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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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구 묘
김철수(1893 - 1986)는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마친 뒤 군산(群山) 금호학교(金湖學校)를 거쳐 1912년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 정치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인 1915년 다섯명의 일본 유학생과 함께 독립운동 비밀결사를 결성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해 갔으며, 1916년에는 조선인, 중국인 20여 명과 함께 반일단체인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을 결성했다. 국내로 돌아온 그는 1920년 서울에서 사회주의단체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 조직에 참가했다. 동년 7·8월경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과 28구락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22년 6월 고려공산당 임시연합의 간부로 선임되었고, 10월 고려 공산당 베르흐네우진스크 연합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 무렵 독립운동계에서는 임시정부의 존재를 놓고 크게 논란이 되었는데, 이때 그는 이동휘(李東輝)·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임시정부 개조파(改造派)의 일원으로 1923년 국민대표회에 참가했다. 국민대표회에서 생계위원 및 비서로 활동했으나, 국민대표회가 유야무야되자 동년 5월 국내로 돌아왔다. 1924년 전북민중운동자동맹(全北民衆運動者同盟)에서 활동하다가 1925년 12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입당하여 중앙위원회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1926년 9월에는 책임비서가 되었다. 동년 12월 코민테른에 파견할 대표자로 선임되어 1927년 5월 코민테른으로부터 조공 제2차 대회 승인을 받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조직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1928년 만주로 망명했다. 1929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었으며, 그해 말 귀국하여 국내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활동을 하다가 1930년 2월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철수 추모비
김철수(1893 - 1986)는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마친 뒤 군산(群山) 금호학교(金湖學校)를 거쳐 1912년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 정치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인 1915년 다섯명의 일본 유학생과 함께 독립운동 비밀결사를 결성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해 갔으며, 1916년에는 조선인, 중국인 20여 명과 함께 반일단체인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을 결성했다. 국내로 돌아온 그는 1920년 서울에서 사회주의단체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 조직에 참가했다. 동년 7·8월경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과 28구락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22년 6월 고려공산당 임시연합의 간부로 선임되었고, 10월 고려 공산당 베르흐네우진스크 연합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 무렵 독립운동계에서는 임시정부의 존재를 놓고 크게 논란이 되었는데, 이때 그는 이동휘(李東輝)·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임시정부 개조파(改造派)의 일원으로 1923년 국민대표회에 참가했다. 국민대표회에서 생계위원 및 비서로 활동했으나, 국민대표회가 유야무야되자 동년 5월 국내로 돌아왔다. 1924년 전북민중운동자동맹(全北民衆運動者同盟)에서 활동하다가 1925년 12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입당하여 중앙위원회 조직부장을 맡았으며, 1926년 9월에는 책임비서가 되었다. 동년 12월 코민테른에 파견할 대표자로 선임되어 1927년 5월 코민테른으로부터 조공 제2차 대회 승인을 받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조선공산당 조직이 와해되는 과정에서 1928년 만주로 망명했다. 1929년 중국 지린성[吉林省] 돈화현(敦化縣)에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었으며, 그해 말 귀국하여 국내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활동을 하다가 1930년 2월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승호 송덕비
이승호(1890 - 1966)는 전북 부안(扶安) 사람이다. 그는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며 임시정부 지원활동을 폈다.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요원인 이완식(李完植)·김진억(金鎭億)·이문용(李文庸)·이영필(李永弼) 등이 그의 자택을 방문하여 독립군자금을 요구하자 이에 적극 호응하여 600원을 지원하였다. 그후 서울 익선동(益善洞)에 은닉해 있던 이완식·이문용 등에게 총 3,600원에 달하는 막대한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1차로 군자금 모집요원인 부안의 자택으로 방문하였을 때인 1920년 11월 600원을 제공하였고, 1921년 1월에 각각 200원, 1,800원과 1921년 5월에 1,000원을 제공하여 총 3,600원을 희사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순창출신 8명 항일 영광정
영광정(迎狂亭)은 이 지방출신 독립운동가인 김원중이 7인의 동지들과 뜻을 모아 1921년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산6 번지에 건립한 것이다. 한일합병으로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구하고 배일사상을 고취하기 위해서였다. 이곳에서 김원중은 애국동지들과 자주 모임을 갖고 의병투쟁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모임을 가질 때, 마치 미친 사람행세를 하여 왜인들의 감시를 피했다고 하여 영광정(迎狂亭)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처마 끝에는 태극팔괘를 새겨 조국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이들의 굳센 의지를 담았다. 6·25전쟁 때 현판이 분실되었을 뿐 그대로 보존되어 오다가 일부 기둥과 현판을 보수하였다.
