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국내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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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의성경찰서
이곳은 일제강점기 의성경찰서가 있었던 곳이다. 3.1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의성농우회를 조직하여 농촌 계몽 운동으로 민족 독립의 방안을 모색한 농촌 계몽가 등 일제에 항거한 애국지사들은 의성경찰서에서 갖은 고문과 수난을 당하였다.특히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평양에서 의성으로 압송되어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앙의 양심을 지키고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끝까지 일제에 저항했던 주기철 목사, 의성 춘산면 지역 목회 중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순교한 권중하 전도사 등이 이곳에서 박해를 당하였다.
대구남산교회
대구남산교회 내에는 여러 독립운동 사적이 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기쁜 소식을 널리 알렸던 남산교회의 종과 더불어,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백남채 장로, 김태련 장로, 김용해 성도, 이만집 목사의 부조가 있다.
정병욱 집(윤동주 유고 보존)
전라남도 광양에 있는 정병욱의 집이다. 이곳은 윤동주 시인의 원고를 해방 후까지 보관하였던 곳이다. <서시>, <별헤는 밤> 등의 시를 발표하며 항일 정신을 고취하였던 윤동주(1917~1945)는 1941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였고, 그의 원고를 친우인 정병욱(1922~1982)에게 맡겨 이곳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1944년 1월,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일제는 조선인 청년 학도들까지 전쟁터로 내몰았고 이때 군에 징집되는 정병욱은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유고 보존을 부탁하였다. 집의 나무 마루 밑에 원고를 보관하고 다른 물건을 올려두어 원고를 은닉하였다가 마침내 광복 후 1948년 시집이 간행되었다.
최인규 순교비
최인규 권사(1881~1942)는 강원도 삼척군 북삼면(현 동해시)에서 태어났다. 마흔 살이 된 1920년, 마을에 찾아온 서양인 선교사의 헌신에 감동을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최인규 권사는 1933년 당시 교역자가 없었던 천곡교회를 이끌기 위하여 가족과 함께 샘실마을(천곡동)로 이주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극성을 부리던 시기가 오자, 최인규 권사와 천곡교회 사람들은 ‘신사참배는 곧 우상숭배’라며 신사참배에 동참하지 않았다. 감리교단은 이미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인정해 받아들였지만 그는 이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신사참배는 물론 창씨개명과 동방요배 등 일제의 모든 압박을 거부하며 믿음을 지켰다. 결국 최인규 권사는 신사참배 거부 주동자로 몰려 1940년 5월 구속되었다. 온갖 고문에도 굴하지 않자 일제는 그에게 창피를 주기 위해 똥지게를 지고 마을을 돌게 하였으나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라는 그의 신념은 바뀌지 않았다. 함흥에서 열린 재판에서도 최인규 권사는 “신사참배는 절대 할 수 없다. 예수를 박해하던 로마도 망했다. 일본도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호통을 쳤고, 결국 2년형을 받았다. 1941년 사상범을 수감하는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고, 이곳에서도 끈질긴 회유가 이어졌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같이 수감되어 있던 어느 목사가 “일단 신사참배하겠다고 말하고 나가라”고 조언하자 최 권사는 ”당신이 목사인 줄 알았는데...“라며 돌아앉아 다시는 마주보지 않을 정도로 확고한 믿음을 지켰다. 결국 계속되는 고문에 1942년 12월 16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천곡교회는 1943년 최인규 권사가 순교한 후 일제의 강압과 주민들의 이주 등으로 인해 문을 닫았다. 대전 인근 야산에 가매장되었던 최인규 권사의 유해는 해방 후에야 친척의 손에 의해 고향으로 옮겨질 수 있었다. 1947년 3월에는 삼척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인 삼척제일교회 마당에 인근 7개 지역 교회가 함께 순교기념비를 세웠다. 또 1986년 11월에는 최인규 권사의 유해를 새로 복원한 천곡교회 마당으로 옮겼고, 순교기념비를 새로 세웠다. 최인규 권사의 순교기념비는 삼척제일교회와 천곡교회 두 곳에 세워져 있다.
