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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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729 건
이창휘 흉상
이창휘는 변호사로서 독립운동 관련의 수많은 '사건'에 자진 변호를 맡거나 무료 변호를 통하여 애국적 의지를 드높이는 한편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의 중앙이사(中央理事)로서 농촌계몽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1925년 10월 29일 천도교의 농민조직이었던 조선농민사의 창립총회에서 중앙이사로 선출된 그는 조선농민사 주최 농촌문제강연회의 주요 연사로 활약하면서 주로 농민들에게 필요한 법률상식 등을 강연하는 등 농민 계몽에 앞장 섰다. 한편 1926년 6·10 만세운동이 일어나 주동 학생들이 일제 법정에 서게 되자, 그는 이인(李仁) 등과 함께 학생들의 애국적 행동을 변론함으로써 민족 변호사의 행동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1927년 11월 일본 삼릉회사(三菱會社)가 수력전기회사를 설립하기 위해 일경을 앞세워 한국인의 토지를 강제 매수하려 하자, 허헌(許憲)과 함께 법률투쟁을 전개하여 토지침탈을 저지시키는 쾌거를 올렸다. 또한 1928년 경남 도청년연맹(道靑年聯盟)의 항일투쟁이 발각되어 관련자들이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 자진하여 변호를 섰으며, 1929년 4월 공명단(共鳴團)의 단원들이 군자금 모집을 위해 망우리에서 일제의 우편물 수송차를 습격하다가 붙잡힌 '공명단 의거'의 공판에서도 이인·허헌과 함께 민족적 입장에서 변호하였다. 그는 '조선공산당 사건'과 광주학생운동, '간도공산당 사건'등 사회주의 계열 운동의 변호를 많이 맡아 사상변호사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러던 중 과로로 인하여 병을 얻어 1934년 9월 9일에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양두옥 묘
양두옥(1914 - 1966)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1931년 3월 9일 제주농업학교(濟州農業學校) 3학년에 재학 중 부당하게 유급(留級)당하자 학교를 습격 교장을 구타하고 학교기물을 파괴하다 붙잡혀 1932년 3월 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같은 해 3월 제주도(濟州島) 구우면(舊右面) 신창리(新昌里)에서 5인조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농민부(農民部)를 맡아 활동하였으며, 5월 1일 서당학생 100여 명을 규합하여 시위행진을 하였다. 8월에는 신창리(新昌里) 등 4개 리(里) 부락민대회(部落民大會)에 참석하여 신창서당(新昌書堂)의 공립보통학교(公立普通學校) 승격(昇格)을 통한 식민지교육에 항거하는 연설을 하였고, 일제의 강압적인 면행정(面行政)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34년 일경에 붙잡힌 그는 오랜 미결기간을 거쳐 1937년 4월 12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창휘 구 묘
이창휘(1897~1934)는 제주(濟州) 사람이다. 변호사로서 독립운동 관련의 수많은 '사건'에 자진 변호를 맡거나 무료 변호를 통하여 애국적 의지를 드높이는 한편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의 중앙이사(中央理事)로서 농촌계몽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1925년 10월 29일 천도교의 농민조직이었던 조선농민사의 창립총회에서 중앙이사로 선출된 그는 조선농민사 주최 농촌문제강연회의 주요 연사로 활약하면서 주로 농민들에게 필요한 법률상식 등을 강연하는 등 농민 계몽에 앞장섰다. 한편 1926년 6·10 만세운동이 일어나 주동 학생들이 일제 법정에 서게 되자, 그는 이인(李仁) 등과 함께 학생들의 애국적 행동을 변론함으로써 민족 변호사의 행동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1927년 11월 일본 삼릉회사(三菱會社)가 수력전기회사를 설립하기 위해 일경을 앞세워 한국인의 토지를 강제 매수하려 하자, 허헌(許憲)과 함께 법률투쟁을 전개하여 토지침탈을 저지시키는 쾌거를 올렸다. 또한 1928년 경남 도청년연맹(道靑年聯盟)의 항일투쟁이 발각되어 관련자들이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 자진하여 변호를 섰으며, 1929년 4월 공명단(共鳴團)의 단원들이 군자금 모집을 위해 망우리에서 일제의 우편물 수송차를 습격하다가 붙잡힌 '공명단 의거'의 공판에서도 이인·허헌과 함께 민족적 입장에서 변호하였다. 그는 '조선공산당 사건'과 광주학생운동, '간도공산당 사건'등 사회주의 계열 운동의 변호를 많이 맡아 사상변호사로도 이름을 날렸다. 그러던 중 과로로 인하여 병을 얻어 1934년 9월 9일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정맹 묘
