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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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만 추모비
고사만(1908 - 1962)은 제주도에서 해녀들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투쟁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고사만은 1927년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고 혁명적 농민조합 결성을 위해 활동했다. 1930년 그는 문도배(文道培)·신재홍(申才弘) 등과 혁우동맹(革友同盟)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한 후 농민부·청년부·소년부·여성부를 편성하여 분야별로 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사유재산제도와 일본제국주의를 부인하는 사회주의 선전에도 나섰다. 조선공산당 제주 야체이카 조직 등에 나선 고사만은 혁우동맹을 해소시키고 농민단체와 해녀조합 결성을 주도하였다. 이런 가운데 제주지역에서는 민족적 열기와 식민체제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어 갔다. 1931년 1월 제주에서는 해녀들에 대한 불합리한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투쟁이 일어났다. 관제적인 해녀어업조합에 반대하고 있던 해녀들은 1천여 명의 시위대로 일경에 맞섰다. 이때 고사만은 해녀들의 항일운동 배후지도자로 지목되어 일경에 붙잡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재판이 지연되는 가운데 1년 10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제주해녀항일사적지 연두망동산
연두망 동산은 1932년 1월 12일 구좌면(현 구좌읍 우도면)과 정의면(현 성산읍) 지역 해녀 1,000여명이 일본인 도사가 조합장인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의 수탈에 항거하여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위해 사전에 모였던 장소이다. 해녀들은 연두망동산 네거리부터 세화오일장터까지 호미와 빗창을 들고 만세를 외치며 갔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은 여성 주도 최대 항일운동이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은 일제의 경제 수탈에 맞선 생존권 수호투쟁인 동시에 여성 집단이 주도한 최대 규모의 항일투쟁이라는 점, 국내 최대 규모의 어민투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해녀박물관
해녀박물관은 제주특별자치도에 있는 제주 해녀를 주제로 한 공립 박물관이다.해녀박물관은 제주 해녀의 역사적 의의를 계승·보존하고 항일 정신의 교육의 장으로 활용함으로써 지역 도민과 관광객들에게 해녀·어촌 문화를 보고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되었다.해녀박물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의 연면적 4,000㎡ 규모에 3개의 전시실, 영상실, 전망대, 어린이 체험관, 뮤지엄샵, 야외 전시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전시실에는 해녀의 삶을 주제로 하여 해녀의 집, 어촌마을, 무속신앙, 세시풍속, 어촌생업을 재현하였다. 제2전시실에는 물질생활, 물질종류, 나잠어구, 제주해녀, 해녀 공동체, 항일운동 관련자료 등 해녀의 일터를 중심으로 재현하였다. 제3전시실에는 고대의 어업 활동과 희망의 바다 등 바다를 주제로 하여 어촌과 어업 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도록 꾸며 놓았다. 지하층에서는 ‘제주해녀의 하루’라는 주제로 해녀 캐릭터를 바탕으로 한 삽화, 그래픽 및 스카시패널, 모형, 음향 장비 등을 갖추어 어린이 눈높이에 맞춘 전시관으로 연출하여 해녀의 하루 일상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어린이들에게 친숙한 공간을 조성하여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2007년 현재 소장 자료는 민속 어구 304점, 채취 어구 242점, 보관 저장 어구 125점, 낚시 어구 3378점, 선박 어구 64점, 민속자료 390점, 사진·문헌 357점 등 총 4,860점이 전시되어 있다.해녀박물관은 제주 해녀의 생활풍습, 무속신앙, 세시풍속, 해녀공동체 뿐만 아니라 제주민의 역사·여성·생업·경제·해양·신앙·연희 등 해녀를 주제로 제주의 전통문화를 총 망라하여 전시한 박물관으로서 제주 해녀의 끈질긴 생명력과 강인한 개척 정신을 일깨워 주고 있다.
