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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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항일사적비
1921년 8월 추기 석전대제 시, 일제가 제주를 밀주로 봉인하자 보성유림이 일제에 항거한 투쟁사를 기록한 비다. 여기서 가리키는 보성향교 제주조난사건은 1921년 8월, 문묘대제에 헌작하기 위해 빚어놓은 신성한 제주를 주세령 위반인 불법밀조주라는 명분으로 일본 재무주임이 봉인 압수한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투철한 항일 운동을 통해 마침내 전국 향교에서는 관례대로 제주를 빚어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1934. 6. 22. 주세령이 개정되는 등 보성향교의 창의 정신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박창규 추모비
박창규(1880~1973)는 전남 보성(寶城) 사람이다. 일제는 1931년 만주를 침략하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도발하면서 한국을 전쟁수행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고 인적·물적자원을 강제로 수탈하는 한편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우며 창씨개명(創氏改名),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요 등 한민족말살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고향인 전남 보성군에서 기독교 교회 전도사로 있던 그는 1940년 4월 신도 30여명에게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참배는 우상을 숭배하도록 하여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를 강력히 거부해야 한다는 내용의 설교를 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는 이일로 인하여 소위 일황불경죄 및 일본국체변혁 선동혐의로 일경에 붙잡혀 1942년 9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 마을(추동마을)
추동마을 출신 독립운동가의 공훈을 기리고자 건립된 안내판이다. 박병두(1883~1936)는 전남 순천 사람이다. 그는 전남 순천군(順天郡) 서면청년회(西面靑年會) 부회장, 순천군농민연합(順天郡農民聯合) 집행위원 등으로 농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그는 친일적 지주의 고율소작료 부과 및 소작권 이동에 시달리는 농민들을 위해 소작쟁의를 주도하였다. 그리고 여수(麗水)·광양(光陽)·보성군(寶城郡)의 농민운동 지도자들과 연계하여 남선농민연맹(南鮮農民聯盟)을 조직하고 선전부 위원 및 상무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순천 지역 농민·청년운동을 주도하다가 1924년 일경에 체포되어 상당한 기간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이 결성될 때 참가하여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5년 순천군수가 향교 토지에 무리한 소작료를 징수하고, 일제의 농업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농민들에게 횡포를 부리자 농민들을 이끌고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무렵 박병두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가입하여 순천지역 책임자로 일제의 지배체제를 배척하고 항일의식을 고취하다가 1926년 6월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1930년부터 1932년까지 전남순천농민조합(全南順天農民組合) 위원장을 맡아 항일농민운동을 주도하다가 두 차례 검거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기칠 집
김기칠(1907~1965)은 1944년 6월 상순 하동순호(河東淳浩), 동년 4월 14일 광산치홍(光山治洪), 동년 9월 1일 박성춘근(朴城春根) 등에게 “일본이 점령한 싱가폴을 미영군이 재탈환하여 일본군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조선에서 지원병제를 선포하고 훈련을 시키고 있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징병제를 선포할 것이며 싱가폴을 재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조선인과 일본인은 전쟁 중에 있으며 기회가 오면 일본인에게 역습을 가하고 죽창 등을 갖고 관청을 습격해야 한다”는 등의 말을 유포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또한 1944년 10월 9일에는 전남 화순군(和順郡) 도암면(道岩面) 원천리(源泉里)에서 일본의 패전에 대한 시국담과 징병제에 대한 문제를 주위 사람에게 유포하였다. 이로 인해 김기칠은 일경에 체포되어 1945년 3월 8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육해군형법 위반 및 조선임시보안령 위반 등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 마을(죽림마을)
