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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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극단
황극단은 전북 임실 출생으로 호남에서 활동한 의병장인 이석용 의병장이 순국하기 전 대구형무소에서 아들인 독립운동가 이원영에게 남긴 유언으로 세워진 추모 제단이다. 광복 후 1955년 1월 1일 이원용은 부친의 유언을 받들어 이석용 의병장 순국비, 고종황제비, 대한의장비, 대한민국임시정부주석 백범안동김공구지비, 대한장의순국5열사(안중근·이봉창·윤봉길·이준·백정기)기적비, 광복정령33인추억비 등 모두 5기의 비를 세우고 황극단을 세웠다. 황극단은 이원영 지사가 8년 동안의 요강 행상과 전답 2600여 평을 팔아 1955년 5월 5일에 건립하였으나 해당 위치에 현 전북대학교가 건립되면서 위치를 옮겨 오늘날의 위치가 되었다. 이석용 의병장은 1907년 한국군대가 해산당하자 진안 마이산 주필대에서 거병하고 진안·용담·정천·임실·순창 등지를 거쳐 태인·남원 등지로 이동하며,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1월 14일 성수산에서 의진을 재편하고 11월 17일 장수읍을 공격, 일본군을 남원으로 후퇴하게 했으며, 12월 25일 진안 무술촌에서 일본군 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8년에는 진안 시동, 마근현, 수류산, 관촌역, 가수리 등지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1909년 9월 의진을 해산한 뒤 잠행 유랑하며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1912년에 일본군에 체포되었다. 1914년 1월 12일 사형선고를 언도받고, 그 해 4월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전북지역 독립운동 추념탑
일제에 찬탈된 국권회복을 위해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치신 전북지역 애국선열들의 거룩한 얼을 추모하고 후세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르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994년 7월 21일 전주시 덕진구 송천동1가 234-16(어린이회관동편)에 독립운동추념탑이 건립되었다. 현재 추념탑 부지에 전북 출신 독립운동가현창비와 탑명비, 헌시비, 건립취지문비, 안중근의사 휘호비, 건립기비 등 부속시설과 함께 추념탑 주변을 공원화하여 청소년들에게는 정신문화의 산 교육장으로, 후손들에게는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을 기리는 역사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장현식 집(전주)
장현식(1896 - 1950)은 중앙고등보통학교[지금의 중앙고등학교]가 설립될 당시 거액을 기부하였으며, 고려대학교가 설립될 당시에도 재단에 사재를 기부하여 교육을 통해 침체된 민족의 기운을 부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동아일보사가 창간될 당시에는 인쇄 장비를 구입할 수 있도록 거금을 기부하였다. 1919년 4월 비밀결사인 대동단(大同團)이 창단되자 운영 자금을 제공하고, 『대동신문(大同新聞)』의 재정을 담당하였다가 체포되어 1921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민족어 보존을 염원하여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 편찬을 위하여 3,000원을 제공하고 지인에게도 권유하여 1,400원을 제공하게 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고 4년간에 걸쳐 옥고를 치르다 8·15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제2대 전라북도지사로 재임 중이던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납치되어 1950년 10월 24일 사망하였다. 1989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최병심 사당(옥동사)
최병심(1874 - 1957)의 자는 경존, 호는 금재이며, 일제강점기 『금재문집』을 저술한 유학자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렬되자 단식으로 항거하고 토역선참(討逆先斬)의 격문을 작성하여 도처에 붙이는 등 항거하였다. 1912년 호남창의대장 이석용(李錫庸)이 전남북 양도에 걸쳐 일군과 항전을 계속하며 독립밀맹단을 조직하고 각 지역을 분담하여 활동할 때 전주 지방을 맡아 이석용의 의병활동을 지원하였다. 1918년 옥류정사가 항일사상의 본거지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함을 간파한 일제가 옥류정사 일대 1,800여평을 잠업시험장으로 조성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협박 강탈하려하자 단식으로 저항하고, 토지강제수용령이 발동되자 결사 항거하였다. 이에 일제가 집 일대에 방화하였으나 "불에 타 죽겠다"고 버티므로 당황한 일경들에 구출되었으며 그후 토지는 수용되고 말았다. 1920년 조희제(趙熙濟)가 일제의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인 실상을 담은 <염재야록(念齋野錄)>을 저술, 발간할 때 서문을 작성한 것을 빌미로 일경에 피체되자 6일간 단식으로 항거하였다. 1942년 일제의 소위 동화정책으로 창씨개명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반대하고 조상의 성씨를 수호하였다. 역사적 상황의 불안정과 격변 속에서 유학의 본질인 도학과 의리 정신을 지켜 가면서, 전주 옥류동(玉流洞)의 염수당(念修堂)에서 많은 영재를 배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최병심 묘
