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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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승수 추모비
문승수(1907~1950)는 전남 완도 사람이다. 1926년 11월 광주농업학교 재학중, 당시 광주 부동정(不動町) 소재 최규창(崔圭昌)의 하숙집에서 광주고보생 등 16명이 함께 모여 조국의 독립, 사회과학 연구, 식민지 노예교육체제 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항일학생결사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고 부서 및 결의사항을 정하였다. 그런데 1927년 3월 해체되고 각 학교별로 조직을 하도록 하였다. 그는 그후에도 지용수(池龍洙)·강해석(姜海錫)등의 지도를 받고 광주농고생인 김만복(金萬福)·김재룡(金在龍)·유상걸(柳上杰) 등과 함께 농업학교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활동하였다. 1928년 4월에 농업학교 졸업 후에는 완도의 사립 약산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직접 간접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도 붙잡혔다. 1930년 10월 27일 그는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 그는 완도에서 황동윤(黃東允)·최창규(崔昌圭)와 함께 비밀결사에 가입하여 야학교사, 독서회원 등으로 민족의식 고취에 전념하였다. 1932년 초 전남운동협의회가 조직되자, 그 산하기관으로 완도군농민조합 건설위원회를 만들고 그는 재정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는 야학과 독서회를 통하여 농민계몽과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며, 1933년 8월 강진군 병영주재소 방화사건을 계기로 일경의 집요한 추적을 받게되어 전남운동협의회가 탐지됨에 따라 그도 1934년 2월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옥고를 치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모도 항일운동기념비 기념탑
전남 완도군 청산면 모도리에서 1923년 9월 청년들이 배달청년회(1925년 모도청년회로 개칭)를 조직하여, 개량서당을 후원하며, 서당 학동들과 주민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항일 활동을 하였다. 이 사건으로 서재만(徐在萬, 1904~1984), 장석칠(張石七, 1905~1952), 정두실(鄭斗實, 1900~1961), 천병섭(千柄燮, 1899~1949), 천홍태(千洪泰, 1903~1927), 최창규(崔昌奎, 1905~1966) 등이 피체되어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완도군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2002년 1월 1일 이 비를 세웠다.
서재만 묘
서재만(1904~1984)은 전남 완도 사람이다. 1923년 9월 완도군 청산면(靑山面) 모도리(茅島里)의 대모도(大茅島) 서부락(西部落)에서 십수 명의 청년들과 함께 배달청년회(倍達靑年會:1925년에 茅島靑年會로 개칭)를 조직하여 서기(書記)로 활동하였다. 청년회 조직의 목적은 원래 마을의 개량서당(改良書堂)을 후원하는 것이었으나, 회원들간에 점차로 민족 독립사상이 고취되어 감에 따라 그들은 회의를 열 때마다 애국가와 혁명가를 합창하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서당 생도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며 「조선독립만세」를 삼창(三唱)하기도 하였다. 또한 회원들은 1925년 1월의 월례회의에서 "우리는 절대 일본인 및 친일인(親日人)에게 동정하지 말고 그들과의 교제를 단절할 것"을 결의하였고, 같은 해 4월의 월례회의에서는 "경찰당국 및 일본인을 파괴할 것"과 "우리는 절대로 대한(大韓)을 위해 활동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활동 사실로 인하여 다른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26년 6월 29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천홍태 묘
천홍태(1903~1927)는 전남 완도 사람이다. 1923년 9월 완도군 청산면(靑山面) 모도리(茅島里)의 대모도(大茅島) 서부락(西部落)에서 십수명의 청년들과 함께 배달청년회(倍達靑年會 : 1925년에 茅島靑年會로 개칭)을 조직하여 교양부 위원이 되었다. 청년회조직의 목적은 원래 마을의 개량서당(改良書堂)을 후원하는 것이었고, 그는 서당의 교사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회원들간에 점차로 민족독립사상이 고취되어감에 따라 그들은 회의를 열 때 마다 혁명가를 합창하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서당 생도들에게 애국가를 가르치며 [조선독립만세]를 삼창(三唱)하기도 하였다. 또한 회원들은 1925년 1월의 월례회의에서 "우리는 절대 일본인 및 친일인(親日人)에게 동정하지 말고 그들과의 교제를 단절할 것"을 결의하였고, 같은 해 4월의 월례회의에서는 "경찰당국 및 일본인을 파괴할 것"과 "우리는 절대로 대한(大韓)을 위해 활동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활동사실로 인하여 다른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26년 10월 4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 7호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아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1927년 6월 18일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위계룡 묘도비
