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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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독립기념비
세종시 연기면 연남초등학교 내부에 위치한 대한민국독립기념비는 5단의 기단 위에 놓여져있으며, 운동장 가장자리에 위치해있다. 증언에 따르면, 본 비는 원래 황국신민서사가 새겨진 비석이었지만, 해방 이후 대한민국독립기념비로 새롭게 새겨 재활용하였다고 한다. 당시 돌이라는 것이 중요한 재산이나 자원이었고, 일제 잔재라는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새겨진 글을 바꾼 것으로 추정되어진다.
천안호국인물 구조물
유관순(1902~1920)은 일제강점기 아우내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2년에 태어나 1920년에 사망했다.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1916년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편입했다. 을사늑약 이후 조국독립을 위한 기도회와 시국토론회·강연회 등에 적극 참여했다.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전국적으로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서울 소식을 전한 후 4월 1일 병천시장에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검거되어 투옥 중에도 옥중만세운동을 벌였고,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1947년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으며, 1951년 순국의열사 심사위원회에서 순국의열사로 선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201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이동녕(1869~1940)은 천안 목천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석오(石吾), 자는 봉소(鳳所)이다. 북간도 용정에 이상설 정순만 등과 같이 서전의숙을 설립하고 청소년 교육에 힘 썼다. 1907년 귀국하여 안창호, 이회영, 김구, 이동휘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고 활약하였으며, 1910년 서간도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13년에는 남만에서 청년운동을 하다가 해삼위로 가서 이상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25년부터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국무위원 겸 주석을 역힘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후 반평생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이끌어 조국광복의 일념에 투쟁하던 그는 1940년 3월 13일 72세 때 사천성기강(四川省綦江)에서 과로로 영면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광복 후인 1948년 9월 22일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조병옥(1894~1960)은 충청남도 천안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경찰관이자 정치가이다. 1914년 미국으로 건너가 안창호가 주도한 흥사단의 조직결성에 참여하였으며, 뉴욕 거주 동포들을 중심으로 한인회를 조직하고 총무를 맡아 독립운동의 진상을 미국에 알리는 등 외교활동에 힘썼다. 1927년 신간회의 결성에 참여하여 35명의 간사 중 일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으며 1929년 신간회 복대표위원회에서 교육부장과 경성지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에서는 이에 호응하여 민중대회를 개최할 것을 계획하고 이를 준비하던 중 조병옥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이 일경에 붙잡혀 그는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2년에 조선일보 전무 겸 영업국장을 맡아 민족언론의 육성에 힘썼으며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붙잡혀 2년간의 예심 끝에 고등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풀려났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용응 공적비
김용응(1869~1959) 1919년 4월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려는 영남의 학생들에게 그 방법 등 편의에 대해 조언했다. 1925년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사회운동자동맹 발기준비위원회에 괴산을 대표한 발기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 1927년 10월 23일 괴산청년회관에서 신간회 괴산지 발기회를 개최하고 설립을 준비작업을 맡았다. 11월 26일 열린 신간회 괴산지회 설립대회에서 지회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12월 27일 괴산청년회 주최로 열린 ‘충청북도 사회운동자 간담회’의 좌장으로 회의를 이끌었다. 1928년 5월 13일 안철수(安喆洙) 등과 함께 괴산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열흘 동안 취조를 당한 후 24일 동지 8명과 함께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8월 6일 예심이 종결되면서 정운석과 함께 면소 처분을 받고 다음날 석방되었다. 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태규 공적비