해녀 3인 흉상(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김옥련(1907 - 2005)는 제주도 북제주(北濟州) 사람이다. 1932년 1월 제주도 구좌면(舊左面)에서 해녀들의 권익침탈에 항거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1931년 해녀들에 대한 일본 관리들의 가혹한 대우와 제주도해녀조합 어용화의 폐단이 있자, 해녀들은 1931년 12월 20일 요구조건과 투쟁방침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김옥련은 1932년 1월 7일과 12일 제주도 구좌면에서 해녀조합의 부당한 침탈행위를 규탄하는 시위운동을 주도하고, 해녀들의 권익을 위해 부춘화(夫春花) 등과 함께 도사(島司) 전구정희(田口禎熹)와 담판을 벌여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 그리고 1월 26일 경에는 제주도 민족운동가의 검거를 저지하려다 붙잡혀 6개월 정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세화 경찰관주재소 터
1932년 1월 12일 구좌면(현 구좌읍 우도면)과 정의면(현 성산읍) 지역 해녀들이 집결하여 일본인 도사에게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제시하며 담판을 벌였으며, 1월 24일 청년운동가들의 검속에 반발하여 해녀들이 일본경찰들을 상대로 투쟁을 하였던 곳이다. 당시 신임 제주도사(겸 제주어업조합장) 다구치 데이키(田口禎熹)가 초도 순시차 세화리에 도착하는 시점을 맞춰 구좌면 동부의 잠녀 1천 명이 항의시위를 벌였다. 항의의 내용은 조업 과정에서의 부당한 착취를 근절시켜 달라는 것이었다.일본 경찰은 부춘화(하도리), 김옥련(하도리) 등 봉기를 주도한 잠녀 20명을 체포, 구금하였는데, 1월 24일에 다시 잠녀 5백 명이 잡혀간 동료 잠녀를 구하러 세화지서로 몰려가 구금된 잠녀의 해방을 요구하며 항의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세화지서의 경찰 한 명이 부상을 당했고, 잠녀들은 순사를 모자를 뺏고 제복을 찢는 등 충돌이 격해졌으며 잠녀측에서도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일본 경찰은 제주 각처의 경관을 총소집하고, 전남에 급보해 전남 경찰부 경부보 이하 32명의 경관이 그 날 밤 11시 경비선 긴코마루(金剛丸)을 타고 목포에서 제주로 급파되었다. 26일 새벽 세 시경, 이어 우도(牛島)에서도 경찰 40여 명이 우도로 들어와 잠녀 30여 명을 체포, 우도 서창에서 배에 태워 제주 본도로 압송하려는 것을 우도 잠녀 8백 명이 나서서 일본 경찰을 에워싸고 저항, 잡혀가는 잠녀를 구해내려 하였다. 경찰은 잠녀들을 향해 공포탄 14발을 쏘아 진압했고 이면에서 잠녀들을 선동한 혐의를 물어 민중협의회원 40명을 다시 체포했는데, 이들에 대해서도 잠녀들은 다시 산발적인 탈환 시도를 벌였다. 27일 오후 7시경 다시 1백 명의 잠녀들이 세화리 주재소에 들어와 잡혀간 잠녀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세화 오일장 터
1932년 1월 12일 구좌면(현 구좌읍 우도면)과 정의면(현 성산읍) 지역 해녀들이 집결하여 일본인 도사에게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제시하며 담판을 벌였으며, 1월 24일 청년운동가들의 검속에 반발하여 해녀들이 일본경찰들을 상대로 투쟁을 하였던 곳이다. 당시 신임 제주도사(겸 제주어업조합장) 다구치 데이키(田口禎熹)가 초도 순시차 세화리에 도착하는 시점을 맞춰 구좌면 동부의 잠녀 1천 명이 항의시위를 벌였다. 항의의 내용은 조업 과정에서의 부당한 착취를 근절시켜 달라는 것이었다.일본 경찰은 부춘화(하도리), 김옥련(하도리) 등 봉기를 주도한 잠녀 20명을 체포, 구금하였는데, 1월 24일에 다시 잠녀 5백 명이 잡혀간 동료 잠녀를 구하러 세화지서로 몰려가 구금된 잠녀의 해방을 요구하며 항의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세화지서의 경찰 한 명이 부상을 당했고, 잠녀들은 순사를 모자를 뺏고 제복을 찢는 등 충돌이 격해졌으며 잠녀측에서도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일본 경찰은 제주 각처의 경관을 총소집하고, 전남에 급보해 전남 경찰부 경부보 이하 32명의 경관이 그 날 밤 11시 경비선 긴코마루(金剛丸)을 타고 목포에서 제주로 급파되었다. 26일 새벽 세 시경, 이어 우도(牛島)에서도 경찰 40여 명이 우도로 들어와 잠녀 30여 명을 체포, 우도 서창에서 배에 태워 제주 본도로 압송하려는 것을 우도 잠녀 8백 명이 나서서 일본 경찰을 에워싸고 저항, 잡혀가는 잠녀를 구해내려 하였다. 경찰은 잠녀들을 향해 공포탄 14발을 쏘아 진압했고 이면에서 잠녀들을 선동한 혐의를 물어 민중협의회원 40명을 다시 체포했는데, 이들에 대해서도 잠녀들은 다시 산발적인 탈환 시도를 벌였다. 27일 오후 7시경 다시 1백 명의 잠녀들이 세화리 주재소에 들어와 잡혀간 잠녀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한원택 묘
