홍면희(洪冕熹)·이규갑(李奎甲) 등으로부터 임시정부(臨時政府)의 수립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대회의 회원 되기를 권고 받았다. 1919년 9월 서울에서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이 조직한 조선독립대동단(朝鮮獨立大同團)에 가입하였다. 대동단의 지방단원 모집 담당이 된 후 임응철(林應喆)·김재구(金在九)·강경진(姜景鎭)을 가입시켰다. 지방동지의 규합과 군자금 모집 등을 위해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처벌령·출판법·보안법·사기 등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