김정맹(1917 - 1969)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1932년 3월 하순경 구우면(舊右面) 신창리(新昌里) 북해안 축항(北海岸築港) 부근에서 김두진(金斗進)·고자봉(高子奉)과 같이 5인조 결사(結社)를 조직하여 소년부서를 담당하고 4월 30일에는 메이데이 기념 시위운동을 계획하였으며 5월 1일 서당학생 100여명을 규합하여 구우면 용수리(龍水里)에서 시위행진을 주동하였다. 1933년 8월 상순경 신창리 서당의 공립보통학교로의 전환과 식민지 교육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여 주민의 여론을 환기시키면서 김윤옥(金允玉)과 함께 소녀야학회(少女夜學會)를 개설하여 재학생들에게 연 25회에 걸쳐 독립정신 고취를 위한 연설을 하다 일경에 붙잡혔다. 1937년 4월 12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귀덕리출신 항일독립항쟁기
그는 1919년 5월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제주도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만세시위를 펼 것을 동료 기독교인들과 협의하던 중, 서울에서 밀파된 독립희생회(獨立犧牲會) 연락원 김창규(金昌圭)와 접선하게 되었다. 이에 평소 뜻을 나누던 동지인 김창국(金昶國)·최정식(崔靜植)·김창언(金昌彦) 등을 소개하고 이들과 함께 독립회생회 제주도지방조직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회원 1인당 2원씩 독립군자금 헌납을 결심하고 최정식의 집에서 임시정부헌장(臨時政府憲章)과 해외통신문(海外通信文) 등을 등사하여 전 도내에 배포하며 군자금 수합활동을 폈다. 그러나 1919년 7월에 이 사실이 일경에 노출당하여 그와 최정식·김창국·문창래(文昌來)·이도종(李道宗)·김창언 등 관련자 60여명이 붙잡혔다. 그는 사건의 중대성과 동지들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하여 스스로 제주도 내의 군자금모집 총책임자라고 자처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동년 11월 1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확정·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가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조봉호 추모비
조봉호(1884 - 1920)는 제주 사람이다. 그는 1919년 5월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제주도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만세시위를 펼 것을 동료 기독교인들과 협의하던 중, 서울에서 밀파된 독립희생회(獨立犧牲會) 연락원 김창규(金昌圭)와 접선하게 되었다. 이에 평소 뜻을 나누던 동지인 김창국(金昶國)·최정식(崔靜植)·김창언(金昌彦) 등을 소개하고 이들과 함께 독립회생회 제주도지방조직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회원 1인당 2원씩 독립군자금 헌납을 결심하고 최정식의 집에서 임시정부헌장(臨時政府憲章)과 해외통신문(海外通信文) 등을 등사하여 전 도내에 배포하며 군자금 수합활동을 폈다. 그러나 1919년 7월에 이 사실이 일경에 노출당하여 그와 최정식·김창국·문창래(文昌來)·이도종(李道宗)·김창언 등 관련자 60여명이 붙잡혔다. 그는 사건의 중대성과 동지들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하여 스스로 제주도 내의 군자금모집 총책임자라고 자처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동년 11월 1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확정·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가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고태리 구 묘
