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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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상 묘
방한상(1900-1970)의 호는 만취이며, 일제강점기 대구청년회 간부, 진우연맹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23년 5월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을 중퇴하고 귀국해 대구에서 가업인 한약상(漢藥商)을 도우면서 대구청년회 간부로서 활동하였다. 1924년 4월에는 서울로 올라가 머물렀다. 이후 북풍회(北風會)·화요회(火曜會) 등의 사회주의 계열과 접촉하면서 조선청년총동맹과 조선노농총동맹 등의 단체에 참여하였다. 무정부주의사상에 심취한 방한상은 사회주의 계열과의 공동 투쟁에 회의를 느꼈다. 무정부주의 동지들의 독자적 이념 연마와 결속이 무엇보다도 절실히 요구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1925년 9월 대구에서 신재모(申宰模)·정명준(鄭命俊)·서학이(徐學伊)·마명(馬鳴)·정해룡(鄭海龍)·안달득(安達得)·서동성(徐東星)·하종진(河鐘璡)·김동석(金東碩) 등과 무정부주의사상 연구단체인 진우연맹(眞友聯盟)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목표를 구현하기 위한 방안으로 우선 일본의 여러 단체와 제휴해 공동 노선을 추구하기로 하였다. 11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東京)·대판(大阪) 등지에서 조선인·일본인 동지들과 교유하면서 긴밀한 유대를 맺었다. 자아인사(自我人社)의 구리하라[栗原一男], 흑화사(黑化社)의 랴쿠모토[掠本運雄], 흑우회(黑友會)의 김정근(金正根) 및 흑선풍(黑旋風), 해방전선(解放戰線), 자유노동(自由勞動), 관동(關東)노동조합연합회 등과 연합해 흑색청년연맹(黑色靑年聯盟)을 결성하고 본부를 동경에 두었다. 한편, 시곡(市谷) 형무소로 박렬(朴烈)과 가네코(金子文子)를 면회 위문하고 돌아와 의연금을 모아 송금하기도 하였다. 1926년 4월 구리하라·후세(布施辰治) 등이 대구로 오자 진우연맹과 흑색청년연맹의 협력을 다짐하는 등 무정부주의운동에 대해 협의하였다. 진우연맹 회원들은 여러 차례 회합 끝에 아나키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흑색청년연맹과 제휴할 것, 그리고 부호로부터 자금을 조달해 대구 일대에서 파괴·암살을 실행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우선 경상북도 도청 및 경찰서·재판소·정거장을 한꺼번에 파괴하고, 도지사 이하 중요관헌을 암살한 이후에 일본인들의 시가지인 원정(元町) 일대를 파괴하고 나아가 전 조선에 무정부주의사상을 선전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상해의 김관선(金官善)과 연락해 폭탄의 밀반입을 추진하던 중 안달득이 절도 혐의로 잡힘에 따라 거사 계획이 드러나, 8월에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오랜 예심 끝에 재판에 회부되어 1927년 7월 징역 5년형을 언도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표창, 1991년 애국장이 추서하였다.
