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국내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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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729 건
현진건 집(추정)
현진건(1900 - 1943)은 김동인(金東仁)·염상섭(廉想涉)과 더불어 근대문학 초기에 단편소설 양식을 개척하고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작가이다. 특히 식민지시대의 현실대응 문제를 단편기교와 더불어 탁월하게 양식화한 작가로서 문학사적 위치를 크게 차지하고 있다. 1920년≪개벽 開闢≫에 <희생화 犧牲花>를 발표함으로써 문필 활동을 시작하여 <빈처 貧妻>(1921)로 문명을 얻었다. 1921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함으로써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홍사용(洪思容)·이상화(李相和)·나도향(羅稻香)·박종화(朴鍾和) 등과 함께 ≪백조(白潮≫ 창간동인으로 참여하여 1920년대 신문학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하였다. 1922년에는 동명사(東明社)에 입사, 1925년 그 후신인 ≪시대일보≫가 폐간되자 동아일보사로 옮겼다. 1932년 상해에서 활약하던 공산주의자인 셋째 형 정건(鼎健)의 체포와 죽음으로 깊은 충격을 받았는데, 그 자신도 1936년 동아일보사 사회부장 당시 일장기말살사건으로 인하여 구속되었다. 1937년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소설 창작에 전념하였으며, 빈궁 속에서도 친일문학에 가담하지 않은 채 지내다가 1943년 장결핵으로 사망하였다.
현진건 현창비
현진건(1900 - 1943)은 김동인(金東仁)·염상섭(廉想涉)과 더불어 근대문학 초기에 단편소설 양식을 개척하고 사실주의 문학의 기틀을 마련한 작가이다. 특히 식민지시대의 현실대응 문제를 단편기교와 더불어 탁월하게 양식화한 작가로서 문학사적 위치를 크게 차지하고 있다. 1920년≪개벽 開闢≫에 <희생화 犧牲花>를 발표함으로써 문필 활동을 시작하여 <빈처 貧妻>(1921)로 문명을 얻었다. 1921년 조선일보사에 입사함으로써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홍사용(洪思容)·이상화(李相和)·나도향(羅稻香)·박종화(朴鍾和) 등과 함께 ≪백조(白潮≫ 창간동인으로 참여하여 1920년대 신문학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하였다. 1922년에는 동명사(東明社)에 입사, 1925년 그 후신인 ≪시대일보≫가 폐간되자 동아일보사로 옮겼다. 1932년 상해에서 활약하던 공산주의자인 셋째 형 정건(鼎健)의 체포와 죽음으로 깊은 충격을 받았는데, 그 자신도 1936년 동아일보사 사회부장 당시 일장기말살사건으로 인하여 구속되었다. 1937년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소설 창작에 전념하였으며, 빈궁 속에서도 친일문학에 가담하지 않은 채 지내다가 1943년 장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신재모 집
신재모(1885 - 1958)는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파괴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상업중심가와 일본인 폭살을 계획한 독립운동가이다. 경상북도 칠곡 출신. 1924년 대구노동친목계를 조직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비밀결사로 폭력단·용진단(勇進團) 등을 조직하였다. 같은 해 4월 비밀결사인 파괴단을 조직하여 상해로부터 폭탄을 가져와서 대구내의 일본인 상업중심가를 파괴하고 일본인 수뇌들을 폭살시킬 것을 계획하였다. 1925년에는 일본으로부터 부산을 거쳐 내륙지방으로 운송되는 일본의 군수물자 수송을 방해하기 위하여 대구노동친목계원들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진우동맹(眞友同盟)을 조직, 책임자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진우동맹이 일본경찰에 탐지되면서 잡혀 징역 5년을 언도받았다. 출옥 후 독립운동을 위하여 중국으로 망명하다가 잡혀서 국내로 송환되었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충렬사
대전시 유성구 장동에 위치한 충렬사는 독립운동가 민영환, 최익현, 이준, 안중근, 윤봉길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사당이다. 1997년부터 매년 5월 3일 제향을 올리고 있다. 1968년 건립된 충렬사는 당시 충남 대덕구 탄동면 장동리(현재 유성구 신성동~도룡동 일대)에 사는 여흥 민씨를 비롯한 지역 유림들이 독립운동가들의 애국충정 정신을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건립했다. 유성구에 위치한 우성이산이 여흥 민씨의 선산이기도 하다. 2018년 12월, 대전지방보훈청이 충렬사를 현충시설로 등록하였다.
