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TOTAL. 729 건
이종주 기적비
이종주(1901 ~ 1921)는 전라북도 고창(高敞) 사람이다.1920년 3월 10일을 전후하여 3·1독립운동 기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 위하여 3월 10일 밤에 이종철(李鍾喆)·이대성(李大成)·유판술(劉判述) 등의 동지들과 함께 그의 집에 모여 3·1독립운동 기념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그 방법으로는 민중의 궐기를 촉구하기 위하여 구한국 구기를 만들어 이를 많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는 장소에 꽂아 두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그날 밤 고창군 성내면(星內面) 사무소에서 등사기를 가져와 독립선언문 수천매를 등사하여 각처에 배부하고 태극기 12매를 만들어 대한독립이라고 써넣은 다음, 이를 파기하는 자는 참살하겠다"는 경고문을 작성하여 성내면사무소 구내의 공터에 꽂아 놓고 시민들의 독립운동 기세를 높였다. 그러나 3월 12일 성내면장의 고발에 의하여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며, 1921년 1월 15일 광주(光州)지방법원 전주(全州)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21년 7월 13일 대구(大邱) 감옥에서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태로 집
이태로(1899 - 1932)는 군산(옛 옥구)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이태로는 1925년 10월 전북 청년 연맹(全北靑年聯盟)을 결성하고 집행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2월 결성된 항일 비밀 결사 조선 공산당 전북 위원회에서 옥구(沃溝) 지역 책임자로 있으면서, 일반 대중에게 계급 의식과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진력하였다. 그리고 활동 범위를 넓혀 군산 노동 연맹(群山勞動聯盟)에서도 활동하였으며, 1927년 11월에는 옥구 청년 동맹 창립 준비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8년 3월 군산 노동 연맹 집행 위원회에서 서무 및 재정부 담당으로 선출되어 활동 자금 모금 및 집행을 담당하였다. 1928년 9월경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 지방 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태로 묘
이태로(1899 - 1932)는 군산(옛 옥구)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이태로는 1925년 10월 전북 청년 연맹(全北靑年聯盟)을 결성하고 집행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2월 결성된 항일 비밀 결사 조선 공산당 전북 위원회에서 옥구(沃溝) 지역 책임자로 있으면서, 일반 대중에게 계급 의식과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진력하였다. 그리고 활동 범위를 넓혀 군산 노동 연맹(群山勞動聯盟)에서도 활동하였으며, 1927년 11월에는 옥구 청년 동맹 창립 준비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8년 3월 군산 노동 연맹 집행 위원회에서 서무 및 재정부 담당으로 선출되어 활동 자금 모금 및 집행을 담당하였다. 1928년 9월 경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경성 지방 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군옥출신독립운동공적기념탑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전북 군산 옥구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군전투, 학생운동, 농민운동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군산시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71년 3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옥구농민항일항쟁 기념비
옥구농민항쟁은 이엽사 농장이 무려 수확량의 75%를 소작료로 요구하여 소작농들이 서수농민조합의 간부를 중심으로 이엽사 측에 소작료 인상에 대하여 항의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인 관리인이 농민들의 요구사항을 거절하자 농민들은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서수주재소의 일본 경찰은 농민조합장 장태성을 검거했고, 지도자의 검거에 분노한 소작농 500여명은 임피(200여명)와 서수주재소(300여명)를 습격해 검거된 조합장을 구출했다. 하지만 농민조합의 간부들은 군산경찰서의 일본경찰에 의해 다시 검거되었고, 모두 재판에 회부되었다.
군산항쟁관
군산은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서울파고다공원에서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나흘 뒤인 3월 5일 한강 이남에서 최초로 항일독립만세운동이 있었던 자랑스런 역사의 현장이다. 군산항쟁관은 일제강점기 일제에 항쟁한 역사와 장소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알리기 위해 설립했다. 한강 이남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 벌어졌던 곳이 바로 군산이었으며 다른 지방으로 항쟁과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항쟁관에서는 1920년대 미선공과 부두노동자들의 항쟁, 옥구 농민항쟁을 비롯한 소작쟁의에 대한 내용도 배워갈 수 있다.