한원택(1912 - 1938) 선생은 제주도 북제주(北濟州) 사람이다. 1931년 11월 2일 농민조합을 설립하고, 농민들의 권익보호와 민족의식 고취에 주력하였으며, 1932년 1월 제주도 해녀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한원택은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의 책임자인 신재홍(申才弘)과 채재오(蔡載五)·고사만(高仕萬) 등과 함께 김기생(金己生)의 집에서 농민조합 설립총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참석농민 수십여 명에게 '농민의 피를 짜는 악질조합 반대, 농민대중의 이익에 배치되는 면(面)행정 반대' 등의 표어를 발표하고 농민들의 권익 보호와 민족의식 고취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1932년 1월 제주도 해녀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33년 6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1년 9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해녀항쟁로
1932년 1월 12일 구좌면(현 구좌읍 우도면)과 정의면(현 성산읍) 지역 해녀들이 집결하여 일본인 도사에게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제시하며 담판을 벌였으며, 1월 24일 청년운동가들의 검속에 반발하여 해녀들이 일본경찰들을 상대로 투쟁을 하였던 곳이다. 당시 신임 제주도사(겸 제주어업조합장) 다구치 데이키(田口禎熹)가 초도 순시차 세화리에 도착하는 시점을 맞춰 구좌면 동부의 잠녀 1천 명이 항의시위를 벌였다. 항의의 내용은 조업 과정에서의 부당한 착취를 근절시켜 달라는 것이었다.일본 경찰은 부춘화(하도리), 김옥련(하도리) 등 봉기를 주도한 잠녀 20명을 체포, 구금하였는데, 1월 24일에 다시 잠녀 5백 명이 잡혀간 동료 잠녀를 구하러 세화지서로 몰려가 구금된 잠녀의 해방을 요구하며 항의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세화지서의 경찰 한 명이 부상을 당했고, 잠녀들은 순사를 모자를 뺏고 제복을 찢는 등 충돌이 격해졌으며 잠녀측에서도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일본 경찰은 제주 각처의 경관을 총소집하고, 전남에 급보해 전남 경찰부 경부보 이하 32명의 경관이 그 날 밤 11시 경비선 긴코마루(金剛丸)을 타고 목포에서 제주로 급파되었다. 26일 새벽 세 시경, 이어 우도(牛島)에서도 경찰 40여 명이 우도로 들어와 잠녀 30여 명을 체포, 우도 서창에서 배에 태워 제주 본도로 압송하려는 것을 우도 잠녀 8백 명이 나서서 일본 경찰을 에워싸고 저항, 잡혀가는 잠녀를 구해내려 하였다. 경찰은 잠녀들을 향해 공포탄 14발을 쏘아 진압했고 이면에서 잠녀들을 선동한 혐의를 물어 민중협의회원 40명을 다시 체포했는데, 이들에 대해서도 잠녀들은 다시 산발적인 탈환 시도를 벌였다. 27일 오후 7시경 다시 1백 명의 잠녀들이 세화리 주재소에 들어와 잡혀간 잠녀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고 나섰다. 해녀항쟁로는 제주해녀항쟁(1931~1932) 당시 제주 여성과 해녀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섰던 활동가 구좌읍 하도리 출신 김옥련(1909~2005) 여사, 부덕량(1911~1939) 여사, 부춘화(1908~1995) 여사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붙여졌다. 이 분들은 야학을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해녀항쟁의 일선에서 주역으로 활동했던 인물로써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부덕량 묘
부덕량(1911 - 1939) 애국지사는 해녀의 신분으로 1932년 1월 7일과 12일 제주도 구좌면에서 제주도해녀조합의 부당한 침탈행위를 규탄하는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제주에는 관제조합인 해녀어업조합의 부정으로 해녀들이 극심한 피해를 보고 있었다. 이에 제주도 해녀들은 자생적으로 해녀회를 조직하고 부당한 해녀어업조합에 맞서 나갔다. 이는 시위투쟁으로 발전하였고 특히 구좌면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다. 1932년 1월 7일과 12일 구좌면 세화장터에서는 1천여 명의 해녀들이 세화주재소의 저지를 뚫고 호미와 비창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그녀는 시위 후 동월 24일경 일경이 제주도 출신 민족운동가들을 체포하려는 것을 몸으로 맞서 저지하려다가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부춘화 집