고태리(1912 - 1932)는 제주(濟州) 사람이다. 그는 1931년 3월 제주농업학교(濟州農業學校)를 졸업한 직후 홍수표(洪秀杓)·김두진(金斗珍) 등 10여 명의 급우와 함께 평소 한국 학생에게 민족적 차별을 일삼던 일본인 교장에 대한 배척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일본인 교장은 한국 학생에게 민족적 열등감을 부추기는 한편 그에 대항하는 학생을 가차없이 퇴학시키는 등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민족적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던 고태리와 동급 학생들은 졸업 직후에 일본인 교장을 배척하기로 결의하고 무력에 의한 실력 행사를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1931년 3월에 일본인 교장을 찾아가 무력으로 시위하는 한편 교장편에서 동조하는 직원들을 격퇴하고 직원실을 파괴하였다. 이 일로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31년 8월 2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1932년 3월 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폭력행위 위반으로 징역 1년 2월에 집행유예 5년을 받기까지 1년여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런데 그는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말미암아 출옥 후 한달 만인 1932년 4월 9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봉호 생가터
조봉호(1884 - 1920)는 제주 사람이다. 그는 1919년 5월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제주도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만세시위를 펼 것을 동료 기독교인들과 협의하던 중, 서울에서 밀파된 독립희생회(獨立犧牲會) 연락원 김창규(金昌圭)와 접선하게 되었다. 이에 평소 뜻을 나누던 동지인 김창국(金昶國)·최정식(崔靜植)·김창언(金昌彦) 등을 소개하고 이들과 함께 독립회생회 제주도지방조직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회원 1인당 2원씩 독립군자금 헌납을 결심하고 최정식의 집에서 임시정부헌장(臨時政府憲章)과 해외통신문(海外通信文) 등을 등사하여 전 도내에 배포하며 군자금 수합활동을 폈다. 그러나 1919년 7월에 이 사실이 일경에 노출당하여 그와 최정식·김창국·문창래(文昌來)·이도종(李道宗)·김창언 등 관련자 60여명이 붙잡혔다. 그는 사건의 중대성과 동지들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하여 스스로 제주도 내의 군자금모집 총책임자라고 자처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동년 11월 1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확정·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가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금악리출신 항일독립항쟁기(박주석, 강봉환)
1918년 10월 5일 제주도 남제주의 법정사(法井寺)에서 승려 김연일(金連日)·강창규(姜昌奎)·방동화(房東華) 등이 주도한 항일무력시위에 참가하였다. 그는 평소 법정사의 승려 김연일 등과 교류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길러 갔다.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던 김연일은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하여 민족적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일찍부터 독립운동의 방도를 강구하였다. 김연일은 우선 1918년 봄에 강창규·방동화 등의 승려를 중심으로 항일비밀결사를 결성한 다음 신도들을 포섭하여 조직을 확대해 갔다. 그리하여 1918년 10월에 이르러서는 박주석을 비롯한 30여 명의 신도들이 법정사를 근거지로 동지적 유대를 이루는 가운데, 조직적 결집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은 동년 10월 5일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옹위하고 도대장(都大將) 이하 군직(軍職) 체제로 조직을 편성하였는데, 이 때 박주석은 도대장의 임무를 맡았다. 