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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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기념탑
항일운동기념탑은 1898년 동래부학교로 개교한 이래 일제강점기에 동래지역 3.1운동을 비롯하여 부산항일학생의거(일명 노다이사건)등 무려 10여차례 항일민족운동을 주도하고 그 선봉에 섰던 동래고 출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이를 애국 애족 애교 봉사의 동고정신과 신종여시의 동고교풍으로 승화시켜 만세에 길이 전하고자 전 동문의 성금과 동래기영회, 부산광역시, 부산광역시교육청의 찬조금으로 개교100주년을 앞두고 제34회 동고의 날에 즈음하여 1995년 11월 4일에 건립되었다.
부산광복기념관
부산 광복 기념관은 1876년 부산항 개항 이후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의 일본의 침략상과 부산 지역의 항일 독립 투쟁에 관한 역사적 유물을 전시함으로써, 선인들의 민족정신과 광복 활동을 기려 전승하고, 후손들에게 올바른 국가관을 세워 주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1997년 8월 15일 기본 계획을 구상하여, 1998년 2월 12일 설계 현상 공모 당선작을 결정하고, 9월 12일 기본 및 실시 계획을 완료하였다. 1999년 6월 6일 준공하여, 2000년 1월 1일부터 부산광역시 시설 공단에서 수탁 관리하게 되었다. 2000년 8월 15일 광복절 제55주년을 맞이하여 부산 광복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1층에는 사무실과 안내실, 로비가 있고, 2층에는 로비와 전시관이 있다. 전시실은 ‘개항과 부산인의 독립 정신’, ‘애국 계몽 운동의 전개’, ‘3·1 운동’, ‘일신 여학교의 독립운동’, ‘1920~1930년대 노동 운동의 전개’, ‘일제 말기 학생들의 독립운동’, ‘사회 문화 운동’, ‘광복의 환희’ 등 총 8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실제 의병장이 사용한 장총 등의 유물과 다양한 사진 자료, 디오라마 등을 통해 부산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항일 독립운동의 실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하 1층에는 주말에 영화 상영이 이루어지는 홍보관[120석 규모]이 있다. 2007년에 순국선열과 애국 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설치된 위패 봉안소에는 2012년 11월 현재, 순국선열 지사 39위, 외국 지사 355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최천택 기념비
최천택(1897-1962)은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언론인이다. 1896년 6월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서 2대 독자로 태어났다. 부산공립상업학교 2학년 때인 1912년 당시 금서였던 『동국 역사(東國歷史)』를 절친한 학우들인 박재혁(朴載赫)·김병태(金鉼泰)·김흥규(金興奎)와 돌려 가며 읽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돌린 것이 발각되어 10여 일간 구속되었다. 윤독회를 통해 결속을 다진 학우들과 함께 북로 군정서의 국내 연락을 담당하고 유사시 항일 비밀 결사대로 전환한다는 목적 아래 1913년 비밀 결사인 구세단(救世團)을 조직하였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과거 구세단 동지를 통해서 정보를 입수하여 울산, 경주, 포항 등지에 3·1 운동 상황을 알렸다. 부산에서 다시 시위를 일으키기 위해 서울에서 지하 신문으로 발행되던 『독립신문』을 등사해 집집마다 뿌리면서 3·1 운동을 다시 선동하였다. 또 1920년 과거 구세단의 동지였던 의열단원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파 사건을 함께 모의하였으며, 1920년 12월 최수봉(崔壽鳳)의 밀양경찰서 폭파 사건과 1923년 강홍렬의 의열단 군자금 모집 사건에도 연루되어 일본 경찰의 혹독한 취조에 시달렸다. 이와 같이 최천택은 의열단원의 국내 활동에 상당한 연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1920년 부산청년회가 결성되었을 때 부산진구락부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1921년 8월 노동자들의 주택 문제를 해결하고자 백산상회의 안희제(安熙濟)와 김철수(金喆壽)[해방 후 경남도지사] 등과 함께 주택 구제 부산 시민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일본으로 건너가는 도항민(渡航民)을 위한 권익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24년에는 김국태와 시대일보사 부산지국을 설치해 언론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친일 종교 단체인 보천교(普天敎)에서 시대일보사를 인수하려 하자 전국 지국의 단결을 조성하여 이를 무산시켰다. 청년 운동 단체의 통일이 시도되면서 부산에서 부산청년연맹과 부산부청년연맹이 대립할 때, 최천택은 노건상 그룹의 부산청년연맹에서 집행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부산의 청년 단체들이 단일의 부산청년동맹으로 통일될 때 최천택은 30세가 넘은 나이 때문에 활동 공간을 신간회(新幹會)로 옮겼다. 1927년 7월 신간회 부산지회가 결성되었을 때 상무 간사로 활동하면서, 1928년 부산보통학교 일본인 교사의 여학생 능욕 사건에 대한 규탄 대회에 앞장섰다. 1929년 2월 신간회 부산지회장이 된 후, 11월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나자 부산제2상업학교 학생들과 접촉하며 시위를 확산시키려 하였다. 이후 신간회 해소론이 등장할 때까지 신간회 부산지회의 회보 발간, 신간회 경남연합회 발기 등을 추진하였다. 