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항일운동
사건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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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 결성지(안일사)
1910년대 대구를 비롯한 영남지역 인사들이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를 결성한 곳이다. 조선국권회복단은 1908년 대구에서 만들어진 달성친목회가 1913년 시회(詩會) 형식을 빌어 조직되었다가 1915년 확대, 개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남지역 계몽계열 인사들이 주축을 이룬 조선국권회복단은 국외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동지 규합 및 군자금 모집에 힘썼다. 3.1운동 때에는 마산 등지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안일사는 고려 태조 오아건이 머물렀다고 하여 오랫동안 안일암으로 불리었다. 1960년대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시영 순국기념탑
이시영(1882 - 1919)은 대구(大邱) 사람이다.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다가 귀국하여 1915년 음력 1월 윤상태(尹相泰)·박상진(朴尙鎭)·서상일(徐相日)·홍주일(洪宙一) 등과 함께 경북 달성군(達城郡)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조직하고 교통부장(交通部長)을 맡아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동단은 대구를 중심으로 주로 경상우도(慶尙右道) 지역의 중산층 이상의 혁신유림들이 참여하여 곡물상의 상업조직과 사립교육기관을 통하여 독립군을 지원한 구국경제활동단체였다. 그는 만주·노령(露領)지방의 독립운동가들과 연계투쟁의 방안을 모색하는 한편 1916년 8월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의 김진우(金鎭瑀)·김진만(金鎭萬)·최병규(崔丙圭) 등과 연계하여 대구의 자산가 서우순(徐祐淳)으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1917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에는 서울의 만세시위에 참여한 후 운동의 확산을 위해 만주로 건너가 항일활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첨운재
첨운재는 대구 상인동 출신으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대구의 독립운동가 향산(香山) 윤상태(尹相泰.1882~1942)의 별서(別墅)로, 시도 짓고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모의한 곳이다. 윤상태는 눈 내리던 1915년 1월 15일(음력)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앞산 안일사에서 비밀결사 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을 조직할 때, 통령(統領)으로 추대됐다. 1년 2개월여 옥고도 치른 윤상태 지사는 비밀결사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 가입, 향산상회(香山相會) 운영, 파리장서운동 참여, 월배 덕산학교(德山學校) 설립, 대구교남학교(현 대륜학교) 후원 등에 나섰고 '상해 독립자금 전달' 등으로 고문을 당한 뒤 사망한다. 이후 잊혀진 이곳은 2018년 손녀 윤이조의 「지나간 것은, 다 그립고 눈물겹다」라는 책으로 다시 알려졌는데, 당시 주변에는 물레방아와 연못도 있었다. 윤상태 지사는 월배의 아름다운 광경을 '달배육경(月背六景)'의 시로 남기기도 했다.
우재룡 흉상, 공적비
우재룡(1884 - 1955)은 일제강점기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여 무기조달, 격문발송을 담당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단양(丹陽). 일명 김경옥(金景玉)·김재수(金在洙)·김재서(金在瑞)·김상호(金尙浩)·김한조(金漢朝). 자는 이견(利見), 호는 백산(白山)이다. 1903년 대한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참교(參校)로 근무하였다. 1906년 의병이 되기 위해 탈영, 영천의 정용기(鄭龍基)와 함께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일으킨 뒤 연습장(練習將)으로 활약하면서 영일의 입암전투(立巖戰鬪) 등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다. 