이들은 조직 편성 후 제주도 내의 일본인 관리의 처단과 일인의 구축을 행동 방침으로 정하여 무력에 의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행동에 앞서 각 면(面)의 이장(里長)에게 격문을 배포하여 동참할 것을 권유하여 군민 4백여 명이 가세하는 가운데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에 박주석 등은 일경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전선(電線)을 절단하여 각 주재소(駐在所)를 고립시킨 다음 중문(中文) 주재소를 습격하여 주재소에 감금되었던 13명의 구금자들을 석방하였으며, 식민수탈의 전위 역할을 맡았던 일본 상인(商人)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이어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이틀만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騷擾)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7년을 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모진 고문으로 인하여 1921년 7월 24일에 옥중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협재리출신 독립항쟁기(장용진, 홍경옥, 장병윤, 강공흡)
협재리출신 독립항쟁기는 협재리 출신의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 활약을 기록한 사적이다. 본 사적에는 장용진, 홍경옥, 장석호, 강공흡의 독립항쟁기가 기록되어 있다. 장용진(1910 - 1983)은 1910년 5월 27일 한림읍 협재리에서 부 장보익, 모 김창숙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17세에 구우공립보통학교 제 4학년을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시 날염공장에 취직 중, 1931년 9월 30일 노동쟁의에 참가하면서 더욱 항일 독립사상이 함양되어 동년 11월 20일 귀향하여 지사의 집에 향진복습소를 개설, 마을 아동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다 검거되어, 1932년 5월 9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에 집행유예 2년간의 언도를 받았고, 1933년 1월 중순경 홍경옥, 강공흡, 장병윤 등과 같이 항일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독서회를 조직하여 각자의 독립항쟁의식을 높이면서 계속 항일운동을 하여 오다가, 1934년 7월 하순 홍경옥, 강공흡과 같이 무명의 비밀결사를 조직 재정부를 맡아 조직 확대를 위하여 동지획득과 자금 조달에 힘쓰다가 1934년 10월 일경에 피체되어, 1937년 4월 12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고, 해방 후 교편을 잡다가 1983년 7월 3일 타계하였다. 홍경옥(1912 - 1949)은 13세인 1924년 구우공립보통학교(현 한림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28년 동교를 졸업하였으며 동교 재학 1926년 협재리 「소년회」에 가입하여「어린이」라는 월간지를 탐독하면서 민족의식이 싹트게 되었고, 1928년 4월부터 1929년까지 약 1년간 부산상업학교에서 공부하다 귀향하여 1930년 3월 용수리 개량서당 교사로 취직하여 12월까지 근무하면서 진보적 사상을 가진 윤한진과 만나면서 항일사상 이름 아래 1931년 3월 지사 및 장동윤, 강동흡 등과 독서회를 조직하였고, 1932년 5월 마을 아동들을 모아 글과 민족의식을 깨우치다 보안법 위반으로 피체되어 옥살이 하다 출옥한 장용진의 환영회를 개최하며 위로함과 동시에 동지들의 투쟁심을 격발시켰고, 그후 농민 대중에게 부담을 많이 주는 공립보통학교 이전에 반대하는 등 지속적으로 민족의식을 일깨우며 동지획득에 힘쓰다 1934년 10월 일경에 피체되어 1937년 4월 12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고 1944년 11월 15일 타계하였다. 장병윤(1914 - 1983)는 이명은 장석호이다. 9세 때 구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5세 때 복습과를 중퇴하고 수차 일본을 왕래하면서 민족차별에 분개 항일사상을 품고 있던 중, 1931년 3월 하순 윤한진, 홍경옥, 고창순, 장정호, 김이규, 김승옥, 강공흡 등과 회합하여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서는 사회제도를 변혁하여야 한다며 찬성 독서회를 조직하였고, 1933년 9월에 구우공립보통학교를 동명리에서 한림리로 이전하는 것은 농민 대중의 부담만 가중시킴으로 반대 진정, 동년 12월에 동지 강공흡 결혼식 때 풍자적으로 사회제도의 비판은 물론, 1934년 7월에는 조직의 가두부를 담당 제주도 농민조합 활동을 통하여 항일독립 운동을 하다가, 1934년 10월 일경에 피체되어,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고, 1983년 월 4일 타계하였다. 