최태만 묘
최태만(1918-1993)은 일제의 강제징용에 반발한 대왕산 죽창의거에 참여하였다. 대왕산 죽창의거는 남산면 일원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1944년 7월 5일, 7월 8일, 7월 15일 세 차례 회합을 통해 계획되었다. 최태만은 7월 15일 밤 자인면 원당보(元堂堡)에서 열린 3차 회합에 참가하여 최종 대원 29명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7월 26일 새벽 남산면 사월·산양·송내·남곡리에서 모인 청년 26명은 대왕산으로 올라갔고 3명은 마을에 남아 연락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대왕산에 올라간 청년들은 결심대를 조직했는데, 최태만은 헌병대원으로 편제되었다. 7월 27일부터 남산면주재소 소속 일경들이 대왕산으로 몰려와 회유하였지만 모두 물리쳤다. 8월 1일 이후 일경들이 본격적으로 공격해오자 대원들과 함께 죽창을 들고 투석전으로 대응하였다. 용산(龍山)으로 근거지를 옮긴 후에도 무력 충돌이 있었는데, 역시 투석전으로 항거하였다. 이후 남산면주재소를 공격하여 주재소를 파괴하고 주임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식량 공급이 차단되자 8월 9일 결심대는 하산을 단행하게 된다. 최태만은 하산한 이후 은신하였지만, 8월 10~13일 사이에 다른 대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최태만과 결심대 대원들은 남산면사무소에서 이틀 동안 조사를 받고 경산경찰서로 이송되어 보안법위반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송치되었다. 1944년 10월 14일경 대구형무소로 다시 이송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최태만은 옥고를 치르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고, 1945년 8월 17일 소송 취하로 석방되었다. 최태만은 199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김홍준 묘
김홍준(1922-1993)은 일제의 강제징용에 반발한 대왕산 죽창의거에 참여하였다. 대왕산 죽창의거는 남산면 일원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1944년 7월 5일, 7월 8일, 7월 15일 세 차례 회합을 통해 계획되었다. 김홍준은 7월 15일 밤 자인면 원당보(元堂堡)에서 열린 3차 회합 때 최종 대원 29명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7월 26일 새벽 남산면 사월·산양·송내·남곡리에서 모인 청년 26명은 대왕산으로 올라갔고 3명은 마을에 남아 연락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대왕산에 올라간 청년들은 결심대를 조직했는데, 김홍준은 제3소대장 최외문(崔外文) 휘하의 제3소대원으로 편제되어 활약하였다. 7월 27일부터 남산면주재소 소속 일경들이 대왕산으로 몰려와 회유하였지만 모두 물리쳤다. 8월 1일 이후 일경들이 본격적으로 공격해오자 대원들과 함께 죽창을 들고 투석전으로 대응하였다. 용산(龍山)으로 근거지를 옮긴 후에도 무력 충돌이 있었는데, 역시 투석전으로 항거하였다. 이후 남산면주재소를 공격하여 주재소를 파괴하고 주임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식량 공급이 차단되자 8월 9일 결심대는 하산을 단행하게 된다. 김홍준은 하산한 이후 은신하였으나, 8월 10~13일 사이에 다른 대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김홍준과 결심대 대원들은 남산면사무소에서 이틀 동안 조사를 받고 경산경찰서로 이송되어 보안법위반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으로 송치되었다. 1944년 10월 4~5일경 대구형무소로 다시 이송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김경룡은 옥중에서 해방을 맞이하였고, 1945년 8월 17일 소송 취하로 석방되었다. 김홍준은 1986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김점학 묘
김점학(1906-미상)은 청년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조선 청년 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7년 민족 운동의 노선이 민족 협동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방향 전환이 이루어지자 귀국하였다. 대구 고등 보통 학교 학생들의 비밀 결사인 사회 과학 연구회가 사상 강좌를 개최할 때, 장적우, 시바타 겐스케[柴田健介] 등과 함께 강사로 초빙되어 학생을 지도하였다. 1927년 7월 24일 대구 청년회, 대구 청년 동맹, 아구 청년 동맹, 무산 청년 동맹 등 4개 단체가 합동하여 결성된 대구 청년 동맹의 집행 위원 겸 교양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1927년 9월 3일에 신간회 대구 지회가 설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8년 1월 경상북도 기자 대회 직후 이루어진 경상북도 청년 연맹 결성 대회에서 김리룡(金利龍)·박창호(朴昌鎬)·신철휴(申喆休)·황윤경(黃潤慶) 등과 함께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 7월경 일제 관헌에 체포되어 대구 지방 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대구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0년 9월 수감 중 조선 은행 대구 지점 폭파 사건을 일으켰던 장진홍의 옥중 순국에 항의하는 시위에 동참하였다가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27일 밤 대구에서 조선 공산당[장안파] 대구시 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였다. 그 뒤 대구 공산주의자 클럽을 결성하였다. 1945년 10월 말에 대구 달성 연합 농민 조합 협의회 결성에 참여하고, 서영로·채충식(蔡忠植)과 함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8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하였다.
