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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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홍 의적비
양재홍(1888 - 1945)은 경술국치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기회를 모색하던 중 1917년초 뜻을 같이하는 정동근(鄭東根)·김교락(金敎洛)·문재교(文在敎)·김영하(金榮夏)·고성후(高成厚) 등과 동지적 결합을 맺고 우선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다.이후 이들은 나주(羅州)·함평(咸平)·화순(和順)·순천(順天) 등 주로 전남지역에서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1년여동안 십여 차례에 걸쳐 천여원의 군자금을 수합하면서 조직을 확대해 갔다. 그러던 중 일경에 붙잡혀 1918년 12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1919년 3월 대구복심법원에서 1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용상, 김영하 충혼탑
김용상(1858 - 1919)은 1914년 서울에서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용상은 이낙정(李樂正) 등과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모금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14년 9월부터 11월까지 수차례에 걸쳐 서울 종로 김태영(金泰榮) 집에서 유병하(柳秉夏)·성기섭(成基燮)·오덕영(吳悳泳) 등 수명에게 '국권회복의 기회가 성숙되었으니 독립운동의 자금을 지원하라'고 권유하였다. 그 결과 김용상은 유병하로부터 금 80원·성기섭으로부터 금 35원·오덕영으로부터 금 22원을 모금하였다. 그리고 다른 3명으로부터 금 백십 원을 모금하였다. 그러나 모금 활동이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붙잡혔다. 이 일로 인하여 김용상은 1915년 2월 10일 경성지방법원 궐석재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후 체포되어 고초를 겪은 후 김용상은 고문의 여독으로 4년간 병석에 있다가 1919년에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영하(1878 - 1920)는 경술국치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기회를 모색하던 중 1917년경 뜻을 같이하는 김교락(金敎洛)·양재홍(梁在鴻)·문재교(文在敎)·정동근(鄭東根)·고성후(高成厚) 등과 동지적 결합을 맺고 우선 독립운동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다. 이후 이들은 나주(羅州)·함평(咸平)·화순·순천(順天) 등 주로 전남지역에서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1년여동안 십여 차례에 걸쳐 천여원의 군자금을 수합하면서 조직을 확대해 갔다. 그러던 중 일경에 붙잡혀 1918년 12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1919년 3월 대구복심법원에서 10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기념비
정순호(鄭淳浩), 박춘근(朴春根), 김기칠(金其七), 이치홍(李治洪)은 1944년 6월 상순 일제의 패망과 조선 독립을 예견하고, "때가 오면 죽창을 들고 일본에 역습, 내란을 야기하여 일본을 패망시키고 조선독립을 쟁취하여야 한다"고 지역 주민에게 역설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천황에 대한 불경죄와 육해군 형법, 보안법, 조선임시보안령 위반 등의 혐의로 1945년 3월 8일 광주 지법에서 정순호 징역 1년, 박춘근 징역 4월, 김기칠 징역 1년 6월, 이치홍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독립운동기념비가 있는 운주사는 일제의 탄압과 수탈이 극에 달했던 1944~1945년 무렵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며 일제에 저항하고 싸웠던 독립지사들의 숨결이 면면히 살아 숨 쉬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정순호와 박춘근은 도암면 용강리 출신이고, 김기칠은 순천시 송광면 출신의 승려로 운주사 주지였으며, 이치홍은 인근 나주시 다도면 방산리 닭금마을 출신이다. 정부는 이들의 노고를 인정하여 정순호, 김기칠, 이치홍에게 각각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송홍 집
송홍(1871 - 1949)은 일제 강점기 화순 출신의 민족 교육 운동가이다. 본관은 신평(新平). 자(字)는 익중(翼仲), 호(號)는 운인(雲人). 아버지는 송용진(宋容鎭)이고 어머니는 나주 박씨이며 부인은 창령 조씨이다.한말의 애국 지사인 송병선(宋秉璿)에게 수학하였다. 1904년 9월 그는 홍종영(洪鍾榮)·이범창(李範昌)·윤흥섭(尹興燮)·윤영섭(尹寧燮) 등과 일본의 토지 침탈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일본 헌병대에 구금되었다. 1905년 5월 헌정 연구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대한 협회 광주 지회에서도 활동하였다. 1909년 3월 17일 광주 공립 보통학교 전과(專科) 부훈도(副訓導)로 교직 생활을 시작하여 1910~1923년 광주 공립 보통학교와 광주 공립 농업학교, 1924~1929년 광주 고등 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3·1운동 때는 격문을 지어 배포하다 체포령이 내려졌다고도 한다. 평소 담당 과목인 한문과 함께 한국사와 한국 지리를 몰래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던 송홍은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나 많은 학생들이 검거되자 제1회 공판일인 1930년 2월 12일 한시를 남기고 사직하였다. 해방이 되자 1945년 8월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다시 교단에 복귀하였으나 신병으로 8개월 만에 사직하였다. 1947년 3월 22일에는 전남 문화 단체 연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22년에 대통령표을 추서하였다.