강공흡(1917 - 1974)은 15세때 구우보통학교 4학년을 졸업하였는데 재학중 13세 때 협재 소년회에 가입하여「어린이」라는 한글잡지를 탐독하면서 항일독립사상을 갖게 되었다. 1932년 5월 마을에서 향진복습소를 개설 마을 아동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다 일경에 피체되어 옥살이를 하다 출옥한 장용진을 홍경옥, 장병윤 등과 같이 격려 환영하는 모임을 가졌으며, 1933년 1월 중순 홍경옥, 장용진, 장병윤 등과 항일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독서회를 조직하여 각자의 독립항쟁의식을 높이면서, 동년 9월 초순에는 농민 대중에게 부담을 많이 주는 공립보통학교 이전에 반대하고, 1934년 7월 하순에는 홍경옥, 장용진 등과 같이 무명의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소년부를 담당하였고 조직 확대를 위하여 소년동지 획득에 힘쓰다가 1934년 10월 일경에 피체되어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고, 1974년 6월 25일 타계하였다. 정부는 위의 독립운동가들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중현 독립항쟁기
김중현(1914 - 1974)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천주교 신자이던 그는 1939년 7월경부터 가을 무렵까지 제주읍 천주교회의 아일랜드인 선교사 손 신부(孫神父:본명 다우슨 패트릭)에게 수 차에 걸쳐, 제주도 대정면(大靜面) 모슬포(慕瑟浦)의 해군비행장에는 대규모의 격납고가 설치되어 30대 가량의 비행기가 계류 중이고 다수 군인이 주둔하며 해상에도 항상 수척의 군함이 정박하고 있다는 사실과, 모슬포 비행장에서 발진한 일본 해군기가 바다를 건너 중국의 상해(上海)를 폭격하다 중국군의 포격을 받아 퇴각하던 중 추락했다는 정보를 알려주었다. 또한 1940년 12월부터 1941년 여름에 걸쳐 위의 손 신부 및 허봉학(許鳳鶴)·하성구(河成九) 등 다른 신도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 수 차에 걸쳐, "일본의 신문들은 독영전쟁(獨英戰爭)에서 독일이 대승하고 있다고 발표하고 있으나 실은 허위보도에 지나지 않는다, 전황은 영국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중일전쟁이 장기화하면 일본군은 물자부족으로 인하여 결국 패전할 것이다", "정감록(鄭鑑錄)의 예언에 따르더라도 중일전쟁은 일본의 패전으로 끝날 것이다"는 등의 발언을 하였다. 이 무렵 일제는 제주도를 중국에 대한 도양폭격(渡洋爆擊)의 발진기지로 만들면서 도내 반일세력을 색출 제거코자 하여, 우선 적성국(敵性國)인 영국 국적의 아일랜드인 선교사들과 그들이 소속된 천주교회 조직을 탄압 파괴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 또한 위의 발언들로써 군사기밀을 유출하고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이유로 1941년 말에 손 신부 등과 함께 일경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그 후 1942년 10월 2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국방보안법 및 군기(軍機)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년과 육·해군형법 위반으로 금고(禁錮) 10월이 병합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효행자 독립유공자비(남면)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에 조성된 도시근린공원으로 독락정과 임씨가묘 등이 있다. 독락정은 1437년, 고려의 충신으로 조선의 개국에 반대했던 임난수(林蘭秀)장군이 공주목 삼기현으로 낙향한 뜻을 기리기 위해 아들인 부사공 임목이 지은 정자이다.이후 나성동은 부안임씨의 집성촌이 자리하였다. 공원 내에는 과거 연기군 남면에 있었던 비석들과 함께 독립유공자 효행자 비가 있다. 해당 비석은 1993년 12월 연기군에서 군민의 문화유산을 남기고자 고장 내 효행자와 독립유공자들의 이름을 새기는 과정에서 세워졌다. 연기군 내 여러 지역에 세워져있으며 독립유공자로 성함이 새겨진 분들은, 임대수, 임헌규, 임휴철, 임헌성, 임영철, 임수철, 임현상, 임헌무 등 부안 임씨 출신 인물이 있으며, 오강표, 정낙진, 황희연, 황도연, 황득수, 심희수의 성함도 새겨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