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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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수 집
김형수(1905 - 1988)는 제주(濟州) 사람이다. 1927년 4월 9일 제주면 삼도리(三徒里)의 자기 집에서 고병희(高秉禧)·강기찬(姜箕贊)·조대수(趙大秀)와 함께 무정부주의 독립운동 노선의 비밀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매월 한 차례씩 모임을 갖고 사회과학 서적을 윤독하며 동지규합에 힘쓰는 한편, 1927년 10월 소비조합(消費組合)을 결성하여 일본상품불매운동을 벌여 나갔다.1929년 5월 위 독서회 회원들은 우리계(宇利 )를 조직하였는데, 우리계는 우의돈목(友誼敦睦), 애경상문(哀慶相問), 생활향상을 표방하는 이면에 무정부주의적 이상사회의 건설을 목적으로 하였다. 특히 제주도의 전통사회에 바탕을 두고 무정부주의 사회를 실현코자 한 것이 주목되는 점이었는데, 그리하여 도청·은행·금융·조합·학교 등의 직원, 교원과 도내 유지들이 계원으로 대거 참여하였고 그들은 1929년 9월 도내 각 동리에 야학을 설립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고 무정부주의사상을 선전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 사실이 일경에 포착됨으로써 그는 1930년 7월 다른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동년 12월 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1931년 7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봉려관 행적비, 석상
해월당 봉려관(속명 안려관, 1865 ~ 1938)은 제주에서 활동한 승려로 1907년 12월 전남 대흥사를 찾아 청봉화상을 계사로 유장스님을 은사로 비구니계를 수계, 이듬해 1월 제주로 내려와 1908년 관음사를 창건, 개산조가 되었다. 법화사, 불탑사, 법정사, 월성사, 백련사 등을 중창 또는 창건하고 국내 대덕스님을 초청, 정법홍포에 매진하였다. 또한 법정사 무오항일항쟁의 중심에 서서 활동자금을 지원하는 등 여성의 사회참여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봉려관 스님이 지원한 법정사 무오항일항쟁은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은 법정사 승려들이 중심이 되고 도순리 인근 마을 주민 700여명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여 참여한 제주도 내 최초, 최대의 항일운동이다. 참여자들은 화승총과 곤봉 등으로 무장하고 6개월여 전부터 거사를 준비하였다. 일본인을 제주도에서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시키겠다는 거사 목적을 격문으로 알리고, 참여 주민들과 함께 중문 경찰관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본인을 때리는 등의 행동을 실천하였다. 법정사 항일운동은 1918년 10월 7일 실행되어 3·1운동보다 5개월여 먼저 일어났는데, 일제는 법정사 항일 운동의 파급을 걱정하여 3·1운동 참여자들보다 무거운 형을 언도하고, 목포로 이송하여 사건을 처리하였다.
위국절사 영현비
강문일(1911 ~ 1967)과 박영순(1916 ~ 1947)은 제주(濟州) 사람으로 1933년 제주도 애월면 하귀리에서 박영순 등과 함께 야학을 설치 운영하며 민족의사를 고취하였다. 그는 동향 출신 사회주의자 김귀영(金貴榮)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에 공감하게 되었고, 일제 타도를 위한 방침으로 아이들에게 항일의식을 주입하기 위해 박영순과 야학을 이끌었다. 그러던 중 1934년 12월 야학을 이웃 마을의 김홍규, 김을봉 등이 운영하던 야학과 통합하였고, 60여 명의 학생들에게 식민지 수탈의 실상을 알리는 한편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1935년 두 사람은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10월 10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1936년 6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을 받기까지 8개월 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두 사람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각각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배창아(1913 ~ 1955), 이명 배두봉은 일찍이 일본 오사카로 넘어가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日本勞動組合全國協議會) 즉 일명 전협(全協)에 가입하여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32년 4월 22일 오사카 니시요도가와구(西淀川區)에 위치한 오즈다케바야시(小津武林)라는 방직공장에서 조선인 여공(女工) 36명을 무단 해고한 데 항의하여 파업투쟁을 전개하고, 무단 해고 반대와 노동조건 개선 등을 요구하였다. 