위계룡(1921 - 2002)은 전남 담양(潭陽) 사람이다. 일찍이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할 뜻을 품고 있던 그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단말마적 발악을 계속하던 1944년 1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재학 중 일본 희로(姬路) 제54부대에 을종간부 후보생으로 입대하였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펼 것을 결심하고 미군(美軍)이 일본에 상륙할 때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여 미군에게 군사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조국의 독립을 도울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인 학도병 1명과 동포 1명을 동지로 포섭하여 활동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45년 3월 일본 군법회의에서 소위 국체변혁에 관한 죄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오헌고택(위계룡 가옥)
위계룡(1921 - 2002)은 전남 담양(潭陽) 사람이다. 일찍이 조국독립운동에 헌신할 뜻을 품고 있던 그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여 단말마적 발악을 계속하던 1944년 1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재학 중 일본 희로(姬路) 제54부대에 을종간부 후보생으로 입대하였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펼 것을 결심하고 미군(美軍)이 일본에 상륙할 때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여 미군에게 군사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조국의 독립을 도울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한국인 학도병 1명과 동포 1명을 동지로 포섭하여 활동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45년 3월 일본 군법회의에서 소위 국체변혁에 관한 죄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인행 집(국사재)
국사재(國思齋)는 애국지사 이인행이 태어난 생가이다. 1996년 기존의 낡은 가옥을 원형의 형태로 복원하였다. 이인행(1898 - 1975)은 1919년 10월 임시정부(臨時政府) 특파원 기산도(奇山度)·김종탁(金鍾鐸)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독립운동 자금 수합활동을 폈다. 그러던 중 동년 10월 21일 일경에 피체되어 1920년 7월 19일에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불복·상고하였으나 대구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인행 의적비
국사재(國思齋)는 애국지사 이인행이 태어난 생가이다. 1996년 기존의 낡은 가옥을 원형의 형태로 복원하였다. 이인행(1898 - 1975)은 1919년 10월 임시정부(臨時政府) 특파원 기산도(奇山度)·김종탁(金鍾鐸)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독립운동 자금 수합활동을 폈다. 그러던 중 동년 10월 21일 일경에 피체되어 1920년 7월 19일에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불복·상고하였으나 대구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인행 묘
국사재(國思齋)는 애국지사 이인행이 태어난 생가이다. 1996년 기존의 낡은 가옥을 원형의 형태로 복원하였다. 이인행(1898 - 1975)은 1919년 10월 임시정부(臨時政府) 특파원 기산도(奇山度)·김종탁(金鍾鐸)과 함께 임시정부를 지원할 목적으로 독립운동 자금 수합활동을 폈다. 그러던 중 동년 10월 21일 일경에 피체되어 1920년 7월 19일에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불복·상고하였으나 대구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오문현 추모비