죽림마을 출신 독립운동가의 공훈을 기리고자 건립된 안내판이다. 조기섭(趙璣燮,1858~1958)은 최익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던 임병찬은 1912년 광무황제의 밀칙을 받고 1914년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하여 일본의 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 및 주요 관리들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보내어 한국 강점의 부당성을 깨우치고, 대규모 의병전쟁을 준비하였다. 이때 조기섭은 대한독립의군부가 세워졌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임병찬과 함께 뜻을 같이 하고자 결의하고 대한독립의군부 순천군 대표를 맡아 활동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서태석 농민항쟁사적비
서태석(1884~1943)은 전남 무안 사람으로, 신안군(新鮟郡) 암태소작회(岩泰小作會) 회장과 조선농민총동맹(朝鮮農民總同盟)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으로 활동하였다. 서태석은 1920년 3월 28일에 전남(全南) 목포(木浦)에서 표성천으로부터 태극기와 대한독립을 촉구하는 격문 200여 매를 전달 받고, 이를 이튿날 29일 밤에 송도공원(松島公園) 및 철도정거장 등지에서 붙이거나 배부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이 일로 인해 서태석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1920년 12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후 서태석은 1923년부터 농민운동에 참여하여, 암태소작회 회장으로서 부당한 소작료율 개선을 위해 소작투쟁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1924년 4월 전조선노동대회(全朝鮮勞動大會)에 참석차 상경하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차단되었다. 이 일로 서태석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1925년 3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후 서태석은 1926년 말 조선공산당(춘경원당)에 입당하여, 전라도 대표 및 선전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 1927년 9월 9일 조선농민총동맹(朝鮮農民總同盟)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으로 활동하다가 1928년 4월 붙잡혀 1930년 5월 1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서태석 추모비
서태석(1884~1943)은 전남 무안 사람으로, 신안군(新鮟郡) 암태소작회(岩泰小作會) 회장과 조선농민총동맹(朝鮮農民總同盟)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으로 활동하였다. 서태석은 1920년 3월 28일에 전남(全南) 목포(木浦)에서 표성천으로부터 태극기와 대한독립을 촉구하는 격문 200여 매를 전달 받고, 이를 이튿날 29일 밤에 송도공원(松島公園) 및 철도정거장 등지에서 붙이거나 배부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이 일로 인해 서태석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1920년 12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후 서태석은 1923년부터 농민운동에 참여하여, 암태소작회 회장으로서 부당한 소작료율 개선을 위해 소작투쟁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1924년 4월 전조선노동대회(全朝鮮勞動大會)에 참석차 상경하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차단되었다. 이 일로 서태석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1925년 3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후 서태석은 1926년 말 조선공산당(춘경원당)에 입당하여, 전라도 대표 및 선전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 1927년 9월 9일 조선농민총동맹(朝鮮農民總同盟)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으로 활동하다가 1928년 4월 붙잡혀 1930년 5월 1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하의3도 농민운동기념탑
조선후기부터 해방까지 360년간 하의 3도(하의, 상태, 하태)의 농민들의 토지탈환을 위한 역사를 기념하기 위하여 2004년 11월에 하의3도 농민운동에 참여한 인물들의 고귀한 뜻을 기려 하의3도 도민들이 본 탑을 건립하였다. 서남해 대부분의 섬들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정부의 공도(空島)정책에 의해 사람이 거의 살지 않다가 임란 이후 사람들의 이주가 이루어지면서 토지의 개간이 시작되었다. 원래 조선시대 미개간지는 개간한 사람이 토지의 소유권을 갖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서남해 연안에서 이미 개간되고 있던 많은 토지를 국왕으로부터 사패(賜牌)받아 그 소유권을 빼앗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선조의 딸 정명공주가 홍씨가에 혼인하게 되면서 하의3도의 개간된 땅 24결을 홍씨가문에서 독점하였다. 한말에 이르러 그 토지는 홍씨가에서 내장원으로, 내장원에서 다시 홍씨가로, 그리고 결국 일본인 우근권좌위문(右近勸左衛門)에게, 그리고 다시 덕전미칠(德田彌七)에게 넘어갔다. 그 과정에서 하의3도민들은 끈질기게 저항하며 도세 혹은 도전의 납부를 거부하고, 각종 소송을 통하여, 그리고 농민조합 등을 통하여 이에 저항하였다. 결국 해방 후인 1950년 국회의 유상반환 결정으로 1956년에야 비로소 농지상환조치가 이루어졌다. 3백여년에 걸친 하의3도민의 이러한 저항운동은 한국사에서 토지문제를 둘러싼 농민들의 항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다.