부춘화(1908 - 1995)는 1932년 1월 제주도 구좌면(舊左面)에서 해녀들이 권익침탈에 항거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1931년 일본 관리들이 해녀들을 가혹하게 대우하고 제주도해녀조합을 어용화하려 하자, 해녀들은 1931년 12월 20일 요구조건과 투쟁방침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부춘화는 1932년 1월 7일과 12일 제주도 구좌면에서 해녀조합의 부당한 침탈행위를 규탄하는 시위운동을 주도하고, 해녀들의 권익을 위해 김옥련(金玉連) 등과 함께 도사(島司) 전구정희(田口禎熹)와 담판을 벌여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 그리고 1월 26일 경에는 제주도 민족운동가의 검거를 저지하려다 피체되어 3개월 정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무극대도 항일기념비
무극대도는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가 1860년 종교체험에서 받은 한울님의 가르침을 뜻하는 천도교 교리를 의미한다. 끝없이 훌륭한 진리라는 뜻이다. 천은이 망극하여 경신 4월 초5일 글로 어찌 기록하며 말로 어찌 형언할까, 만고없는 무극대도 여몽여각 득도로다. 라는 <용담가 龍潭歌>의 구절은 1860년 4월 5일의 체험을 나타내고 있다. 최제우의 종교적 신념을 결정적으로 굳어지게 하였던 하느님의 가르침의 내용은 요컨대 세상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모시게(侍天主)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을 모시는 것이 끝없이 훌륭한 도가 되는 까닭은 “하느님을 모시면 조화가 얻어지기(侍天主造化定)” 때문이다. 여기서 ‘조화가 얻어진다’는 것은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造化]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그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모시면 “온갖 사물들에 대하여 깨달아진다(萬事知)”는 것을 말한다. 최제우는 종교체험을 통하여 하느님으로부터 하느님을 모시라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그 방법을 마련하였는데 중심이 되는 것은 21자로 된 주문으로서 “하느님을 지극히 위하는 글(至爲天主之字)”이다. 이 주문을 외움으로써 하느님을 정성껏 모시는 종교가 바로 동학이다. 무극대도는 제주에서 활동했던 민족종교 중 하나로, 독립운동과 일제에 대한 저항운동을 펼쳐나갔다. 항일기념비는 총 21인의 교인이 일경에 체포되어 수형된 사실을 기록하고 이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조봉호 선교기념비
조봉호(1884 - 1920) 목사는 제주 사람이다. 그는 1919년 5월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제주도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만세시위를 펼 것을 동료 기독교인들과 협의하던 중, 서울에서 밀파된 독립희생회(獨立犧牲會) 연락원 김창규(金昌圭)와 접선하게 되었다. 이에 평소 뜻을 나누던 동지인 김창국(金昶國)·최정식(崔靜植)·김창언(金昌彦) 등을 소개하고 이들과 함께 독립회생회 제주도지방조직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회원 1인당 2원씩 독립군자금 헌납을 결심하고 최정식의 집에서 임시정부헌장(臨時政府憲章)과 해외통신문(海外通信文) 등을 등사하여 전 도내에 배포하며 군자금 수집활동을 폈다. 그러나 1919년 7월에 이 사실이 일경에 노출당하여 그와 최정식·김창국·문창래(文昌來)·이도종(李道宗)·김창언 등 관련자 60여명이 붙잡혔다. 그는 사건의 중대성과 동지들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하여 스스로 제주도 내의 군자금모집 총책임자라고 자처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동년 11월 1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확정·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가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