박만선 묘
박만선(1924-1999)은 어린 시절 큰아버지 박정식(朴正植)과 외숙부 강종호(姜鍾鎬)에게 한학(漢學)을 배웠다.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에 재학 중이던 1942년 3월, 일본군에 복무할 학도지원병 모집에 반대하는 활동을 은밀히 전개하였다. 이어 만주로 건너가 9월에 지린성[吉林省] 신징[新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재원 박동만(朴東萬)과 접촉하고 특수 임무를 부여받아 국내로 돌아왔다. 귀국 후 박만선은 1943년 5월 동갑의 대구 출신 박기수(朴基秀)와 접선했다. 박기수는 일본 오사카[大阪] 유학 중 동포 학생들과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기공창(機工廠) 제조품목 탐지 등의 활동을 벌였던 인사로 역시 임시정부 요원의 지령을 받고 밀입국한 특파원이었다. 박만선과 박기수는 박만선이 살았던 영천으로 가서 동갑 청년 이영환(李榮還)·김영길(金永吉)·이상진(李相鎭) 3인을 포섭했다. 그들은 영천 교촌의 영천향교 옆 사망대(四望臺) 중턱에 있는 신사(神社)를 불 질러 없애버리기로 결의하였다. 드디어 1943년 4월 어느 날 심야에 신사의 벽판지를 헐어 그 안쪽에 종이쪽들을 흩어놓고 촛불을 켜놓아 불이 번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순찰 일경이 발견하고 곧 진화해버리는 바람에 신사 소훼 기도는 실패하고 말았다. 신사 소훼 기도가 실패하자 박만선은 대구 외곽에 주둔 중인 일본군 부대의 탄약고를 폭파하려 하였다. 탄약고 폭파 계획을 추진하던 중 동지를 가장해 접근한 헌병보 박천만(朴千萬)의 밀고로 1944년 8월 23일 대구헌병대에 체포되었다. 박만선은 1945년 5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조선임시보안령 위반, 불경, 방화예비 등의 죄목으로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이하여 8월 20일 출옥하였다. 박만선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우해룡 묘
우해룡(1906-1969)은 1925년 3월 신사상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상단체 혁조단(革造團)을 결성하였다. 같은 해인 1925년 7월 대구노동친목계를 대구노동친목회로 전환하는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축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 당국의 금지로 마무리하지 못한 채 축사는 중지되었다. 이 일에 대해 언론은 대구설화사건이라고 보도하였다. 1925년 9월 30일 대구[지금 대구광역시]에서 무정부주의 원칙 아래 사회문제 연구를 목적으로 결성된 진우연맹(眞友聯盟)에 참여하였다. 1926년 4월 박열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조선에 들어온 일본인 무정부주의자 구리하라 가즈오[栗原一男]를 통해 일본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색청년연맹에 가맹하였다. 이 과정에서 구리하라 가즈오는 일본과 조선에서 자유를 옹호하고 무정부주의 촉진을 위해서는 파괴·암살 등의 방법이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 같은 해인 1926년 5월 무렵 진우연맹원과 함께 8월 10일을 기해 중국 상하이[上海]에 거주하던 고삼현(高三賢)에게서 폭탄을 입수하여 대구 내 도청, 법원, 우편국, 경찰서 등 식민지배 기구를 폭파하고, 각 관서의 고위자를 암살하며, 대구 최고 번화가인 원정, 본정 등의 각 점포를 파괴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926년 7월 중순에 대구경찰에 검속되어 구류처분 속에 조사를 받았다. 구류가 끝난 뒤에도 또다시 검속되었다. 당시 박열(朴烈) 사건 연장선상에서 조사를 받아 무정부주의를 선전하려 했다는 것으로 범죄 내용이 구성되었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옥중에서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는 단식투쟁을 벌였다. 1927년 7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우해룡은 대한민국정부로부터 1990년에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대구경북 항일독립운동기념탑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기념탑은 2006년 6월 15일 건립되었다. 을미사변이 일어난 1895년부터 1945년 광복 때까지 약 50여 년 간 대구광역시 및 경상북도 지역에서 출생 혹은 활동을 한 항일독립운동가의 활동 행적을 추모하고, 독립정신을 계승하고자 세워졌다. 광복회대구경북연합지부가 세운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기념탑 표지석에는 “내 민족 혼의 쉼터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기념탑”이라고 새겨져 있다. “내 민족 혼의 쉼터”라는 표어가 부가적으로 적힌 이유는 아래와 같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영혼의 결집체이며 국권 회복과 국가 수호의 상징으로서 외세의 침범을 불허하고 선진조국 건설의 원동력인 민족정기를 회복하고 ‘내 조국혼의 쉼터’로서 역사 앞에 세계인 앞에 자주독립정신을 표방한다.”