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TOTAL. 729 건
곽경렬 추모비
곽경렬(1901 - 1968)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라북도 김제군(지금의 김제시) 출신으로 이명(異名)은 곽봉수(郭奉守)이고,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1915년 대한광복회에 들어가 박곡(朴谷) · 벌교(筏橋) 등지의 친일파 부호를 숙청하였으며, 오성(烏城)의 일본헌병 분견대를 습격하는 등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6년 일본 경찰의 체포망을 피하여 잠시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국내로 몰래 돌아와 계속 활동하였다. 1919년 9월부터 6인의 동지를 모아 전라북도 김제군 일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위원이라는 명의로 김제군 일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일곱 차례의 활동을 펼쳤다. 군자금 모금 활동 사실이 발각되어 함께 활동한 박재문이 1919년에 체포된 이래 남정관, 박봉춘 등이 차례대로 붙잡히게 되자 몸을 숨기며 도피 생활을 하다가, 1926년 2월 11일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追敍)되었다.
남원항일운동기념탑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전북 남원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항일운동, 일본지역항일운동, 광복군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선국사 은적암 터
은적암은 동학 창시자의 최제우가 은거한 곳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던 백용성의 첫 출가성지이다. 최제우는 은적암에서 숨어 지내면서 동학을 수도하고 포교와 저술 활동을 이어나갔는데, 나중에 동학농민혁명의 주력이 되는 호남포의 포덕 씨앗이 뿌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몰락 양반가 출신으로 세상 인심의 각박함과 어지러움이 천명을 돌보지 않아서임을 깨닫고 천명을 밝히기 위한 구도와 수련에 전력을 다했다. 1860년 신비한 종교적 체험을 통해 이치를 체득하고 동학을 창시했다. 1861년 포교를 시작한 이후 교세가 빠르게 확장되자 조정은 두려움을 느끼고 제자 20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했다. 서울로 압송 중 철종이 사망하자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어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참형에 처해졌다.
이태현 추모비
이태현(1907 - 1942)은 전북 남원(南原) 사람이다. 그는 호남 유학(儒學)의 거두 간재(艮齋) 전 우(田愚) 계열인 흠재(欽齋) 최병심(崔秉心)의 문하생으로 한학과 유학에 정통하고 우국충절의 기개가 높은 유학자로서 1932년 흠재의 문인들과 함께 경앙계(景仰 )를 조직하였다. 그를 비롯한 경앙계의 계원들은 일제가 강요하던 창씨개명(創氏改名) 반대, 신사참배(神社參拜) 거부, 정오묵도(正午默禱) 거부, 삭발 거부, 일장기게양 거부운동을 주도하며 동포들의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는 1942년까지 이와 같은 항일활동을 계속하였으나 일경의 감시가 심하여 도피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1942년 5월 23일 남원에 소재한 주생(周生) 순사주재소에 자진 출두하여 일제의 침략상과 죄악을 폭로·규탄하였다. 이에 일경이 그를 체포하려 하자 그는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그 자리에서 자결·순국하였다고 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독립유공 애국지사 추모비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전북 남원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임시정부, 노동운동, 국내항일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그 가운데 독립유공자로 추서된 분들은 다음과 같다. 박권영(朴權永, 1898~1967), 박기영(朴琪永, 1893~1938), 박재홍(朴在洪, 1845~1910), 양문순(梁文淳, 1862~1927), 양한규(梁漢奎, 1844~1907), 이두석(李斗碩, 1921~1947), 이태현(李太鉉, 1907~1942), 전규문(田圭文, 1881~미상), 정한익(丁漢翼, 1890~1977), 황찬서(黃贊西, 1873~1919) 남원 시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70년 3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한태현 숭모비