정용기가 죽은 뒤에는 그를 계승한 그의 아버지 정환직(鄭煥直) 진영의 선봉장으로서 영일·경주·청송·영천·대구 근방에서 용맹을 떨쳤다. 1908년 무기조달 관계로 대구에 숨어들었다가 잡혀 종신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는데,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 1911년에 이른바 은사령에 따라 출옥하였다. 1915년 대구에서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과 함께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였다. 이 조직은 경상북도·충청남도·전라남도·황해도를 비롯한 전국으로 뻗어나가 1910년대 독립운동을 하는 국내 조직 중 가장 큰 규모로 발전하였다. 이때 국내와 국외의 연락책임을 맡아 국내에서는 광주·목포 등지에서 독립군 연락기지 건설과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활약하였고, 만주에서는 안동에 상주하면서 대한광복회와 재만독립군기지인 서간도의 부민단(扶民團), 신흥학교와의 연락업무를 맡았다. 또한 국내로 보내는 무기 조달과 격문 발송 등의 일을 맡아 보았다. 1917년을 전후하여 전국적으로 송달되어 화제가 되었던 대한광복회 격문은 거의 그의 주선에 의하여 배포된 것이다. 또 1917년 11월에 처단된 칠곡의 친일 부호 장승원(張承遠)과 1918년 1월에 처단된 아산의 친일파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에 대한 암살 투쟁과 무기 공급 등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1918년 대한광복회 조직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거의 파괴당하자, 남아 있는 한훈(韓焄)·권영만(權寧萬)과 함께 대한광복회의 조직 회복에 주력하였다. 1920년 군산에서 일본 경찰에 잡혀 무기징역으로 옥고를 치렀다. 그 뒤 감형되어 1937년 풀려나왔다. 출옥 후 옥중에서 얻은 병이 깊어 권영만 등의 지원을 받아 살아가던 중 8·15광복을 맞았다. 그 뒤 권영만·이관구(李觀求: 일명 李海量) 등과 함께 대한광복회를 재건하여 독립운동 유적지를 정화하는 사업에 전념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파리장서비(월곡역사공원)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한 사건을 기념하는 비이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유림측에서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작성하였다. 이 사건은 전에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던 호서지방의 유종(儒宗)인 전 승지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대부분 의병에 참여하였던 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김봉제(金鳳濟)·임한주(林翰周)·전양진(田穰鎭)·최중식(崔中軾) 등에 의해 이뤄졌다. 그들이 작성한 서한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지는 일본의 배신행위와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고종의 시해, 그리고 한국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고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호서지방 유림들의 활동이 전개되고 있을 때, 영남유림에서도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 등이 필두로 같은 목적의 일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 뒤 영남유림은 이런 사실을 알고 영남본(嶺南本)을 전용학(田溶學)에게 주며 홍성으로 가서 호서본(湖西本)과 비교, 검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교정본이 작성되기 전에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선정된 김창숙이 시급히 상해(上海)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에 서울유림들은 영남본이나 호서본의 내용이 서로 뜻이 같으나, 영남본이 호서본보다 포괄적이면서도 뜻이 명확하다는 여론에 따라 김창숙에게 영남본을 주어 출발시켰다. 그리고 장서 말미에 134명 유림대표가 서명하였으며, 대표파견 경비는 황일성(黃佾性)이 조달하였다. 그러나 장서는 김창숙이 파리로 가져가지 못하고, 당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로 선정되어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으며, 또한 국내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같은 해 4월 12일경상북도 성주의 만세시위운동에 관련되어 일본경찰에 붙잡혔던 송회근(宋晦根)에 의해 사건이 발각됨으로써 관계자들이 피체되어 옥고를 겪었다.