회사가 이를 묵살하자 5월 14일 시위 및 공장 내 농성을 주도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배창아는 폭력행위 처벌에 관한 건 위반으로 기소되어, 1933년 4월 19일 오사카 공소원에서 징역 6월(미결 구류 100일 합산)을 확정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향으로 돌아와 1934년 8월 제주 북제주군 애월면 하귀리에서 김홍규와 함께 야학을 설치, 민족의식을 교육 고취하였다. 인근에서 같은 목적으로 앞서 소개한 강문일과 박영순 등이 이끌던 야학과 협력하기 위한 협의회를 개최하고 함께 교육강연회를 조직 활동하였다. 항일의식 고취와 생도 연설회, 어린이날 행사 개최 등의 활동을 이어나가던 중 1935년 5월 5일 어린이날 운동회를 개최하던 중 일본 경찰 외도리주재소(外都里駐在所)와 제주경찰서(齊州警察署)에서 총동원되어 선생과 학생 100여 명을 검거하였다. 같은 해 8월 13일에 16명이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 목포지청(木浦支廳)으로 송치되었다. 같은 달 23일 김을봉(金乙鳳)과 함께 기소유예(起訴猶豫)로 석방되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1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양남구 묘
양남구(1892 ~ 1976)는 제주(濟州) 사람이다. 1918년 9월 김영일 등 7명의 동지와 함께 남제주군 중문면의 주민들을 규합하여 일경을 축출하기 위한 시위를 펴고 중문주재소를 습격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피체되어 1919년 2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4년 형을 언도 받고 목포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양남구 독립항쟁기
양남구(1892 ~ 1976)는 제주(濟州) 사람이다. 1918년 9월 김영일 등 7명의 동지와 함께 남제주군 중문면의 주민들을 규합하여 일경을 축출하기 위한 시위를 펴고 중문주재소를 습격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 일로 인하여 일경에 피체되어 1919년 2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4년 형을 언도 받고 목포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독립애국지사 기념비
강평국은 동급생인 최은희(崔恩喜)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상의했으며, 1919년 3월 1일 경성여자고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에 참여했다. 강평국은 대한문 앞 등을 돌면서 만세를 불렀다. 같은 동급생인 최은희와 최정숙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강평국은 다행히 검거를 면했다. 1921년 제주에서 친구 최정숙과 함께 여성의 문맹 퇴치와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여수원을 설립하였다. 1924년 3월 8일 제주도 신좌면 조천리에서 최정숙·고수선 등과 함께 여성의 수양기관인 ‘부인회’를 조직했다. 1925년 12월 26일 제주도 전체에 여성들의 권익을 신장시키고자 불교포교당에서 제주여자청년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였고, 강평국은 사회부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강평국은 어릴 때부터 친구인 고수선과 의사가 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로 하였다. 고수선은 서울의 경성여자의학전문학에 입학하였고, 강평국은 일본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본에서 강평국은 여러 사회단체에 적극 참여했다. 1927년 1월 16일에 창립된 동경조선여자청년동맹의 초대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3월 15일 재동경 동부조선노동조합 제2회 정기대회에 참가하여 부인부(婦人部) 위원이 되었다. 그해 8월 3일 동경조선노동조합 서부지부 주최와 신간회 동경지회·노동농민당 성서(成西)지부 후원으로 고전회관(高田會館)에서 열린 ‘조선총독폭압정치 폭로연설회'에 동경여자청년동맹 대표로 연설을 하였다. 그 외에 강평국은 1928년 1월 10일 재동경조선청년동맹과 학우회가 주최한 재동경청년단체 합동위원간담회에 동경여자청년동맹 대표로 참석하였다. 신간회 동경지회가 1927년 5월 7일 와세다대학 스콧트홀에서 창립된 이후,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 동경지회 발기회가 12월 27일 개최되었다. 박화성(朴花城)이 위원장에 강평국이 서무부 위원에 선출되었다. 근우회 동경지회 창립대회는 1928년 1월 22일 동경제대기독교청년회관(東京帝大基督敎靑年會館) 개최되었으며, 박화성이 위원장, 강평국이 정치문화부 위원에 뽑혔다. 강평국은 일본에서 학업을 하며 여러 사회단체에 참여하면서 영양실조와 빈곤에 시달리다가,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3학년을 수료하고 제주도로 돌아왔다. 그러나 고향인 제주도에서도 폐환이 더욱 악화되어 1933년 8월 12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2019년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고수선(1898~1989)은 1915년부터 1918년 사이에 학교에서 일본교사 배척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1일 박희도(朴熙道)의 지시를 받아 학생을 동원·인솔하여 탑골공원으로 가서 시위에 참가하였다. 