한규설 묘
한규설(1848~1930)은 1896년 독립협회가 결성되자 활동에 호의적 태도를 취하였으며, 1898년에는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의 열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중추원 의장으로 임명되고, 다시 법부대신으로서 고등재판소 재판장을 겸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정부의 탄압으로 독립협회가 해산당하게 되면서 본직에서 해임되었다. 1901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이어 이듬해 다시 법부대신에 임명되었다가, 의정부 찬정을 거쳐 1905년 의정부참정대신이 되어 내각을 조각하였다. 그런데 당시 일제가 전권대사 이토[伊藤博文]를 앞세워 을사조약을 체결하려 하자 끝까지 앞장서서 반대하였다. 이에 일제는 갖은 협박을 가했으나 뜻을 굽히지 않자 결국 대궐 수옥헌(漱玉軒) 골방에 감금하고 본관(本官)을 면직시켰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곧 징계에서 풀려나 중추원 고문·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일제가 강제로 국권 피탈 후에 남작의 작위가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이후 칩거생활을 하다가 1920년 이상재(李商在)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를 창립하였으며, 그 뒤 민립대학기성회로 발전시켰다.
성우경 묘
성우경(1842~1916)은 1898년과 1904년 두 차례에 걸친 시흥농민운동을 주도하였다. 시흥농민운동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시흥군 관리들의 탐학과 가렴주구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의 반란이었다. 제1차 시흥농민운동은 1898년(고종 35) 음력 7월 9일 시흥 읍내[현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서 발발하여 관속배가사 9호가 파괴되고, 집물 등이 파손되었다. 1904년 9월 14일 일어난 제2차 농민 봉기는 개항 이후 열강들의 이권 침탈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일본이 철도 부설을 위해 노역자들을 강제 모집하는 데서 항쟁이 발생되었다. 성우경은 농민측 협상 대표로 선정되어 일본의 내정 간섭으로 더욱 심각해진 부역 모집에 강력하게 항의하였고, 농민들을 규합하여 관공서 등을 공격하였다. 제1차 시흥농민운동 결과 성우경과 아전배 3인이 구속되었고, 시흥 한천변[현 광명시 소하동]에서 벌어진 제2차 항거에서는 수천 명이 운집한 결과 일본인 2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당하였다.
변영로 묘
변영로(1898~1961)는 일제강점기 부천 지역에서 활동한 문학가이다. 1919년 3·1운동 때는 YMCA의 구석진 방에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가며 「독립선언문」을 영역하여 해외로 발송하는 일을 하였다. 1920년 『폐허』 동인(同人)으로 활약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1922년 이후 『개벽』지를 통해 해학이 넘치는 수필을 발표하였으며, 발자크의 작품 등 해외 문학을 국내에 번역·소개하였다. 1924년 일제 식민지 지배하의 민족적 울분을 노래한 시집 『조선의 마음』을 출간하였고, 1927년에는 백두산을 여행한 후 「두만강 상류를 끼고 가며」, 「정계비」, 「천지(天池) 가에 누워」 등 10여 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1931년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산호세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33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신가정』 주간으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신가정』 표지에 손기정 선수의 다리만을 게재하고 ‘조선의 건각’이라는 제목을 붙이는 등 일본 총독부의 비위를 건드려, 결국 일본 총독부의 압력으로 동아일보사를 떠나야만 했다. 광복 후인 1946년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이후 서울신문사 이사, 대한공론사 이사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초대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1년 3월 14일 인후암으로 별세하였다. 변영로는 친일 문학 연구가 임종국에 의해 “일제강점기의 지식인 중 지조를 지킨 몇 안 되는 문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일제의 탄압에도 굽히지 않고 민족의 저항 정신을 노래한 시와 수필을 발표하였다. 1922년 발표한 「논개」는 변영로의 대표적인 시로, 진주성 촉석루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남강으로 떨어져 죽은 논개(論介)의 애국충절을 노래함으로써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한백호 묘
한백호는 1927년 8월 신간회 광주지회에서 각종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신간회 광주지회는 서울특별시 강남구일대를 포괄한 지역에서 1927년 2월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창립한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의 지회이다. 비타협적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연합하여 우경화한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을 배격하고 통일된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신간회가 조직되었다. 전국적으로 150여 개의 지회가 조직되었으며 회원은 4만 여명에 달했다.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일대를 포괄하는 신간회 광주지회는 1927년 8월 24일에 설립되었는데, 회원의 총수는 알 수 없다. 1927년 8월 24일 경기도 광주군 광주읍 남한산소년회관에서 설립대회를 개최하여 회장 한순회(韓順會), 부회장 석혜환(石惠煥), 총무간사 한철기(韓哲基), 유인목(兪仁穆), 허범(許範), 김상환(金尙煥), 한백호(韓百鎬) 등을 선출하였다. 1928년 12월에는 지회장을 석혜환(石惠煥)으로 개선하였으며, 1929년 12월에는 조직 개편에 따라 유인목(兪仁穆)이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1930년 말부터 신간회 해소론이 대두하자 이 해 1월 신간회를 고수하고자 하는 회원들이 광흥(廣興) 지회로 개편하고자 하였으나 경찰에 의해 금지되었고,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소되면서 지회도 소멸하였다.