최병심(1874 - 1957)의 자는 경존, 호는 금재이며, 일제강점기 『금재문집』을 저술한 유학자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렬되자 단식으로 항거하고 토역선참(討逆先斬)의 격문을 작성하여 도처에 붙이는 등 항거하였다. 1912년 호남창의대장 이석용(李錫庸)이 전남북 양도에 걸쳐 일군과 항전을 계속하며 독립밀맹단을 조직하고 각 지역을 분담하여 활동할 때 전주 지방을 맡아 이석용의 의병활동을 지원하였다. 1918년 옥류정사가 항일사상의 본거지로서 큰 영향력을 행사함을 간파한 일제가 옥류정사 일대 1,800여평을 잠업시험장으로 조성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협박 강탈하려하자 단식으로 저항하고, 토지강제수용령이 발동되자 결사 항거하였다. 이에 일제가 집 일대에 방화하였으나 "불에 타 죽겠다"고 버티므로 당황한 일경들에 구출되었으며 그후 토지는 수용되고 말았다. 1920년 조희제(趙熙濟)가 일제의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인 실상을 담은 <염재야록(念齋野錄)>을 저술, 발간할 때 서문을 작성한 것을 빌미로 일경에 피체되자 6일간 단식으로 항거하였다. 1942년 일제의 소위 동화정책으로 창씨개명을 강요받았으나 끝내 반대하고 조상의 성씨를 수호하였다. 역사적 상황의 불안정과 격변 속에서 유학의 본질인 도학과 의리 정신을 지켜 가면서, 전주 옥류동(玉流洞)의 염수당(念修堂)에서 많은 영재를 배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충의정
충의정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민여운과 더불어 독립선언문 33인 중 한 명인 박준승, 동학농민혁명의 김개남, 임정에 독립자금을 가져가다가 옥고를 치른 김정술, 6·10만세 사건을 주도한 이동환, 조선어사전 편찬에 동참하는 등 우리말 살리기에 이바지한 임혁규 등 산외면과 깊은 연이 있는 여섯 명의 항일지사를 함께 모신 사적이다.
이동환 공적비
이동환(1901 - 1982)은 정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1926년 「6·10만세운동」은 우리민족의 항일운동사상 3·1독립운동에 이은 또 하나의 쾌거였다. 그것은 기미년 독립만세 이후 7년만에 일어난 운동으로서 융희황제가 동년 4월 26일에 붕어하여 6월 10일로 인산일(因山日)이 결정되자 맺혔던 분노가 폭발되어 일어났다. 또한 6·10만세운동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협력으로 주로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따라서 당초에는 세 갈래로 이 운동이 계획되었는데 첫째는 공산당원이던 권오설에 의하여 추진되었으나, 서전에 일경에게 체포되어 좌절되었으며, 둘째는 당시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회원이며 연희전문학교 학생이던 이병립(李炳立)에 의하여 추진된 것으로 권오설로부터 지도를 받아 착수하였다. 세 번째가 통동계(通洞系)라 불리우는 중앙고보의 이동환과 박용규(朴龍圭)가 중심이 된 계획으로서 이들은 1926년 5월 16일 문인근(文仁根)의 하숙에서 거사에 필요한 동지규합의 방법은 논의하였으며, 그는 제일(第一)고보 동쪽에 있는 학교를 맡아 활동하기로 하였다. 5월 23일에는 다시 삼선호(三仙湖)에 모였는데 그는 독립만세보다 일본인의 집단거주지인 당시 목정(木町)을 습격하고 총독부를 때려부수자고 제의하였으나 극소수의 찬성밖에 얻지 못하였다. 이틀 후인 5월 26일에 모인 이들은 격문을 작성하였다. 5월 30일에는 약 5천 여장의 격문을 프린트하였고, 6월 8일에는 이를 전국에 배포하였으며, 그는 중앙고보의 최재민(崔載民)에게 4백여매를 주어 당일 거사시 살포하도록 하였다. 6월 10일에는 30만의 애도 군중이 연도에 몰려나왔는데 그는 오후 2시 경 동대문 밖 동묘 앞에서 박용규(朴龍圭)·황정환(黃廷煥) 등과 함께 격문 7백여 매를 살포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는 6월 19일 이 운동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중앙고보생 18명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1926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 형을 받았으나, 경성복심법원의 공소심에서 1927년 4월 1일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고 동년 9월 20일 서대문 감옥에서 만기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익겸, 박환규, 유만규 공적비
이익겸(1879 - 1928)은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1919년 당시 정읍 읍내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천도교인 및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만세운동계획이 추진되었다. 그는 읍내에 사는 박환규(朴桓奎) 등을 비롯하여 천도교와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1919년 3월 23일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정하고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미리 준비하였다. 천도교인들은 각 지구의 교인들에게 내통하고, 기독교인들은 전도형식으로 각처를 순방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만세운동대열에 참가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거사 전날인 3월 22일 이 사실이 일제에 탐지되어 태극기와 선언서가 압수되고 주동자들이 일제헌병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5월 15일 전북지방법원 정읍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환규(1886 - 1958)는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1919년 3월 20일경 전북 정읍(井邑)에서 3월 23일 열리는 읍내의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문 등을 준비하던 중인 3월 22일 밤에 계획이 발각되어 붙잡혔다. 이로 인해 1919년 5월 19일 광주지방법원 정읍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유만규(1886 - 1956)는 전북 정읍(井邑) 사람이다. 1919년 11월경 중국 상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요원 조한옥(趙漢鈺)의 지시에 따라 윤철(尹喆)이 독립운동 자금모집책이 되어 활동할 때 이태훈(李泰勳)·유학규(柳學圭)와 함께 모집활동에 참여하여 사재(私財)를 털어 1920년 3월까지 3회에 걸쳐 5,000원을 제공하였다. 1920년 11월 윤철과 임시정부요원 고정일(高政一)의 결정으로 흥덕군(興德郡) 관장(管長)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고 1921년 3월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의 독립운동비 모집의뢰장과 독립공채(獨立公債)를 유학규와 함께 교부받고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21년 5월 20일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붙잡혀 1922년 3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심리(審理)를 받았으나 무죄로 방면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파리장서비(정읍사공원)