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기념탑은 기단부, 탑신부, 첨탑으로 구성되어 있다. 총 높이는 45m로 광복을 맞이한 1945년을 기념한다. 기단부는 원형으로 지구상의 중심, 우주의 중앙에 우리 민족이 있음을 상징한다. 탑신부는 돌출요철 십자형상으로 독립 정신을 발휘하고 세계 정세를 받아 대비함을 표현했다. 따라서 4열각과 4예각으로 좀더 구체적으로 형상화했다. 첨탑은 다이아몬드 형상이다. 불굴의 강인한 독립 정신으로 빛나는 구국 선열혼의 결집체를 의미한다. 탑 방향은 일본을 향해 준엄한 경고를 하기 위해 정동(正東)으로 향하고 있다.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기념탑 뒷편에는 좌우 부조, 명각대, 좌우조형물이 있다. 명각대에는 독립유공 국가서훈자 1,800여 명이 음각되어 있다. 좌우부조는 평화만세시위와 무장투쟁의 독립전쟁상이 새겨져 있다. 좌우조형물에는 독립 만세 함성과 함께 울려오는 영남인의 독립운동을 추상화하였다.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기념탑은 근대시기 대한민국 항일운동사에서 대구광역시 및 경상북도가 차지하는 역사적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기념탑이다. 또한 동구 주민뿐 아니라 대구광역시 시민이 민족 정신과 독립 정신을 고취할 수 있는 학습체험형 역사관광 명소로서 가치가 뛰어나다. 특히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기념탑 뒷편 명각대에 새겨진 각 시대별, 대표적 항일운동과 대표적 항일운동가의 명단은 대구광역시 및 경상북도 지역 사람들의 구체적인 항일운동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훌륭한 역사적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항일독립운동기념탑 조형물
항일독립운동기념탑 근처에는 조형물 6기가 있는데, 국권회복운동, 3.1독립운동, 무장독립운동, 국외독립운동, 항일대중운동, 학생독립운동을 테마로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국권회복운동 동상은 대구에서 활발하게 일어났던 애국계몽운동을 연출한 것이다.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고 교육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애국계몽운동의 특징을 책과 등불로 표현하였다. 이미지는 교육구국운동에 기여한 대구 협성학교 졸업 기념 사진을 각인한 것이다.대한제국기의 국권회복운동은 일제의 침략에 저항해 무력투쟁을 벌인 의병전쟁과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고 교육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애국계몽운동의 두 갈래로 전개되었다. 의병전쟁의 경우, 대구의 대표적인 이눔루로는 문석봉과 우재룡이 있다. 애국계몽운동은 신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등으로 전개된 구국운동으로 대구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단체는 대구광문사, 대구광학회, 대한협회 대구지회, 달성친목회가 있다. 국권회복운동은 1910년대 조선국권회복단과 대한광복회 등의 국내 외 투쟁으로 계승되었으며 1919년 3.1독립운동과 1920년대 독립운동의 원류가 되었다. 3.1독립운동 동상은 여학생이 목청껏 독립만세를 외치는 모습을 생생히 표현해 그날의 감동을 재현하고 있다. 이미지는 여학생들이 남학생 못지 않게 적극적으로 운동에 참여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함께 다수의 여학생이 만세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을 각인한 것이다.대구의 3.1운동은 1919년 3월 8일, 군중 1,000여 명이 펼친 서문시장 만세시위로 시작되어 덕산정시장 만세시위, 4월 미대동 여봉산 만세시위 등으로 이어졌다. 만세시위는 5회에 걸쳐 약 3,200명이 참가하였고 그중 240여 명이 일제 군경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만세시이에 참가했던 일부 학생들은 상인들의 철시투쟁을 이끌고 내고 비밀결사 혜상단을 조직하여 친일 무리에 강력한 경고문을 보내 각성을 촉구하였다. 한편, 1919년 3월 전국 유림대표 137명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파리장서운동을 펼칠 때 대구에서도 유림대표 13명이 참여하였다. 이 운동은 4월 12일 일제 군경에 탐지되어 유림이 큰 수난을 당하였지만, 독립에 대한 국민의 의지를 전 세계에 선포하였다는 의미가 있다. 무장독립운동 동상은 총을 겨누고 있는 의열투사의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꼭 쥔 주먹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드러내고 있으며 침착하게 목표를 겨냥하고 있는 모습에서는 독립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이미지는 중국에서 활동한 의열단 지도자와 독립군의 사진을 각인한 것이다.항일의병투쟁의 정신을 계승한 무장독립운동에 대구사람들 또한 다양한 경로를 통해 합류하였다. 