송홍 기념비
송홍(1871 - 1949)은 일제 강점기 화순 출신의 민족 교육 운동가이다. 본관은 신평(新平). 자(字)는 익중(翼仲), 호(號)는 운인(雲人). 아버지는 송용진(宋容鎭)이고 어머니는 나주 박씨이며 부인은 창령 조씨이다.한말의 애국 지사인 송병선(宋秉璿)에게 수학하였다. 1904년 9월 그는 홍종영(洪鍾榮)·이범창(李範昌)·윤흥섭(尹興燮)·윤영섭(尹寧燮) 등과 일본의 토지 침탈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일본 헌병대에 구금되었다. 1905년 5월 헌정 연구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대한 협회 광주 지회에서도 활동하였다. 1909년 3월 17일 광주 공립 보통학교 전과(專科) 부훈도(副訓導)로 교직 생활을 시작하여 1910~1923년 광주 공립 보통학교와 광주 공립 농업학교, 1924~1929년 광주 고등 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3·1운동 때는 격문을 지어 배포하다 체포령이 내려졌다고도 한다. 평소 담당 과목인 한문과 함께 한국사와 한국 지리를 몰래 가르치며 학생들에게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던 송홍은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나 많은 학생들이 검거되자 제1회 공판일인 1930년 2월 12일 한시를 남기고 사직하였다. 해방이 되자 1945년 8월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다시 교단에 복귀하였으나 신병으로 8개월 만에 사직하였다. 1947년 3월 22일에는 전남 문화 단체 연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오의균 묘
오의균(1883 ~ 1957)은 전북 고창(高敞) 사람이다. 1919년 11월 중국 상해(上海)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명령을 수행하는 국내 독립운동단체들 가운데 하나인 감독부(監督府)의 부감독(副監督) 직책을 맡아, 감독인 노진룡(魯鎭龍)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인원 파송 및 군자금 모금, 밀송 등의 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펴 나갔다. 1927년 1월에는 농촌개발과 문명퇴치를 목적으로 최정익(崔正益)·여운홍(呂運弘) 등 10여 명의 발기에 의해 창립된 조선농인사(朝鮮農人社)의 전라북도 대표 겸 이사(理事)의 일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정창묵 의적비
정창묵(1884 ~ 1961)은 전북 고창(高敞) 사람이다. 1938년 4월부터 정읍(井邑)을 활동무대로 조직된 비밀결사 신인동맹(神人同盟)에 가담하여, 종교적 결합을 바탕으로 일제의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을 쏟았다. 신인동맹은 보천교도(普天敎徒)들이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한 비밀결사단체로 일제패망을 기원하는 한편 국권회복에 앞장서기를 결의하고 대원 50여명으로 조(組)를 편성하여 경찰서 습격 등을 계획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했던 정창묵은 신인동맹 설립초기부터 활동하며 동지들 규합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그런데 1940년 12월 경, 비밀결사 신인동맹이 일경에 발각되면서, 모든 계획들이 무산되었을 뿐 아니라 주도자도 검거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43년 10월 6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춘산리 비석군(애국지사 유혼추도비 외)
춘산리 비석군은 국도 23호선 영광으로 가는 방향에서 지석리로 갈라지는 도로 서쪽에 세워진 비석 10기를 말한다. 대산면 지역에 흩어져 있던 공적비를 한 곳에 모은 것이며 공덕비 2기, 불망비 3기, 선정비 1기, 추모비 2기, 기념비 1기 등으로 총 10기가 세워져 있다. 그 중 독립지사를 위한 비석은 의사 김공 영수 추모비와 건립성취록, 고 애국지사 유혼 추도비가 있으며 그 외에도 진주 정규묵 공덕비, 전 참봉 정규원 영세불망비, 전 참봉 이철환 영세불망비, 전 참봉 이상구 진휼비, 전 면장 여주 이공 병섭 추모비, 면장 황판규 기념비 등이 건립되어있다.