1941년에는 장건상(張建相) 해외 탈출 사건과 소설가 김동리(金東里)의 형인 김범부(金凡夫)의 해인사(海印寺)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해방 후에도 왕성하게 사회 활동을 하였다. 1946년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 경남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며, 1948년 민주중보사의 사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 5월 2대 제헌 의원 선거 때 부산시 동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혁신 성향의 장건상 선거 본부의 사무장을 맡아 당선시켰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좌익계로 분류되어 해방 직후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남위원장이었던 김동산(金東山)과 함께 육군 특무대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6·25 전쟁 이후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을 사수하다 전사한 정발(鄭撥) 장군의 정공단(鄭公壇)을 개수하고 봉제(奉祭)하면서 자유당 정권의 붕괴를 지켜보았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혁신동지총연맹의 최고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부산시 동구 을구에 출마하였으나 혁신계의 난립으로 낙선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군사 정권이 들어서자 서면 육군형무소에서 수개월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육군형무소에서의 후유증 때문인지 1961년 11월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자택에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2003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차미리사 흉상
차미리사(1880 - 1955)는 일제강점기 근화여학교 교장, 근화학원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여성운동가이다. 본관은 연안(延安). 경기도 고양 출신. 미리사는 세례명이다. 남편이 죽은 뒤 기독교에 입교, 미국인 여선교사를 통하여 선진국의 실정 및 여성의 사회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1년 여선교사의 알선으로 중국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되어 인천에서 떠나는 중국 화물선에 몸을 숨겨 상하이[上海]로 출국한 뒤 쑤저우[蘇州]에 있는 버지니아여학교에 입학하였다. 1905년에 졸업하고 양주삼(梁柱三)과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기울어가는 국운을 만회하기 위하여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등 여러 활동을 하였다. 그 뒤 캔자스(Kansas) 주의 더스칼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1917년 미국 선교회에서 한국으로 파견하는 선교사 8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귀국하였다. 귀국과 동시에 배화여학교(培花女學校)의 교사와 기숙사 사감에 취임하였고, 1919년 3·1운동 때는 국내외 비밀 연락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3·1운동 이후 종교교회(宗橋敎會)에 여자 야학강습소를 설치, 여성을 대상으로 한 문맹퇴치와 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0년 조선여자교육협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순회여자강연단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계몽강연을 실시하였다. 이때 4개월간 73개소에서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웠으며, 1921년 10월 강연회에서 얻은 찬조금으로 근화여학교(槿花女學校)를 설립, 교장에 취임하였다. 1934년 2월 안국동에 재단법인 근화학원(槿花學園)을 설립하여 재단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그 뒤 ‘근화’라는 명칭이 무궁화를 상징한다는 일제의 시비에 따라 명칭을 덕성학원(德成學園)으로 바꾸었다. 광복이 되자 그 동안 계획해 왔던 여성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추진, 1950년 덕성여자초급대학(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을 설립하였고, 그 뒤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2002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함석헌 기념관
함석헌(1901 - 1989)은 해방 이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인간혁명』, 『역사와 민족』 등을 저술한 작가. 문필가, 민중운동가이다.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內村鑑三)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金敎臣)·송두용(宋斗用)·정상훈(鄭相勳) 등과 함께 무교회주의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 1927년 동인지 ≪성서조선 聖書朝鮮≫ 창간에 참여하여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 4월 귀국하여 모교인 오산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가 1938년 3월 사임하였다. 1940년 송산(松山)에서 김혁(金赫)이 운영하는 송산학원을 경영하다가 계우회사건(鷄友會事件)에 연루되어 대동경찰서에서 1년간 구류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 ≪성서조선≫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1년간을 서대문경찰서에서 미결수로 복역하였다. 1947년 3월 월남하여 YMCA에서 성서강해를 계속하였다. 1956년부터 ≪사상계≫에 자신의 글을 발표하면서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을 기탄없이 비판하였고,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면서 자유당정권에 도전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에는 ‘5·16을 어떻게 볼까’로 군사혁명정권에 도전하였다. 1962년 미국무성 초청으로 방미하였을 때 퀘이커교(Quaker敎)와의 친밀관계를 굳혔다. 1967년 장준하(張俊河)의 국회의원 옥중출마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1970년 4월≪씨ᄋᆞᆯ의 소리≫를 창간하였고, 민중운동을 전개하면서 반독재민주화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주요저서로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1948)·≪인간혁명≫(1961)·≪역사와 민족≫(1964)·≪뜻으로 본 한국역사≫(1967)·≪통일의 길≫(1984) 등이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법린 묘