권용두 추모비
권용두(1914-1992)는 1926년 6학년에 재학하고 있을 때, 6·10만세운동에 참가하여 무기정학을 당하였고, 1929년 4월 선우회(鮮友會)에 가입하여 일본인 하급생인 멸시태도를 제재하려고 구타하여 징계를 받았다. 1931년 1월 충남전위동맹(忠南前衛同盟)에 가입하여 일제식민통치를 규탄하고, 농민야학을 개설하여 민족정신 고취 및 인재양성을 위해 활동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으며, 징역 1년형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항일무명용사위령비
항일무명용사위령비는 해방을 앞두고 자결한 한 무명용사의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1995년 8월 15일 녹산향토문화관에서 건립한 위령비이다. 1945년 8월 15일 새벽, 한 청년이 가덕도 외양포에 주둔한 일본 해군 기지를 탈출하였다. 그는 10리 바다를 헤엄쳐 건너 송정 바닷가를 지나 녹산, 성산을 거쳐 서낙동강 가에 닿았다. 그날 오전 10시경 장락포[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생곡동 장락 마을] 모퉁이 산 낭떠러지에서 총을 쏘며 쫓는 일본 헌병과 대치하던 이 청년은 ‘대한 독립 만세’를 세 번 외치고 투신, 순국하였다. 청년의 탈영 과정을 목격한 이들은 “큰 키에 좀 마른 얼굴, 누런 일본 수병의 옷을 입었고 어깨에는 옷 보자기 같은 걸 짊어졌다.”라고 증언하였을 뿐 성과 이름, 고향도 알 수 없다.
김법린 집 터
김법린(1899-1964)은 불교 승려로서 3·1운동때 서울에서 한용운(韓龍雲)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동래 범어사(梵魚寺)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범어사의 대표 자격으로 서울로 올라갔으며, 3월 4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범어사로 내려와 3월 18일 동래읍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그 후 1919년 4월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승려 백초월(白初月)을 중심으로 결성된 항일비밀단체인 한국민단본부(韓國民團本部)의 활동을 하였으며 1920년 초 의용승군(義勇僧軍)의 계획이 발각되어 좌절되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파리대학 문학부(文學部)에 재학하면서 피압박민족대회(被壓迫民族大會)에서 한국 대표로 활약했다. 1929년 봄 조선어학회가 주관하는 조선어사전편찬회의 준비위원으로 참가하였다. 불교계 민족운동인 만당(卍黨)에 참여하여 한용운, 김법린, 조은택, 박창두 등과 함께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배척하였고,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주장하며 경남 사천의 다솔사(多率寺)를 근거지로 비밀투쟁을 전개하였다. 김법린은 동경의 조직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만당의 조직이 1938년 말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얼마 안 있어 1942년 10월 소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다시 붙잡혔다. 이 때 일제에 붙잡힌 회원은 그를 비롯하여 32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일제의 취조과정에서 고문을 2년 넘게 당하다가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영출 묘
박영출(1907-1938)의 자는 현출(炫出), 호는 정인(盯仁)이며,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 운동가이다. 기장공립보통학교를 다닐 때 3·1 운동을 목격하였다. 1920년 3월 기장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기장에서 학교까지 기차로 통학하면서, 기장학우회 회장으로서 학생들의 단결과 항일 정신을 길러 주었다. 1920년 11월 17일 부친 박인표가 사망한 뒤 가세가 기울자 동래로 이사하였다. 1925년 7월 전교 학생 회장과 학급 급장을 맡고 있던 박영출은 동맹 휴학을 주도하였다. 새로 부임해 온 일본인 교장 오타 노부유키[大田信之]는 교내에서 조선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식민지 교육에 순종할 것을 학생들에게 강요하였다. 또 한문 담당 교사 이희보의 부당한 교육 방침과 학생 세 명의 퇴학도 학생들의 분노를 샀다. 이에 박영출은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 400여 명을 규합하여 7월 6일 동맹 휴학을 이끌었다. 경찰이 동맹 휴학을 수사하였고, 학교 측은 학생 234명을 정학시켰다. 학부형들의 중재로 사태가 마무리되었으나 학교 측의 감시는 더욱 엄격해졌다. 1926년 2월 기숙사 사감인 마쓰다[松田]가 조선인 학생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자, 박영출은 졸업을 한 달 남겨둔 상태에서 장산 촛불 시위 사건을 주도하고 퇴학을 당하였다. 1927년부터 1930년까지 일본 야마구치고등학교[山口高等學校]에서 생물학을 공부하였다. 