동년 3월에는 유철향(兪喆鄕)의 집 지하실에서 신경우(申敬雨) 등 동지 학생들과 모여 일편단심을 상징하는 적색 댕기를 수천 매 제작하고 경성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을 통하여 각 학교에 배포하게 하였고 신경우(申敬雨)·김숙정(金淑貞)과 벽보를 붙이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동년 3월 중순경에 상해(上海)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내와 연락하는 사무를 보다가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띠고 동년 11월경 귀국하여 370원을 모금해서 박정식(朴偵植) 편에 송금하고 일본(日本)으로 피신하였다. 1921년 동경(東京)에서 동지 이덕요(李德耀)·이낙도(李樂道)·이의향(李義鄕) 등과 상야공원(上野公園)에서 독립운동을 모의하던 중 일경에 연행되어 고문을 받다가 증거불충분으로 방면되었다. 그러나 1922년에 항일용의자로 고광수(高光洙)와 함께 붙잡혀 일경으로부터 가혹한 고문을 받아 손가락이 불구가 되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최정숙(1902~1977)은 1919년 당시 경성여자보통학교 학생으로 3월 1일 서울 탑동 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이 발표되자 수천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의 무력탄압으로 시위가 강제로 해산되고 다른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그리하여 같은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기까지 8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교사로 민족교육 및 인재양성에 힘쓰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두경 묘
김두경(1910 ~ 1937)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그는 1931년 6월 제주청년동맹(濟州靑年同盟) 읍내(邑內) 지부에 가입하여 강창보(姜昌輔)와 함께 조직 확대에 힘을 쏟으며 청년운동과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9월 6일 그는 송성철(宋性徹)과 함께 국제무산청년일에 시위투쟁을 벌이기 위해 선전물을 작성·인쇄하는 한편 거사 당일날 인쇄물을 각처에 배포하였다. 또한 1931년 10월 동지들을 포섭하는 한편 11월 7일 러시아혁명일을 기하여 축항 인부 40여 명을 지도하여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그는 주로 축항 인부를 대상으로 항일 사상을 전파하며 조직원을 포섭해 갔다. 그러던 중 1932년 초 강창보가 일경에 발각 붙잡히자, 그는 조직 재건을 위해 동지를 규합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1932년 5월 목포지청 검사국에서 기소유예(起訴猶豫) 처분을 받았다. 그는 출옥 직후 활동을 재개하여 1932년 6월 부병훈(夫秉勳)·김경봉·김일준 등을 배후에서 지도하면서 제주도 농민조합 창립준비위원회를 결성케 하였으며, 1933년 8월에 정충조(鄭忠朝)와 힘을 합하여 정세 판단에 따른 운동노선과 방침을 정하고 조직 활동의 범위를 확대해 갔다. 그러던 중 1934년 말 조직이 발각됨에 따라 붙잡힌 그는 1935년 1월 7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예심에 회부되었으나,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병보석으로 출옥 후 1937년 7월 13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문연사
문연사는 면암 최익현 선생과 귤암 이기온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제자와 지사들이 시설한 제단이다. 귤암 선생은 제주에 유배 온 후 면암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향리후진 교육에 많은 공헌을 한 분이다. 지난 1977년 신제주가 건설되면서 도시 계획에 저촉되어 이곳으로 이설하였으며, 지금도 여러 후학과 뜻있는 사람들이 음력 정월 중정에 제를 지내고 있다.
집의계 광복의사 경모비
1905년 을사늑약으로 우리나라가 일본에 합방될 당시 문연서숙에서 면암 최익현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던 12인의 젊은 유림들이 집의계를 결성하고 연미마을 망곡단에 모여 “조선의 수치를 설욕하겠다”는 뜻으로 바위에 조설대(朝雪臺)라 새겨 당시 항일구국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땅의 백성으로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왜놈을 일도일검에 살육할 것을 선서했던 피 끓는 항일의거의 결의는 도내 항일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그 결의가 행동으로 이어지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었는지 집의계는 격변의 세월 속에 조용히 묻히고 말았다. 집의계 12광복의사의 숭고한 뜻을 받들고 그 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12월 1일 ‘제1회 제주 오라 조설대 집의계 12광복의사 경모식’을 거행했다.