한태현(1878 - 19510은 전북 남원(南原) 사람이다. 1919년 8월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한 이후 고향인 남원 지방을 중심으로 조직활동을 벌였다. 동단의 조직 확대를 위해 그는 남원군내에 청년단(靑年團)을 조직하고 단장의 일을 맡으면서 주로 청년 단원의 모집에 힘을 기울였다. 대동단은 1919년 3월 말 전 협(全協)·최익환(崔益煥) 등이 전 조선 민족의 대단결을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독립운동단체로서, 본부를 서울에 두고 전국 각처에 지단을 설치하였다. 또 이들은 당시 사회 각층을 황족(皇族)·진신(縉紳)·유림(儒林)·종교(宗敎)·교육(敎育)·상공(商工)·노동(勞動)·청년(靑年)·군인(軍人)·부인(婦人)·지역구역(地域區域) 등 11개 단(團)으로 분류하고, 이와 같은 사회 각층의 인사들을 통일·종합함으로써 범국민적 조직을 구상했다. 이러한 목적에 따라 그는 동지 김재구(金在九)·강경진(姜景鎭) 등과 함께 동지를 포섭하였고, 또 자금모금 활동도 전개했다. 그런데 1919년 11월 대동단 본부가 주도한 의친왕(義親王)의 상해(上海) 망명계획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대동단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어 동단의 전라북도 지단도 자연 발각되었고, 이로 인하여 그는 1920년 3월 15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준상 항일공적비
박준상(1914 - 1943)은 박준상은 전북 남원 운봉에서 1925년 4월부터 1929년 2월에 걸쳐 이명수(李明壽) 등 사회주의자의 지도를 받아 신사상을 받아들이고, 『자본주의의 기구』 등 사회과학 서적을 강독, 연구하였다.1931년 11월 25일 안희탁(安禧鐸)·임철호(林喆鎬)·박종암(朴鍾岩)·박순영(朴舜永) 등과 함께 한국독립과 신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남원청년동맹 운봉지부를 재조직하였다. 남원청년동맹은 1927년 8월 12일 결성되었고 운봉지부는 이듬해에 결성되었다. 그러나 운봉지부는 남원 형평사(衡平社)와 운봉 권농회(勸農會)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면서 1929년 3월 13일에 열린 예정이었던 정기대회가 관할 주재소로부터 금지 명령이 내려지는 등 제대로 활동을 못하게 되자, 이때 재조직하려고 했던 것이다. 재조직된 운봉지부에서 박준상은 박순영과 함께 농민부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소작료 불납운동과 강제 부역동원을 반대하였다.운봉지부는 표면적으로 ‘운봉단발회(雲峰斷髮會)’를 결성, 일반인에게 단발의 필요함을 선전하는 한편, 이발업까지 경영하여 이발요금을 운동자금으로 활용하였다. 이 자금으로 각종 사회과학 서적들을 구입하고, 이를 통해 신사상을 고취하였으며 운동자 양성에 주력하였다.이 사건(속칭 ‘운봉단발회 비사사건’)으로 1932년 9월 남원경찰서에 체포된 박준상은 1933년 4월 19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미결구류 70일 통산)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그러나 1934년 2월 11일 전주지방법원에서 1934년 칙령 제19호에 따라 징역 1년 9월 17일로 변경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덕음원 표지석
독립 유공 애국지사 추모비 표지판의 내용으로서는 여기 이곳은 남원지역 출식으로 항일운동 헌신하다 순열한 독립 운동가 10인의 추모비가 세워진 곳이다. 일본이 강압적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하다 1907년 3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남원읍에서 왜군들을 기습공격하다 순열한 양한규 선생과 그 휘하에서 활동했던 진사 박재홍,참봉 양문순 선생의 공적을 기리는 의적비, 남원,구례,곡성등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한 전규문 선생, 독립운동 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대한 국민회를 조직하여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등 구국활동을 전개한 박기영, 박권영선생 1919년 4월4일(장날) 남원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적군의 총탄에 관통상을 입고 순열한 정한일, 황찬서 선생, 1929년 야학을 세워 문명퇴치 활동을 펴면서 민족의식고취에 앞장 선 이두석 선생의 추모비이다.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을 규탄하여 항일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순열의사 정암 이태현선생의 추모비등이 세워져 독립 유공 애국지사의 뜻을 기리고 있다고 쓰여져 있다.