오문현(1911 - 1943)은 광주공립농업학교를 다녔으나 학비 마련이 어려워 중퇴한 후 1929년 서울로 올라가 활동하면서 사회주의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1932년 4월 고향으로 돌아와서 농민운동에 투신하였다. 해남에 돌아온 오문현은 일제 식민통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우선 농민들의 의식을 계몽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박태술(朴太述) 등과 함께 야학을 설치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해남 지역 농민들의 소작쟁의를 지도하였다. 1933년에 이르러서는 기존의 대중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해남 김홍배(金洪培) 등이 주도하여 만든 전남운동협의회에 참여하였다. 전남운동협의회는 혁명적 농민조합을 결성하여 계급의식을 고취하고 지역 조직의 기반을 만들고자 한 단체로,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비밀결사 단체 중 하나였다. 광주를 비롯한 전남의 9개 군 청년들이 해남군 북평면 동해리 성도암(成道庵)에서 첫 모임을 갖고 활동을 시작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 주요 활동 내용은 소작쟁의 운동과 야학, 무산자 해방운동 등이었다. 1933년 8월에 명칭이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赤色農民組合建設準備委員會)로 개편되었고, 완도(莞島)·장흥(長興)·강진(康津)·영암(靈岩) 등에 지부 조직이 설치되었다. 적색농민조합건설준비위원회는 농민운동의 지도 기관으로서 전라남도 각 군에 걸쳐 혁명적 농민조합을 건설하고, 농촌 각지에 농민반·청년반·소년반을 결성한 후 이들 각 반을 면 단위로 통합하여 각 군의 혁명적 농민조합의 지부로 삼는다는 목표를 지니고 있었다. 오문현은 자신의 고향인 북평면에서 정맹영(鄭孟永) 등 3명을 포섭하여 청년반을 건설하는 등 조직 확대를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34년 2월에 조직 활동이 발각되었고, 1934년 9월 오문현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일로 오문현은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오문현은 1943년 10월 29일 사망하였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오문현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해남항일운동추모비
해남 항일운동 추모비(海南抗日運動追慕碑)는 해남군 해남읍 신안리에 있다.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가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3년 7월 9일 해남항일독립운동희생자추모사업회가 건립하였다. 해남 항일운동 추모비는 ‘해남 항일운동 추모비’ 글자가 새겨진 비석[높이 6m] 1개와 1592~1945년까지 왜군들의 침략에 맞서 투쟁한 순국열사와 애국지사의 이름이 새겨진 와비 2개가 있다. 글은 모두 한글로 새겨져 있다. 해남 항일운동 추모비는 해남 지역에서 임진왜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우며 순국·참살·옥사·투옥 등 희생을 치른 325명 선열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기리고자 2013년 7월 9일 건립되었다. 비석에 새겨진 순국열사와 애국지사의 이름은 1592년 임진왜란 구국공신 순국열사 64명, 1597년 정유재란 구국공신 순국열사 18명, 1636년 병자호란 구국공신 순국열사 13명, 1890~1894년 동학농민혁명군 참형 희생자 66명, 1909년 심적암 항일 투쟁 희생자 54명, 1919년 기미 3·1 독립 만세 사건 희생자 75명, 1934~1936년 호남 최대의 독립운동 단체인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관련 애국지사 21명,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 사건 관련 애국지사 14명이 한글로 새겨져 있다. 해남 항일운동 합동 추모제는 2007년 3월 1일부터 매년 개최되고 있다.
조준기 기적비
조준기(1890 - 1929)는 1920년 능주 청년회 창립을 위한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921년에는 능주 청년회 회장에 선출되어 계몽 운동을 벌였다. 이후 광주로 이주한 뒤, 1924년 7월 민족 차별 교육에 반대하여 동맹 휴학을 벌인 광주 고등 보통학교 학생들이 무기 정학 처분을 받자 그 수습을 위한 도민 대회 준비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아울러 민립 대학 설립 기성회 발기인[1923], 광주 소작인 연합회 집행 위원[1924], 광주 노동 공제회 집행 위원 및 전라 노농 연맹회 전형 위원[1925] 등으로 활동하며 농민 운동과 노동 운동에 참여하였다. 1926년 3월경에는 일제 타도를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 공산당에 김재중(金載中)·정흥모(鄭洪模)·최안섭(崔安燮)·최일봉(崔一峰) 등과 함께 가입하여 광주 지역 야체이카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같은 해 7월 체포되어 종로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았다. 조준기는 1928년 2월 경성 지방 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2005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