우하교 구 묘
우하교(1872~1941)는 1872년 5월 1일 경상북도 달성군 월배면 상인동에서 태어났다. 1913년 음력 정월 대보름날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 안일암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결성된 재건 달성 친목회[조선 국권 회복단 중앙 총회]에 참여하였다. 달성 친목회는 민족 독립을 위해 결성된 비밀 결사였고, 혁신 유림, 지식인, 경제인, 은행원 등 다양한 성향의 인물들이 참여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또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는 등 민족 독립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전개된 달성 친목회의 만세 운동 확산 노력과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적극 참여하였다. 유림계의 파리 강화 회의 독립 청원서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장석영(張錫英)을 찾아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낼 조선 독립 청원서 초안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독립 청원서의 초안을 첨삭한 뒤 김응섭(金應燮)이 영문으로 번역하였다. 그 뒤 조선 총독부 총독 및 파리 평화 회의에 제출할 청원서를 칠곡의 이수목(李壽穆)을 통해 전달받았다. 번역된 독립 청원서는 김응섭(金應燮)과 남형우(南亨祐)를 통해 중국 상하이에서 배부되었다. 그러나 독립 청원서 활동이 일제 당국에 발각되어 1919년 8월 윤상태(尹相泰)가 피체되자, 예심에서 증인으로 불려나가 독립 청원서 관련 사실을 부인하였다. 1919년 10월 대구 지방 법원에서 위증죄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대구 형무소에 복역하였다.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곽종해 공덕비
곽종해(1891 - 1946)는 경북 달성(達城) 사람이다. 그는 1920년 7월 3일 고향에서 백여명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현풍청년회(玄風靑年會)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동회를 이끌었다. 그런데 동년 8월 10일경 임시정부에서 특파된 이현수(李賢壽)가 항일민족의식의 고취와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띠고 경고문·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자유신보(自由申報)·물품불구매고지서(物品不購買告知書)·납세거부서·독립공채 모집에 관한 인정서 등을 휴대하고 귀향하였다. 그는 이현수를 도와 이 문서들을 복사한 후 1921년 2월말에 이르기까지 서장환(徐章煥)·정팔진(丁八鎭)과 함께 경상북도 일대의 관공리·부호들에게 우송하는 한편 대구시내 상점과 도로상에 살포하였다. 이들은 다시 임원조(林元祚)를 영천군(永川郡), 이상철(李相徹)을 달성군 교통사무지국장, 박기석(朴奇石)을 안동군(安東郡) 교통사무특파원으로 삼고 안동·영천·대구·경주지방의 관공서와 도로상에 이 문서들을 살포하여 민족의식의 고취에 힘썼다. 또한 이들은 일제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알림으로써 세계 각국의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하여 1923년 워싱턴에서 열리는 군축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대구·평양·전주 등지의 외국인 선교사와 부산에 거주하는 외국인 인사 아벤에게 독립청원서를 우송하고 워싱턴회의에 즈음하여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내용의 자유지(自由誌)를 인쇄하여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및 국내 각지에 배포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을 펴던 중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1923년 1월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1945년 봄에는 달성군 현풍면의 신사(神社) 방화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으로부터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다고 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교훈 묘
김교훈(1880 - 1934)은 대전(大田) 사람이다.구한말에 의병으로 활약하였고,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1919년 국민대회(國民大會)와 임시정부 지원 등의 활동을 펴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김교훈은 1907년 군대해산과 더불어 의병전쟁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의병에 투신하여 강원·충남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4개월 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국권회복의 기회를 기다리던 김교훈은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에 가입하여 권유부장(勸誘部長)으로 활동하였다. 조선국권회복단은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족지도자와 연결, 대규모의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래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중앙총부는 경남 함안(咸安), 진주(晉州) 등지에 신상태(申相泰), 변상태(卞相泰) 등 2명을 파견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김교훈은 1919년 3월 초 이교헌(李敎憲)·윤이병(尹履炳) 등과 함께 이규갑(李奎甲)에게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래서 같은 해 4월 2일 각계 대표 20여 명이 인천 만국공원(萬國公園)에 모여 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할 것을 의정하였다. 그때 그는 유림대표로 참석하였다. 그 결과 같은 해 4월 23일 13도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고 이로써 「한성정부」가 출범하였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상해로 건너갔다. 당시 임시정부에서는 만주 소항령(蘇項嶺)에서 노백린(盧伯麟)을 교관으로 30,000명의 병력을 훈련시키기 위해 자금 마련에 고심하고 있었다. 그는 국내에서 군자금 모집을 벌이기로 하고 귀국하였다.그는 우선 각 지방의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하였으나, 그들이 솔선하여 협조하지 않는 등, 자금 모집에 어려움을 겪자 계획을 바꿔 중국지폐를 위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마저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그는 1919년 6월 붙잡혀 9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기홍 묘