대한광복의사비
조설대(朝雪臺)는 한일 강제합방의 수치를 설욕하겠다는 의미의 마애명(磨崖銘: 암각문)을 새긴 곳이다. 제주 애국지사 12인은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이 곳에 모여서 조선의 수치를 설욕하겠다는 구국 맹세를 하고, 이 바위에 그 맹약을 새겼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동년 12월 제주 유림 이응호, 김좌겸, 김병로, 김병구, 김이중, 서병수, 고석구, 김석익, 강철호, 강석종, 임성숙, 김기수 등 12인은 문연서숙에 모여 집의계(集義契)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오라동 연미마을 바위산인 망곡단에 모여 집의계 선언문을 낭독하고 의병투쟁을 다짐하였다. 본래 망곡단은 국상을 당했을 때 선비들이 향을 피우고 북향사배하던 유서 깊은 곳이었다. 이후 이곳은 집의계 회원들에 의해 ‘조선의 치욕을 설역한다’라는 뜻의 조설대(朝雪臺)로 부르게 되었다.
김상언 묘
김상언(1873 - 1965)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승려로서 1918년 10월 5일 제주도 남제주의 법정사(法井寺)에서 승려 김연일(金連日)·강창규(姜昌奎)·방동화(房東華) 등이 주도한 항일무력시위에 참가하였다. 법정사의 승려인 그는 김연일 등과 교류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길러 갔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던 김연일은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하여 민족적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일찍부터 독립운동의 방도를 강구하였다. 김상언은 1918년 봄에 김연일·강창규·방동화 등의 승려와 함께 항일비밀결사를 결성하였으며, 다음에 신도들을 포섭하여 조직을 확대해 갔다. 그리하여 1918년 10월에 이르러서는 30여 명의 신도들이 법정사를 근거지로 하여 동지적 유대를 이루는 가운데, 조직적 결집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은 동년 10월 5일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옹위하고 도대장(都大將) 이하 군직(軍職) 체제로 조직을 편성한 뒤, 제주도 내의 일본인 관리의 처단과 일인의 도외(島外)로의 구축을 행동 방침으로 정하여 무력에 의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행동에 앞서 각 면(面)의 이장(里長)에게 격문을 배포하여 동참할 것을 권유하여 군민 4백여 명이 가세하는 가운데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일경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전선(電線)을 절단하여 각 주재소(駐在所)를 고립시킨 다음 중문(中文)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주재소에 감금되었던 13명의 구금자들을 석방하고, 식민수탈의 전위 역할을 맡았던 일본 상인(商人)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이어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이틀만에 피체되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騷擾)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상언 독립항쟁기
김상언(1873 - 1965)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승려로서 1918년 10월 5일 제주도 남제주의 법정사(法井寺)에서 승려 김연일(金連日)·강창규(姜昌奎)·방동화(房東華) 등이 주도한 항일무력시위에 참가하였다. 법정사의 승려인 그는 김연일 등과 교류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길러 갔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였던 김연일은 일제의 한국 강점에 대하여 민족적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일찍부터 독립운동의 방도를 강구하였다. 김상언은 1918년 봄에 김연일·강창규·방동화 등의 승려와 함께 항일비밀결사를 결성하였으며, 다음에 신도들을 포섭하여 조직을 확대해 갔다. 그리하여 1918년 10월에 이르러서는 30여 명의 신도들이 법정사를 근거지로 하여 동지적 유대를 이루는 가운데, 조직적 결집을 이룰 수 있었다. 이들은 동년 10월 5일 김연일을 불무황제(佛務皇帝)로 옹위하고 도대장(都大將) 이하 군직(軍職) 체제로 조직을 편성한 뒤, 제주도 내의 일본인 관리의 처단과 일인의 도외(島外)로의 구축을 행동 방침으로 정하여 무력에 의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행동에 앞서 각 면(面)의 이장(里長)에게 격문을 배포하여 동참할 것을 권유하여 군민 4백여 명이 가세하는 가운데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일경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전선(電線)을 절단하여 각 주재소(駐在所)를 고립시킨 다음 중문(中文)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주재소에 감금되었던 13명의 구금자들을 석방하고, 식민수탈의 전위 역할을 맡았던 일본 상인(商人)들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곧이어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이틀만에 피체되고 말았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騷擾)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