고영근 묘
고영근(출생, 사망 미정)은 개항기 때,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며 정부에게 개혁을 요구하는 개혁개방운동을 전개한 관리 · 독립운동가이다. 1898년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 가담하여, 근대개화 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여러 차례에 걸쳐 독립협회의 총대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에서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또한, 이무렵 독립협회에서 선거한 중추원의관 17명 중의 한 사람으로 뽑히기도 하였으며, 독립협회 부회장을 맡는 등 독립협회 중심 인물로 활약했다. 1898년 11월부터 12월에 걸쳐 개최된 만민공동회를 대표하여 5흉을 재판에 회부할 것, 대신을 가려 쓸 것, 헌의6조를 시행할 것 등을 요구하는 상소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민권운동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1898년 12월 고종과 수구파 대신들은 만민공동회의 금지를 명하는 조칙과 함께 시위대와 보부상을 동원하여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에 대하여 기습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인 집에 피신하면서 만민공동회의 활로를 모색하였다. 1899년 1월 만민공동회 대표 자격으로 독립협회 대표인 윤치호(尹致昊)와 함께 사후대책을 협의하는 한편, 어려운 처지에 있던 만민공동회의 재정 문제 해결에 힘을 쏟았다. 5월 최정덕(崔廷德)·현제창(玄濟昶)·윤병길(尹炳吉) 등과 함께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다시 설립하려는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3년 12월 윤효정(尹孝定)과 협력하여, 명성황후 살해에 가담하였다가 아관파천으로 일본에 망명 중이던 우범선(禹範善)을 처단하였다.
윤효정 묘
윤효정(1858~1939)은 일제강점기 독립협회 간부, 대한협회 총무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이후 탁지부주사로 근무하였고, 1898년 독립협회 간부로 활동할 때 고종양위음모사건에 관련되어 일본 거류지에 숨어 있다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후 고베[神戶]에 머물며 박영효(朴泳孝) · 우범선(禹範善) 등과 조일의숙(朝日義塾)을 세워 우리나라 유학생을 수용하였다. 우범선과 사귀는 동안 우범선이 을미사변의 관련자라는 것을 알고, 민비의 원수를 갚으려고 고영근(高永根) 등을 시켜 우범선을 죽였다. 귀국하여 1905년 이준(李準) · 양한묵(梁漢默) 등과 헌정연구회를 조직, 의회를 중심으로 한 입헌정치 체제를 목적하였다. 1906년 장지연(張志淵) 등과 헌정연구회를 토대로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였다. 이 회는 민중을 기반으로 애국 인사를 포섭, 교육 확장과 산업 개발을 통한 한국의 자강독립을 목적으로 한 단체로서, 전국에 25개 지부를 설치하였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고종이 퇴위당하자 반대 운동을 전개하다가 해산당하였다. 이에 장지연 · 오세창(吳世昌) · 권동진(權東鎭) · 유근(柳瑾) 등과 대한협회를 조직하여 대한자강회 사업을 계승하였다. 대한협회의 총무로서 이 회의 기관지인 『대한협회회보』 · 『대한민보』를 간행하여 일제의 통감정치와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를 규탄, 공격하였다. 1908년 전국에 60여 지부를 결성하였으며, 회원이 수만 명에 이르는 등 강력한 애국단체로 성장하였다. 1907년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차용한 금액이 1300만원의 거액에 달하자, 일제에 의한 경제적 예속이 주권 상실의 근본임을 판단하고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강점되자 창신동에 숨어 살았다. 1919년 3 · 1운동 후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강원도 철원군으로 옮겼고, 1924년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용암리로 이사하였다. 1931년부터 『동아일보』에 「풍운한말비사」를 연재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홍만자회(紅卍字會) 한국 지부의 일을 맡아 보았다.