당시 일본 내 다양한 공산주의 사건이 일어났다. 박영출 또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1930년 교토대학[京都大學] 경제학부에 입학하였다. 잠시 귀국한 박영출은 1931년 3월 5일 동래구 수안동 광장에서 일제의 탄압과 식민지 정책을 규탄하였다. 같은 해 9월 7일에는 동래청년동맹에서 주관하는 강연회에서 ‘청년과 종교’라는 주제로 식민지 조선에서 청년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박영출의 민족주의 활동은 검거와 구속으로 이어졌다. 1930년 교토대학 재학 시절에는 재일 한인 학생 강연회에서 조선 독립을 호소하다가 체포되었다. 이어 1931년 3월 동래구 수안동 집회 결과 체포되어 징역 6월, 집행 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일본에서 1933년 2월 공산주의 운동을 원조한 혐의로 구속되어 기소 유예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1934년 봄에 귀국한 박영출은 외숙부 김철수를 중심으로 한 인맥과 함께 조선광복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4년 5월 서울에서 동경고등사법학교를 졸업한 울산 출신 이관술과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재건그룹 운동을 주도한 이재유를 만났다. 박영출은 공산당 재건과 노동 운동을 지도하는 역할을 하였다. 1935년 3월 조선공산당 재건과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였다는 이유로 「치안 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었다. 1936년 7월 30일 징역 4년형을 선고 받았다.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38년 8월 2일 3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977년에 건국 포장, 1990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최천택 길
최천택(1897-1962)은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언론인이다. 1896년 6월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서 2대 독자로 태어났다. 부산공립상업학교 2학년 때인 1912년 당시 금서였던 『동국 역사(東國歷史)』를 절친한 학우들인 박재혁(朴載赫)·김병태(金鉼泰)·김흥규(金興奎)와 돌려 가며 읽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돌린 것이 발각되어 10여 일간 구속되었다. 윤독회를 통해 결속을 다진 학우들과 함께 북로 군정서의 국내 연락을 담당하고 유사시 항일 비밀 결사대로 전환한다는 목적 아래 1913년 비밀 결사인 구세단(救世團)을 조직하였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과거 구세단 동지를 통해서 정보를 입수하여 울산, 경주, 포항 등지에 3·1 운동 상황을 알렸다. 부산에서 다시 시위를 일으키기 위해 서울에서 지하 신문으로 발행되던 『독립신문』을 등사해 집집마다 뿌리면서 3·1 운동을 다시 선동하였다. 또 1920년 과거 구세단의 동지였던 의열단원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파 사건을 함께 모의하였으며, 1920년 12월 최수봉(崔壽鳳)의 밀양경찰서 폭파 사건과 1923년 강홍렬의 의열단 군자금 모집 사건에도 연루되어 일본 경찰의 혹독한 취조에 시달렸다. 이와 같이 최천택은 의열단원의 국내 활동에 상당한 연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1920년 부산청년회가 결성되었을 때 부산진구락부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1921년 8월 노동자들의 주택 문제를 해결하고자 백산상회의 안희제(安熙濟)와 김철수(金喆壽)[해방 후 경남도지사] 등과 함께 주택 구제 부산 시민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일본으로 건너가는 도항민(渡航民)을 위한 권익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24년에는 김국태와 시대일보사 부산지국을 설치해 언론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친일 종교 단체인 보천교(普天敎)에서 시대일보사를 인수하려 하자 전국 지국의 단결을 조성하여 이를 무산시켰다. 청년 운동 단체의 통일이 시도되면서 부산에서 부산청년연맹과 부산부청년연맹이 대립할 때, 최천택은 노건상 그룹의 부산청년연맹에서 집행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부산의 청년 단체들이 단일의 부산청년동맹으로 통일될 때 최천택은 30세가 넘은 나이 때문에 활동 공간을 신간회(新幹會)로 옮겼다. 1927년 7월 신간회 부산지회가 결성되었을 때 상무 간사로 활동하면서, 1928년 부산보통학교 일본인 교사의 여학생 능욕 사건에 대한 규탄 대회에 앞장섰다. 1929년 2월 신간회 부산지회장이 된 후, 11월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나자 부산제2상업학교 학생들과 접촉하며 시위를 확산시키려 하였다. 