조기홍(1883-1945)은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가한 뒤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하여 잠적하였다. 12월에 대구 출신의 최익무(崔益武)는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 강태동(姜泰東)·이정래(李丁來)로부터 대한청년단 명의의 「적의 관공리(官公吏)인 동포에게」와 「남녀 학생에게(포고 제1호)」,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이동녕(李東寧) 명의의 「상업에 종사하는 동포에게(포고 제2호)」, 「독립축하가」라는 항일 문건을 전달받았다. 이후 조기홍은 최익무·서상하(徐相夏)·이종선(李鍾善)과 함께 이를 등사하여 대구 시내 각 학교와 상점 등에 뿌려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고,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내용의 『대한민보(大韓民報)』 수백 매와 격문 등을 평안도·전라도·경상도 등지에 배포하려고 준비하던 중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로 인하여 1920년 7월 31일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조기홍은 1922년 출옥한 직후에도 대구에 거주하는 양한위(梁漢緯)와 함께 일제 관리 습격과 관공서 폭파를 계획하였으며, 이를 실행하기 위하여 대구 남문시장에서 폭탄을 제조하여 대구 남쪽 비파산(琵琶山)에 숨겨두고 기회를 노리던 중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계획이 좌절되었다. 조기홍은 대구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및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6월형을 언도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조기홍은 이후에도 항일 의지를 굽히지 않고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3년 다시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고, 1945년 8월 2일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정부는 조기홍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혜경 묘
이혜경(1889-1968)은 함경남도 원산의 진성(進誠)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적극 동참하였다. 또한 여성들의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 대한민국애국부인회에 가입하여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1919년 6월 혈성단(血誠團)애국부인회와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가 통합하여 결성되었다. 1919년 9월 김마리아 등을 중심으로 결사부(決死部)·적십자부(赤十字部)를 신설하고 항일 독립전쟁에 대비하여 조직을 전환하였는데, 이혜경은 이때 부회장을 맡아 주도적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 연계 역할을 대행하였으며, 대한적십자회 활동을 수행하였다. 특히 회비와 수예품 판매 등을 통하여 독립운동 자금 6,000원을 모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이혜경은 1920년 중반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20년 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제령 제7호」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혜경은 1926년 대구성경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경상남도 양산 출신의 김성국과 결혼하여 광복 이후 대구에 거주하였다. 이혜경은 1968년 2월 10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이혜경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정명준 묘
정명준(1900-1959)은 1925년 9월 29일 대구의 서동성(徐東星), 경남의 방한상(方漢相), 칠곡의 신재모(申宰模) 등 7명과 함께 대구에서 무정부주의 비밀결사인 진우연맹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을 폈다. 진우연맹은 회원이 1,100여 명이나 되는 대구노동친목회(大邱勞動親睦會)를 지도하면서, 일본의 무정부주의 단체와 연계도 강구하였다. 1926년 4월 12~13일 신재모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연맹 내에 파괴단(破壞團)을 만들어 대구의 주요 관서와 일인(日人) 점포 파괴, 수뇌부 암살 등을 하기로 하였다. 폭탄은 상해(上海) 민중사(民衆社)의 무정부주의자 유림(柳林)을 통해 입수키로 하였으나 연맹원이 경찰에 검거되면서 가택 수색 결과 전모가 드러나 1926년 7월에 체포되었다. 1927년 7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신재모 묘
신재모(1885-1958)는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파괴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상업중심가와 일본인 폭살을 계획한 독립운동가이다. 1924년 대구노동친목계를 조직하고 이를 보호하기 위한 비밀결사로 폭력단·용진단(勇進團) 등을 조직하였다. 같은 해 4월 비밀결사인 파괴단을 조직하여 상해로부터 폭탄을 가져와서 대구내의 일본인 상업중심가를 파괴하고 일본인 수뇌들을 폭살시킬 것을 계획하였다. 1925년에는 일본으로부터 부산을 거쳐 내륙지방으로 운송되는 일본의 군수물자 수송을 방해하기 위하여 대구노동친목계원들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진우동맹(眞友同盟)을 조직, 책임자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1926년 진우동맹이 일본경찰에 탐지되면서 잡혀 징역 5년을 언도받았다. 출옥 후 독립운동을 위하여 중국으로 망명하다가 잡혀서 국내로 송환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하였다.