의열투쟁에서는 1910년대 대한광복회의 활동을 시작으로 이종암이 앞장선 1920년대의 의열단운동, 1920년 서상헌의 도쿄 폭탄 거사 추진, 1927년 장진홍의 폭탄의거 감행, 1944년 임시정부 요원의 일본군부대 탄약고 및 군사비행장 폭파 계획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대구사람들은 만주 독립군 무장투쟁을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운동을 여러 차례 전개하였으며 중국에서 활동한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에도 동참하였다. 국외독립운동 동상은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을 연출한 것으로, 중국식 복장에 선언문 종류의 두루마리 문서를 움켜 쥔 손으로 독립지사임을 표현하였고 안경을 쓴 모습은 국외독립운동의 지식층 인사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미지는 1921년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요인들이 가진 신년축하식 기념사진을 각인한 것이다.일제에 강점되어버린 조국을 떠나 국외 각지로 망명한 대구사람들은 조국광복의 날까지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 현정건과 이두산 등 여러 인사가 참여하였고, 배천택 등이 좌우합작의 대독립당 건설운동을 앞장서 이끌었다. 일본에서는 초기부터 유학생회와 독서회 등의 비밀결사 조직에 가담하였고, 1930년대 이후 노동운동과 반전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미국에서는 송종익 등이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꾸준히 독립운동을 펼쳤다. 항일대중운동 동상은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주체로 성장한 대구의 대중이 벌여간 농민운동, 노동운동, 청년운동, 소년운동, 여성운동, 형평운동 등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미지는 일제의 식민지배를 극복하기 위해 항일투쟁을 벌인 대중운동을 묘사한 것으로 각계각층의 대중들이 불끈 쥔 주먹을 높이 들고 전진하는 모습을 통해 대중운동의 역동성을 표현하고 있다.1920년대, 대구의 대중은 대구노동공제회, 대구청년회, 대구여성회, 형평사 경북지사 등 다양한 분야의 대중운동을 벌이며 항일민족운동의 주체로 자리매김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에는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 등의 문화운동과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였고, 1920년대 중.후반에는 달성군 소작쟁의의 농민운동과 대구신문배달부조합, 재봉직공청년회 등 노동단체 결성과 파업의 노동운동, 신여성운동과 청년운동, 백정들의 신분해방투쟁 등이 펼쳐졌다. 이러한 대중운동은 신간회 대구지회의 설립을 통해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930년대 이후부터 일제 말기에 이르기까지 대구의 대중운동은 침략전쟁과 강제 동원에 반대하는 투쟁을 끊임없이 펼치며 광복과 해방을 준비하고 통일된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을 전망하였다. 학생독립운동동상은 대구의 학생들이 일제에 맞서 펼친 다양한 독립운동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제의 폭압적 식민정책에 맞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광복과 해방을 위해 굳세게 전진하는 독립정신을 생동감있게 연출하고 있다. 이미지는 1920년대 이후 대구의 학생들이 장래에 대한 불이익을 감수하며 학업을 포기하고 일제의 식민지배와 식민교육에 맞선 민족교육 투쟁, 동맹휴학 투쟁, 격문 투쟁, 전쟁반대 투쟁 등의 장면을 각인한 것이다.대구의 학생들은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는 일제의 식민지배에 맞서 민족차별 철폐와 민족교육을 부르짖는 동맹휴학투쟁과 적우동맹 등의 비밀결사 활동을 전개하였고, 1930년대에 들어서는 전쟁을 반대하는 격문 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 말기에는 다혁당, 태극단, 무우원 등 다양한 형태의 비밀결사운동을 펼쳤고, 침략전쟁에 강제 동원되는 것을 반대하는 학병거부 투쟁도 벌였다. 이처럼 대구의 학생독립운동은 근대 민족운동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채기중 순국기념비
채기중(1873 - 1921)은 경북 함창(咸昌 : 현재 尙州郡) 사람이다. 경술국치를 당하자 그는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유창순(庾昌淳)·유장렬(柳璋烈)·한 훈(韓焄)·강순필(姜順必)·김병렬(金炳烈)·정만교(鄭萬敎)·김상오(金相五)·정운홍(鄭雲洪)·정진화(鄭鎭華) 등과 함께 1913년 풍기에서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을 결성하였다. 이때 광복단에 참여한 인사들은 대부분 의병적(義兵的) 성향의 인물들이었고 동단의 실천방략은 독립군 양성을 위한 무기구입과 군자금 모집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강병수(姜秉洙)와 함께 영월(寧越)의 일본인 중석광(重石鑛)에 광부를 가장하고 잠입하여 자금탈취를 기도하였으며 또 자산가를 대상으로 군자금 수합활동을 펴고 국내뿐 아니라 만주를 왕래하며 재만(在滿) 독립군과도 연계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했는데, 이무렵 박상진(朴尙鎭)을 만나 보다 적극적인 투쟁방법을 모색하였다. 