장병구 구국비
장병구(1897 - 1983)는 전북 전주(全州) 사람이다. 1922년 5월 21일 전북 전주군(全州郡) 운동하면(雲東下面) 금당리(金塘里)에서 김영한(金永翰)·김익환(金益煥)·문병래(文柄來)·김덕칠(金德七)·김명섭(金明燮)·서보국(徐寶局) 등과 함께 독립운동 군자금(軍資金)을 조달하기 위하여 금당리 산중(山中)에 있는 서정관(徐政官)의 빈집에 인쇄기계와 석판(石版) 등을 설치, 조선은행발행(朝鮮銀行發行) 1원권 40,000여 매와 50전 지폐 3,000여매를 인쇄한 것이 일경에게 발각되어 붙잡혔다. 1922년 12월 27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통화위조(通貨僞造)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추념탑
전북 완주군 경천면 완주독립운동추모공원은 완주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1994년에 위패를 모시는 사당, 추념탑, 현충문 등을 건립하며 조성이 완료됐다. 독립운동추념탑은 글귀가 새겨진 두 개의 바위와 둥근 기둥, 반구 형태의 조형물로 이뤄져 있는데 바위 위로 각각 ‘민족의 얼’ ‘나는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이 한 몸 바쳤노라’는 글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조형물의 둥근 기둥의 가장 윗부분, 활시위에 해당하는 부분은 활활 타오르는 불의 형상으로 독립을 향한 우리 선열들의 기백과 강열한 의지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추념탑 이면에는 완주 출신 독립운동가 28인의 명판과 독립선언문, 추념탑 설립 취지 등이 함께 기록돼 있다.
김판봉 공적비
김판봉(1901 - 미상)은 김판봉은 1936년 음력 12월경 전북 익산에서 정해도(鄭海桃)를 교주로 하는 황극교(黃極敎)에 가입하여, 표면적으로 종교 활동을 표방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를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판봉은 황극교가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임을 알고 은세룡(殷世龍)의 권유로 가입한 후 전북 일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37년 4월경 이간상(李旰相), 김경록(金京錄) 등 20여 명을 입교시키고 김경록의 집에서 수명의 교도들에게 교세확장과 조선독립을 설파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일로 인해 김판봉은 1940년 10월 30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8월을 받고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일환 의용추모비
김일환(1889 - 1939)은 한문 수학하며 청운에 뜻을 두었던 중 경술국치의 비보는 모든 것을 격변시켜 통분을 가누지 못하여 논산군 채운면 용화리로 이거하였다. 거기에도 왜인은 가까이 있어 일상 그들과 충돌은 그치지않아 인근까지 알게되었다. 국권회복의 기회만을 기도하던 중 서기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은 천재일우의 호기였다. 국내 3대 시장인 강경장날을 택하여 궐기할 것을 모의하고 손수 태극기를 제작하여 당일에 인근 친지와 나기창 등 동민 태반은 장꾼으로, 태극기는 상품으로 가장하고 시장에 잠입 하오 늦게 옥녀봉에서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니 근만여명의 장꾼들은 삽시간에 합세 작열하는 거대한 불덩어리가 되어 만세를 절규하니 가히 강경벌도 흔들릴듯한 기세였다. 겁에 질린 왜적은 당황하여 평화의 군중이 지극히 정당한 국권회복을 외치는 거룩한 행진을 잔인무도하게 일언의 경고도 없이 총격하며 급습하므로 할수없이 밀리던 중 눈앞에 금강 샛강이 가로막혀 진퇴양난의 상태가 되었다. 많은 동지들이 이때 피체되었으나 김일환 선생은 태극기의 노도를 지휘하던 움켜진 농기장등을 강심에 꽂고 힘껏 뛰어건너므로 위기일발 호구를 탈출하고 각처를 암약하며 재봉기를 계획하다가 강경서에 피체되어 매일 동지의 명단을 추궁 당하였으며, 한사 거절하다 못해 감방에서 자결을 기도했다가 간수에게 발각되어 미수로 끝났다. 후일 공주법원의 재판에서 유례없는 8년의 중형이 선고되었고 즉시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서울 이감을 지연시키다가 가을에야 이송되었다. 서울 역시 재판을 지연시켜 12월 말쯤 재판정에 끌려가니 판사가 비참한 흉상을 보고 당시 법정 석방되어 쫓겨났다. 그러나 출소 후 고문 여독이 심했지만, 몸을 회복시킬 겨를도 없이 은신할만한 빈집을 찾아 다녔다. 만년에 상엽부락의 빈집 냉방에서 외아들의 어린 손에 의지하여 몽상에도 못 잊는 조국광복의 한을 품고 향년 51세 서기 1939년 정월 22일 서거하셨다.