주재연 기념관
주재연(1929~1945)은 1943년 3월 여수군 돌산면 공립국민학교 제6학년을 졸업하고 집안일을 돕고 있었다. 그는 국민학교 시절부터 항일의식이 투철했다. 1942년 음력 12월 초순경, 그의 형 재연(在淵)의 나병을 치료하기 위해 와 있던 일본인 산원낙섭(山元洛燮)로부터 '대동아전쟁이 장기화되면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은 미국 등의 힘을 빌려 독립해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 1943년 9월 초순경, 여수에서 조국독립의 실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말을 유포하였다. 그리고 동년 9월 23, 24일경, 나무하러 가는 도중 돌산면(突山面) 율림리(栗林里)로 가는 도로 민가 목화밭 담장에 '조선일본별국(朝鮮日本別國)', '일본(日本)놈 져라', '조선만세(朝鮮萬歲)', '조선지광(朝鮮之光)'이라는 글자를 새겼다가 사흘 만에 여수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때 일제는 경비정 7~8척과 경찰 100여 명을 동원해 경적을 울리며 온 마을을 수색했으나 범인을 잡지 못하였다. 이에 주민들을 모아놓고 마을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자 자수했다고 한다. 주재연은 1944년 1월 21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4년을 받아 풀려났으나 고문의 휴유증으로 이듬해에 숨졌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주재연 묘
주재연(1929~1945)은 1943년 3월 여수군 돌산면 공립국민학교 제6학년을 졸업하고 집안일을 돕고 있었다. 그는 국민학교 시절부터 항일의식이 투철했다. 1942년 음력 12월 초순경, 그의 형 재연(在淵)의 나병을 치료하기 위해 와 있던 일본인 산원낙섭(山元洛燮)로부터 '대동아전쟁이 장기화되면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은 미국 등의 힘을 빌려 독립해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 1943년 9월 초순경, 여수에서 조국독립의 실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말을 유포하였다. 그리고 동년 9월 23, 24일경, 나무하러 가는 도중 돌산면(突山面) 율림리(栗林里)로 가는 도로 민가 목화밭 담장에 '조선일본별국(朝鮮日本別國)', '일본(日本)놈 져라', '조선만세(朝鮮萬歲)', '조선지광(朝鮮之光)'이라는 글자를 새겼다가 사흘 만에 여수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때 일제는 경비정 7~8척과 경찰 100여 명을 동원해 경적을 울리며 온 마을을 수색했으나 범인을 잡지 못하였다. 이에 주민들을 모아놓고 마을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자 자수했다고 한다. 주재연은 1944년 1월 21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4년을 받아 풀려났으나 고문의 휴유증으로 이듬해에 숨졌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손연준 순교기념비
손연준(1902~1950)은 손양원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으며, 경남 함안(咸安) 사람이다. 기독교 목회자로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반대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1915년 칠원보통학교 재학시절부터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며, 1919년 3·1운동 때에서는 서울의 중동학교 재학 중 만세시위에 참가했다가 퇴학을 당하였다. 이후 신학교(神學校)에 진학한 그는 신학교 졸업반 때인 1938년 기독교계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여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벌이기로 의지를 굳혀 갔다. 졸업 후 그는 전남 여수(麗水)의 나병환자 요양소인 애양원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강연이나 회의 석상에서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토로하고 일제가 패망할 것이라는 내용을 연설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던 중 1940년 9월 25일 일경에 붙잡혀 1941년 11월 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여수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여수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은 여수시가 일제강점기에 광복을 위해 투쟁하다 순국한 지역 출신 독립유공자 40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4년 3월 1일, 여수 웅천 하나로공원에 건립하였다. '불멸의 비상'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기념탑은 높이 17m 규모로 승리(Victory)의 영문 V자와 3.1독립운동의 '만세', 여수반도 지형의 '나비'를 상징하는 세 가지 형상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