이후 신간회 해소론이 등장할 때까지 신간회 부산지회의 회보 발간, 신간회 경남연합회 발기 등을 추진하였다. 1941년에는 장건상(張建相) 해외 탈출 사건과 소설가 김동리(金東里)의 형인 김범부(金凡夫)의 해인사(海印寺)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해방 후에도 왕성하게 사회 활동을 하였다. 1946년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 경남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며, 1948년 민주중보사의 사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 5월 2대 제헌 의원 선거 때 부산시 동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혁신 성향의 장건상 선거 본부의 사무장을 맡아 당선시켰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좌익계로 분류되어 해방 직후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남위원장이었던 김동산(金東山)과 함께 육군 특무대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6·25 전쟁 이후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을 사수하다 전사한 정발(鄭撥) 장군의 정공단(鄭公壇)을 개수하고 봉제(奉祭)하면서 자유당 정권의 붕괴를 지켜보았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혁신동지총연맹의 최고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부산시 동구 을구에 출마하였으나 혁신계의 난립으로 낙선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군사 정권이 들어서자 서면 육군형무소에서 수개월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육군형무소에서의 후유증 때문인지 1961년 11월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자택에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2003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부산 독립운동가 골목
부산의 독립운동을 벽화로 그려 기념하고 있다. 부산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박재혁, 최천택, 오택 선생과 양한나, 변봉금, 김반수 여사의 존함이 적혀있고, 특히 박재혁 선생은 인물화도 그려져 있다. 박재혁 선생(1895-1921)은 일제강점기 의열단에서 부산경찰서장 하시모도에게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이다. 1920년 8월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과의 연락으로 상해로 가 의열단에 입단하고, 9월 상순 고서(古書) 짐 속에 폭탄을 숨겨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13일 부산에 돌아왔다. 이튿날 부산경찰서로 찾아가 평소 안면이 있던 서장 하시모도[橋本秀平]를 만나 진기한 고서를 보여준다며 봇짐을 풀고 짐 속에 있던 폭탄을 꺼내어 서장을 죽이려는 의도를 밝힌 다음, 폭탄을 던졌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두 사람 모두 중상을 입었다. 중상을 입고 붙잡혀, 1921년 3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과 폭탄으로 인한 상처로 고통을 겪다가 단식을 하던 중 옥사하였다. 1962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반수(1904~2001)는 1919년 당시 부산에 있는 일신여학교 학생으로 서울로부터 학생대표가 내려와서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며 시위 소식을 알리자 이곳에서도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그는 동료들과 태극기 100여매를 만들어 같은해 3월 11일 기숙사를 뛰쳐나와 좌천동(佐川洞) 일대에 모인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주민 수백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같은 해 4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오재영(1897~1948)은 1920년 9월 의열단원인 박재혁(朴載赫)이 상해에서 장기(長崎)를 거쳐 부산에 입항하여 자기 집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중국서적상으로 가장하고 부산경찰서장을 방문하여 폭탄을 투척, 서장이 중상을 당한 거사가 일어났다. 