김태규(1896~1962)는 충북 괴산 사람이다. 그는 3·1독립운동 직후 국내에서 성립된 독립운동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재무부장으로 활동했다. 동단은 1919년 5월 조용주(趙鏞周)·연병호(延秉昊)·이병철(李秉徹) 등이 외교활동을 행동지침으로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것으로서, 본부인 중앙부를 서울에 두고 국내의 각처와 해외 조직으로 상해 지부를 설치하였는데, 중앙부의 부서 구성은 총무를 중심으로 외교부·재무부·편집부·외교원·외교특파원 등으로 이루어졌다. 동단의 활동은 외교선전 활동과 관련된 외교원의 해외 파견 및 기관지 〈외교시보(外交時報)〉의 발간 등 선전물 간행이 주된 것으로서, 재무부장의 책임을 맡았던 그는 이같은 활동에 필요한 자금지원을 관장했다. 그러던 중 동년 10월에 그는 외교 연구를 목적으로 상해에 파견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충북 괴산군 조사원으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임무를 띠고 국내에 다시 들어왔다가 동년 11월말 동단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조명희 행적도
조명희(1894~1938)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면 벽암리에서 출생했다. 호는 포석(抱石)이다. 1919년 12월 17일 조명희는 황석우(黃錫禹) 등이 조직된 의권단에 몸담았다. 의권단은 사회주의자와 연계를 맺어 재경친일자와 밀정 등을 징계할 것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희곡 작가, 연극운동가, 시인, 소설가로 창작 활동을 했다. 1928년 6월 5일 자신의 창작집 『낙동강(洛東江)』과 이기영의 작품집 『민촌(民村)』이 출판되자, 한국 최초로 창작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7월 27일에는 서울 공평동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회관에서 본 동맹의 경성지회 설립대회 준비위원회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항일과 카프 활동을 계속하자 일제의 그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고 생활상의 곤란도 심하였다. 1928년 8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한인학교에서 교원이 되었다. 연해주에서 1928년 10월에 「짓밟힌 고려」라는 산문시를 발표했다. 「짓밟힌 고려」는 일제 식민지하에 한국인의 궁핍상과 민족의 비참상을 묘사했다. 항일투쟁과 계급투쟁을 통해서 계급해방의식을 형상화했다. 조명희는 연해주지역 학교에서 교원으로 한인 2세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한편, 소비에트 문사동맹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1936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인 작가들의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었을 때, 매월 6일 1회 이들을 전문적으로 지도하였다. 9월 27일 하바로프스크에서도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자 이곳에서도 문인들을 지도했다. 스탈린 대탄압이 시작되면서 1937년 9월 18일 일본 첩자의 누명을 쓰고 체포되었다. 1938년 4월 15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5월 11일 하바로프스크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1956년 7월 20일 극동주 군법재판소에 의해 복권되었다. 조명희는 스탈린의 정치적 탄압으로 사형을 당하였지만, 연해주에서 문학을 통해 항일정신을 고취했다. 수많은 문학인을 길러낸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불렸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안삼순 묘
안삼순(1894~1941)은 강원도 춘천 사람이다.춘천 일대에서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1907년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당한 외삼촌 마정삼(馬正三)의 아들인 마도현(馬道賢)·마만봉(馬萬奉) 형제와 역시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했다. 1908년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당한 박영관(朴永寬)의 아들 박순구(朴順九)가 장성한 뒤 서로 협력하여 부친의 원수를 갚고 일제 침략세력을 토멸키로 맹약하고 1921년 9월경부터 화승총과 사냥총으로 무장하여 홍천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에 그의 형제인 안이순(安二淳)·안귀봉(安貴鳳)과 외사촌 마남룡(馬南龍), 사돈지간인 전봉학(全鳳學) 등이 그들과 뜻을 같이하여 잇달아 가담하면서 장총단(長銃團)을 구성하여 인제 가리산 을 본거지로 하고 홍천·춘천·인제·양구 등지를 무대로 전후 19회에 걸쳐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고, 일경을 사살 처치하며, 부호층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 또는 징수하는 등의 활동을 벌여 나가자, 그도 같이 가담하여 주로 군자금 모금을 위한 부호층의 자산상태 정보 수집, 행동대원에 대한 길 안내 등의 지원활동을 하였다.그러나 1927년 11월 일제 군경의 대규모 토벌작전으로 다른 단원들과 함께 붙잡혀, 1928년 10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주재년 기념관