이태현 묘
이태현(1907 - 1942)은 전북 남원(南原) 사람이다. 그는 호남 유학(儒學)의 거두 간재(艮齋) 전 우(田愚) 계열인 흠재(欽齋) 최병심(崔秉心)의 문하생으로 한학과 유학에 정통하고 우국충절의 기개가 높은 유학자로서 1932년 흠재의 문인들과 함께 경앙계(景仰 )를 조직하였다. 그를 비롯한 경앙계의 계원들은 일제가 강요하던 창씨개명(創氏改名) 반대, 신사참배(神社參拜) 거부, 정오묵도(正午默禱) 거부, 삭발 거부, 일장기게양 거부운동을 주도하며 동포들의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는 1942년까지 이와 같은 항일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일경의 감시가 심하여 도피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1942년 5월 23일 남원에 소재한 주생(周生) 순사주재소에 자진 출두하여 일제의 침략상과 죄악을 폭로·규탄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이 그를 체포하려 하자 그는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그 자리에서 자결·순국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동학과 동학농민군 유적지 광한루원 표지석
1960년대 광한루원 확장사업 이전에 광한루원의 호수 나목은 성밖시장(남원장)이었다. 동학의 교조 수은 최제우선생이 혹세무민,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1861년 겨울, 경주에서 피신차 남원에 들어와 광한루 오작교 주변 서형칠의 약방에 머물다가 공창윤의 집을 거쳐 교룡산성 내 덕밀암으로 옮겨 은적암이라는 현판을 걸고 경전 집필과 포교활동을 하였는데 이것이 호남에 동학이 전파 된 시초다. 서형칠약방은 광한루원 경내인 완월정 앞 호석 근방으로 추정되고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음) 11월 28일 전라좌도 농민군이 민보군과 일본군에 잡혀 처형되었는데 대부분의 농민군들이 성밖시장 저자거리에서 참살당하였다. 그 위치는 광한루원 정문에서 본 잔디광장 시작 지점 부근이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때 천도교가 주도한 만세운동이 실패한 뒤, 덕과면장 이석기가 주도한 3월3일 동해골과 계명당고개 만세운동 다음날인 4월 4일 남원장날 성밖시장(현 광한루원)에 모인 군민들이 대대적으로 만세를 부르며 오작교를 거쳐 남원부관아를 향하며 성안시장(현 남원교육문화회관) 군민들과 합류하려다가 일제의 무차별 사격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잡혀서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박병권 묘
박병권(1907 - 1942)은 박병권은 군산 영명학교(永明學校) 고등과 2학년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1928년 1월 28일부터 1929년 1월 25일까지 부안군 동진면(動津面)사무소에서 면서기로 근무하였다. 1928년 5월 경부터 최옥환(崔玉煥), 최순환(崔順煥) 등과 함께 신사상 연구를 시작하고 1931년 음력 10월 경부터 전북 부안군 동진면 당상리(堂上里)에서 모여 회의한 결과 1927년부터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전해져 오는 위친계(爲親契)를 바탕으로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조합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1932년 2월 말 명칭을 당상리저축조합(貯蓄組合)으로 하고, 최상기(崔相基) 등 위친계원 31명의 찬성을 얻어 조합을 출범시켰다. 이후 농민의 권익보호와 신사회 건설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었다.이로 인해 박병권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9개월간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최순환 묘
최순환(1912 - 1950)은 최순환은 1926년 3월 부안공립보통학교(扶安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1927년 4월 경성사립중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자퇴하고 최옥환(崔玉煥),박병권(朴炳權)과 함께 신사상연구를 시작하였다. 최순환과 동지들은 1931년 음력 10월경 부안군 동진면 당상리에 조직된 '위친계(爲親契)'라는 조직을 '농민조합'으로 변경하였고, 이후 '당상리 저축조합'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최순환은 동(同) 조합의 서기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받기까지 약 1년 간 옥고를 치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