나상필 묘
나상필(1884~1940)은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내 군자금 모금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음력 7월경 서울 창성동에서 임시정부로부터 밀파된 요원 정상섭(鄭祥燮)을 만나 군자금 모집방법을 협의하였다. 그 결과 충남 논산으로 내려가 그 곳에 있던 윤교병(尹喬炳)과 함께 군자금 모집방안을 상의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논산군 노성면 병사리의 윤교병과 합류한 뒤 군자금 모집에 착수하였다. 1919년 음력 11월경 윤교병과 함께 논산군 논산면에 거주하는 윤일병(尹一炳)으로부터 100원을 모금하였고, 1920년 3·4월에도 2회에 걸쳐 역시 윤일병으로부터 260원을 모금하였다. 1920년 음력 4·5월경에는 윤교병과 함께 논산군 노성면 죽촌리 거주 윤임중(尹任重)으로부터 350원을 모금하였다. 이어 같은 해 음력 6월경 윤교병과 함께 경북 봉화군 법전면 척곡리의 강창문(姜聞昌)을 찾아가 이시영(李始榮)이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독립운동에 매진하고 있는 사실을 알리고 군자금을 요청하여 그로부터 40원을 모금하였다. 같은 해 7월경에는 윤교병과 함께 충남 보령군 미산면 용수리의 이시우(李是雨)로부터 40원을 모금하는 등 1919년 말부터 1920년 7월까지 전후 6회에 걸쳐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1921년 10월 28일 소위 제령 7호 위반으로 징역 4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내홍 묘
박내홍(1894~1928)은 서울 사람이다. 1920년대 천도교청년당과 천도교청년동맹 등을 결성하면서 천도교의 청년운동을 지도하는 한편 신간회 발기인으로 활약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천도교에서는 3·1운동 이후 천도교의 조직을 쇄신하면서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천도교청년당과 천도교청년동맹 등을 조직해 갔는데 이 때 그는 천도교내 젊은 지도자로써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1926년 6·10만세운동이 일어날 때 천도교측의 실무담당자 박내원(朴來源)을 후원하면서 만세운동의 조직과 자금에 대한 지원활동을 벌였다. 천도교 교주 박인호(朴寅浩)의 아들이기도 한 그는 천도교측의 6·10만세운동 계획이 사전 발각되어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으나, 조선공산당과 협동전선을 형성하여 추진해 갔던 6·10만세운동에서 그는 배후 지원의 역할을 맡았다. 당시 천도교는 6·10만세운동에 필요한 전국의 조직망과 격문 인쇄 등을 맡는 등 만세운동의 대중 확산에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발각 후 천도교측에서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천도교 지도층의 6·10만세운동 관여사실을 숨겼으나, 실은 박내홍을 비롯하여 천도교 구파의 지도자인 권동진(權東鎭)·이종린(李鍾麟)·박인호 등이 배후에 깊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천도교측의 인사들이 이러한 비밀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일제의 검거망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1927년 민족협동전선체로서 신간회가 창립될 때 천도교 지도자들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신간회 결성에 크게 힘을 쏟았다. 신간회 창립 간사의 일을 맡았던 그는 1928년 10월 5일 경운동 천도교회 사무실에서 단도를 든 괴한 서을봉에 피습당하여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