주재년(1929~1945)은 국민학교 재학시절부터 항일의식이 투철했다. 1942년 음력 12월 초순경, 그의 형 재연(在淵)의 나병을 치료하기 위해 와 있던 일본인 산원낙섭(山元洛燮)로부터 '대동아전쟁이 장기화되면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은 미국 등의 힘을 빌려 독립해야 한다'라는 말을 듣고, 1943년 9월 초순경, 여수에서 조국독립의 실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말을 유포하였다. 그리고 동년 9월 23, 24일경, 나무하러 가는 도중 돌산면 율림리로 가는 도로 민가 목화밭 담장에 '조선일본별국', '일본놈 져라', '조선만세', '조선지광'이라는 글자를 새겼다가 사흘 만에 여수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때 일제는 경비정 7~8척과 경찰 100여 명을 동원해 경적을 울리며 온 마을을 수색했으나 범인을 잡지 못하였다. 이에 주민들을 모아놓고 마을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자 자수했다고 한다. 주재연은 1944년 1월 21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4년을 받아 풀려났으나 고문의 휴유증으로 이듬해에 숨졌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산양서원
식량부족에 허덕이고 있던 일본은 식민지 조선의 토지를 폭력적으로 수탈하고, 일본 농민을 이주시켜 농업권을 장악하기 위해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전국적으로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일본의 토지조사사업을 담당한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의 악랄한 수탈과 농민착취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화전민으로 전락하거나 간도지방 등 해외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농촌경제 수탈에 대하여 전국 곳곳에서 농민들의 항쟁이 이어졌는데 강원도의 경우 삼척 임원리의 농민항쟁을 대표적인 사건으로 들 수 있다. 삼척의 향토지와 나이 드신 분들의 고증에 근거하여 임원리 임야측량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13년 4월에 임원리에서 국유림과 사유림에 대한 경계측량을 하는데 사유림을 부당하게 국유림으로 편입시키는 일이 있었다. 이미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는 상황이므로 국유지는 결국 일본정부의 소유나 마찬가지였으므로 개인 소유의 임야를 국유지로 만드는데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부당함을 지적하고 항의할 목적으로 원덕면 주민 5백여 명이 운집하였습니다. 임원리 김치경(金致卿)의 지휘로 재측량을 요구하며 궐기하여 수일간 시위를 벌였습니다. 당시 삼척군수 심의승(沈宜昇)과 원덕면장 김동호(金東鎬)가 일본인 측량기수 화장(花藏)을 대동하고 민중을 설득시키기 위해 임원리에 왔는데, 이 때 뒷산에서 몰래 사진촬영하는 자를 발견하고 군중들은 격분하여 측량기수를 죽이라고 외치며 몰려들어 타살하고 불에 태웠다. 그러자 일본 헌병 20여 명이 출동하여 무차별 발포하여 군중들은 재빠르게 해산했지만 3명이 죽고 많은 부상자를 내게 된다. 일제는 향후 군중시위의 뿌리를 뽑기 위해 본보기로 주동자 김치경을 비롯하여 조정원(趙正元) 이락서(李洛書) 김문식(金文植) 김평서(金平書) 등 70여 명이 끌려가 옥고를 치르게 되었는데 함흥형무소에서 복역 중 김평서는 옥사하고, 남은 사람들은 경성형무소로 이감되어 5년간 복역하고 풀려났으나 모진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모두 사망했다. 이 사건 뒤에 원덕면의 유림들은 한 목소리로 간악한 일본 헌병들의 만행을 맹렬히 규탄하고 비난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 헌병대는 대규모 민중봉기로 이어질 것을 염려하여 1913년 5월 유림들의 본거지인 원덕면 산양리의 산양서원(山陽書院)을 방화했고, 그 결과 건물은 모두 불에 타 없어지고 묘정비(廟庭碑)만 남게 되었다. 1971년 유림들의 정성으로 묘정비각은 중건하였으나 서원 본 건물은 아직도 복구되지 못하고 있으니, 원덕주민들은 지금까지 잊지 못할 사건으로 기억하고 있다. 1998년 4월 18일에 산양서원 묘정비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여주박물관
1997년 ‘여주군향토사료관’으로 문을 연 여주박물관은 여주의 역사와 민속자료 등을 조사·수집·전시·교육하고, 새로운 학술자료를 발굴하며 여주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여주박물관 2층 여주역사실에서는 우리나라 근, 현대에 여주에서 일어난 항일운동 역사와 여주 출신 독립운동가 및 여주 3.1운동, 국권 회복을 위한 여주인들의 투쟁 흔적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주환, 송병선, 송병순 사당(성암사)
성암사는 한말의 우국지사 이주환과 그의 스승인 송병선, 송병순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다. 이주환(1854~1919)은 경상남도 거창(居昌) 사람이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일제에게의 세금(稅金)납부를 거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군청에 호출되자 당시 거창군수 유상범(兪尙範)에게 「나라가 망하고 국왕이 업거늘 누구에게 세금을 바치느냐」고 꾸짖고, 「너같은 친일파는 나의 뜻을 꺾지 못한다」고 힐책하였다. 일제 헌병대가 그를 연행하여 강제로 무인(拇印)을 찍히자 귀가 후에 「자귀」로 자기의 엄지손가락을 절단해 버렸다. 1919년 1월 21일 광무황제가 서거한 소식을 듣고 흰 갓을 쓰고 선영에 참배한 다음 면사무소에 가서 호적 열람을 요구하여 찢어 버리고 거창읍 침류정(枕流亭)에서 사세시(辭世詩) 1편을 남기고 「자귀」로 목을쳐서 자결하였다고 한다. 송병선(1836~1905)은 충청남도 회덕(懷德)에서 태어났다. 