김법린(1899 - 1964)은 해방 이후 제3대 민의원, 원자력원장, 동국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한 승려. 독립운동가, 정치인, 학자이다. 경상북도 영천 출신. 필명은 철아(鐵啞), 호는 범산(梵山)이다. 14세에 출가하여 1915년 동래 범어사(梵魚寺)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3 · 1운동 때 영남의 불교계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1920년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을 졸업하였으며, 이듬해 프랑스로 건너가서 1926년 파리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28년 백성욱(白性郁) · 김상호(金尙昊) 등과 함께 불교청년회의 중흥을 도모하였고, 1929년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를 개최하였다. 1930년 한용운(韓龍雲)의 뜻을 이어 일제에 대항하는 비밀결사조직인 만당(卍黨)을 결성하였다. 1930년 일본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에서 불교를 연구하였으며, 1931년 동경에서 조선청년동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다. 1933년부터는 다솔사(多率寺) · 해인사(海印寺) · 범어사 등의 사찰을 다니면서 불교의 교학을 강의하는 한편, 독립정신의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1938년 만당사건으로 진주에서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흥에서 투옥되었다. 그러나 감옥에서 풀려나와 다시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불교계에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45년 겨울 불교중앙총무위원직을 맡았을 때에는 미군정장관 하지를 만나 일본인 승려들이 머물렀던 사찰을 종단에서 인수할 수 있게끔 협의하는 등, 여러 면에서 불교혁신운동을 벌였으며, 동국학원(東國學院)의 이사장직을 맡아 동국대학교의 발전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1952년 문교부장관에 임명되었고, 1953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제3대 민의원으로 피선되는 등 정치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1959년 원자력원장을 역임하였고, 1962년 동국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3년 동국대학교 총장이 되어 학교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세속을 떠났던 승려의 신분이면서도 독립운동과 정치활동, 교육계의 활동에 주력하였으며, 불교계의 정화와 발전을 위해서 노력을 기울였던 행정가 · 학자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주요논문으로는 「정교분립(政敎分立)에 대하여」 · 「3 · 1운동과 불교」 · 「12인연에 대하여」 등이 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차미리사 묘
차미리사(1880 - 1955)는 일제강점기 근화여학교 교장, 근화학원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여성운동가이다. 본관은 연안(延安). 경기도 고양 출신. 미리사는 세례명이다. 남편이 죽은 뒤 기독교에 입교, 미국인 여선교사를 통하여 선진국의 실정 및 여성의 사회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1년 여선교사의 알선으로 중국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되어 인천에서 떠나는 중국 화물선에 몸을 숨겨 상하이[上海]로 출국한 뒤 쑤저우[蘇州]에 있는 버지니아여학교에 입학하였다. 1905년에 졸업하고 양주삼(梁柱三)과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기울어가는 국운을 만회하기 위하여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등 여러 활동을 하였다. 그 뒤 캔자스(Kansas) 주의 더스칼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1917년 미국 선교회에서 한국으로 파견하는 선교사 8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귀국하였다. 귀국과 동시에 배화여학교(培花女學校)의 교사와 기숙사 사감에 취임하였고, 1919년 3·1운동 때는 국내외 비밀 연락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3·1운동 이후 종교교회(宗橋敎會)에 여자 야학강습소를 설치, 여성을 대상으로 한 문맹퇴치와 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0년 조선여자교육협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순회여자강연단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계몽강연을 실시하였다. 이때 4개월간 73개소에서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웠으며, 1921년 10월 강연회에서 얻은 찬조금으로 근화여학교(槿花女學校)를 설립, 교장에 취임하였다. 1934년 2월 안국동에 재단법인 근화학원(槿花學園)을 설립하여 재단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그 뒤 ‘근화’라는 명칭이 무궁화를 상징한다는 일제의 시비에 따라 명칭을 덕성학원(德成學園)으로 바꾸었다. 광복이 되자 그 동안 계획해 왔던 여성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추진, 1950년 덕성여자초급대학(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을 설립하였고, 그 뒤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2002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충열대
충열대는 일제에게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국내는 물론 중국, 러시아, 미국 등지에서 의병활동과 독립투쟁을 하시다가 돌아가신 후 묘역에 안장된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들과 시신도 없고 후손도 없어서 무후선열제단에 위패로 봉안된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추모하는 제단입니다.