김규선 묘
1929년 2월 전주공립보통학교 3학년 재학 당시 김규선(1911 - 미상)은 동맹휴교를 주도하다가 체포됐다. 같은 해 2월 3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이른바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건 위반’으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로 인해 전주공립보통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1930년 2월 초 전주공립고등보통학교 3학년 고창동(高唱東), 박재선(朴在善)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했다. 이 독서회는 잠시 해산됐으나, 같은 해 2월 하순경 다시 박재선 외 4명에게 독서회를 다시 조직할 것을 설득해 재결성됐다. 4월 하순경 김규선은 자신의 집에서 이겸중(李謙重) 등 5명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고 지도책임자를 맡았다. 이들은 독서회 산하에 전교지도부(全校指導部)와 학년지도부를 구성하고, 학생들을 포섭해 공산주의를 연구했다. 1931년 5월 20일경 학년 변동에 따라 독서회를 재편하고 계속 지도책임자를 담당했다. 이어 5월 말경에는 전주사립신흥학교(全州私立新興學校) 조균(趙筠)에게 3학년을 대상으로 독서회를 조직하도록 권유했다. 한편 김규선은 전주합동노동조합(全州合同勞動組合) 간부를 역임하며 삼공정미(三共精米) 동맹파업사건 당시 노동자들을 대변했다. 1931년 7월경 한종식(韓宗植)은 전주 학생들의 적화(赤化)를 위해 학생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연구의 독서회를 조직하게 할 것, 공산주의 의식 교양, 독서회 간의 연락 통일과 혁명기념일에 집회 개최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 김규선 등은 학생 송별회와 환영회 개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실세 조사 등에 대해 협의했다. 같은 해 12월경부터 1932년 2월경까지 김철주(金鐵柱)가 발행한 ‘반전(反戰) 뉴스’를 독서회원들에게 배포하도록 주도했다. 또한 김문옥(金文玉)에게서 공산주의운동 잡지 『코뮤니스트와 봉화(烽火)』9월호와 10월호를 받아 배포했다. 김규선은 전주지역에서 독서회 조직과 활동,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전주경찰서(全州警察署)의 취조를 여러 차례 받았다. 이후 적색비밀결사 조직 활동을 하다가 다시 체포됐다. 1934년 3월 31일 전주지방법원(全州地方法院)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다. 1934년 11월 29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형이 확정돼 전주형무소(全州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5년 11월 29일 석방됐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익산항일독립운동기념관
익산 항일독립운동 기념관은 익산의 독립운동사를 1관, 2관, 3관으로 구분하였다.1관은 항일운동인데,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 외교권을 강탈하고,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폐위시켰으며 대한제국 군대까지 해산시켰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일본군에 대항해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강제 체결로 대한제국의 국권이 강탈당하자 우리 민족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를 포함한 모든 자유를 박탈당하고 농민들은 토지를 빼앗겼다. 1918년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를 계기로 우리민족은 독립선언을 기획하였다. 1919.3・1운동은 전 세계에 비폭력 평화적인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와 불굴의 민족정신을 보여준 민족독립운동이었다.2관은 일제수탈인데, 익산은 만경강의 풍부한 농업용수, 값싼 토지가격, 양질의 토질, 1912년 호남선 개통으로 농경지의 최적의 조건을 갖추어 토지, 양곡수탈의 최전선이자 경제침략의 현장이 되었다.특히 이리지역의 오하시농장, 대장촌의 호소카와농장, 불이홍업주식회사 등은 300만평 이상의 농지를 소유하는 대지주였다. 일본인들은 쌀 수확량을 증산하기 위하여 수로 시설을 개선하여 땅을 개간하고 생산된 쌀은 춘포역을 통해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반출시켰다.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일본인 농업인을 이주시키고 그 아래 수만명의 한국 소작농을 관리하였으며, 익옥수리조합은 쌀 생산량 증대를 위한 다는 명목아래 토지 개량을 시행하였고 이에 따른 과다한 공사비와 수세를 부담시켜 지역농민을 몰락시켰다. 3관은 4.4만세운동인데, 1919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3・1운동 중 익산은 4・4만세운동으로 정점을 맞았다.당시 대교농장 앞이자 솜리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은 남전교회, 서두교회, 고현교회, 제석교회, 대장교회 등을 주축으로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전개되었다. 1,000여명 군중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수많은 군중에 위협을 느낀 일본 헌병대가 일본인 농장 관리원까지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문용기, 박영문, 장경춘, 박도현, 서공유, 이충규 등 6인은 현장에서 순국하고 39명이 체포되었다. 국가보훈처를 통해 공훈을 인정받은 익산지역의 독립운동가는 총 92명이다.
이원영 충효정려비
이원영(1899 - 1983)은 1912년 호남창의군(湖南倡義軍) 이석용(李錫庸) 의병장의 장남으로 부친의 의병활동에 비밀문서와 군자금을 전달하는 등의 지원을 하였으며, 1913년 겨울 부친이 일본군과 전투하다가 붙잡히자 1914년 4월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기까지 부친의 옥고를 뒷바라지하였다.그후 1939년 4월 4일 부친의 출생지인 전북 임실군 성수면(聖壽面) 삼봉리(三峰里) 부락 뒷산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금지되어 있는 소위 형사자(刑死者)에 대한 제사를 지내며 친부의 항일독립정신을 후세에 전승케하려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41년 10월 8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형사자분묘제초상(刑死者墳墓祭肖像) 등 취체령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아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춘성정 정사기적비
전라북도 임실군 오수면에 있는 이웅재 고가는 현 소유자인 이웅재의 선조인 춘성정 이담손이 이 마을에 입향하여 처음 지은 주택이다. 해당 집은 1977년 전라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종가에 위치한 춘성정 정사 기적비는 둔덕이씨 가문의 애국지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춘성정 정사 기적비에 각명된 애국지사는 총 16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