학행으로 천거 받아 서연관(書延官)과 경연관(經延官)을 지내었다. 1882년에 공조참판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충청북도 옥천(沃川)에 내려가 정자를 짓고 유학을 가르치면서 세상일을 잊고 지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 소식을 들은 송병선은 나라가 위험에 처해 있음을 알고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을사5적의 처단과 을사조약의 파기를 건의하였으며, 을사조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경무사 윤철규(尹喆奎)에게 인치(引致)되어 강제로 향리에 호송되었다. 이에 국권을 빼앗김에 통분하여 세차례 다량의 독약을 마시고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겨 놓고 자결 순국하였다. 유서에서는 을사5적의 처형과 을사조약의 파기 및 의(義)로서 궐기하여 국권을 찾을 것 등을 호소하였다. 고종은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06년 2월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송병순(1839~1912)은 을사조약을 반대하여 순절한 송병선(宋秉璿)의 아우이다. 일제가 1905년 11월 무력으로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고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이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여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5적을 성토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 유림에게 배포하고 국권회복에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1906년에는 충청북도 영동(永同)군 학산(鶴山)면에 강당(講堂)을 건립하여 수백 명에게 민족독립사상을 교육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하여 여러 번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두문불출하며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1912년 일제 헌병이 소위 은사금(恩賜金)을 가져 왔으나 거절했으며, 같은 해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 강사로 천거하자 이를 거절한 다음 유서를 남기고 독약을 마시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충절을 기리어 이주환에게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 송병선에게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 송병순에게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3.20 독립만세운동, 이태준 조형물
본 조형물은 3.20 군북 독립만세운동과 함안 출신 이태준의 공적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3.20 군북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0일 군북 장날을 기해 사회지도층을 비롯한 장꾼과 주민 등 5000명이 넘는 군중이 가세해 일제에 항거한 만세의거로 거센 항거에 놀란 일제가 대포·포대 병력까지 동원해 진압에 급급했던 함안의 자랑스런 만세의거다. 3·1만세운동 기간 중 사망·부상자가 50여 명에 이르러 전국에서 다섯번째로 큰 희생을 치렀고, 일본군경과 민간인 사상자 수가 전국에서 최고일 정도로 다른 지역의 만세운동을 압도했던 대규모 만세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태준(1883~1921)은 경남 함안(咸安) 출신으로, 의사(醫師)로 몽고(蒙古)수도 고륜(庫倫)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던 중, 1918년 9월 김규식(金奎植)이 파리강화회의 참석에 필요한 여비를 마련키 위해 몽고로 오자 그에게 독립운동자금 2천 달러를 제공하여 활동을 도왔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상징조형물
경상북도독립기념관 내에는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상징조형물 밖에도 다양한 시설이 함께 위치해 있다. 2002년에 안동독립운동기념사업회로 발기하여 2007년 개관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의 설립 목적은 경북독립운동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보존, 조사‧연구, 전시, 교육함으로써 민족의 자주독립을 지켜온 독립운동가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하고 민족문화의 정체성 확립 및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는데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설립 배경은 다음과 같다. 안동은 유교문화권의 핵심지역으로 선비정신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곳이며, 퇴계 학맥의 정통을 계승한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수 많은 유학자들이 국난 극복을 위해 노력한 결과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 및 자정순국자를 배출한 곳이다. 살아있는 유교문화와 경상북도 독립운동 역사를 교육하고 나라사랑 정신을 배우는 21세기 국민정신의 교육장으로 발돋움하고자 안동에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을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