김영수 추모비
김영수(1914-1944)는 1940년 2월 17일 전북 정읍(井邑)에서 구국결사단(救國決死團)을 조직하고, 40여명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김제(金堤)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헌병대와 경찰서를 습격·멸살하려는 계획을 추진하려다가 붙잡혔다. 이로 인해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영관 공적비
박영관(1899 ~ 1975)은 전북 고창(高敞) 사람이다. 1928년 이리 동척(裡里東拓) 습격계획에 참가하였다. 이 계획은 평북 의주 출신 조인현(趙仁賢 일명 : 吳海龍)의 지휘로 추진되었는데, 조인현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의 독립단원으로 1925년 군자금모집의 사명을 띠고 권총과 격문 등을 휴대하고 동지 이중산(李中山)과 함께 군산 지방에 들어와 장재여관(藏財旅館)을 경영하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지폐를 위조하였으며 폭탄을 만들어 일제 착취기관인 이리 동척(東拓)지점 등을 습격할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는 1925년 조인현과 만나 이 계획에 적극 찬동하여 함께 거사계획을 착착 추진하였다. 그러나 전남의 부호(富豪) 강(姜)모에게 군자금 지원을 요청하던 중 불행히도 일경에게 탐지되어 조인현 등 13명의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1930년 3월 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옥고의 여독으로 반신 불수가 되어 출옥하였으며, 산간벽지에서 은둔생활을 했다고 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영관 집
박영관(1899 ~ 1975)은 전북 고창(高敞) 사람이다. 1928년 이리 동척(裡里東拓) 습격계획에 참가하였다. 이 계획은 평북 의주 출신 조인현(趙仁賢 일명 : 吳海龍)의 지휘로 추진되었는데, 조인현은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의 독립단원으로 1925년 군자금모집의 사명을 띠고 권총과 격문 등을 휴대하고 동지 이중산(李中山)과 함께 군산 지방에 들어와 장재여관(藏財旅館)을 경영하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자금조달을 목적으로 지폐를 위조하였으며 폭탄을 만들어 일제 착취기관인 이리 동척(東拓)지점 등을 습격할 준비를 진행하였다.그는 1925년 조인현과 만나 이 계획에 적극 찬동하여 함께 거사계획을 착착 추진하였다. 그러나 전남의 부호(富豪) 강(姜)모에게 군자금 지원을 요청하던 중 불행히도 일경에게 탐지되어 조인현 등 13명의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1930년 3월 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옥고의 여독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출옥하였으며, 산간벽지에서 은둔생활을 했다고 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대한독립운동사적비
대한독립운동사적비는 경술국치 이후 3.1 운동부터 임시정부, 국내외 항일투쟁 등의 역사를 회고하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되었다. 해당 비석은 1960년 삼일절 고창군이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