파리장서는 3.1독립투쟁에 참여하지 못한 유림측에서 파리 평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려는 독립투쟁의 하나인데, 독립정신을 기리는 파리장서비는 서울 장충단공원 외에 충남 홍성, 대구 달서구, 봉화군, 거창군, 밀양시, 합천군, 고창군, 정읍시 등 총 9기가 건립되어 있다. 파리장서는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던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대부분 의병에 참여하였던 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김봉제(金鳳濟)·임한주(林翰周)·전양진(田穰鎭)·최중식(崔中軾) 등에 의해 이뤄졌다. 서한의 요지는 일본의 배신행위와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고종의 시해, 그리고 한국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고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영남유림에서도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 등이 필두로 같은 목적의 일이 추진되고 있었다.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선정된 김창숙이 상해(上海)로 출발하였으며, 장서에는 134명 유림대표가 서명하였다. 장서는 김창숙이 파리로 가져가지 못하고, 당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로 선정되어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으며, 또한 국내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러나 송회근(宋晦根)에 의해 사건이 발각됨으로써 관계자들이 피체되어 옥고를 겪었다.
정인표 묘
정인표(1898 - 1957, 鄭寅杓, 鄭仁杓)는 1938년 4월부터 정읍(井邑)을 활동무대로 조직된 비밀결사 신인동맹(神人同盟)에 가담하여, 종교적 결합을 바탕으로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을 쏟았다. 신인동맹은 보천교도(普天敎徒)들이 독립운동을목적으로 조직한 비밀결사단체로, 일제패망을 기원하는 한편 국권회복에 앞장서기를 결의하고 대원 50여명으로 조(組)를 편성하여 경찰서 습격 등을 계획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정인표는 신인동맹 설립초기부터 활동하며 동지들 규합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그런데 1940년 12월 경 비밀결사 신인동맹이 일경에 발각되면서 모든 계획들이 무산되었을 뿐 아니라 주도자도 검거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43년 10월 6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8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오충오열사비(충렬사)
충렬사는 송병선, 최익현,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이준,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일제에 항거한 애국지사들을 배향하는 사당이다. 1948년에 단을 설치하여 향사하다가 1972년에 사우를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처음에는 학선사(鶴仙祠)라고 하였다가 충렬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2009년 10월에 복원과 수리를 하였다. 내부에 충렬사 비석이 있다.
대한이산묘
송병선(1836 - 1905)은 충청남도 회덕(懷德)에서 태어났다. 학행으로 천거 받아 서연관(書延官)과 경연관(經延官)을 지내었다. 1882년에 공조참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충청북도 옥천(沃川)에 내려가 정자를 짓고 유학을 가르치면서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 소식을 들은 송병선은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고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5적의 처단과 을사조약의 파기를 건의하였으며, 을사조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경무사 윤철규(尹喆奎)에게 인치(引致)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이에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하여 세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겨 놓고 자결 순국하였다. 유서에서는 을사5적의 처형과 을사조약의 파기 및 의(義)로서 궐기하여 국권을 찾을 것 등을 호소하였다. 고종은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06년 2월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정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익현(1833~1907)은 조선 후기의 지사이다.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며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체포되었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