이때 그는 박재혁이 국외에서 숨겨가지고 온 폭탄 한 개를 맡아 두었다가 1920년 9월 14일 거사를 결행하는 박재혁에게 내주는 등 박재혁의 의거를 돕다가 공동혐의자로 지목되어 붙잡힌 것이다. 1921년 8월 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7호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최천택(1897~1962)은 1920년 9월경 박재혁(朴載赫)·김영주(金永柱) 등과 함께 부산경찰서 사무실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이일로 인해 최천택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이후 최천택은 1923년 7월경 의열단원(義烈團員)인 강일(姜逸)을 만나 신임장(信任狀)·협박문(脅迫文)·관공리사직권고문(官公吏辭職勸告文)·의열단선전문(義烈團宣傳文) 등을 받고 군자금 모금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래서 최천택은 1924년 12월 26일경에 합천군(陜川郡) 합천면(陜川面) 서산리(西山里)에 사는 이종연을 찾아가 자신이 의열단원임을 밝히고 군자금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후 최천택은 부산지방에서 전개된 청년운동 및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1924년 11월경 부산청년회 주최로 열린 조선기근구제의연회에서 동정연설(同情演說)을 하였다. 또한 1925년 12월에 열린 부산청년연맹발기준비회에 참가하였고, 몇일 후에 열린 부산청년연맹 집행위원회에서 서무부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1927년 7월에 열린 신간회 부산지회 설립총회에서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이어서 신간회 부산지회가 결성되자 최천택은 서무부를 담당하였다. 1927년 12월에 신간회 부산지회 임원이 개선되었는데, 이때 최천택은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 2월에 열린 신간회 부산지회 정기대회에서 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처럼 최천택은 부산지방에서 활발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일제기간 중 수십차례에 걸쳐 구금되었으나 고문에 굴하지 않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오연 집
정오연(1928-1945)은 1943년 봄 부산공업학교 재학 중 국민학교 동창생인 차병곤(車炳坤)·박정오(朴禎五) 등이 주도한 독서회(讀書會)에 가입하여 항일의식을 길러 갔다.이후 이들은 동지를 포섭함으로써 조직을 확대하고, 보다 구체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1944년 5월 1일에 독서회를 비밀결사 순국당(殉國黨)으로 개편·발전시켰다. 순국당이란 명칭은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조국독립을 쟁취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 때 순국당의 강령은 '민족독립·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한다'였으며, 행동 목표로 총독 처단·군사시설 파괴·일인 집단거주지 방화 등을 설정하였다. 이같은 행동 목표는 순국당이 단순히 민족의식을 고취하거나 교내에 머무는 학생운동조직이 아니라 독립군적 조직으로 전환해 갔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당시 이들은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들면서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조국독립에 대비한 운동방침을 세워갔는데, 그는 폭약 연구책을 맡았다. 또한 그는 차병곤 등과 함께 부산 시내 영도다리에 '대한독립 만세'라고 쓴 벽보를 붙이는 등 민족의식 고취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의 폭압적인 탄압과 경계를 뚫고 국내에서 무력투쟁을 전개하기가 여의치 않자, 이들은 중국으로 넘어가 광복군(光復軍)에 참가하기로 결의하고 해외 망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44년 7월 1차 선발대로 차병곤 등이 국경을 넘어 중국 길림(吉林)에 무사히 도착하고 뒤이어 2진이 출발했으나, 이러한 사실이 일경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5년 5월 9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최천택 묘