즉 절박한 민족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지금까지 행하였던 일본인 광산습격 및 순리로 요구하던 군자금 모집의 방법을 떠나 식민지배에 안주하는 친일부호의 응징과 무력적 방법에 의한 군자금 수합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이의 실천을 위해 풍기광복단과 박상진이 참여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에서 정운일(鄭雲馹) 등 의병적 성향의 인사가 합류하여 1915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였다. 이때 채기중은 광복회 조직의 경상도 지역 책임자로 광복회의 포고문을 작성하는 한편 동지를 규합하여 조직확대에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1916년 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이 무기구입을 위해 만주로 다녀오다가 일경에 붙잡혔고, 1917년초 김좌진(金佐鎭) 등 광복회의 중진 인사들 다수가 망명함에 따라 동회가 수난을 당할 때, 그는 예산(禮山)의 김한종(金漢鍾)을 가입시켜 충청동의 조직을 재건케 하는 등 세력만회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그는 민족적 각성을 위해 식민지배에 안주하는 친일부호를 처단할 때에도 앞장서서 1917년 11월 칠곡군(漆谷郡)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기에 앞서 장승원의 집을 정찰하는 한편 거사를 지휘하여 성공케 하였다. 이일로 인하여 대한광복회는 조직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그는 상해로 망명을 계획하던 중 1918년 붙잡혔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운곡서당
운곡 서당은 지강 이승연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32년 3월 15일 문하생들이 건립한 사당이다. 이승연(1861 - 1933)은 경북 칠곡(漆谷) 사람으로 1913년 7월 만주에 설치된 신흥무관학교의 경비조달을 위해 국내에 온 박경종(朴慶鍾)과 함께 경북 일원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1914년 9월에도 만주에서 군자금 모집을 위해 온 황종언(黃鍾彦)·이형국(李衡國) 등과 20만원을 목표로 활동하다가 1915년 2월 체포되어 동년 9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19년에는 유림의 파리장서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고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이승연 구 묘
이승연(1861 - 1933)은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 1913년 7월 만주에 설치된 신흥무관학교의 경비조달을 위해 국내에 온 박경종(朴慶鍾)과 함께 경북 일원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1914년 9월에도 만주에서 군자금 모집을 위해 온 황종언(黃鍾彦)·이형국(李衡國) 등과 20만원을 목표로 활동하다가 1915년 2월 체포되어 동년 9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9년에는 유림의 파리장서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운해 묘
정운해(1893 - 1945)는 1910년 망국 후 해외로 망명하여 연해주(沿海州)와 만주(滿洲) 일대에서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다가, 1919년 2월 중국 길림에서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 결성에 참가하였다. 길림군정사는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의 후신으로 무장투쟁노선을 지향했는데, 이때 그는 선전 및 연락을 담당하였다. 이후 국내로 돌아온 그는 1920년 6월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大邱支會) 결성을 주도하면서, 대구와 경북 일대에서 노동운동 확산에 힘을 기울였다.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이 결성될 때 전형위원·기초위원·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했다. 동년 11월 서울에서 김약수(金若水) 등과 함께 사상단체 북풍회(北風會) 결성을 주도하여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결성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면서 노농부를 맡았다. 동년 12월 제1차 조선공산당사건(朝鮮共産黨事件)으로 인한 검거를 피해 일본으로 탈출하여 조선공산당 일본연락부에 가입했다가 조공 일본부가 파괴되자, 다시 간도로 망명했으나 1927년 5월 간도(間島)에서 체포되어 1928년 5월 징역 3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