옥구농민항일항쟁 기념비
구농민항일항쟁은 악랄했던 일본의 식민 지배에 정면 대항한 사상 초유의 농민저항운동이다. 일찍이 3·1운동의 열기가 뜨거웠던 군산지역에서는 민족 저항 정신이 확산되면서 옥구농민조합(1926), 서수농민조합(1927), 서수청년회(1927) 등이 조직되었다. 이들은 언론의 자유를 외치고 악덕 농장주에 대항하는 시위를 벌이며 일제에 저항하였다. 1927년 11월, 일본인 지주들이 공동 설립한 대규모 농장인 이엽사 농장에서 수확한 곡물의 75%를 소작료로 요구하였다. 농민조합에서는 생존을 위해 소작료를 인하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이를 묵살당한 끝에 11월 25일 소작료 납부 거부를 결의하였다. 다음날 농장 측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농민 간부 장태성을 술산주재소에 감금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500여 명의 농민들은 징을 울리며 몰려가 주재소를 부수고 장태성을 구출한 뒤 만세를 불렀다. 또한 서수주재소에 감금된 농민 간부 박상호도 구출하였다. 경찰은 80여 명의 농민들을 체포해 혹독하게 취조하였고, 체포된 농민 중 34명은 실형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러한 옥구농민항일항쟁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조직적으로 전개된 농민항일운동으로서, 일제의 착취와 폭압에 항거한 대표적인 항일 투쟁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장현식 기적비
장현식(1896 - 미상)은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항일구국의 인재를 육성할 목적으로 현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인 사립 중앙고등보통학교(私立中央高等普通學校)를 설립하고 교주(校主)가 되어 지도자 양성에 헌신하였다. 1919년 비밀결사인 대동단(大同團)이 창단되자 대동단의 운영자금을 제공하고 〈대동신문(大同新聞)〉 발간의 재정운영을 담당하여 활동하다가 붙잡혀 1921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다. 1939년에서 194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에는 민족어 보존을 염원하여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를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지원하는 자금으로 3천원을 제공하였으며 1940년 11월경까지 지인(知人) 등에게도 권유하여 1400원을 제공하게 하는 등 활동하다가 붙잡혔으나 1945년 8월 13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무죄로 확정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9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장현식 집
장현식(1896 - 미상)은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항일구국의 인재를 육성할 목적으로 현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인 사립 중앙고등보통학교(私立中央高等普通學校)를 설립하고 교주(校主)가 되어 지도자 양성에 헌신하였다. 1919년 비밀결사인 대동단(大同團)이 창단되자 대동단의 운영자금을 제공하고 〈대동신문(大同新聞)〉 발간의 재정운영을 담당하여 활동하다가 붙잡혀 1921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형을 선고받았다. 1939년에서 194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는 민족어 보존을 염원하여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를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는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지원하는 자금으로 3천 원을 제공하였으며 1940년 11월 경까지 지인(知人) 등에게도 권유하여 1400원을 제공하게 하는 등 활동하다가 붙잡혔으나 1945년 8월 13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무죄로 확정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9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정한조 묘
정한조(1890 - 1945)는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1926년 1월 25일 전북 이리(裡里) 청년회관 건축위원회 모임에서 상무위원으로 선임되고, 같은 해 7월 11일에 개최된 이리청년회(裡里靑年會)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사회부를 맡아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 이리 지역 13개 단체 대표 30여명이 모여서 재만동포옹호동맹(在滿同胞擁護同盟)을 결성할 때에 조선일보 이리지국장 자격으로 참여하여, 재만 동포에 대한 중국 동삼성(東三省) 군벌정권 관헌의 비인도적 처사에 대해 거족적으로 항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돌연 일경의 검거령에 의해 수십명의 인사와 함께 그도 붙잡혀, 1928년 3월 6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정한조 사적비
정한조(1890 - 1945)는 전북 김제(金堤) 사람이다. 1926년 1월 25일 전북 이리(裡里) 청년회관 건축위원회 모임에서 상무위원으로 선임되고, 같은 해 7월 11일에 개최된 이리청년회(裡里靑年會)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사회부를 맡아 활동하였다. 같은 해 12월 이리 지역 13개 단체 대표 30여 명이 모여서 재만동포옹호동맹(在滿同胞擁護同盟)을 결성할 때에 조선일보 이리지국장 자격으로 참여하여, 재만 동포에 대한 중국 동삼성(東三省) 군벌정권 관헌의 비인도적 처사에 대해 거족적으로 항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돌연 일경의 검거령에 의해 수십명의 인사와 함께 그도 붙잡혀, 1928년 3월 6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곽경렬 구 묘
곽경렬(1901 - 1968)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라북도 김제군(지금의 김제시) 출신으로 이명(異名)은 곽봉수(郭奉守)이고,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1915년 대한광복회에 들어가 박곡(朴谷) · 벌교(筏橋) 등지의 친일파 부호를 숙청하였으며, 오성(烏城)의 일본헌병 분견대를 습격하는 등 많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6년 일본 경찰의 체포망을 피하여 잠시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국내로 몰래 돌아와 계속 활동하였다. 1919년 9월부터 6인의 동지를 모아 전라북도 김제군 일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위원이라는 명의로 김제군 일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일곱 차례의 활동을 펼쳤다. 군자금 모금 활동 사실이 발각되어 함께 활동한 박재문이 1919년에 체포된 이래 남정관, 박봉춘 등이 차례대로 붙잡히게 되자 몸을 숨기며 도피 생활을 하다가, 1926년 2월 11일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追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