숭실출신 독립유공자 추모비
이 추모비는 일제강점기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숭실대학교 독립유공자를 추모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2020년 10월 숭실대학교 개교 123주년을 맞이하여 건립하였다. 숭실대학교는 1897년 개교 이래 근대 문명 교육을 선도하며 민족의 자주적 근대화와 독립에 앞장섰다. 관서지방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이로 인하여 일제로 부터 '불온사상의 온상'으로 낙인찍혀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숭실대학교 출신의 독립유공자들은 을사늑약 반대, 신민회 및 조선국민회 활동 등을 전개하면서 3.1운동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추모비에 숭실의 독립유공자들이 추구했던 독립의 반석을 형상화하고, 추모벽에 독립유공자를 명각하여 그들의 고귀한 희생정신과 애국혼을 기리고자 한다.
베델 묘,추모비
베델(1872~1909)S는 일제강점기 언론 활동으로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독립운동을 펼친 영국인 독립운동가다. 대한매일신보(현 서울신문)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창간했다.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폭로하고 고종의 밀서를 보도하는 등 일본의 침탈을 국제사회에 고발하는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며 국채보상운동을 지원했다. 베델 선생을 눈엣가시처럼 여긴 일제는 영국에 추방을 요구했다. 추방 소송 중 건강이 악화한 베델 선생은 결국 1909년 5월 1일 37세로 순국, 서울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됐다. 정부는 베델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1950)을 추서했다.
헐버트 묘
헐버트(Hulbert, Homer B)(1863-1949)1863년 1월 26일 미국에서 태어났다. 1886년 내한하여 육영공원에서 외국어를 가르쳤다. 1905년 11월, 고종(高宗)의 비밀 특사로 미국을 방문하여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행정부에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일본의 보호조약 저지를 호소하였으며, 1906년에는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를 위한 고종의 비밀 특사로 임명되었다. 1907년 7월 초 헤이그에서 이상준과 이준, 이위종 특사를 돕고 그달 10일 ‘평화클럽[Peace Club]’에서 일본의 불법성을 폭로하였다.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를 만나기 위해 헤이그를 출발하여 미국에 도착하였는데, 그해 8월에 고종이 퇴위하자 호머 헐버트는 일본의 저지로 미국에 남게 되었다. 그는 1907년부터 1945년까지 38년 동안 미국에서 기고와 강연, 회견 등을 열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19년 미국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서 ‘한국 독립 호소문[What About Korea]’을 제출하여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고 한국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1942년에는 ‘한인자유대회[Korean Liberty Conference]’에서 한국인들의 단결과 대일 투쟁을 호소하였다. 1947년 7월에는 미국 신문 『스프링필드 유니언(Springfield Union)』과의 회견에서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이라고 주장하였고, 한국의 3.1운동은 “세계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애국심의 본보기”라고 설파하였다. 1949년 8월 5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195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순국선열추념탑
순국선열추념탑은 애국지사들과 항일투사들이 가장 많이 옥고를 치른 조국수난의 현장이었던 서대문형무소를 비롯하여 우리 산하와 해외 각처에서 조국 광복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 장열히 순국하신 선열들의 얼을 되새기며 원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서울특별시에서 1992년 8월 15일에 건립하였다. 추념탑의 중앙에는 전국 14개도 전역에서 나타난 우리 민족의 드높은 독립의지와 기상을 상징하고 있는 태극기를 음양각한 조각상이 높이 22.3m로 축조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길이 40m로 독립투쟁의 역사적 활동상을 형상화한 모습이 부조(浮彫)되어 있다. 좌측에는 항일의병무장상, 윤봉길. 이봉창열사 상징상, 독립군의병 순국선열 처형상, 유관순열사 만세운동상이, 우측에는 3.1독립만세상, 안중근의사 이토 히로부미 저격상, 순국선열 의병체포 처형상, 청산리 전투상이 새겨져 있다. 또한 바로 아래의 순국선열추념탑기(殉國先烈追念塔記)에는 일제의 침챡부터 조국독립을 재취하기 위한 우리 선열들의 자주독립 의지와 끊임없이 계속된 항일투쟁사가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