최천택(1897-1962)은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언론인이다. 1896년 6월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서 2대 독자로 태어났다. 부산공립상업학교 2학년 때인 1912년 당시 금서였던 『동국 역사(東國歷史)』를 절친한 학우들인 박재혁(朴載赫)·김병태(金鉼泰)·김흥규(金興奎)와 돌려 가며 읽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돌린 것이 발각되어 10여 일간 구속되었다. 윤독회를 통해 결속을 다진 학우들과 함께 북로 군정서의 국내 연락을 담당하고 유사시 항일 비밀 결사대로 전환한다는 목적 아래 1913년 비밀 결사인 구세단(救世團)을 조직하였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과거 구세단 동지를 통해서 정보를 입수하여 울산, 경주, 포항 등지에 3·1 운동 상황을 알렸다. 부산에서 다시 시위를 일으키기 위해 서울에서 지하 신문으로 발행되던 『독립신문』을 등사해 집집마다 뿌리면서 3·1 운동을 다시 선동하였다. 또 1920년 과거 구세단의 동지였던 의열단원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파 사건을 함께 모의하였으며, 1920년 12월 최수봉(崔壽鳳)의 밀양경찰서 폭파 사건과 1923년 강홍렬의 의열단 군자금 모집 사건에도 연루되어 일본 경찰의 혹독한 취조에 시달렸다. 이와 같이 최천택은 의열단원의 국내 활동에 상당한 연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1920년 부산청년회가 결성되었을 때 부산진구락부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1921년 8월 노동자들의 주택 문제를 해결하고자 백산상회의 안희제(安熙濟)와 김철수(金喆壽)[해방 후 경남도지사] 등과 함께 주택 구제 부산 시민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일본으로 건너가는 도항민(渡航民)을 위한 권익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24년에는 김국태와 시대일보사 부산지국을 설치해 언론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친일 종교 단체인 보천교(普天敎)에서 시대일보사를 인수하려 하자 전국 지국의 단결을 조성하여 이를 무산시켰다. 청년 운동 단체의 통일이 시도되면서 부산에서 부산청년연맹과 부산부청년연맹이 대립할 때, 최천택은 노건상 그룹의 부산청년연맹에서 집행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부산의 청년 단체들이 단일의 부산청년동맹으로 통일될 때 최천택은 30세가 넘은 나이 때문에 활동 공간을 신간회(新幹會)로 옮겼다. 1927년 7월 신간회 부산지회가 결성되었을 때 상무 간사로 활동하면서, 1928년 부산보통학교 일본인 교사의 여학생 능욕 사건에 대한 규탄 대회에 앞장섰다. 1929년 2월 신간회 부산지회장이 된 후, 11월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나자 부산제2상업학교 학생들과 접촉하며 시위를 확산시키려 하였다. 이후 신간회 해소론이 등장할 때까지 신간회 부산지회의 회보 발간, 신간회 경남연합회 발기 등을 추진하였다. 1941년에는 장건상(張建相) 해외 탈출 사건과 소설가 김동리(金東里)의 형인 김범부(金凡夫)의 해인사(海印寺)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해방 후에도 왕성하게 사회 활동을 하였다. 1946년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 경남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며, 1948년 민주중보사의 사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 5월 2대 제헌 의원 선거 때 부산시 동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혁신 성향의 장건상 선거 본부의 사무장을 맡아 당선시켰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좌익계로 분류되어 해방 직후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남위원장이었던 김동산(金東山)과 함께 육군 특무대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6·25 전쟁 이후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을 사수하다 전사한 정발(鄭撥) 장군의 정공단(鄭公壇)을 개수하고 봉제(奉祭)하면서 자유당 정권의 붕괴를 지켜보았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혁신동지총연맹의 최고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부산시 동구 을구에 출마하였으나 혁신계의 난립으로 낙선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군사 정권이 들어서자 서면 육군형무소에서 수개월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육군형무소에서의 후유증 때문인지 1961년 11월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자택에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2003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